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르네 지라르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욕망의 삼각형' 이나 '희생양' 개념에 대해 알고 있다.그 개념들은 지라르를 '이방인'취급하며 배제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무시할 수 없으리 만큼 인용되고 있다.신문이나 잡지등에서 가끔 만나는 에세이등에서도 모방'과 '희생양'개념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인용된다.내가 르네 지라르를 알게 된 것은 라캉 전문가로 알려진 권택영의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이라는 책을 통해서다.군대를 제대하고 연애문제로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였다. 90년대를 포효하던 문화연구의 관심은 그동안 거대담론에 소외 받았던 '몸'과 '욕망'의 문제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그런 트랜드의 한 복판에 들어갈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관심을 갖고 있다가 지라르와 라캉을 코끼리 더듬듯이 만났다.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간간이 다른 글을 읽다가 지라르의 이름을 볼 때면 그의 책들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욕망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늘상 순위에서 밀려났다.

<문화의 기원>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때문이다.테러의 문제를 문화인류학적으로 해설하는 그 책을 읽다가 지라르의 개념들이 머리를 어지럽혔기때문이다.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직접적으로 지라르를 언급하지는 않는다.그렇지만 이글턴이 테러와 테러리스트를 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쉽게 지라르의 '짝패'나 '희생양'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물론 지라르 이전에도 '모방'과 '희생양'의 관점으로 인류문화를 설명한 학자들은 많다.그러나 지라르가 스스로도 말하 듯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형태로 이 문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도 그 자신 밖에 없다.

<문화의 기원>은 인터뷰 형식의 책이다.이 책을 통해 지라르는 자신이 평생동안 부여잡고 있는 '모방매커니즘'과 '희생양'이라는 개념에 대해 평이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는다.지라르의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모방'된다는 즉 '모방적 욕망'부터 시작해야된다.이 말을 딱잘라 쉽게 말하면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라는 것이다.소아기적 주체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것이 남이 원하는 것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물론 지라르 역시 모든 욕망이 매개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또한 일방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그래도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그걸 원해서'라고만 말할 수 있다면 '소아기'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다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방'욕망이 경쟁과 갈등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데에 있다.이 단계에서 서로의 욕망은 서로를 투사하는 '짝패'가 된다.지라르가 9.11과 관련되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미국의 폭력적 정권을 '짝패'로 상정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테리 이글턴 역시 이런 '짝패'가설을 이용한다.결국 갈등은 폭발하게 되는데 이 폭발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모방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제의적'살해를 통해 일차적으로 해소된다.지라르는 인류의 역사의 기원에 '초석적 살해'라는 것이 있었다고 말한다.결국 인류의 기원은 핏덩이 위에 서 있는 것이다.그러나 희생제의롤 통해 찾아진 안정은 임시적인 것이다.모방은은 항구적이기 때문이다.'모방매커니즘'에서 피해자인 '희생양'은 초기 단계에서는 '악'으로 묘사되지만 '제의'라는 과정을 거치고 또한 사회안정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다시 '성스러운 존재'로 자리잡는다.지라르는 신화와 인류학적 문헌등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이런 '희생양'메커니즘의 가장 중요한 비밀 중에 하나는 집단구성원들이 그들의 집단적 살해와 이런 매커니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지라르는 '무의식'적인 집단 정신 대신에 이를 '인지불능'이라고 말하고 있다.)이런 매커니즘은 공동체라는 집단의식을 만들고 결국 제도로서 '국가의 기원'과도 연결된다.지라르는 현재의 문명은 -다들 인정하지 않지만-'희생양'제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제의적 살해'라는 형식이 문화의 형성과 전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리고'제의'가 제도화 된 형태를 띠면 그것이  '종교'가 된다.지라르는 '종교'를 '문화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지라르의 이론에는 '신화와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데 이 둘은 '희생양'을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신화에는 무수한 희생양이 등장한다.하지만 신화의 입장은 가해자 편에 선다는 것이 지라라의 주장이다.즉 신화속 희생양들은 흠결이 있고 그에 대한 운명의 처벌은 마땅한 것이었다.반면 구약에서는 우리 문명에 희생양이 존재하고 희생양이 무죄임을 언급하기 시작한다.구체적으로 지라라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예로 든다.그리고 본격적으로 희생양이 무죄임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은신약의 복음서에 와서이다.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모방욕망과 만장일치적 집단 폭력의 희생양이다. 그를 통해 인류는 희생양에 대한 기나긴 '인지불능'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현재의 문명도 그 영향하에 있다.지라르에 의하면 희생양에 대한 인류의 집단적 인지불능과 매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거기에는 인류를 움직여온 거대한 집단적 폭력과 희생양을 무죄로 인정하는 복음서의 시각이 한 공간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지라르는 그의 희생양메커니즘을 성경 시편을 이용하여 함축하고 있다.

