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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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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5월 광주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많이 아는 것도 같고 전혀 모르는 것도 같은 것이 80월 광주이다. 나는 요즘도 거의 매일 오월이야기를 듣는다. 단지 노래가 좋기 때문일 뿐 매일같이 오월광주를 기린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까닭 없이 울컥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일상의 모든 것들이 구차해져버리곤 한다.

 

805월 나는 아무 것도 몰랐고, 그저 서울시내에 가득한 군인들이 불쾌했을 뿐이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흐른 뒤에 오월광주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왜 그때 철없이 뉴스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할 만큼 억울하고 또 분했다. 그래도 세월은 잘도 흘러 벌써  오월광주로부터 30여년이나 도망쳐 왔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폭도 혹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도 애먼 사람을 그렇게 버젓이 부르는 시대에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한강의 신작소설 <소년이 온다>를 접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광주에 대한 이야기다. 광주 그날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날로부터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 핍박을 말하는 것 같다. 당연히 자주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순간들을 이겨내야 했다. 누가 쓰던, 누가 읽던 광주이야기는 그렇게 들려주고 들을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 소설의 화자는 매우 독특하다. 나도 너도 그도 아닌 어른어른한 어떤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런 요소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것이 기교가 아니라 작가가 가진 오월광주에 대한 엄연한 거리감에 대한 솔직한 고백일 것이라 짐작할 수는 있다. 작가가 5월 당시보다 이후에 천착한 것도 그런 진솔함의 일환일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월이 흘렀어도 광주가 어떻게 더 지속됐는지, 또 어떻게 광주를 이어갈지에 대한 주제의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삼 소설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말하면 광주를 고작 카타르시스로 써먹은 경박한 짓거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랬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동일한 의문이 지박령처럼 따라다녔다. 도대체 지금 광주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대체 일개 독자인 내게 어떤 의미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물론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작가는 이 소설을 꽤나 늦게 쓴 편이다. 작가 한강은 광주출생으로 어릴 적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그 시기가 오월광주와 무척이나 근접했다고 한다. 열 살 무렵에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또 글이라는 것을 쓰면서 자신이 떠났던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무게감이 얼마나 커졌을까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다.

 

작가에게 오월광주는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라면 누구라도 그럴진대 광주출신이라면 더할 것이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두려운 마음으로 이제야 광주에 대해 입을 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남의 일이 아니지만 남의 입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 그 거리감이 나도 너도 그도 아닌 화자로 소설 속에 선 모습이 어른어른 보이는 느낌이다. 그렇게 꼭 안아줘야 하지만 안아줄 수 있는 몸이 없는 영혼의 심정으로 광주의 사람들을 누구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그려낸 것은 작가의 역량보다도 진심과 양심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그 양심의 짐을 아주 조금 더는 기분을 얻었다. 너무 큰 것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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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2]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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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국인이 있다. 그는 미국유학 중에 천안문 사태를 밖에서 겪게 된다. 그는 그 일 이후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의 삶을 택하게 된다. 지식인에게 천안문 사태가 주는 절망과 분노는 매우 컸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한 중국인의 미국생활은 단순한 도피일 수도 있지만 아주 개인적으로는 망명과도 같은 심정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된 나날들의 지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이민자들이 그렇듯이, 이 사람도 미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온갖 험한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이 사람의 목표는 자신도 모르게 수정되어 버렸다. 애초에 유학을 오게 된 것은 정치학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시인이 되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민자의 삶은 그의 공식적인 것도, 사적인 꿈도 모두 내려놓게 했다. 그는 요리사가 됐고 식당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가는 성공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일원이 되었다.

 

,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되었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그 꿈의 외부에서 보는 시각일 뿐이다. 또한 자유를 위해 미국에 머물게 됐지만 어느 순간 과연 자신에게 자유라는 것이 있었는지에 대한 짙은 회의를 발견하게 되는 것 역시 이민자 자신이 아니라면 알지 못할 일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지만 정작 자신의 꿈은 포기하게 된 아이러니를 이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거기다가 조국과의 유리된 삶이라는 고독은 덤이자 이민자에게는 평생 짊어져야 할 근원적 무게감이다.

 

물론 이민자에게 경제적 안정은 최우선적 과제이다. 의식이 족해야 예를 안다는 말처럼 생존이 된 후에 꿈이고, 자유고 따실 겨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민자의 형이상학적 관점이란 일단 배부른 고민이라고 꼬집을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부른 고민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배부른 고민이 이민자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보면 외국 이민자들이, 버젓이 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갖고 사는 그들이 정작 그쪽 나라 정치보다 조국의 상황에 더 열심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여권의 국적이 달라진다고 한들 한 개인이 갖는 국적은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 때문에 이 소설이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지만 어쩐지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것은 이 주인공의 상황과 한국 이민자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이민자에게 적용될 수 있기도 하겠지만 천안문사태가 언급되는 지점에서 이 경험의 특수성은 매우 제한되게 된다.

