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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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정 없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눈. 

일방적으로 이쪽에 보이는 역할을 강요하는 오만한 눈. 

이 녀석, 어느 틈에 이런 수법을 터득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표본이 된 것은 나다. 

113


상자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상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자에 알맞는 인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것의 반대, 그러니까 먼저 인간이 필요하고 그에 알맞은 상자가 필요하다는 명제는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인간은 상자에 맞춰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자가 인간에 맞춰진다면, 그러한 상태는 너무나 '주체적'이라 '상자인간'으로 불리기 어렵다. 이것이 아베고보의 <상자인간>을 읽으며 받은 느낌이고, 이 느낌의 경로는 그다지 주체적으로 작용되지 않았다. 


소설은 독자에게 주체적으로 해석하기를 원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독자가 지극히 수동적으로 작품에 흡수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상자인간에 대한 독자마다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에 반박하고 싶은 기분이다) 왜냐면 상자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주어진 세계를 자발적으로 확장/축소할 수 없고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우리를 확장/축소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쾌락을 적정선까지 만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세계는 거기서 거기다. 아무래도 더 나아가거나 퇴보하는 느낌을 받기란 어렵다. 우리는 인지하는데, 그것은 세계가 더 나아가거나 퇴보하는 순간에 대한 인지일 뿐, 자신의 주체적인 움직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세계-나' 관계나 '주체-객체'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오직 상자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이 상자인간에게 주체적으로 주어진 행위는 '쓰기'와 '엿보기'이다. 상자에 엿보기용 창을 뚫어 그곳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상자인간은, 엿보기용 창에 알맞게 진화하고 또 그에 알맞게 퇴화된다. 현대사회의 관음증에 대해 누누히 전해오는 그런 이야기와 비슷하다. 아베고보는 텔레비전 역시 그런 엿보기 심리에서 애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쪽은 볼 수 있다, 그러나 보이는 쪽은 이 쪽을 볼 수 없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명확히 구분된 세계에서 보는 자는 항상 우위에 있다. 보이지 않으면 열등해질 이유가 없고 이러한 열등의 제거로서 엿보기 심리는 현대사회인이 상용하는 무엇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상자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입장이 되는 것. 그러나 오직 보는 입장이 되는 것.


필사적으로 상자에 계속 들러붙어 있기 위해 

이대로 쓰는 걸 언제까지라도 계속할 심산이 아닐까.

136 


그렇지만 보이지는 않고 보기만 하는 삶에 어떤 의의가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유의미한 삶이라는 명분에 지배당한 현대사회인의 노이로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의미'할까. 나는 여기에 어떤 답도 구하지 않는다. 방도가 있다면 상자인간처럼 '쓰는'자로서 쓰는 동안에는 오직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바로 그 쓰는 행위때문에 상자인간은 상자를 떠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쓴다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주체적 도구인 동시에 세상과 자신을 격리시키는 무거운 벽으로 존재한다. 쓸 때는 늘 자기 자신만으로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쓰는 동안 그 자신은 철저히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 


나는 지금 담배를 물었네....

성냥을 그었어....

불꽃이 내 벗은 무릎을 비추지....

담뱃불을 그 무릎에 가까이 대보네....

틀림없이 열을 느꼈어....

모든 것이 다, 의심할 바 없는 현실이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쓰는 것을 멈추면 

그 다음의 한 글자, 한 구절도 나올리 없어."


"....라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쓰는 거지도 모르지."


"누가?"


"가령 나라고 해도 괜찮아."


"당신이?"


"그래, 내가 쓰는 건지도 몰라. 

나를 상상하면서 쓰는 자네를 상상하며,

 내가 계속 쓰는 건지도 몰라."


"무엇을 위해서?"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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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의승 옮김 / 뜻이있는사람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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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딱히 독후를 어찌 할 바를 모르겠는 소설이 있다. 좌절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지극히 따분한 소재와 자본의 힘에 기댄 이기적인 인간과 순수한 욕망을 쫓는 사람 간의 갈등 같은 지극히 단조로운 구도인 <위대한 개츠비>는, 읽고 나서 '정말 충격적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져요' 하는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읽는 동안 분명한 것은, 어느 로맨스 소설에서 볼 법한 인물 관계도와 그 안에서 쉽게 예측가능한 사건을 축으로 도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는 인간 내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것은 스무 살 적에는 약간 지루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소설 속 이야기가 결코 내 삶과 결부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개츠비의 삶은 사치스럽고, 아메리칸 드림이 곳곳에 전염된 당시의 미국은, 쟁취할 꿈이나 대상이 없는 스무살 여자 아이에게 허공에 뜬 세상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칠, 팔년 쯤 흘러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결코 개츠비나 데이지의 입장에 있지 않으며, 그나마 소설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다면 그것은 개츠비가 설정한 화자_어쩌면 자신은 개츠비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개츠비에게 일어난 사건에 내적으로 깊이 관여된_ 닉일 것이다. 