"사람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 시편 118:22 ) " 이는 복음서가 증명하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중요한 아포리즘으로 지라르에 의해 선택된다.중요한 것이 '버린다'라는 개념과 '머릿돌'이라는 메타포이다.

<문화의 기원>이 르네 지라르의 입문서로서 가장 좋을 것이라는 평가는 옳은 듯 보인다.내가 지라르를 더 읽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누구든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 책이 좋을 듯하다.먼저 지라르 자신이 그의 가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때문이다.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갖는 평가와 위치들이다.(사실 지라르의 책만 읽는다면 이런 부문에 대해 알기 힘들다.) 이 책은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되었다.질문자들은 지라르의 이론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통해서 지라르의 반비판을 끌어낸다.지라라는 사실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위치에 서있다.즉 학계에서는 반과학적이고 환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또한 기독교를 상정해 놓고 결과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비판도 받는다.또한 기독교입장에서는 신학적인 것을 과학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치부하기도 한다.지라라는 자신의 연구가 처음부터 신학과 과학을 연결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그러면서 각 비판에 대해 또렷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지라르는 현대문명과 관련해서 분명히 '희생양'제의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기독교의 영향으로 희생양제의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최초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평가를 내린다.반면 더이상 희생양제의라는 보호책이 없는 상황에서 폭력의 둑이 무너질 경우 무방비일 수 밖에 없는 묵시록적 세상도 우려한다.질문자들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지만 지라르의 대답은 그닥 신통치 않은 양시론적 입장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지라르가 자신의 가설을 조금더 사회적으로 확장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그는 '희생양'을 언급했던 많은 연구자들이 조금 더 깊이 '초석적 살해'와 '만장일치적 폭력'그리고 '희생양'의 효과에 대해 인정하고 밀고 나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지적한다.그런 차원에서 지라르의 '희생양'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원론적이지만 '착취'라는 개념은 결국 그 대상을 상정할 수 밖에 없다.죽임을 당하는 희생양은 아니지만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같은 말을 쓸 수 있다.(지라르의 희생양은 은유적 개념보다는 사실적 개념이다.)또한 '착취'에 대한 집단적 인지불능도 작용해야 한다.그람시의 헤게모니가 그런 차원의 해석일 것이다.야만적 자본주의 광풍 하에서 현재 사회구조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확대한다면 결국 우리 세상에는 여전히 여전히 수많은 '희생양'들이 존재한다.다만 그들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칼로 베는 직접적 행위만 있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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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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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스러운 테러>에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서구 문명사에 스며 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영어판 제목은 "성스러운 테러, 테러리즘의 의미"이다.'테러리즘의 계보학'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테리 이글턴의 서문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서 쓴 제목으로 보인다.그러나 서문에서 자신의 에세이에 떨어질 비판을 의식해서 이런 말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얼토당토하지 않는 제목은 아니다.