 

그리고 이민자도 아닌 내게 이 소설이 유난히 잘 읽혔던 이유는 요즘 우리가 국내에서 겪는 많은 일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조국을 떠나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안전하지도 않고, 안주할 수도 없이 떠도는 삶 같은 요즘의 상황이 마치 지금 내가 미국이나 어디 다른 나라에 유학 중이라면 귀국을 포기하고 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 기술된 이민자의 삶은 그런 충동을 제어하게 해주기도 했다. 이민자가 자유를 위해 포기해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아니 자유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 역시 자유였다. 전자는 국가와 상관한 것이고 후자는 개인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민을 꿈꾸는 내게 시뮬레이션의 효과를 주었다. 또 한편으로는 잊고 살아야만 했던 꿈을 다시 이 두 권 분량의 긴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가슴에 꺼내놓게 한 것도 고마운 점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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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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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핀천의 소설은 솔직히 낯설다. 영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서도 최고라지만 번역물로나 그의 소설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와 닿는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번번이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될 정도니 그의 문학성은 분명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토마스 핀천의 초기 단편을 모아 엮은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어떤 흥분과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흥분과 기대는 이내 좌절과 지루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의 독서경향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근래 일부로 찾아 읽는 소설은 대부분이 추리 장르이다. 문학적 완상보다는 그 반대의 뇌를 자극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단편이라는 것, 그것도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라는 것들이 여러모로 독서의 속도를 방해했다. 그래서 이 단편집의 제목이 느리게 배우는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비교적 얇은 책인데도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정독을 했기 때문에 더뎠다면 그나마 자랑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읽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정독이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얻은 성과물도 있었다. 도무지 단편의 내용이 납득할 수가 없었고, 그 이해를 위해서 자주 서문을 다시 읽게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작가의 단편보다 서문을 더 여러 번 읽게 됐다. 그렇게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 끝이라도 작가의 단편들을 잘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작가의 문학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다가설 수는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문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작가의 강제였을지도 모른다. 이 단편집은 아주 독특하게도 서문이 본문보다 길다 싶을 정도다. 수록된 단편들이 작가의 초기작품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문의 긴 호흡에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오래 전 모습은 부끄럽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적인 것이라면 깊이 숨겨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숨길 수도 없고 더욱이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거꾸로 그때에 비해 현재가 부끄러울 수도 있는 문제다.

 

물론 이 작가의 서문은 그런 변명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젊은 작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치열함과 난해함을 독자에게 설명하면서 스스로 그 시절의 자신에게서 재충전하고자 하는 의도 일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운 단편들을 읽으면서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기는 나름 유익한 반복이었다.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로써의 의미도 있었지만 자신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재구성하는 진솔한 자세와 용기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이 서문이 갖는 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편집을 읽는 사람에게는 특히 서문에 애정을 갖기를 권하고 싶다. 이 단편집에 대한 평점을 높게 줄 수는 없지만 인내가 자랑인 문학도에게는 아주 좋은 참고가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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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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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문학관이라 어설프게 드러내기 두렵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동기는 권태에 있다. 시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장황한 묘사와 관찰 그리고 방대한 상상 등은 아무래도 권태롭지 않고서는 한 인간의 머릿속에 펼쳐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기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 결과물은 상반된다.

 

김중혁의 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일요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목의 소설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이 작가의 일상이 얼마나 권태로울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분주하거나 무엇엔가 열중하는 모습으로 위장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작가의 의식은 정말 권태로워서 이것저것 별 의미도 없는 것에 몰두하는 것만 같았다. 예컨대,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보이지도 않는 천장 위의 별들을 세는 것과 같은 행위다.

