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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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어릴 적 소위 세계명작전집에는 프랑스 문학이 아닌 것도 프랑스 것으로 착각하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유럽이라는 혹은 세세하게는 독일이나 영국 문학이라는 제대로 된 기억 대신 그저 프랑스 문학이라는 인상이 더 오래 남아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그러다가 조금 더 커서는 전집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얼마나 자유로울지는 미지수지만) 책에 대해서 선택할 수준이 되서 접한 프랑스 문학은 다소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을 주겠지만 그래도 뭔가 한국문학에서 느끼지 못할 막연한 기대감을 채워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 문학을 접한 기억이 아주 희미한 것을 보니 기껏해야 영화로나 본 정도일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그것도 두 권씩이나 프랑스 소설을 읽게 됐는데, 그중 이야기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한 대단히 발칙한 상상의 <육식이야기>는 오랫동안 가져왔던 프랑스 문학의 인상을 많이 바꿔놓게 될 듯하다. 처음 육식이야기라는 책제목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사자가 고기를 먹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꽃이 고기를 먹는 것일까? 하는 상상을 자극하는 제목이었다. 심지어는 사자를 한입에 꿀꺽 집어삼키는 어떤 무시무시한 꽃의 이야기일까 하고도 상상해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육식이야기는 그런 식이다. 비록 사자를 집어삼키는 어마어마한 꽃이 나오진 않지만 그것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흥미진진한 발상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단편소설 14개로 구성된 육식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로운 상상 혹은 공상을 전달하고 있다. 거기에 프랑스 남자에 대한 전인류의 선인견인 에로틱까지 겸비해서 읽는 이의 은밀한 욕망까지도 자극해주니 읽는 일이 매우 신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에로티시즘이 말초만을 자극하는 싸구려가 아니다. 다소 직접적이고, 디테일한 묘사가 동원되고 있지만 그것에는 문학적 연민과 낭만으로 잘 포장되었다.

무엇보다 신선했던 것은 한국문학을 끔찍히도 사랑하는 독자가 쉽게 경험하기 힘든 외식 같은 맛을 주고 있다는 점이 좋다. 물론 한국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 이런 류의 소설이 문학지향을 바꿀 것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주 훌륭한 손맛을 가진 어머니의 밥상을 매일 대하면서도 가끔은 김밥집 단무지에서 달콤한 맛을 느끼듯이 이 낯선 프랑스 단편집은 그 김밥 이상의 재미를 주고 있다. 이 책은 너무도 차가운 도시생활에 굳어진 현대인에게 은밀한 상상을 제공하는 공을 세우고 있다.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는 만족을 수치로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단편집은 유행가 가사처럼 십점 만점에 십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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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 문학A조 마지막 도서 <퀴르발남작의 성>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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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문학성 짙은 작품집답지 않게 읽는데 의욕을 불사르게 한다. 그의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지극히 가학적인 것들인 탓이다. 소설집 속 단편에서도 담겼듯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을 법한 폭력적 또 다른 자아들에 대해서 혹은 그것들을 주저하고, 후회할 것이 분명한 또 또 다른 자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서 성선설 따위의 뒤편에 숨을 수 없는 치밀한 포위망을 갖춰놓고 있다.

모든 소설가의 단편들이 그러하듯이 최제훈의 단편집들도 따로 발표된 것들이지만 하나의 책에 묶으니 자연스럽게 장편처럼 내용(적어도 작가가 천착하는 사회의 폭력성에 대해서)들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지류의 물줄기들이 본류에 합류되면서 섞이게 되는 것처럼 최제훈 소설의 주인공들은 홍길동의 분신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모이는 것처럼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가 언급한데로 그의 괴물은 드라큐라나 퀴르발 남작같은 본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보다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이런 저런 조각들이 짜깁기된 것이다. 어쩌면 그 조각들 하나하나로는 결코 괴물이지 않은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꿰매 놓으니 그 형상이 괴기스러워진 것처럼. 그런 작가의 커다란 구도는 다섯 번째에 실린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 - 휘뚜루마뚜루 세계사1’에서는 더 이상 숨길 것이 뭐 있냐는 투로 직접화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세계사의 기록 속에 마녀사냥은 17세기에 그쳤다고 하지만 21세기 뉴스에는 여전히 마녀사냥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인용되고 있다. 그렇게 산 채로 사람을 태워 죽이는 일은 아니지만 불에 태워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통을 주는 마녀사냥은, 솔직히 고백하자, 현재도 횡행하고 있다. 마녀사냥의 주체는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라고 적시된 인물들이 아니라 죄없는 마녀들이 불에 타 죽는 동안에 방관자인 동시에 조력자, 공벙자였던 우리들에 대해서 작가는 매서운 질타를 쏟아 붓는다.