 이 책은 테러리즘에 대한 숱한 정치적 연구들의 목록에 한 항목을 추가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그보다는 테러라는 개념을 좀더 고유한 맥락,즉 넓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글턴은 자신과 함께 서 있는 좌파진영에게 사탄, 디오니소스,희생양 등이 담고 있는 정치학이  오늘날의 정통 마르크스 담론보다 더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한다.

책을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이다.이 뱀은 각 장의 부제를 감싸고 있다.'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거대한 뱀'은 그리스 신화에서 '우로보로스'라고 한다.영원한 시간의 상징이며 생과 사의 끊없는 순환을 뜻 한다.마치 테리 이글턴의 작업이 신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징표처럼 읽힌다.또한 이 책의 주제인 '테러'라는 것이 문명과 끊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영원한 수레바퀴의 한 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폭력'과 '희생'의 순환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테리 이글턴이 '테러'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양가성'이다.테러나 국가폭력 그리고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은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서로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문제점은 동전의 한 쪽 면이 나머지 한 쪽을 배척하고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이런 우화를 떠올리면 되겠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만화였던 것 같다.머리 둘 달린 괴물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유용한 점이 많아서 좋았다.먹을 것도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또 적들로 부터 방어도 용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한 쪽이 나머지 한 쪽을 너무 귀찮아했다. 걸리적 거리는 것이다. 결국 잠든 사이에 한쪽 대가리가 나머지 한쪽 대가리를 물어 뜯어 죽였다. 그랬더니 자기도 곧 죽게 되었다.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가장 우화적으로 설명하면 이것이다.(이글턴 선생님께 죄송하긴 하지만)

인류문명의 핵심에는 근본적으로 그것에 적대적인 힘들이 내재한다. 힘겹게 쟁취해낸 문명의 내부에 '테러리즘'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에 기초하지 않은 문명은 없다.

테러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우선 그것의 양가성을 인정해야한다....문명은 자신이 테러에 기생하고 있다는 그 이유에서라도 더욱 더 자신의 타자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테러>에서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는 디오니소스이다. 이 매력적인 신은 포도주와 꿀의 신이지만 -디오니스소는 그래서 계절로는 가을을 상징한다-또한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획일성의 지지하는 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의 제전을 펼치고 있는 광경을 본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신전을 파괴하고 학살한다. 이글턴은 펜테우스를 한계를 벗어난 이성으로 보며 국가폭력의 한 전형으로 생각한다. 이 둘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서로를 존립케 하는 서로에 대한 '경건함'이다.이글턴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그다지 낯선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디오니소스에게 공간을 열어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완충역할을 한다. 이글턴을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도덕적 현실주의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이를 현재에 비유하면 '테러'라는 행위가 수용될 만한 사회적 공간이 없다는 비판으로 읽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중세에 나타나는 성스러운 테러로 들어간다. 그 핵심에는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신의 사랑이다. 하지만 신의 사랑은 신의 법을 통해 구현된다. 과거 유대인들은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파악한 것에 비해 크나큰 전환이다. 저자는 이 '법과 사랑'이라는 것도 대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파르마코스'예수이다. 그는 비인간성에 도전하는 또다른 비인간성, 즉 인간성을 초월한 인간성으로 더욱 더 인간적이 된 상징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이글턴은 약간 방향을 바꾸어 '탈근대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더한다. 즉 기존의 법과 제도에 대한 무화를 주장하는 세느강변 좌파들을 싸잡아 허무주의자로 지적한다. 그리고 그의 지도 위에서는 이런 허무주의는 절대주의와도 쉽게 연결된다.(이글턴의 뒤에서 근대문명의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는 헤겔식의 '절대자유'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비판을 가한다.) 이글턴은 법과 제도가 문명에서 가진 역사적 긍정성을 지지하는 토대 위에 서 있다. 특히 신체를 포함하는 물질성에 대한 그의 긍정은 그가 마르크스 문학이론가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인식시킨다.  이글턴에 의하면 법의 의미를 만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예수의 행위는 고대 영웅 신화의 패러다임과 함께 숭고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는 테러리스트들이 스스로 세속적으로 갖는 -결코 축복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방식의-숭고의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신이 사라진 시대 '예술'이 갖는 '숭고'의 의미로 미학적 견지로 문제를 옮아간다.