사실 독자는 개츠비에 대해 노출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자신의 내적 성장을 통해 개츠비에게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닉'이라는 인물을 통해 여과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공감하게 되는 이는 '개츠비'가 아니며, 개츠비에게 뭔가를 기대했다면, 더군다나 제목만 보고 위대한 뭔가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여지없이 좌절되고 만다. 읽는 입장에서 지적, 감정적 동의를 구하는 이가 '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왜 개츠비가 위대한 것인지요?'하는 물음을 그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경우에는 스무살 적에 '개츠비'에 초점을 두고 있던 시야가 이제는 '닉'쪽으로 확대된 것에 의의를 둘 수도 있다.


예전에 소설가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정말 잘 써진 소설은 어떤 한 구절이 와 닿는 게 아니라 소설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한 권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 잔상이 밀려오는 것이란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책을 보다가 좋은 구절이 나오면 꼭 메모를 남기는데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때는 두 번 다 그런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그저 소설을 다 읽고, 덮었을 때 희붐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에클버그 박사의 눈, 그리고 톰 뷰캐넌과 데이지의 이기심, 인물들 간의 모호한 관계, 그리고 '왜 닉은 그토록 개츠비를 옹호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았다. 이러한 잔영과 의구심이 소설을 다시 들춰보게 한다면, 이 소설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다만 다시 보고 싶게 만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부시절 서양문학산책이란 교양수업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분석해서 조망한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면, 그때는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과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라는 두 개로 분리된 사회의 상징성, 그리고 개츠비가 바라보는 초록불빛이라는 이상향과 개츠비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의 껍데기일 뿐인 데이지라는 당시 일반적 인간군상 같은 것을 배웠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츠비를 읽고나서 그런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심오하게 따져보기 않기 때문에, 이 소설이 역사의 한 줄기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이건 소설에 반영된 '시대상'이 아니라 그런 시대상을 창조해낸 소설로 보였으니까. (그리고 이런 소설이 아무래도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보다 훨씬 높이 평가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_이미 있는 것을 소설 속에서 보여줄 때도, 여기 없는 것처럼 표현해야지, 그래야 독자는 소설에 속아넘어간다)


<위대한 개츠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급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은 것 같다. 번역본이 여러가지라 무엇이 좋을지 따져보면 평생 못 볼 경우도 있을 듯하다. 나는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보았고 나쁘지 않았다.(김의승 번역, 뜻이 있는 사람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보면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는데, 난 이제 한 번 남았다. 한 번 더 보면 정말 하루키랑 친구가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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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2-01-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키 때문에 읽었는데, 여러 번역본을 전전하며 읽어도 통 감흥을 못 느끼다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김영하가 번역한 개츠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나이를 먹은 건지, 정말 번역을 잘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영하를 더이상 읽지 않는 나이에 그가 번역한 개츠비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니 조금 아이러니 같기도 하고. 저도 대충 하루키랑 친구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연락처를 도통 모르겠네요...

김토끼 2012-01-16 14:17   좋아요 0 | URL
하루키한테 메일 보내보세요!!나 세번 봤는데 친구해줘여~ (으아) 영어라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도 후다닥 도서관으로 날아가서 김영하 번역 찾아봐야지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개츠비>를 헌책방에서 산 70년대 삼중당 문고 번역본으로 읽었어요.뒤 편에 독자가 쓴 독후감이 실려 있는데 당시에도 우리나라에선 독자들 사이에 꽤 알려져 있었다네요.사실 헤밍웨이 소설은 지명도에 비해서 실제로 읽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그런 반면에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소설 중에선 꽤 읽히는 편이죠.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김토끼 2012-01-17 08:57   좋아요 0 | URL
아항 그렇다면 하루키가 소개하기도 전이겠네요. 삼중당이라면 정말 오래된 문고본 아닌가요? 저도 가끔 시내 서점가면 보는데요. 장정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오직 책만 읽겠다는 사람에게 가격도 싸고 좋은 것 같아요. 개츠비..영화는 안 봤는데요_ㅎ 사실 영화가 있다는 것도 지금 알았어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7 17:03   좋아요 0 | URL
요즘은 헌책방에도 삼중당문고가 잘 안 나오더라고요.세로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읽기 힘들죠.

