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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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줄을 그으면서 

너무 많이 긋고 있다, 

고 생각했다. 대개는 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게 많은 책이라고 해도... 읽다보면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어서 뒤로 갈수록 줄 긋는 횟수가 줄어들곤 했었다. 그건 다시 말하면... 책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줄 긋기를 행함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게 싫을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아- 난 책을 읽고 있어. 

라고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처음 한동안은 실제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읽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으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쥔 4B 연필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 파반느>의 스토리가 약하다거나 몰입하기엔 뭔가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생각해본 적 없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 책 만큼은 조금 천천히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영혼이 따라오는지 뒤돌아보며 달려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없이 줄을 긋는 동안만큼은... 나는 박민규가 <... 파반느> 속에서 비난하는 그 수많은 사람과는 다르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외모와 돈이 다인 것처럼 떠드는 세상에 대한 비판에 밑줄을 칠때마다 조금씩 나 역시 박민규 당신과, 혹은 그렇게 지독히도 못생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나'와 같이 겉보다는 속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적어도 겉만 보고 쉽게 누군가를 비아냥대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게 잠시 변장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다시 나를 찾는 현실과 여전히 속물인 내 자신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하게 되는 그런 줄긋기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차라리 나보다 더 솔직한 누군가가 <... 파반느>의 리뷰에 이렇게 썼다. 

공감이 안 된다. 

고... 처음엔 왜 이게 공감이 안 돼? 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곧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이 이야기를 소설로, 활자로 읽었기 때문에 공감하며 눈물까지 쏟아내는 일이 가능했을 거라고... 만약 이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든다면... 원작에 충실해서는 아마 소설에서처럼 공감을 이끌어내진 못했을 거란 생각이다. 전개가 분명 달라져야만 했을 거다. 그녀처럼 세계에서 제일 가는 추녀가 아니라... 안경을 벗거나... 다이어트를 하거나... 다소 성형수술을 하거나... 하면 결국은 미녀가 되는 그런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았을 것이다. <초절정 미녀 공주와의 사랑>이라는 작법을 깬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던 <슈렉>에서는 오히려 본 모습은 잘 생긴 슈렉 왕자가 등장하고... 인기 미드 <어글리 베티>의 베티 역시 세계에서 제일 가는 추녀라고 하기엔 뭔가 모자란다. 아니, 오히려 그만의 자신만만하고 엉뚱한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처럼 초절정 추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결코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박민규의 이번 소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상상력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정말로 나는 '나'와 '그녀'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대목에선 전체적인 실루엣만 그려봤지... 얼굴 속에 눈, 코, 입 따위를 넣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책의 표지로 사용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유독 조명을 비추고 있는 그 얼굴을 적당히 변형해볼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나의 비루한 상상력은 기껏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그럴듯한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쓰고 다시 적당히 치워두었던 거다. 

하여... 나는 박민규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정말 박민규는 자신이 소설에서 그리는 그녀의 모습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있을까... 하다못해 모델로 삼은 사람이라도 있을까... 그도 나처럼 그저 관념 속에 정말 정말 못 생긴 여자를 넣어두고 그저 글솜씨만으로 소설을 써내려간 건 아닐까... 그리고 결론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유일하게 줄 긋기를 하지 않은 부분... 그을 만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긋기 시작하다가는 책에 온통 흑칠을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줄 긋기 자체를 포기한 부분... 그녀.가 '나'에게 남긴 편지만으로도 그는 분명 막연하게 못 생긴 여자를 상정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확신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그러니까 제가 아주 못생긴 여자라면 말이죠. 그래도 절... 사랑해 줄 건가요? 라고 묻는 아내가 있다고 해서 이번 소설을 쓰기에 이른 박민규가 난 더 좋아졌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느낀 당혹감... 너무 연애소설 같은 풋풋한 문장들과... 지나치게 많이 사용된 말줄임표... 또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인쇄된 그녀.와 '나'의 말들... 과연 이게 내가 아는 그 박민규의 소설이 맞나 하고 다시 한 번 작가의 얼굴을 찾아보게 만든... 그 낯선 작법까지도 이제는 다 받아들인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쓰는 이 글에 어설픈 오마주...라 이름 붙이기도 부끄러운 흉내...가 가득한 것이 그 받아들임의 증거다.  