 근본적으로 '숭고'의 개념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와 '무'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한다. 아퀴나스같은 경우는 '신'을 '무'에 개념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무'는 '영원성'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또는 추론할 수 있는 영원성은 '죽음'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이글턴의 책 내내 타나토노스의 욕망과 관련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이 영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신화가 한 예를 보여준다.

운명적 패배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그는 맞서 싸우는 그 두려운 힘과 다르지 않은 무한함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시한다.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개인을 초극한 힘만이 유한한 존재의 포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희생의 정치화'하는 과정을 설명한다.(지라르의 '희생양제의'도 결국은 정치적 죽음이다.그러므로 정치적이지 않은 희생은 없다)그는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를 인용한다.(클라리사는 강간의 피해자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대중들 앞에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위반당한 자신의 육체를 정치화 하고 사회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테러'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와 한 쌍이 '국가폭력' 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이 책에서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데니즈 존스턴이 인용된다

"죄 없는 국가란 불가능한 개념이다"

 대부분 사회는 결국 자신의 기원에 대해 숨기려는 속성이 있다.특히 정치 권력은 세월의 망각에 힘입어 그 토대를 만든 폭력을 위장하고 짐짓 점잖은 척한다.정치권력은 또한 추상적인 개념들을 강제하며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를 결함시켜 자신의 폭력적 결과를 정당화한다.이런 추상적 개념에는 자유,평등,국가,민족,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X 를 규명하기 우해 우리 인육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흘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

게오르크 뷔휘너 <당통의 죽음>중에서

이런 국가 폭력에는 중간계급의 역할도 한 몫을 한다.이런 폭력은 숨기고 싶은 기원에만 해당하지 않는다..중간계급은 도덕적 이상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경쟁,착취,침략,파괴적 개인주의라는 형식으로 폭력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대신 중간계급은 자신의 파괴적 성질을 괴물적 타자에게 뒤집어 씌운다.이글턴은 이것이 결국 '악'을 '악'으로 배제해 버림으로써 '악'을 타자화시키는 딜레마라고 말한다.

결론에서 다시 이글턴은 최초의 논의를 제확인한다.그는 테러를 결코 옹호하지 않으며 또한 테러리스트들을 그들이 칭송하듯 순교자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대개의 테러리스트들이 수시로 달라지는 정치적 사안을 위해 싸우며 자신을 빌려주는 청부 테러업자라고 말한다.그러나 문제의 직접적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는 서구문명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이글턴은 자신의 에세이 중간 중간에 존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현재의 문명-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미국-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한다.그는 공정함과 정의,그리고 현 체제에 잘 저항할 수 있는 잘 조직된 정치적 기구를 언급한다.또한 윤리적으로는 비인간성을 끌어안고 넘어서는 인간성의 구현을 말한다.물론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의 문제는 테리 이글턴의 몫이 아니다.이 책 <성스러운 테러>는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고 또한 테러에 대한 엄정한 역사서 역시 아니다.테러와 폭력에 대한 신화적이고 문학적인 분석이고 그런 의미에서 음미해 볼 만한 에세이다.

