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젊어?
아니요, 나이들었어요.
몇 살인데?
마흔여덟.
젊네.
사십대 초반의 s언니의 '젊다'는 표현에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아직 그 영역에 들어가지 않은 나로서는 마흔여덟이라는 나이를 젊다고 표현할 생각은 못해봤는데. 아마도 내가 언니의 나이가 되어 바라보는 마흔여덟은 더이상 늙음으로 보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고 지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정작 마음을 빼앗긴 소설은 대상 수상작 대신 말미에 실린 이장욱의 <크리스마스캐럴>. 외견상으로 성공한 중년의 사내를 어느 날 찾아온 어린 아내의 전남자친구. 그와 함께 앉아 의미 없는 얘기들을 나누는 순간 주점에 우연히 들어온 노인. 그 날은 하필 크리스마스이브, 게다가 하얀 눈발까지 흩날렸다. 셋 사이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고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껌을 팔러 온 듯한 초라한 행색의 할아버지와 사랑 운운하는 서투른 애송이와 알 것 다 알고 체념할 것도 다 수긍하는 중년의 사내가 어떤 '순간' 우연히 함께 하는 정경을 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고 그는 술에 취해 추적추적 자신의 번듯한 집으로 돌아와 어린 아내 곁으로 간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젊은 부인의 얼굴은 그 새 노파로 변해 있다. 청년, 노인은 모두 '나'의 모습이 단지 시공간의 흐름 속에 투영되어 나타난 모습일런 지도 모른다. '나'는 꿈을 꾸었을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필 주인공이 다녔던 대학교 앞의 허름했던 주점 안에서 조우한 '젊음'과 '늙음'이 응시하는 '현재'가 바로 나다. 내가 진짜라고 여기며 향유했던 것의 추악한 실재를 목도하며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진다.
조경란의 <기도에 가까운>에도 전성태의 <소풍>에도 이러한 '늙음'이 있다. 작가들의 연배는 대체로 중년이다. 우리가 더이상 젊지 않다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면 어느덧 파도처럼 다가오는 '늙음'과 '죽음'을 원하든 원치 않든 응시하게 되는 순간이 많아진다. 그러니 많은 작가들이 이에 천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런 지도 모른다. 과거는 나의 소년, 소녀 시절로 대치될 수 있지만 나의 '늙음'은 대부분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으로 대치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마르셀도 소년 시절 회고의 시점을 취하고 있지만 그에게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주던 레오니 아주머니의 늙은 모습에서 그것을 찾는다. 나는 이미 늙어버렸는데도 나의 늙음은 외부에 있다는 이 모순의 중심에는 어쩌면 '늙음' 그 자체를 직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늙음'은 이렇게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과연 정말 그렇기만 한 걸까? 이제 우체국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몰래 훔쳐본다고 아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여든두 살의 커트 보니것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쉬운 점은 이미 이 유쾌한 독설가 할아버지는 이 지구상에 없다.
이 노작가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기득권과 정부를 욕할 수 있다. 솔직하게 조소할 것들이 널려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없이 냉소적이지만 왠지 따뜻하다. 분명 다 욕인데 불쾌하지 않다. 그것은 분명 그가 제대로 늙는다는 것이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떠나고 남을 지구를 제발 지켜달라고 보호해달라고 진심어린 호소를 어떻게 하면 가장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지 그는 알 만큼 늙었다. <크리스마스캐럴>에서 사내가 목도한 끔찍하고 초라한 늙음은 그 앞에서 뻥 하고 지구 밖으로 꺼져 버린다. 그 사내처럼, 보이는 것들과 가질 수 있는 것들에만 끄달리다 이내 손안에 남는 그 '늙음'에의 경고의 또다른 방식을 커트 보니것은 알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아직 많이 늙지는 않았다고 느낀 쉰둘의 나이. "이 아침 속에, 모든 지난 아침들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고 이야기한 그 반세기의 시간을 지날 쯔음을 기대해 본다. 그때의 삶의 풍경은 또다른 깊이와 넓이로 다가오기를...마흔여덟은 젊은 나이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