예의 시니컬하고 개성 넘치며 무심한 듯한 문체로는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아니, 아니에요.하고 말을 줄이고 삼가는 것이 익숙한 그녀에 대해 쓰기 위해선 말줄임표가 수없이 필요했을 거다. 그녀와 '나'는 이미 평범한 세상의 기준의 밖에서 가장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었으므로 그녀의 말은 꽃분홍색으로 또 그 꽃분홍빛 그녀의 말을 받는 '나'의 말은 맑은 하늘빛으로 표현한 것도 다 그럴만 했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머 넘치는 박민규가 <... 파반느>에서는... 특히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눈곱만큼의 농담도 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못생긴 여자에게는 못생겼다는 바로 그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우리는 어른이 되면 정말 못생긴 사람 바로 앞에서는 못생겼다고 놀리지 않고 몹시 뚱뚱한 사람 바로 앞에서는 장난으로라도 '돼지'라는 말을 내뱉지 않는다. 박민규도 여전히 못생긴 그녀를 두고는 끝끝내 농담을 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놀이공원에 다녀와 아주 어렵게... 자신과 함께였던 것이 부끄럽지 않았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후에 요한에게 하는 얘기에 나타난다. 

그녀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상하죠? 실은 내가 어떻게 생각했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어떤 대답을 해도 그녀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거니까... 진실을 말해도 상처가 되고 거짓말을 해도 상처가 되는 문제라면, 도대체 어떤 말로 그 상처를 대해야 할까... 그리고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p. 217 

이미 사랑에 있어 외모 문제를 초월한 '나'에게는 그것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해도 그녀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라니... 이게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도 여전히 열쇠는 그녀의 손에 남아있을까... 슬프게도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 아니에요. 비슷한 것이 될 것 같다. 그녀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는 흔히 말하듯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 이 사회는... 오로지 외모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책에 쳐놓은 줄 위에 놓인 문장들을 바로 이 페이지에 옮기면서... 나도 모르게 50개 넘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알라딘 <밑줄긋기>에는 밑줄 그은 내용을 50개까지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책에 줄을 긋는 행위는... 책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시 못 읽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 나만의 착각이고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읽었고... 이러이러한 부분을 인상깊어할 만큼의 감수성은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부지런하게 독후감까지 남긴다는 것을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거라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열쇠를 내가 쥐고 있는 게 맞다. 하지만 그녀.의 문제는 지금 나의 이 문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일상에서 늘 의식하고 직면하는 것은 마음 속에 숨겨진 허영심보다 외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냐하면... 소설에서의 묘사로 미루어 소위 꽃미남일 것이 분명한 '나'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나'가 외모보다는 내면을 볼 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잘 생긴 아버지 때문에 입은 상처 때문이 아니냐...는 반감을 나도 모르게 가졌을 정도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남들이 다 예쁘다는 아이에게서는 굳이 단점을 찾아내 '만두'라는 별명이나 붙여주고... 남들 다 수근댈 정도의 추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거 아니냐는 의심... 여기에 대해서는 요한이 멋들어지게 설명해준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 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p. 122 

그러니까... 이쯤되면 나...를 비롯한 많은 속세의 독자들 모두 이런저런 이의제기를 그만두고 소설에 몰입할 수 있게 박민규로서는 모든 태세를 갖춰놓은 셈이 아닐까. 결국은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왜 밤새도록 안 자느냐는 엄마의 잔소리에 울어 부은 눈으로 항변하게끔 리얼리티를 갖추는 데까지 그는 성공한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요즘 젊은이들(물론 나도 젊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라는... 이 소설에서 박민규가 내린 원인진단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두 문장에는 미묘한 차이도 존재하는데... 부러우면 지는 거다... 라는 말은 이미 자신이 무언가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유행어 중에서도 이 말이 가장 희망적인 것은... 비록 이기고 지는 문제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이는 극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 어쩔 수 없이 부럽지만 내 의지로 그 부러움을 최소화해보겠다는 뜻을 표현한 본질을 해칠 만큼은 아니라는 점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그녀.는 그토록 뿌리 깊은 부끄러움을 2가지의 힘으로 이겨낸다. 그 뻔한 사랑과 세월의 힘이다. 소설의 리얼리티를 위해서 최선이었을 거다. 하지만...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 변화는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따라서 나는 비이성적으로 이 소설의 후반을... 마음 속에서 이렇게 고쳐본다. 결국 그녀는 외모도... 그것이 궁극의 아름다움이든 궁극의 추함이든... 그저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라고... 서로 다른 값을 갖지 않는 동등한 조건 중 하나라고... 느끼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비극적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박민규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당신에게 묻는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www.youtube.com/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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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따라붙던 밤이 버스를 저만치 앞질러 간 느낌이었다. p.9  