영화가 70년대 중반에 나왔을 겁니다.로버트 레드포드가 30대였죠.

김토끼 2012-01-18 11:53   좋아요 0 | URL
로버트 레트포드가 30대. 그 사람 지금 할아버지 아닌가요? 전 영화배우 잘 모르지만..정말 세월이 엄청나군요. 그런데 개츠비는 지금봐도 뭔가 젊은 느낌_문학은 그렇지 않나요? 작가가 젊을 때 쓰면 젊은 느낌을 주고 늙어서 쓰면 늙은 느낌을 주고..전 그러던데 ㅎ
 
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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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없이 책을 받는 일이 있다. 일단 줬으니 돌려받지않겠다 선언하거나 빌려준다며 딱히 기한을 정하지 않아 결국 내 책장에 남는 경우도 있고 혹은 버릴 책이라며 '가질래?'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도쿄 기담집>도 그런 경위로 (빌렸으나 반납일은 미정인 상태로) 손에 들어왔다. 평소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의 저작을 모두 읽어치울 열정은 없는 탓에 정말 사소한 이유, 가령 표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식의 이유로 읽지 않은 것도 꽤 있다. <도쿄 기담집>이 대표적인 경우다. 앞서 말한대로 누가 '읽어보라'며 손에 들려주지 않았다면 새표지가 나오기 전까지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다.(나중에 이 표지의 기괴한 매력에 끌렸지만_책을 읽기 전까지 얼마간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건 사실이다.)

 

<도쿄 기담집>은 일본의 도시사람들에게 일어난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물론 팩트가 아니라 픽션! 그런데 진짜 픽션이기만 할까? 그런 생각도 든다.) 중단편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 '고베지진'에 관해 쓰되 직접적인 피해자를 등장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여러 단편을 한 권의 소설집에 모았던 하루키다. 그는 마치 숙제하는 학생처럼 글을 쓰지만 억지를 부려 일단 끝내자는 식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인데 그의 글은 문장마다 단락마다 성실하고 세심한 고려 끝에 '쉽게'쓰여졌기 때문이다.(하루키의 개인 편집자인 부인 '요코'가 많은 기여를 한다.)

 

여기 등장하는 다섯 이야기 <우연한 여행자>, <하나레이 만>,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시나가와 원숭이>을 관통하는 것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즉, 기담)이다. 개연성에 입각한 소설읽기를 즐긴다면 이것저것 따질 부분이 많을 것이다. 예전에 한창 소설 쓰기를 배울 때,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작가들을 읽지 않았는데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이 플롯을 짜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소설이란 그저 읽고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소설은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작업이기도 하다.(물론 이 과정에서 개연성이 필요하지만) 애초에 전제가 그러하니 이런 작업은 항상 실패에 이른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실패를 목격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그런 실패의 목격이 소설을 읽는 목적인 것 같기도 하다.(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지만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앞에서 말한 '세심한 고려' 외에도 말이다.) 다만 질서를 갖춰 열거하는 일이 귀찮기에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 할 뿐이다. 여러 이유 중 하나를 말하면 그가 치밀한 척하지 않아서 좋다. (약간의 스포일러!) 핫케이크를 구워달라 전화해놓고 집으로 오던 중 계단과 계단 사이에서 사라진 남편에 대해,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돌에 대해, 이름표를 훔치고 달아난_게다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원숭이에 대해 정연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은 힘들고, 솔직히 불편한/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도쿄 기담집>은 그런 불편하고 불필요한 방식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나버렸어요.. 조금 재밌긴 한데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아..어쨌든 시간에 맡겨볼까..' 이런 느낌, 그러니까 설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계에서 '(매력적으로) 뭔가를 말하지 않는' 방식을 구사하는 하루키가 좋다.

 

솔직히 구구절절 설명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래서 저래서 그렇다는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납득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고 (어쩌면 너무 많아) 종종 곤란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말하는 동안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인지 알 수 없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일어났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싶은 태도로 일관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하루키의 그런 '마인드'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마인드..는 아니고, 그물에 걸렸는데 거기서 빠져나갈 생각은 안하고 그물에 그물 나름의 삶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구나, 하고 현재상황에 충실한 마인드라고 할까.

