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책을 읽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문학'적 성장을 위해 철학을 부러 찾아다니는데, 나는 저항적으로 철학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니면 그런 시기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싫어, 싫어, 하면서 피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도피. 그러나 이유있는 도피일 수 있다. 대학원에서 주구장창 읽어야 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들, 시험 준비하면서 읽은 문예사조, 미술사조, 스터디하면서 읽은 벤야민, 바르트, 푸코 등등 실은 주구장창 읽었다면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났을지모르지만 게을러 터져서 수업 전 날, 세미나 전 날 슥- 훑어보고 공부한 척 했었으니,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그래도 가끔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여길만한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기도 했으니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아름다운 문장들만 골라 다시 읽고 밑줄을 쳐둬야지. 밑줄을 안 쳤더니 어딜 보고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한 줄 읽고 열 줄 쓰려 했던 그 욕심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또 하나 나는 두꺼운 책은 읽지 않는다. 정확히 읽을 수 없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책 읽는데, 두꺼운 책은 아무리 보석 같아도, 문자그대로 무겁기만 하다. 무거운 보석은 목에 걸 수가 없으니까. 결국 얇디 얇은 책으로 눈길이 간다. 그래서 서울 올라갔다가, 혼자 쓸쓸히 내려오는 길에 구입한 '피로사회'는 부피와 무게와 디자인과 뭐랄까 그 책을 만든 출판사까지도 마음에 들어버렸다. 조그만 가방에 지갑, 핸드폰, 책만 넣고 왔다갔다하는 일주일 사이에 읽었다. 그 시기에 정말 피곤해서, 나는 왜 이렇게 맨날 피곤한거지, 비타민을 먹어도, 홍삼을 먹어도 몸이 노곤노곤하네, 아무 것도 못하겠다, 생각도 하기 싫다, 이런 상태였다. 그렇게 피곤한 상황에서 '피로사회'를 읽는데, 신기하게도 '당신이 피로한 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입니다'하고 말하는데, 그 말 만큼은 전혀 피로하게 들리지 않았다. 


긍정성의 과잉이 당신을 지치게 한다.


맞다. 그런 내용의 책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우리를 피해자로 만들기 위해 가해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다. 성과사회인 현대사회는 당신에게 말한다. 물론 나에게도 말한다. 


당신은 할 수 있어. 멈추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다의 노예가 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런 말을 들으면 뭔가 잘못된 시스템이야, 하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계속한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불안한 이 긍정성으로 계속한다. 나 역시 할 수 있다의 노예. 할 수 없다, 그만 하자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그만'이라는 그 말은 그 다음에 무엇을 상상해야 할 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만'일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그랬다. 인간은 '중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건 배울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인가 시작하면 이내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버리니까.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중단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중단을 외치는 '분노'(분노는 중단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감정적 시발점이다) 대신, 중단하고 싶다는 그 간당간당한 마음, 짜증과 신경질만 남아있다. 그래서 매일 부모님을 붙들고 징징거리는 것일지도. 아니면 너무 친한 친구, 내 말을 너무 잘 들어주는데 어려움 없이 자란 친구, 그런 친구한테 징징거리는 것일지도. '징징거리는 그 모습'은 귀여운 것도, 연약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폭력적이고 간사한 것인데, 이것도 계속된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징징거리기'도 계속 되는걸까. 그럼 나는 할 수 없다고 믿을까. 난 할 수 없어, 안 할 거야, 못하니까, 이런 좌절로 가는 게 맞는 건가.