“자신의 친척이나 이웃이 눈앞에서 불태워져 잿가루로 흩날리지만, 그들을 동정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절대 그럴 수 없었지. 그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자신들이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뚝에 묶인 자가 진짜 마녀가 되어야 했으니까...사냥이 진행될수록 인간들은 형벌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는 거야”

영화 피셔 킹에서 주인공 잭 루퍼스의 애인은 이런 말을 한다. “신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잉태를 통해서 창조 역할을 잇는 여자가 신을 닮았다. 남자는 반대로 악마를 본 따 만든 것이다. 대체로 못된 짓은 남자가 다 하지 않는가?” 최제훈의 소설 속 조각 괴물에는 여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기록되거나 구전되는 역사 속 가해자 리스트에 여자 이름이 오른 경우는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괴물을 구성하는 많은 조각들은 아마도 남자 이름일 것이다.

아무튼 남자가 됐건 통틀어 인간이 됐건 괴물과 우리는 잠재되거나 억제된 본능임을 말하는데 묘하게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 우리의 범주에서 살짝 빠져나올 수 있는 신비한 장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최제훈의 소설은 인간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를 드러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지만 정작 그들 속 하나가 분명할 독자에게는 묘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마치, 그의 소설이 악에서 구해줄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우둔한 나로서는 도저히 분석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론을 위해서 미완성이고 지극히 추측에 불과한 것이나마 말하자면, 그것은 앞서 인용한 글 속에 나온 것처럼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불태워져 잿가루로 흩날리는 마녀를 지켜보던 그 시대의 군중의 시선이 되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 대한 통렬한 질타에 아쉬움을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내가 괴물이 되고 마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면죄부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일 따름일 뿐.

최제훈의 소설은 충격 그 자체였다. 현대의 아니 인류 역사의 가장 근원적 문제에 대해서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 그 이유를 밝혀내려고 하고 충분히 설득력을 담보해내고 있다. 폭력에 대한 집요한 리포트인 소설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콧등이 시려진다. 그런 순간들 때문에 면죄부에 대한 착각을 갖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골 아픈 주제의 소설은 읽는 것 자체가 작가와의 싸움이 되거나 동조자가 되는 일인데, 그 과정을 통해 나는 그의 문장에 포로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15세기의 장작불에 비교할 수도 없는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인터넷을 갖고 노는 우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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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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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간만에 큰 충격을 준 소설이다. 착한 소녀가 아닌 어두운 밤공원 한켠에서 삼삼오오 몰려 불온하게 담배를 피우며 침을 찍찍 뱉어내는 불량소녀의 모습이 불현듯 아프게 다가선다. 이 책을 읽을라고 그랬는지 며칠 전 헬쓰를 나오는데 1층 창문 뒤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담배를 피우는 여중생 무리를 보았다. 그 아이들을 잠시 보며 나무래야 하나를 두고 잠시 고민하는데 그중 한 아이가 담배를 감출 필요도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때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내가 말려주기 바랬던 것일까. 이 소설 속의 마지막 이름 유나를 보호해주던 남자들처럼 그 아이의 사정을 들어봤어야 했을까 문득 후회가 된다.

2..
이 소설을 처음 읽어갈 때는 이외수가 떠올랐다. 그것이 우선은 흥미로왔다. 끝까지 소설 속 소녀의 의식에 따라붙는 사람을 갉아먹는 쥐 때문에 그런 듯 싶다. 이런 감상이 작가에게 혹시 결례가 될 지 모르지만 무의식 중에 떠오른 생각이니 어쩔 도리 없다. 소설 속 소녀의 긴 방황을 보면서 이외수의 소설 <들개> 속 미스 강이 떠올랐다. 이 소녀가 더 자라서는 그 미스 강처럼 될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럴 것만 같았다.

모든 남자라고 해도 좋을까 모르겠지만 대게의 남자들은 이쁜 딸에 대한 로망을 갖고 산다. 대를 잇는다는 개념이 확실히 희미해진 요즘이라면 더욱 결혼과 무관하게 남자는 착한 딸을 예쁘게 키우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소녀는 그런 착한 딸의 가능성은 매우 적다. 착하기는 커녕 못되고 괴팍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불행하다. 행복했던 순간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불쌍한 아이다. 어린시절 불쌍하지만 그래도 착한 소녀들이 왕자를 만나 행복해지는 일들을 나이 먹어서도 테레비에서 실컫 감상하고 있는데 이 소녀에게는 그럴 가능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다.