 

만약 하루키 소설을 줄곧 읽어온 사람이라면 <도쿄 기담집>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편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에 그의 전작인 <벌꿀파이>의 소설가 쥰페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 <벌꿀파이>에서 쥰페이는 서른 여섯이었고 여기서는 서른 한 살의 쥰페이를 볼 수 있다. 쥰페이의 아버지가 어린 그에게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여자는 3명이다, 하고 말하는 의미심장한 장면도 한 번 읽으면 잊기 힘들다.(문득 <위대한 개츠비>의 첫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이 단편을 읽은 날 도서관에서 <벌꿀 파이>를 다시 찾아읽었다. 몇 년이 지나, 같은 인물이 또 다른 소설에 등장한다는 것이 역시 재밌었다.(예전에 써둔 리뷰도 봤는데, 이건 재미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시나가와 원숭이>가 좋았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말은 하루키의 책 제목)을 가장한 채로 시나가와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인데, 이유없이 이름을 잊어버려서 은팔찌에 이름을 새겨 걸고 다닌다. 나중에는 원숭이를 통해 자꾸 이름을 잊어버리는 원인을 찾게 되는 줄거리다. 흔히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시나가와 원숭이>를 읽으면서 뭔가 쓰고 싶어졌다. 실제로 여러 개의 메모를 남겨뒀는데 이 메모들은 시나가와 원숭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너무 뚜렷해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시나가와 원숭이가 쓴 것처럼 여겨졌다.(?) 

 

빌린 책이고, 다 읽은 책이니 이제 돌려줘야 하는데 곧바로 돌려줄 수가 없다. 한 번 더 읽을까, 하고 마음으로 저울질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읽고자 마음 먹은 책들이 있는데 어떡할까 싶다.(정말_쓸데없는 고민_그러나 진심으로 고민한다) 음...모르겠다. 지금은 리뷰를 다 쓰고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 차가운 공기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씻고 따뜻한 밥을 먹어야지. 한 번 더 읽을지 말지는 밥을 먹고 생각해야겠다..(해놓고 다음 날 돌려줬다..) 

 

 

 

밑줄

 

"이름을 새겨 넣은 팔찌를 만든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미즈키가 얘기를 끝내자, 상담원은 처음에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행한 대처 방법들은 모두 옳아요. 우선 실제적으로 불편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나가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이상한 죄책감을 갖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대신에, 현실적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거예요. 당신은 상당히 영리하군요. 게다가 팔찌가 아주 멋지네요. 잘 어울려요."

(시나가와 원숭이,210쪽)

 

 

"아가씨와 잘 지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어. 첫째, 상대방의 얘기를 잠자코 들어줄 것. 둘째, 입고 있는 옷을 칭찬해 줄 것. 셋째, 가능한 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사줄 것. 어때, 간단하지? 그 정도로 했는데도 효과가 없다면, 차라리 단념하는 게 나아."

"그것 참 현실적이고 알기 쉽네요. 수첩에 적어놓아도 괜찮지요?"

"나야 상관없지만, 그 정도는 그냥 머리로 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저는 꼭 닭처럼 세 발자국만 걸어가면 기억했던 걸 다 까먹어버린다니까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메모를 해둬요. 그런데 아인슈타인도 저랑 비슷했대요."

"아인슈타인이?"

"잘 잊어버리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완전히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

"좋을 대로 생각해" 하고 사치는 말했다.

(하나레이 만,97-98쪽)

 

 

사실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점괘에 마음이 끌린 적도 없다. 일부러 점쟁이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찾아갈 거라면, 차라리 내 머리를 쥐어짜내서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내려고 할 것이다. 결코 뛰어난 머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쪽이 해결하기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능력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윤회에도, 영혼에도, 육감에도, 텔레파시에도, 세상의 종말에도 솔직히 말해서 흥미가 없다. 전혀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유의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상관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나는 다만 개인적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적지 않은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의 조촐한 인생 여기저기를 다채롭게 만든다. 그에 대해서 나는 무엇인가 적극적인 분석을 했는가? 하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다.

(우연한 여행자,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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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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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의 첫 책.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인물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가며 봐야했다.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카라마죠프씨네 형제들>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카라마죠프씨네 형제>들은 중도에 포기했지만..)