....책의 번역은 상당히 매끄러운 편이다.번역이라는 분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고 또한 이글턴의 책이 번역대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읽는데 문법적인 막힘을 별로 없다.물론 간간히 오탈자가 있기는 하다.역자는 이 책이 많이 팔려서 2쇄, 3쇄 찍으면서 다시 손볼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번역에 불만이 없었기때문에 역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마음에서 나 역시 이 책이 많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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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시공 로고스 총서 5 시공 로고스 총서 5
J. G. 메르키오르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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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리뷰의 제목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수많은 푸코 연구자와 푸코매니아들이 발끈하셔서 제게 달려든다면 참으로 곤란하기 때문입니다.천규석 선생이 '유목주의'는 야만이라고 했다고 이정우 철학박사께서 '무식한 노인네.당신이 들뢰즈를 알아?' 라고 했던 전공자의 예리함을 받아낼 자신은 없습니다.저 말은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자 메르키오르가 한 말입니다.(외부필자가 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드팀일보-)

푸코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사람입니다.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제가 문제적 인간들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물론 이런 호기심과 친교는 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실제 문제적 인간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베토벤을 무척 좋아하지만 제가 베토벤 시대에 살았다면 그 괴팍한 영감과 친구가 되었을까요? 아닐겁니다. 아마 파파 하이든처럼 무난한 사람과 더 가까왔을 듯 합니다.그래도 문제적 인간을 매도하는 편에 설 만큼 인류애가 각박하지는 않기때문에 문제적 인간들에 대한 호기심도 마르지가 않습니다.

푸코라는 사람은 스타일부터 외계인 같습니다.잘생긴 외모지만 헤어스타일 덕분에 문어별에서 온 외계특사처럼 보입니다.저희 집 아기도 푸코의 사진을 보면 '어 어 어'(아빠의 매끄러운 번역에 의하면 '어..어느 별에서 왔어요? 정도 됩니다.) 라고 관심을 보입니다.푸코의 학문적 영역도 기발합니다.첫번째 나온 책이 <광기의 역사>. 즉 미친년놈들이 학문의 대상이 된거지요.조금 뒤에는 또 의학에 무슨 조예가 있으서셔 <임상의학의 탄생>을 쓰십니다.후기로 오면 프랑스에서 크라샹만큼 많이 팔렸다는 <감시와 처벌>이 나오지요.이건 큰집 이야기입니다.이랬던 사람이 죽기 얼마전부터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섹스에 대해 뒤적입니다.철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얼추 역사학자이기도 했습니다.본인은 '현재의 역사가'라고 스스로를 불렀습니다. 

메르키오르의 <푸코>는 이 문제적 인간이 벌인 학문적 결과물들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는 책입니다.책은 머리 속으로 따가가기 편리하게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었습니다.즉 푸코의 첫번째 책 <광기의 역사>부터 출간 순서에 따라 푸코의 철학과 그에 대한 비판을 이어갑니다.먼저 푸코가 남긴 각각의 텍스트에서 푸코가 집중하고 있는 주제,그리고 그 의미들을 설명합니다.이어서 비판이 이어집니다.이 비판에는 저자가 구성한 것도 있고 다른 푸코 연구자들의 비판을 인용한 것들도 있습니다.마지막 장에서는 총체적으로 푸코의 철학이 가진 기여와 딜레마를 정리합니다.하버마스의 비판을 인용하여 푸코철학이 가진 철학의 죽음을 도출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통해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자''강단허무주의자'로 그의 철학에 레테르를 붙입니다.  