물론 극단적으로 대척점으로 가는 건 이상하다. 이것이야말로 최강의 꼬장이다. 그러니까 해야 될 것은 '과'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어, 나 완전 할 수 있어. 이런 마인드를 매일매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론 피로하지,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늘 잘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댈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잘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겠지, 이런 것이라도 마인드 컨트롤 해야겠다. 자신을 과다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밀어넣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학대의 수준이라면) 그러니까 쉴 때는 좀 쉬자. 의도하지 않게 철학책을 읽어버렸는데, 이건 정말 나에게 꼭 필요했던 책이었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 얇았으니까.(지하철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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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단편 <방>과 '방'과 쓰기의 삶
 

때때로 방의 독점을 꿈꾸는 이가 '내 방을 갖고 싶다'고 희구할 때, 그/그녀에게는 고립에 대한 의지가 읽힌다. 자매/남매/형제로 구성된 그러나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공동의 '방'을 갖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나눈다는 의미 외에 개인의 내밀성이 자라날 토양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인지, 어릴 적부터 '내 방'을 갖는 게 소원인 이들이 적지 않다.(어떤 이에게는 한 번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므로 더욱 그렇다.)  

또 '방'이라는 공간에 골몰해 밖으로 자주 나오지 않는 이를 오랜 만에 '바깥 세상'(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방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에서 만날 경우, 그들과 뭔가 공유하려는 것은 힘든 작업이 된다.(정말로 그것은 하나의 사무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말이 없고,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많은 부분 잊었고, 그만큼 자신에게 집중해있어, 둘의 관계에서 뭔가 시도 할 때, 나는 그들의 무심을 견뎌야 한다.) 왜냐면 그들이 혼자 '방'에서 지내는 동안 달팽이처럼 견고한 '껍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껍질은 자신을 지키는 '성벽'이기도 하지만, 성벽이 단단한 만큼 외부의 접근도 그에 비례해 빈약해진다. 곧 그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일종의 '장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방'이 장애가 되리라는 점,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견디는 데 삶의 의의를 둔다. 그리고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이 갖는 내밀한 속성 때문인지, 문학에서도 종종 '방'은 작품의 모티프로 작용한다. 글을 쓰기 위해 집/방을 점유하고 싶은 사람을 화자로 내세운 이승우의 단편 <방>도 그러하다. 애초에 쓴다는 행위는 협업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때의 협업은 더 치밀하게 정의 되어야 한다. 혼자만의 행위 이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단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물질적 가치들이 과잉생산되자 인간은 '잉여 시간'을 갖게 되고, 그 잉여가 자연스럽게 예술 쪽으로 흐르게 된 역사의 전개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 그것은 시간의 잉여만이 아닌 공간의 잉여가 발생한 지점에 대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산업화와 함께 개인적인 공간이 탄생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적 공간은 검은 옷을 두르고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던 수도사에 한정된, 즉 수도원에서나 등장할 법한 개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계를 위해 공동생활은 필수였다. 그러나 가내/길드적 협업의 형태로 생계를 이어가던 삶의 방식은 공업의 발달로 달라졌다. 협업은 '근무시간'에만 활성되는 '근무 형태'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사무가 끝난 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방을 갈망하게 되고(곧 혼자만의 시간을 희망하게 되고), 그 공간의 협소와 침묵을 사랑하며 그곳에 머무른다.(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은 산업화로 인해 성장했다/이에 더해 내면의 발달은 책의 분량을 늘렸고,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소리 내 읽지 않는 '묵독'에 길들여졌다. 이러한 묵독은 다시 내면의 발달에 기여한다.)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그런 공간을 열망한다. '쓰는 사람'들에게 '쓴다'는 행위가 주(主)가 되고, '쓰는 공간'은 객(客)이 된다 흔히 여겨지지만, 많은 경우 주(主)는 '쓰는 공간'이다. 쓰는 행위의 부속물인 '글'은 그러한 공간에서 파생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가상의 인물을 빌어 '자기만의 방'을 주창할 때, 그녀가 강조한 것은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의 소유였다. 그러한 소유를 위해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와 돈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이승우의 단편 <방>에서도 글을 쓰는 화자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글을 쓸 공간이다. 그 공간은 단지 혼자만 남겨질 수 있는 상황을 전제할 뿐 아니라, 자신을 쓰게 할 사연/내력을 가진 공간이어야 한다.  