 

나는 본격 추리문학이 뭔지도 잘 모르고
기껏해야 읽은 추리소설이라곤 홈즈 1권인가..(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소년탐정 김전일> <탐정학원 Q> <명탐정 코난> 같은 건 
중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읽어대서_'추리'라는 항목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재미'를 느끼지도 않았는데
조르주 심농의 책도 '재미있다'는 건 아닌데
문득 깨달았을 뿐이다.
사건을 쫓아가는 것은 곧 인간의 숨은 심리를 쫓아가는 것이고
너무 휴머니즘에 젖어있는,
진지한 인간일 수록_자신의 삶에 집중 할 수록_타인의 마음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한다는 점.

 

이것은 꼭 이 책을 통한 교훈은 아니고

다른 책을 읽어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요즘 본 책들에서는 그런 것을 뚜렷하게 감지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추리문학'이 때때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면서도

작품성을 인정받는 이유가 결국 '인간의 발견'에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추리만화에서도 보면 범행을 저지른 인간들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알고나면 범인을 동정/이해 하게 된다.

일본 추리계의 여신(?)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의 소설에

미치광이, 정신병자, 아무 이유없이 범행을 저지르는 냉혈한을 범인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한다.

자극적인 사건에만 주목하는 추리문학은 자신의 소임이 아니다는 식의 대답을 했다.

(정확한 건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의미였다.)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으레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읽으면서 나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았고

또 생각해보면 다른 소설을 읽을 때도

마지막이 비틀린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다.

 

스포일러!!

하지만 이 소설에는 충격적인 반전이라 할 만한 게 없다.

그렇지만 나는 좀 충격을 받긴 했다.

그것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동안의 인물 간의 관계가 이래저래 얽혀 있었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매그레 반장이 범인인 한스와 단 둘이 밤에 남아 있을 때

한스가 권총이 놓인 침대 쪽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감한 뒤

급하게 술을 한 잔 들이킨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끝 부분에서 방관자로 남으려 한 매그레에게

무책임하다는 멍에를 씌울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순간순간 판단하며 살아온 '형사'였을 테니

그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거의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에 옳고 그름의 여부를 따질 수가 없었다.

그 판단은 오직 한스 자신에게 맡겨야 할 문제일 수도 있다.

어쩌면 한스는 매그레 반장이

자신을 말려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선택을 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_입안으로 총구를 들이민_

한스의 죽음으로 사건은 종결된 것이다.

스포일러 끝

 

책제가 <수상한 라트비아인>인 까닭은

단순히 범인의 행태가 '수상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 수상함은 매그레의 훈련된 감각이 발견한

범인의 두 인격에서 기인한다.



한데 피에트르-표도르는 내면적인 차원에서부터 진짜 피에트르이거나 표도르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반장이 받은 인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즉 저 라트비아인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적 본질에서까지 피에트르이면서 동시에 표도르다!

필경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어쩌면 항상, 그토록 다른 두 인생을 번갈아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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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하는 이를 한편으로 증오하는

기형적인 감정 혹은 그러한 습관에서

동경하며 증오하는 이는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복잡한 마음이 많은 작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고

어쩌면 '갈등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

이런 관계를 찾아 헤매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다만 그런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수상한 라트비아인인 한스는

쌍둥이 동생에 대한 그런 애증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한 여인(베르트)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에게 뭔가를 깨닫게 한 순간

그는 오래 드리우고 있던 동생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그저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인간의 고통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자기 자신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빠른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묘사로

인물의 옷차림이나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의 분위기를

선명히 그릴 수 있는 게 좋다.

신문기자로서 1천 편의 기사를 쓴 것이 그가 글을 쓰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는데

보도기자 특유의 간결한 문구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모든 패를 다 보인 상태에서 진행되는 소설이

마지막까지 모든 걸 숨기려드는 소설보다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독자가 발견해야 할 것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사건 속 인물들의 진심이다.

(진심 쪽이 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


많은 수사 과정에서,

형사와 그 형사가 추궁하는 용의자 사이에 우정 어린 관계가 생성된다고 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주장일지 모른다.

한데 상대가 막무가내 짐승 같은 종류가 아니라면,

둘 사이에 일종의 친밀감이 싹트는 것은 거의 언제나 사실이다.

이는 물론 몇 주, 혹은 몇 달이라는 기간 동안

경찰과 범죄자가 서로에게만 몰두했을 경우를 전제로 하는 얘기다.

수사관은 용의자의 지난 과거를 어떻게든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한다.

또한 용의자의 사고를 재구성하고, 가장 사소한 생각들까지 내다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둘이 각자 밀고 당기는 게임에 모든 걸 거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대면하는 상황이란 워낙 드라마틱해서,

평범한 삶 속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냉담함 따위는 일거에 녹아버리기 일쑤다.