친엄마가 아닌 진짜 엄마라는 참 어려운 개념을 제시한 이 소설은 처음부터 소녀와 행복을 유리시켜 놓고 있다. 학교를 다녀본 적 없고,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이 소녀를 불행하다고 말하기는 정말 쉽다. 정작 소녀도 행복을 목표하지 않았다. 친엄마가 아닌 진짜 엄마를 찾는 대단히 철학적 동기를 가진 것이 어쩌면 이 소녀의 진정한 불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행복하지 않아서 불행하기보다는 불행이 두려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3..
문학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참 잔혹한 짓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81년생이면 서른살인 이 소설의 작가는 이 불행한 소녀의 뒤를 밟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불행한 상상을 했을까 싶은 마음에 글을 쓴다는 것이 참 못할 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 뒤의 추천사 중 누군가 톨스토이의 문학론을 인용했다. 그것을 다시 인용해보자.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이 소설을 읽고나서 독자인 나는 내 삶에 애착을 가질 수 있을까 반문하게 된다. 이 불행한 소녀의 일이 비록 소설이라는 유리 속에 갖혀 있지만 이런 것도 카타르시스할 정도로 나는 야비한가 되묻게 된다. 그러면서도 문학이라는 것이 3분 혹은 길어야 5분짜리 대중가요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항상 불신하면서도 여전히 소설이나 시를 뒤적이는 미확정의 태도도 문제긴 하다.

4.
소녀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상식 선에서 가장 진짜 아빠 같았던 달수 삼촌과 헤어지던 소녀의 독백은 참 감각적이었고 적절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많은 진짜 엄마가 아닌가 생각됐던 황금다방의 장미언니, 역에서 만나 소녀를 극진히 보살폈던 식당 할머니 그리고 폐가에 숨어살던 사내 등과 헤어질 때 없었던 독백이었다.

"삼촌이 머뭇거리더니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주문처럼, 나쁜 사람 만나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삼촌과 나 사이에 끼인 까만 비닐봉지에서 서걱서걱, 마음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달수 삼촌과 헤어질 무렵 소녀는 초경을 경험한다. 그리고 더 이상은 어른들에게 보호받는 일도 없어진다. 그 지점이 참 아련하다.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어른들에게 보호받던 소녀가 하필 그 즈음에 또래들과 어울리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그리고 진정 불행한 일을 겪게 된다. 어쩌면 황금다방을 나올 때부터 잠재의식을 지배했던 불길한 예감일지도 모를 결말이기도 하지만. 끝내 자기 이름을 갖지 못하고 불행에 갇혀버린 것은 소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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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름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Asia 제17호 - Summer, 2010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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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안이다. 사실은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다. 적어도 한국인에게 아시안이라는 말은 마치 외국인을 지칭하는 말처럼 낯설다. 너무 어릴적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척의 이웃처럼 느끼며 자라온 탓이 클 것이다. 가끔씩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오랜 이웃 앵글로 섹슨과 달리 생겼다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성년의 날을 맞을 때까지 겨우 일본이나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 아시아 문학을 접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크 아시아는 그런 한국의 이율배반적인 정체성을 조용히 나무라는 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도 이런 계간지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17번째를 맞은 무크 아시아는 특별히 팔레스타인을 다뤘다. 어쩌면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낯선 지명이 팔레스타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따라붙는 연상은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다. 터번을 두른 위험하고 불온한 사람들 팔레스타인.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벌인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테러리스트 집단이라고 외면해서는 안된다. 복잡한 세계 정치를 논하기에는 이 지면이 어울리지도 않고, 그럴 만한 식견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팔레스타인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를 곧이곧대로 읽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막연한 동질감은 느낄 수 있어 무크 아시아를 받아보는 마음은 80년대 금서를 대하듯 설레임이 느껴졌다. 아니야 다를까 책 속에는 우리의 1940년대라고 해도 좋고, 80년대라고 해도 좋을 절규와 몸부림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김지하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살아온 저푸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 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에
서툰 백묵글씨로 쓴다


이 시에 답하듯 무크 아시아에 실린 이부 살마의 시 '우리 돌아가리'를 대할 수 있었다.