메르키오르는 푸코가 남긴 굵직한 책들은 거의 다루고 있습니다. (인터뷰나 강의록 등은 부분적으로 인용됩니다) 분량으로 보면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말과 사물>,<감시와 처벌>입니다.심세광 교수의 강의를 잠깐 도강해봤는데 <말과 사물>은 대우학술총서 이후에 국내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푸코는 이 책을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을 읽다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분류법에 대한 이국적 적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지요.<말과 사물>은 좀 어려운 책인 듯 합니다.별로 읽고 싶지는 않더군요.(푸코의 책이 어렵지 않은게 어디있겠습니까만은..) <말과 사물>의 주제는 경험을 정돈하는데 부과되는 근본적인 코드에 대한 것입니다.그 유명한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이것은 어떤 사유의 기초가 되면서 특정 시대의 지식의 모든 흐름밑에 있는 하부구조를 말합니다.<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역사적으로 네 개의 에피스테메를 설정합니다.17세기 중반까지 전고전시대,18세기말까지 고전시대,그리고 근대,1950년 대 이후 현대 입니다.푸코는 이 시기에 에피스테메가 어떻게 변이하는지 그리고 담론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지요.먼저 르네상스 시대에는 말과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 유사성의 시대라고 합니다.이후 고전시대에 들어오면 유추의 시대가 가고 분석의 시대가 들어서게 됩니다.표상이라는 개념이 출현하지요.푸코는 쉬운 예로 <돈키호테>를 들면서 소설 속에서 정체성과 차별에 바탕을 둔 이성이 기호와 유사성을 핵심으로 한 르네상스 지식을 매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에피스테메의 변이는 중심되는 담론의 변화도 이끌어냅니다.예를 들어 고전시대 부의 분석이 에피스테메의 변이로 인해 정치경제학으로 학문의 바톤을 넘기게 됩니다.(그러나 이후 푸코는 '에피스테메'개념을 뒤로하고 '담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어쨋거나 여차 저차해서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메르키오르는 <말과 사물>에 대한 비판에서 먼저 에피스테메의 불연속성과 단일체적 견해 대해 비판합니다.푸코는 에피스테메에 절대적 단절을 주장했고 특정 시대에 모든 지식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에피스테메는 단 한가지로 보았기때문입니다.총체성 부문에서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가 부정합니다만 저자는 이걸 단순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어쨋거나 메르키오르는 과학사의 연속성과 세계의 수학화를 예로 들면서 푸코의 단절론과 지엽적인 담론선택을 비판합니다.또한 메르키오르는 <말과 사물>이외의 책 <광기의 역사><임상의학의 탄생><감시와 처벌>등에서도 푸코의 자료선택과 해석의 임의성,왜곡에 대해 지적합니다.그는 이 책들에서 푸코가 천착했던 주제들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들을 토대로 푸코가 자료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합니다.푸코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저자는 역사학적으로 푸코의 역사적 객관성이 형편없다고 평가합니다.물론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전제를 두기는 합니다. "푸코 역사의 객관성은 전반적으로 보아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쪽에 무게를 싣습니다.