 



 "책상에서 눈을 들어 둘러보면 사면에 들어찬 물건들이 감시병처럼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간이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창고에 쟁여진 물건과 다름없이 여겨져서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자주 집에서 나와 배회했다. 일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마련하고 찻집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음은 급한데 한 줄의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 많았다. 바깥을 떠도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172) 

 



이승우 단편 <방>의 화자는 아내와 아이를 미국으로 떠나 보낸 뒤 10년 8개월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쓴다.(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때때로 소설을 발표한 무명의 소설가이다.) 이때 소설쓰기는 그의 정당한 목적이 아니라 핑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를 뒷바라지 하면서 전부터 파열되어 있던 부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뒤 원래 살던 집을 팔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화자는 집에 혼자 남게 된다. '혼자'라는 물리성만은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만 그는 쓰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런 중 자신이 원래 살던 집(큰어머니의 배설물과 땀과 약물 냄새가 남아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뭔가 쓸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의 집을 아들의 신혼집으로 샀던 노인이 아들이 파혼하면서 집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화자는 부동산중개업자를 통해 노인의 허락을 구하고, 언제든 나가라고 하면 나갈 것을 조건으로 그 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비로소 화자는 뭔가 쓰게 되고, 이때 화자를 쓰게 하는 힘은 죽은 큰어머니가 살아 있던 당시 남겨 놓은 다소 역겨운 냄새다.(여기에 그간 빈 집에 들어와서 살 것이라 예상된 집없는 노인의 이야기도 들어간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이와 잠재적인 동거 형태로 살아가며, 이 공간에 익숙해져 가는 화자 역시 기괴하다.) 
 


 
"한때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큰어머니가 몸도 불편하고 정신까지 가물가물하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서울에서의 매일매일의 생활이 전투와 같아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고 해도 큰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긴 무관심은 부끄러운 일이었다."(164) 

 
"집을 팔면 되잖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 때, 마치 자기 돈을 들여 산 집이니 자기에게 권리가 있다고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 그것은 단순히 집을 팔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집이라는 단어를 발음함으로써 통상 은연중에 암시하는 가족으로서의 삶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꼭 집어 말하자면 집의 분해였다."(167)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반복되는 '냄새'는 화자가 짊어진 부채의식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큰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만은 아니다. 큰어머니를 투과해 보여지는 자신의 잔인성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다. 아내를, 아이를, 큰어머니를, 아내의 부모를 언급할 때, 화자가 관계맺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자신이 옳은 듯 행동하지만, 여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씁쓸한 느낌을 남게 한다. 이런 느낌 속에는 그가 소설 곳곳에서 토로하는 죄의식이 묻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냄새로 인해 그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큰어머니의 존재만은 아닐 것이라 유추하게 된다. 냄새가 환기시키는 것은 그 자신이며,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죄의식이다.(이승우의 소설에서 '죄의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의 죄의식은 그의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양상이 아닌, 다른 양상으로 뻗어간다. 그것은 쓰려는 의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그를 쓰게 만들고, 화자는 그런 의지 속에 산다는 것을 즐기는 듯 하다.)  

 

  
"어느 순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 방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상관없어졌을 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소설을 한 편 썼다." (184) 

 

무언가를 위해 '수단'을 필요로 할 때 일단은 수단의 성취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성취의 영역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하고 싶다/갖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에는 그에 대한 어려움이 수반될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해결한 뒤 우리가 쉬운 상태로 들어갔을 때, 즉 그것을 지배할 힘을 가졌을 때, 그토록 원하던 무엇은 그야말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며, 우리는 종종 그 지점을 '끝'으로 착각한다. 이승우 소설에서 '방'의 성취는 화자에게 그런 환각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환각이 '쓰는 삶'을 연장시킨다.  