이를테면 죽을 고생을 다해 범죄자를 검거하고 난 뒤부터

바로 그 범죄자를 향한 인간적인 애정을 품게 되고, 감옥에 수감된 그를 찾아가,

마침내 교수대에 오르기까지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는 형사들이

세상에는 부지기수인 것이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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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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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들을 읽어가겠다고 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 책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가난한 캐테와 프레드의 이야기다. 그들은 전쟁 이후에 가난해졌고, 비참해졌고, 회복이 좀 불능한 그런 부부이다. 그것은 물론 모든 소설이 관통해야만 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결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끊임없이 그들의 상황을 '묘사'하기보다는 '보도'하고 있으므로 독자가 인물의 정신적인 결여따위를 진중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지켜보고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해야겠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걷고, 버스를 타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만나기위해 호텔로 향하고, 심지어 데이트를 하는 와중에(어쩌면 데이트를 하는 중에 가장) 전후 독일을 둘러싼, 광고문구들이 그들의 삶에 개입된다. 불쑥, 하늘에서 비행기가 연기로 하얀 광고문구를 그리고, 건물 벽에 글자들이 붙어있고, 갑자기 채소장수가 나타나 양배추가 얼마라고 외치는 식이다. 그 모든 것이 현실이 얼마나 기이하고, 소설이 얼마나 진지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잡음이 많다고 해야할까. 지금 내가 이 소설에 대해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어느 거리에서건 그런 소리들이 누군가의, 진지해져보려는, 좀 더 행복해져보려는, 아니면 불행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여기는 이들의 귀를 뚫고 이미 그 삶 속에 추가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오늘 거리를 나간 동안 분명 그런 소리들을 혹은 광고문구들을 지나쳤을 테지만, 그것들 때문에 내가 어떤 타격을 입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그것대로 살아있고, 나는 나대로 살아있다. 다만 소설에서 그 소리들은, 너무나 눈에 띈다. 그 소리들은 끊임없이 다른 목소리로 반복되지만, 같은 목적을 가진 것들이다. 소설이 그들의 시간-소설의 내용상 2일에 불과한 시간-을 보도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이전에 읽은 뵐의 <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임에는 분명해보인다. 

  

아이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이 두 부부에게서, 몹쓸 느낌을 받는다면, 아마도 그들이 가난이 아닌 불행을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려하기 때문이다. 측은하게 바라보고, 측은하지 않아보이는 아이들을 걱정하고-너무도 정상적인 미소를 짓는 그들을 걱정하고-, 내심 아이들의 얼굴이 어둡기를 바라는 캐테가-그러나 소설에서 이런 식의 노골적인 정서 표현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무서웠다. 캐테는 다른 이의 불행을 통해 보상받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소설과 현실의 맥락을 잇는,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약100년 쯤 전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시몽을 바라보면서 했던 생각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일 뿐이다. 아마도 캐테가 그런 여자로 보였던 것은, 갑자기 사강의 소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캐테를 아이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그저 어머니인 여자로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에게는 욕망이 좌절된 채로 남아있고, 어떤 삶에 대한 갈급증이 보인다. 어쩌면 그 삶은 프레드와 단 둘만 남아있는 상황이 연속되는 그런 삶이었을까. 그토록 자신을 아프게 하는 프레드-아픈 만큼 계속 사랑하고, 버릴 수 없고, 품을 수도 없고, 불행을 나눠가질 수도, 함께 행복해질 수도 없는 그 프레드-와 유보된 상태의 사랑을, 지속하고 싶어하는 캐테가 읽혔다. 그를 위해 더 예쁘게 보이고 싶고, 매춘부로 오인될지라도 꼬박꼬박 그를 만나기 위해 호텔을 찾는 것이다. 캐테는 이미 너무 많이 초라해진 여자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레드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반하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프레드는 남편이나 아버지로 불리기에는 다소 부족한 사람이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불행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분명히 해피엔딩이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끝이었다. 다시 처음, 첫 페이지로 돌아가 소설을 다시 시작하고 싶게 만들었다. 아주 단순한 끝이지만, 단순하지 않으면 어떻게 끝냈을까 싶은 소설이었기에 이런 끝이 좋았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쩌면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소설인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아직도 프레드가 캐테와 한 침대에 누워,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그녀가 누워 있다는 이유로 상처받았던,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불을 끈 방에서 보이지 않는 그녀가 등을 돌리고 누웠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어보는 프레드.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약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를 견딜만큼은 힘이 있기에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이 소설을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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