 

눈의 파편 같은 샐러드를 입에 머금은 채 스무 살의 남자는 AM 라디오와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무리 채널을 돌리고 고정해도 여자라는 이름의 전파를 잡을 수 없다. p.14 

 

젊은은 결국 단파 라디오와 같은 것임을, 좋을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 p.14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 주었다. p.15 

 

눈이 그쳤어요, 

나지막이 그녀가 속삭였다. 눈이 그쳤군, 나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한 시절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눈은 모은 것을 지우고, p.18 

 

융프라우를요? 다보탑으로부터 그런 얘길 건네들은 석가탑처럼, 그녀는 표정 없이 커피 잔의 손잡이를 매만지기만 했다. 분명 우리보다는 탑들이 알프스에 오를 확률이 높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했었다. p.21  

 

기억의 트랙을 돌고 도는 한 마리의 사슴처럼, 나도 덩달아 어두운 골짜기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나는 일어나 카운터 뒤의 턴테이블을 찾았고, 조심스레 바늘을 들어올려 지쳐 있는 사슴을 문밖으로 내보내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루돌프의 코>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놀려대고 웃어도 산타는 오지 않는다. p.25 

 

마지막 운행을 마친 협궤열차처럼, 우리를 운반해 준 어둠도 말없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p.32 

 

그리움이 무수한 동심원의 파문을 일으키며 비처럼 나의 맨발을 적시운다. p.35 

 

달리는 사람만 가득했을 뿐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을 기다려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p.40 

 

인정하진 않으면서도 다 같이 부러워하던 사람들... 땀 흘려 일하기가 갑자기 서먹하고 무안해진 사람들... 가난이 죄란 사실을 그제서야 깨들은 사람들과... p.42 

 

누가 봐도 이상한 삶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현실을 해결하고, 아버지는 열심히 비현실을 추구하는... p.47 

 

꽤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저 그런 식으로, 진지한 느낌의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생각이다. p.56 

 

간혹 내리지도 않은 낚싯줄에 딸려 올라온... 오징어처럼 멍청한 느낌의 분노와 물끄러미 대면하다가... p.57 

 

한치의 흔들림 없이, 아버지는 끝끝내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한 인간이었다. p.60 

 

두려운 일도 진지하게 귀찮아, 해버리면 왠지 극복했다는 느낌을 받곤 하던 나이였다. p.61 

 

이런저런 고민들을 늘어놓고는 마치 해답처럼 여기 한 잔 더요! 를 외치던 술자리였다. 넌 뭐 힘든 일 없냐? 친구 하나가 물었다. 글쎄,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을 들어 술을 추가시켰다. 한 잔 더 맥주를 마시고 나면 역시나 모든 문제를 극복한 느낌이 들던 무렵이었다. 세계의 변혁이니 그런 문제를 잘도 떠들어놓고, 싱겁게도 우르르 우리 집에 몰려와 다함께 포르노를 본 기억이 난다. p. 62 

 

고양이의 똥을 치우듯 내가 뱉은 거짓말들을 머릿속에 추스르며... 인간은 결코 진실만으론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했었다. p. 63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 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그중 하나가 

눈이라고, 음악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p.71 

 

바로 내가, 상처 받은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p.77 

 

기분이 좋을 때 글을 쓴다면 뭐 친근한 얼굴이었다, 말할 수 있는 오십 줄의 아저씨였다. p. 80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 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p. 122 

 

이상하네요? 아니, 당연한 거야.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p.156 

 

뿌리에 붙은 흙처럼  

딸려,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p.156 

 

일상이란 이런 것이구나,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왜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갖기 힘든지를... 알 수 있었다. p. 158 

 

비를 맞으며 외로운 섬처럼 서 있던 나무들과... 가을과 겨울, 어느 쪽으로도 떠내려가지 못한 채... 배수구 속으로 사라지던 은행잎들이 생각난다. p. 161 

 

미세한 기울기의 사선을 그으며... 또 가끔 서로의 자세를 수정해 가며, 우리는 그렇게 광장을 가로질렀다. 우산을 벗어난 어깨가 젖은 것은 알았지만, 겨드랑이에 낀 책이 젖은 사실은 느끼지 못하던 밤이었다. p.162 

 

하지만 맞을 만한 비는 아니라고 보는데... 