 

그런데 그런 권태로운 작업의 결과는 의외로 흥미롭다. 그래서 소설이 되기도 하겠지만. 김중혁의 소설은 아주 한가한 사람조차 너무 바빠서 당연히 놓치거나 관심조차 주지 않은 일상의 실오라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문장이 무엇보다 특징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소설가적인 문장이 어떻게 적합한지 아닌지는 다소의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어쨌든 김중혁의 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수월하게 읽으면서 매순간마다 나를 부끄럽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용을 겪어야만 했다. 아무리 작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상에 대해서 얼마나 생략과 무관심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소설은 어떤 사람들이 죽은 후에 세상에 자신의 흔적들을 지워달라는 청탁과 그것을 맡아 하는 탐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이 설마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반반의 공감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동력의 하나일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지로 시작했다가 결국은 그럴 만도 하겠다로 끝나기를 작가는 의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백퍼센트 수긍할 수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소설이 준 흥미로운 취미가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주변의 평판에 신경을 곧추 세운다. 때로는 그것이 궁금하고,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민감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차마 생각지 못한 것이 내가 죽은 후에 비로소 숨겨져 있던 평판 혹은 비밀들이 까발려질 때의 당혹감이다. 살아있을 때라면 변명이나 혹은 거짓말이라도 해서 최소한 무마시키려는 노력이라도 해본다지만 죽은 후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죽었으니까 상관없을까?

 

오죽 심심하면 이런 발상을 했을까 싶기도 한 엉뚱한 일들을 쫓는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어쨌든 읽기는 무척이나 수월한 소설이다. 약간은 추리소설 같기도 해서 더욱 그럴 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기대하게 되는 촌스런 감동은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설 혹은 문학이라는 그럴듯한 감흥보다는 마치 낯선 사람이 불현 듯이 내가 모르고 있는 내 일상의 문제를 툭 하고 지적해주는 당황스러움과 고마움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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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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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우선 형식에서 일반 소설과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전체가 하나의 단락으로 뭉쳐 있다는 것이다. 자주 시가 시의 형태라는 것을 탈피해 산문의 모습을 한 채로 독자들을 당혹시키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문장의 형태면에서 특별함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은 이 작가의 독특하거나 혹은 괴팍한 특징이다. 그래서 책을 단번에 독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띄엄띄엄 읽는 사람이라면 이어서 읽기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끝까지 이 형태의 이유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었지만 한 편의 소설로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짐작 정도나 가능하면 모를까.

 

그러나 그 낯선 형태를 불편해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또 다른 흥미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것은 문장과 연관된 흥미로움이다. 어떤 소설가의 문장은 산문이면서도 운문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베른하르트의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아무리 번역이라 할지라도 문장에서 느껴지는 시적 기법이 느껴진다. 광기에 관한 사적 고찰이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만한 것이 이 소설인 만큼 은유와 상징이 많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단 하나의 단락에 묶인 이 소설의 문장이 의외로 운율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이 형식의 특징은 작가가 카라얀을 숭배한다고 표현할 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소설 속 화자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을 좋아한다면 분명 카라얀을 숭배한다는 화자의 고백에 어느 정도 공감도 되면서 한편으로는 질투심을 느낄 법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운율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도저히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모를 이 소설의 읽는 맛에 가속이 붙었다.

 

소설 비트켄슈타인의 조카는 광기와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싶다. 도대체 광기와 우정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광기라는 것이 소설이 될 정도면 세상 무엇과도 결합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아니 이 작가의 작품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냉소적 태도 또한 이 우정을 말하기에 어색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어색하거나 혹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기에 남에게 읽혀질 만한 특별함이라 생각할 수 있다.

 

화자와 비트겐슈타인의 우정은 각별하다. 아주 심각한 수술을 받아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화자는 온통 친구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동까지 가는 생각과 실행에 골몰한다. 어쩌면 거기까지 가는 길에, 그 무리한 행동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꼭 가고 싶어할 정도면 그 우정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런 자극적인 동기가 아니더라도 이 소설 전체가 화자와 친구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우정은 정말로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가 죽자 화자는 그의 장레식은 물론 후일 언제라도 그의 무덤조차 찾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 장황하게 묘사한 우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정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이 소설은 내가 (온전히) 갖지 못한 광기와 우정에 대해서 때늦은 갈망을 안겨주었다. 광기라면 웬만한 작가라면 다 갖고 있을 것이겠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 화자처럼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광기지만 거기다 냉소의 태도까지 갖추니 이보다 근사한 지식인의 모습이 없을 것만 같다. 물론 정작 광기에 사로잡힌 본인은 고통스러운 것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소설이라는 문학적 성과가 될 수 있었으니 나쁠 것도 없다. 또한 우정도 그렇다. 사랑 때문이라면 죽을 각오로 보고 싶은 열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우정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 특별한 우정이 광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거꾸로 우정 때문에 미쳐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처럼 이 소설은 무수한 의문을 품게 한다. 또한 광기의 우정이라는 것이 뭔가 훔쳐보고 싶게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다행히 길지 않은 소설인 탓에 그 호기심을 채우기에 많은 인내가 필요치 않은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가장 친절한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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