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이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싶은 열망으로 '메리 웨스트콧'이라는 필명으로 여섯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봄에 나는 없었다>를 시작으로 <사랑을 배운다>까지 이 소설들에는 방황하거나 인생의 위기를 겪는 주인공들에게 지근거리에서 삶의 통찰과 현명한 식견을 보여주는 멘토들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들의 해결사 미스 마플과 에르큘 포와로 탐정이 개별적인 사건들에서 더 확대되고 심화된 생의 각종 문제들에 다른 버전으로 재등장한 듯하다. 특히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라는 촌철살인의 말로 대변되는 <딸은 딸이다>에서 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 대하여 현명하고 사려 깊은 조언을 해 주는 로라 휘스터블이라는 예순네 살의 여성은 주옥 같은 그러나 지나치게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가르침을 준다. 비단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애거사 크리스티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과 깨달음은 이 여섯 편의 소설들 속에서 일관되게 독자들을 설복시킨다. 누구나 삶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 행복을 누리는 능력에 대한 긍정, 타인의 삶의 존중, 인간의 모순적인 본성 때문에 인간을 한 면으로 단정짓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오만인 지에 대한 경고 등은 그녀 자신이 삶에서 체득한 소중한 깨달음으로 보인다.
여자 주인공들은 한결 같이 조금은 경솔하고 어떤 면에서는 과도하고 어느 정도 어리석어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녀들은 넘어지고 좌절하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선다.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 낙관 때문이 아니라 애거사 크리스티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가졌던 겸허하고 성실한 태도에서 비롯된 생의 의지 덕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메리 웨스트콧'의 이름으로 씌어진 이야기들을 읽는 일은 그녀가 생의 후반에서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던 희망에 감염되는 일이다.
짧은 오솔길이라 생각했지만 몇 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었다. 들어선 이상 계속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다보면 어디선가는 밖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 지점은 분명 존재할 것이고, 정해져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자신의 행동뿐이었다. 의지와 목적에 따라 오솔길을 밟아가는 일. 발길을 되돌리거나 계속 나아가거나. 모든 건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 애거사 크리스티 <사랑을 배운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