비를 상대하는 게... 사람을 상대하는 거보단 쉬워요. p.162 

 

모처럼의 휴일은 

갑자기 우리가 젊다는 사실과, 이 세상이 지하주차장처럼 칙칙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군, 면도를 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실은 젊었던 얼굴이, 마치 발굴된 화석처럼 거울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이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하동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p.164 

 

45억 명의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엔 분명 45억 개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 하고 담배를 피워 문 요한이 중얼거렸다. 즐겁다는 영화를 봤으니 말이야, 그래도  

즐거운 영화를 봤다는 표정을 짓자구... 그때 그, 요한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p.165 

 

모르긴 몰라도, 그 시절 택시의 조수석에 앉아 켄터키 옛집을 목 놓아 부르는 인간은 전 지구인을 통틀어 요한이 유일했을 것이다. 2절은 가사가 어떻게 되지? 철부지처럼 가사를 물어보던 그 얼굴을 일을 수 없다. 몰라요, 제발이요. 강을 건너던 택시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포스터의 작곡을 방해했을 나의 다급한 목소리도 기억이 난다. p.166 

 

중풍을 앓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 행상을 하는 어머니... 어떤 묘사를 하지 않아도 세상의 가혹함은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나열되는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그녀가 고궁을 찾지 못한 수백 가지의 이유를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p.170 

 

돌이켜보면 참으로 쉽고, 간편한 세계였다. 이뻐와 착해, 그리고 돈 있어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세계였으니까. 쉽고 쉬운 초급 영어의 페이지를 넘겨버린 중학생처럼,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p.172 

 

그렇게 다 먹을 것처럼 덤비다가도, 또 조금이라도 배가 부르면 치즈 자체를 망각하는 게 인간이야. p.173 

 

그게 인간이야.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미모를 준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때는 또 방바닥에 거울을 깔아놓고 내 항문의 주름은 왜 정확한 쌍방 대칭 데칼코마니가 아닐까, 머릴 쥐어뜯는 게 이간이라구. p.174 

 

그런데 형, 저는 한 가지는 알아요. 그 어떤 인간도 실은 나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거... 이러쿵저러쿵 말들은 해도 실은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이란 거. p.175 

 

너무 못생겼어요. 

마음속에서 

켄터키의 모든 닭들이 

일제히 홰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p.178 

 

어둠 속에서, 어둠에 섞인 바람이 길 건너편의 시멘트벽에 자신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p.179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p.185 

 

이를테면 

집을 다녀오는, 그런 사소하고도 당연한 일이... 서로의 불을 밝힌 인간에게는 더 없이 크고 다행한 일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p.189 

 

문득 돌아갈 수 없는 나 자신이, 그래도 돌아가야 하는 나 자신을 업고 있는 기분이다. p.192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193 

 

놀이기구 앞엔 언제나 길고 긴 줄이 이어져 있었고, 둘 다 

그런 줄 앞에서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리는 성격임을 안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5분 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아마도, 하고 나는 얘기했었다. 그런 걸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꼭 타고 가야지, 그런 심리가 되는 거지. 두 시간 줄서서 5분 열차, 두 시간 줄서서 5분 회전바퀴, 두 시간 줄서서 5분 바이킹... 우와, 거의 하루인 걸. 한적한 느낌의 참으로 시시한 회전 커피 잔에 앉아 나는 생각했었다. 누구나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p.200 

 

그 짧은 기억의 삽화를 떠올릴 때마다, 하여 반짝이는 한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영혼의 우체통 속으로 배달되는 기분이다. p.202 

 

오늘...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하고 그녀는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연약한 물거품과도 같았던 그 말들을, 나는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애썼다. 입술을 깨문 느낌의 정적이 오늘... 많았던... 사람들의... 행렬처럼 그녀의 말 뒤를 따라붙고 따라붙었다. p.204 

 

너 너무 예뻐졌다, 하는 친구의 얼굴도 그렇게 밝은 것은 아니었어요. 나는 여전히 그런 인사가 절실히 필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p.209 

 

외롭기가 힘들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는데 

외로웠어요. p.210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鬪病)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p.214 