환각이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다는 전제에서, 환각과 쓰기의 순환을 유추할 때, 영화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수 있다.(니콜 키드먼이 만년필을 잡고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가며 입술로 문장을 웅얼거리는 장면 때문에, 나는 영화를 수 차례 돌려봤다. 쓴다는 행위는, 그것의 행위자가 느끼는 것 만큼이나 지켜보는 이에게도 매혹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 깊이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진실에 닿기 때문에 현실의 이면을 뜨겁게 느끼는 사람이다.(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부적응자가 된 사람들의 순수는 매력이라기보다 위협이다.) 그녀에게는 지나친 진실이 환각이고, 그 환각은 그녀에게 펜을 잡게 한다.(쓰고 싶다는 유혹에는 세상의 비밀 한 조각을 발견한 것 같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열망이 있다. 아마도 작가들은 그런 열망을 끝까지 붙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력 아래 현대를 살아가는 로라와 클라리사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열망하는 세계를 먼저 인지했다. 그래서 세상이 정한 윤리가 그들에게는 맞지 않고, 그들은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그런 억누름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폭발할 때 뿐이다. 그들이 폭발하지 않기 위해 부여잡은 끈은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글'이었고, 로라 브라운에게는 '댈러웨이 부인'이었고, 클라리사 본에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환생인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 끈이 목을 조르기도 한다.)   



앞서 '방'의 필요를 강조한 버지니아 울프는, 누구보다 사적 공간을 필요로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원했던 장소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였고, 리치몬드에서의 요양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회복보다 런던의 고독을 더욱 갈망했다. 이것은 도시화 된 지역에서 사적인 공간이 필요를 동반하여 나타났다는 점과 맥락이 닿는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는 고독이라는 그림자를 갖는다. 그것의 속도가 누군가를 동반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고, 나아가는 존재 자신이 동반자를 거부하기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방을 갖고 싶다'는 발언은, 자신만의 속도를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보다 빠를 수 수도 느릴 수도 있으나,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릴 것이다. (방이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방을 가진 순간, 정체가 불분명한 열망에 휩싸여, 자신만의 속도로 공책을 펼치고, 자신만의 속도로 펜을 들어, 자신만의 속도로 어떤 문장을 웅얼거리며 빈 공간을 채워갈지 모를 일이다.   

 
 


 
* 인용_이승우, <오래된 일기>,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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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11-13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 소설은,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을 보았을 뿐인데, 우연찮게도 며칠 전에 2010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집을 보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두번째 문단은 상당히 뜨끔, 한데요 ㅎㅎ

김토끼 2011-11-14 13:18   좋아요 0 | URL
'칼'이었죠? 저도 마지막 서너장을 못 보고 도서관에서 나온 기억이 있는데, 다시 봐야겠지 싶습니다. 방금 두 번째 문단을 다시 보고 왔는데 저리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저는 ㅎ 그렇지만 밖에도 종종 나오세요ㅎ 건강해야 방콕도 하죠.
 

책이 곧 삶인 여자.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랬는데,
정확히는 열일곱 살에 친구한테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선물받은 시점부터이다.
그러나 더 막연하게 따져보자면 그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전혀 무섭지 않은 아동 흡혈귀물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혼혈인 친구와 교내 책장터 행사 에서 각자 한 권씩 책을 사서
난 이거 샀다, 넌 뭐 샀니, 하던 시절부터이다.
(그때 내 친구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초등용 버전을 샀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난 속으로 얘 뭐야, 장난 아니네, 라고 생각했었다.
그애는 영어도 잘했으니까.)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정말 중독된 사람처럼 거의 모든 종류의 책에 집착했고
지금은 오히려 책을 갖다 버리는 데 집착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책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졌다.
(소유하게 되면서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
확실히 난 유물론적이다.)
최근에 내가 사랑한 책들의 목록;
하인리히 뵐의 소설 두 개,
하루키의 소설 그리고 에세이,
잡지 나일론,
그리고 앤 패디먼의 에세이를 오늘 부로 추가시킨다.
그러니까 이 에세이에는 내가 항상 만나고 싶었던 기질을 가진 그런 남자를 만난 그런 여자가 있기 때문에 읽는 동안 행복하다.(현재형이다-절대 과거형인 '행복했다'라고 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앤처럼 모든 문서에 등장한 오탈자에 촉을 세우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고
(그러나 자신이 작성한 문서에는 어쩐지 관대하다..)
몇 살 때 어느 계절에 어떤 책을 읽었는지 늘 기억하고 있다가
시기적절한 순간에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고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약간의 논쟁이 예상되지만
그러나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람과 결국 함께하게 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되어가는가,
그렇게 존재론적 물음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전혀 심각하지 않으니까 괜찮다.
다가올 가을에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게되지 않을까..
하루키를 비타민처럼 읽던 그 시절처럼,
(책장이 아니라 약상자에서 책을 꺼내는 심정으로)
지금 나에게 이게 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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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게 2주일 정도 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나는 어떤 회사의 2차 전형까지 합격하고, 방금 3차에서 떨어진 상태다. 마치 시기적절하게 이런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한데, 어쩌면 구직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를 불만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난 6년이나 대학에 다녔는데,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난 여기서 그럭저럭 열등감없이 공부해왔고, 영어도 했고, 신문도 읽고, 손석희의 시선집중도 열심히 들었는데, 왜요, 왜, 내가 제일 답답한 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노력하지 않았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다들 열심히 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다. 이럴 때 방법은 한 가지,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 되는 것이겠지. 그런데 다들 이런 생각이니까, 다들 나는 놈이 되어버리니까 갈수록 힘들어진다. 게다가 이번에는 4차 면접까지 치른 후 300명 중에 겨우 1명을 뽑는 것이었으니 달리 할 말이 없긴 없다. 

