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 사두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과일이나 채소가 냉장고 안에서 물러 터질때가 종종 있다. 그걸 발견하는 순간 나의 건망증을 한탄하게 되고 얼른 먹어 치웠으면 될것을 아껴 먹는다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하기에 이르는데 그런 상태의 과일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들으니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으며 어딘지 날카롭게 다가오는 글의 힘을 느꼈던 기억이 나는데 아가미를 읽으며 약간 환타지를 가미한듯한 소설에서는 작가의 또다른 면모를 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예순을 넘긴 할머니를 등장시켜 고백같기도 하고 독백같기도 한 썰을 풀어 놓으며 놀랍도록 긴박하게 이야기를 전개 시켜 숨을 참으며 글을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청부살인업자라 하면 건장하고 샤프하고 팔팔하고 젊은 사내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예순을 넘어 그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를 한 나이든 노파라니 글의 소재는 물론 주인공 캐릭터 부터가 독특하다. 그녀의 이름은 조각! 소설을 읽을때면 이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또 글을 읽는 재미를 주는데 한몫한다는 사실을 글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듯 한데 그녀의 책속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사실 너무 낯설어 눈에 잘 익어지지 않지만 이름에 담긴 의미심장한 뜻을 새겨보게 만든다. 날카로운 칼을 손닿는곳에 두고 언제든 자신이 의뢰받은 사람에게 가차없이 그어 단숨에 죽여버리는 그녀가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건지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해서그런건지 감성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야금 야금 보여주고 있다.  

 

집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 있는 것에 인사를 하게 될 줄은, 집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또는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까 봐 초조해질 줄은, 자기 인생에서 그런 날이 다시 올 줄은, 무용을 데려오기 전에는 몰랐다. ---p138

 

자신이 청부 살인자가 되기까지의 지난 과거를 드문 드문 회상하는 장면은 그녀의 삶이 어려서부터 파란만장했음을 들려주는데 대가족의 살길이 막막해 친척집으로 더부살이를 갔다가 결국 그집에서조차 쫓겨나 오갈데 없던 그녀를 거둬준 류로부터 권유받은 술집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 소질이 되어 예순을 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 명성이 자자한 실력을 갖추게 만든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유일한 가족이었던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으로 자신도 따라 죽으려 하지만 예순이 넘는 나이가 될때까지도 어찌어찌 살아오던 조각은 어느날 강아지 한마리를 데려다 무용이라 이름지어주고 키우며 어쩐지 스스로에게 말하듯 드문드문 쓸쓸한 혼잣말을 하고 주변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그녀의 일을 방해하는 젊은 투우의 등장에 몹시도 당혹스러워하게 된다.

 

방심의 결과로 상처입은 몸을 치료받고자 찾아든 지정 병원에서는 뜻밖의 젊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고 그 모든일들을 함구하기로 약속받게 되는데 류를 떠나 보낸 이후로 가슴이 뛰는 느낌을 것두 젊은 남자 의사에게서 받게 되는 조각은 그런 자신의 상태를 노리고 그 틈으로 파고드는 투우의 기척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날 제대로 된 집도 가족도 가져보지 못한 조각에게 따스한 시선을 가지게 했던 그 젊은 의사의 가족이 위협받게 되면서 투우와의 본격적인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그 장면은 한편의 액션 영화를 방불케할 정도로 실감나고 스릴있다. 다만 예순이 넘은 나이의 할머니와 아직 30대 밖에 안된 젊은 청년의 대결구도라니 그런 부분만큼은 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것이 농읽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딘 모든 상실을 살아야할때,  --- p333

 

나는 사실 끝이 날듯 날듯 자꾸만 이어지는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풀어 놓은 글을 읽기를 즐기지만 누군가는 이런 글을 쉽게 읽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디서 끊어 읽어야할지 모르게 써내려가는 꽤나 긴 문장은 앞의것을 이해하기도 전에 뒤에것을 이해해야하는 까다로운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전반부를 읽으며 문장에 익숙해지게 되면 뒷 이야기는 무리없이 읽게 되리라 생각한다.  한편의 첩보스릴러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의 삶도 투우의 안타까운 이야기도 어쩌면 냉장고 한쪽 구석에서 물러지고 있을지 모를 과일이나 채소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에게 한번은 빛을 내는 순간이 있음을, 그러게 쉽게 놓을수 없어 살아가게끔 되어지는게 삶이라는 사실을 들려주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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