 

그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의 후회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때>의 인간처럼 무능한 인간은 없다. p.217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p.219 

 

그래서 죠다쉬 점장이 점잖은 양반이잖아. 애를 앉혀놓고 그러더라고.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 대신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십 년이고 이십 년 후에 반드시 오늘 이 일을 되새겨봐라, 그럼 이 바지가 얼마나 시시한 건지 알 수 있을 거다... 뭐, 조언이라면 조언인 셈이지. 그런데 그 양반 요즘 남들 다하는 주식인데 하며 정신 못 차리고 있거든. 그게 보편적인 인간관계야. 훔치지 않았을 뿐 결국 똑같은 관념에 갇혀 있는 인간이지. 십 년이고 이십 년 후에 그 아이도 분명 어른이 될 거야. 그땐 왜 그랬을까, 나 참 하며 한참을 웃고 말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주택청약자로서 아직 1순위가 아님을 무척이나 괴로워할 거야. 전혀 달라진 인간이라 본인은 믿고 있지만, 실은 똑같은 관념을 가진 나이 든 인간일 뿐이지. 그게 보편적인 인간의 이른바 성장이야. p.226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p.228 

 

인생이 그런 거면 어떡하나... 간단한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듯 요한이 흥얼거렸다. 평생을 숭어인 줄 알았는데 실은 송어라면 말이야... 그러면 어떡하나... 나는 문어가 되고 싶었는데... 어때? 내가 곡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대학가요제라도 나가보지 않을래? 요한이 물었다. 그녀의 손을 몰래 잡은 채 그만해요, 라고 내가 말했다. 정말이지 

모래 속의 문어처럼 눈에 띄지 않는 대학생이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무도 몰래 그저 자신의 딸기밭에 다다르는, 해서 익어가는 자신의 딸기를 바라보는 인간이... 나는 되고 싶었다. 좋든 싫든 이런 밤길을 남몰래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 삶이, 설사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저도 여태 <숭어>로 알고 있었어요, 라고 말해 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행복할 거라 나는 생각했었다. p.238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f(x) +  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p.296  

 

잘 살아보자고 모두가 노래하던 시절이었지만, 그 역시 삶이 아니라 생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p.300 

 

가까스로, 그래서 외롭지 않은 여름이었고... p.302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p.308 

 

매장마다 기웃 기웃 고개를 내민 직원들과, 옷을 고르는 여배우의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 배시시 몸을 꼰 채 특히나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그것은 슬픈 풍경이었다. 뭐랄까, 양장피며 팔보채를 시켰을 때 서비스로 나온... 그러나 좀처럼 눈길이 가지 않는... 그러니까 그저 성의로 받아주세요, 하는 느낌의 

군만두를 보는 기분이었다. p.308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p.310 

 

그나마... 그래도 그런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대개가 스스로의 도덕성을 확보하던 시절이었다. p.320 

 

즉 이윤을 추구해 놓고 

자기최면이라도 하듯 이것 연애야, 그래서 우린 결혼한 거야 라고 다들 믿는 게 아닐까 싶어. p.326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p.328 

 

알 수 없었다. 30년만 지나면 허물어야 할 한 채의 집을 위해, 실은 조건과 조건... 이윤과 프리미엄에 의해 만난 서로에 의해... 하여, 실은 있지도 않았던 사랑에 내내 절망할 이 사람에 대해... 그 <생활>에 대해... 하여 자신의 자녀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이 삶에 대해... 다시 사랑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사육하는 이 삶에 대해... 갖추고 올라섰다 한들, 이를테면 일병 7호봉 정도나 될 그 대단한 프리미엄에 대해... 실은 허망한, 하여 과시밖에는 할 게 없는 이 삶에 대해... 그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할 이 삶에 대해... 고생하셨어요, 말은 하지만 실은 유산을 셈하고 있을 자녀들에 대해... 그래서 실은 그 무엇도 남지 않을 이 삶에 대해 p.329 

 

오로지 진실인 이유로 평범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p.341 

 

약속시간을 어기고... 늦게 나올까 생각도 했었어요. 그럼 늦어서 죄송해요, 라고 할 말이 생기잖아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물어볼 수 있는 말도 생기고...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말들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생각해 낼 수 없었어요. p.370 

 

그래도 예전보다는 평범한 얼굴에 속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런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사이 제가 예뻐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여자들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입니다.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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