탄식하는 해안이 나를 부른다
내 탄식은 시간의 귀에 쟁쟁하다
도망하는 사내들이 나를 부른다
그들의 땅속에서 낯설어진다
그들의 고아가 된 도시들이 나를 부른다
그대의 마을과 성곽들이
내 친구들 내게 묻기를 "우리 다시 만날까?"
"우리 돌아가게 될까?"
그래! 우리 이슬 머금은 대지에 입 맞추리
우리 입술 붉은 열정으로 달아올라
내일, 우리 돌아가리




마이클 셀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유독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저자도 놀라는 이 현상이 정말 정의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 또 다른 문화기호의 소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무크 아시아에서는 아주 명징하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독립과 해방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무크 아시아의 창간호부터 16호까지의 내용은 겨우 커다란 주제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다룬 17호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듯 하면서도 가물가물해진 민주주의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일기에서 그때 못해서 안타까웠던 어떤 고백을 발견하듯이 팔레스타인 그리고 우리가 사는 가까운 세계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찾아내기에 충분했다.

계간기 아시아는 정작 아시안이면서 아시아에 대해서 지극히 이국적인 시각을 가진 우리들의 좁은 시각을 넓혀주는데 작지만 의미있는 작용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희박한 관심 속에서 각각의 아시안 문학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큰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책이 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진다. 누군가 권하고, 또 소장하고 싶은 책을 발견해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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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침묵의 무게
헤더 구덴커프 지음, 김진영 옮김 / 북캐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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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는 세상의 모든 문학이 그렇듯이 행복보다는 불행을 다루고 있다. 그것도 접근하기 대단히 고통스러운 아동학대, 가정폭력 그리고 아동성폭력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충격적인 단어들로 인해서 어떤 관음증적 동기를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침묵의 무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책임감 넘치는 진지한 자세로 사회문제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에 대한 짧은 프로필을 통해서도 그 진정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작가 헤더 구텐커프는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아이오와의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16년간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침묵의 무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칼리의 침묵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말을 걸어주었던 교사를 얼핏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이 픽션인지 넌픽션인지 읽으면서도 판단이 쉽지 않을 만큼 작가 헤더의 묘사는 정말 생생하고 섬세하다.

사건이 아닌 실종된 두 어린 소녀 칼리와 페트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쫓아가는 형식이어서 때때로 심리학 부교재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다양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정말 꼼꼼하게 관찰하고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한번 터지면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슬픔에 빠뜨리고 마는 아동 범죄에 대한 예방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밑그림처럼 소설 전반에 깔아두고 있다.

그런 친절함 때문에 심리학에 대해서 정말 얄팍한 지식밖에 갖고 있지 못한 문외한인 나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족치료라는 단어를 새삼 떠올리게 됐다. 침묵의 무게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덟 명 정도가 짧은 챕터를 오가며 묘사되고 있다. 또한 범죄의 현장보다는 범죄 혹은 오해의 현상을 더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다.

독자는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떻게 오해를 통해서 비극으로 치닫는가를 보여준다. 어쩌면 작가는 범죄보다 오해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칼리의 폭력적인 아버지 그리프를 범인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직접적인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범인이어도 충분할 아주 많고, 치명적인 잘못들을 자기 가족들에게 저질러 왔다.

그런 그의 잘못으로 인해 칼리의 아버지는 죽어도 싼 인물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죽어도 싼 인물일지라도 죽어야 할 범죄는 저지르지 않은 칼리의 아버지의 죽음도 또한 비극이며, 불행한 결과이다. 그의 죽음으로 긴 세월 침묵에 스스로를 가뒀던 칼리가 말을 하게 되고, 가족들 또한 오랜 불안에서 해방되었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죽음은 비극적 결말이다. 모두 그리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그리프 혼자만 희생된 이 비틀어진 결과는 표면적인 해피 엔딩에도 불구하고 비극이 숨겨져 있다.

그리프의 아내 안토니오, 아들 벤 그리고 딸 칼리는 모두 그리프의 폭력적인 태도에 피해를 받아온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받아온 상처와 불신으로 인해서 직접적인 가해 없이 그리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만일 사건의 해결 부분에서 칼리의 엄마 안토니오가 정신과 의사에게 비로소 칼리를 의뢰하듯이 진작부터 이들 가족이 심리 상담을 받아서 조금씩이라도 상처를 이겨냈다면 처음부터 칼리의 실종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볼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이 가족의 비극은 이런저런 생각과 반성을 자극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무엇이든 다 이해하고, 용서할 것만 같지만 현대는 그런 전통적 가치에서 자주 이탈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또한 가족이라는 절대적 울타리 내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일들에 대한 위험성도 경고하고 있다. 이 소설은 가족이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불행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가장의 죽음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더 복잡한 문제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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