 현재 이 책을 180여 페이지 읽고 있는데, 책에 의하면, 우리 나라 직업 중에 열정노동에 지배당하지 않는 직업군이 거의 없는 것 같고, 그나마 스스로가 '노동자'가 아니라 '창작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업'도 사실은 가장 열정노동을 강요하는 분야일 수 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고, 만약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좋아서'라기보다는 '너희는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라는 말로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의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국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우리 나라는 역시 모든 면에서 젊은이들 복지에 취약하는 것을 보여주니까, '한국은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영어권에서 태어나지 못해 몇 년이나 영어에'만' 투자해야 하는 이 운명이 야속하기도 하고-영어권에서 태어났으면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여튼, 여튼, 여러가지 생각을 든다. 특히 요즘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시위와 맞물려 20대 청춘을 '젊음'이라는 자본을 가진 '강자'로 착각하는 건지, 혹은 청춘에게는 이미 '젊음'이 보장되어 있으므로-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므로- 그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인지, 뭐, 나는 내 청춘이 그렇게 청춘답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내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반값 등록금 시위 현장을 트윗으로 속달받으면서 느낀는 것은, 20대는 여기까지 왔구나-정말로 와 버렸구나 어쨌든 오긴 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현실을 계속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이런 생각 결코 하지 않았는데, 정말 사회순응적인 인간이었는데, 지금도 굉장히 순응적인 편이지만, 돌이켜보니 내 삶이 돌아가는 사이클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취업고민없는 자유로운 젊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세상이 20대에게 공부할 시간을 더 줬으면 좋겠고, 그리고 근무 여건이 괜찮아서 조금 덜 받더라도 일할 맛이 난다는 소문이 도는 취업자리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솔직히 공사,공단을 희망하는 것도 그런 것이니까).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디스토피아를 바라지 않는 건데, 어쨌든 난 그렇게 힘들어 죽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조금 막막하다.  

_트윗: 그래서방금내린결론은영어를더하고(말하자면토익이고)신문을미친듯이읽고시사지를읽고매주한편씩논술을쓰고수학문제를더빨리풀수있도록구몬학습을신청하고내가가고싶은기업의홈페이지를이잡듯뒤져야겠다는것그러나문제는여기에어떤비판같은것이없다는것이다그냥그렇게해야겠다고내가생각하고있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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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토끼 2011-08-1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정은 노동(강제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모든 부류의 일)에 대한 거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건가.
 

 

2011년 5월 29일 일요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4쪽-56쪽

_과연 정말 좋아서 하는 걸까?  
_항상 더 열심히를 부르짖게 되는 건 내재화된 기업가의식 때문?
_문화종사자: 우린 노동자 x 장인 o 그런데 배고프고 일은 죽도록 하는데 삶의 질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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