저자는 푸코가 계몽주의와 근대이성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에서 인식의 출발점을 잡고 있다고 봅니다.또한 구조주의 영향하에서(푸코 자신은 부인했지만) 주체 문제에 대해 등한시 했다는 것입니다.물론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권력/지식 망에 완벽하게 포위된 개인이 어떻게 자기 통제화를 통해 주체화 해나가느냐에 관심을 갖습니다.저자는 그동안 푸코가 작업해왔던 방식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그런데 푸코 입장에서 보면 권력에 포위되지 않는 개인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아가야했던 방향일 수 밖에 없어보입니다.)메르키오르는 엘리아스같은 문화사가들이 서구의 진보와 자기통제의 확대를 동일시하는 태도로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던 점을 이야기합니다.하지만 푸코의 경우 근대화 과정의 '문명'에 적극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기때문에 <성의 역사>에서 언급하는 역사적 이야기(그리스의 성이야기)와 주체를 지배도구로 삼는 권력이라는 주제와 일치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메르키오르의 비판은 주로 푸코의 초기,중기 사상-고고학,계보학-에 집중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푸코 스스로도 <성의 역사1>이후 약 8년간의 침잠에 들어갑니다.그리고 이후 <성의 역사2>에서 부터 주체의 재문제화를 꺼내들기 시작합니다.이를 푸코의 자기부정이라고 보는 견해는 푸코에 대한 또하나의 목적론적 비판이 아닐까합니다.실제로 푸코 후기 사상이며 푸코의 이론적 탈출구라고 할 수 있는 '주체화'에 대한 부문은 이 책에서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리고 푸코가 주체화를 이야기했다고 그것이 과거 자신의 학문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오히려 자기비판적 문제제기와 돌파라고 보여집니다.푸코가 주체화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권력문제와의 결별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푸코는 주체가 통제된 복속상태를 말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자각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주체의 모습도 상정합니다.이는 푸코를 구조주의의 한 흐름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이 부분을 외면한다면 푸코에 대한 왜곡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저자는 푸코에게서 바쿠닌류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를 읽어냅니다.그런데 이것 역시 푸코의 실천방식에 대한 극단적 해석은 아닐까 합니다.푸코는 권력의 격자망에 사로잡힌 개인은 '복속하기'에 대한 투쟁의 양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보는 듯 합니다.푸코는 권력을 억압으로만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착취라는 지배형식에 대한 투쟁만으로는 해방적 가치를 획득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책의 결론에 와서 메르키오르는 푸코의 사상에 대해 몇 몇 단어로 정리합니다.푸코는 뱅상 데콩브가 말한 (폴 리쾨르가 먼저한 건 지 누가 먼저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심의 3인방-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후예라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들보다 더 급진적인 후배로 기억될 듯합니다.왜냐하면 마르크스나 니체는 계몽주의에 대해 푸코처럼 쌍심지를 들고 반대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또한 권력 문제에 있어 비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을 보입니다.푸코는 권력을 억압만이 아니라 생산하는 권력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저자는 푸코가 니체의 우산 아래 있지만 대안없는 문화적 비관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지요. "푸코의 사상은 단정적인 니테의 에토스와 도덕에 대한 근대적인 망설임의 중간지점에 세워진 집이다.저자는 68혁명과 푸코와의 관계를 슬쩍 언급하면서 푸코를 가장 의심스러운 '반문화' 게이머로 언급합니다. " 그 게임은 근대사의 의미를 다시 말들어 내는 것이었다.그렇게 하여 근대적 이성, 자유주의적 문화의 주된 원천이며, 또 패러다임인 계몽사상에 반역하는 아주 잘못된 편견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인용하여 푸코에서 연상되는 '보편적 이성의 포기'가 '철학의 종말'을 유도할 뿐이라고 말합니다.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푸코가 활약하던 당시 프랑스 철학 시장 내에서 푸코의 위치를 말하면서 푸코의 사상이 가진 '무정부주의적 '시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결론적으로 저자는 푸코를 부정주의와 비합리주의를 대표하는 비유토피아적 신무정부주의자로 정리합니다.

푸코는 이래저래 문제적 인간이 맞는 것 같습니다.<푸코>에서 메르키오르는 흥미진진하게 책을 이끌어갑니다.이 책이 입문서로 옳은지 아니면 비판서로서 옳은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균형감을 가지고 푸코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좋은 나침반이 될 듯 합니다.이 책에서 나온 푸코 비판으로 인해 푸코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입문서 수준의 분량에서 푸코 철학의 비판과 반비판을 전부 거론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푸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고 또 푸코를 받아들인 다는 것이 전면적 수용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지난 번에 보았던 <치즈와 구더기>의 주인공 메노키오가 생각이 나는군요.그가 읽었던 책이 그의 반카톨릭적 종교관을 그대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16세기 방앗간 주인이 그랫던 것 처럼 푸코를 읽는 사람들 역시 때로는 과감한 단순화,때로는 이종결합,때로는 혼성에 의해서 '자신의 푸코'를 엮어내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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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10-03 12:10   좋아요 0 | URL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가 결국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푸코를 욕할 수만도 없겠지요. 그넘의 역사 연구와 민족 연구가 결국 살상의 논리로 무장하게 된 걸 보면... 푸코는 살상쟁이는 아니니까요.
저도 푸코에 관심은 있으면서도... 가까이 하기엔 쪼매 먼 사람이란 생각을 늘 합니다.
멋진 리뷰를 잘 읽고 갑니다.
겨울 방학쯤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드팀전 2007-10-03 12:2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푸코에게 낚시밥만 던지고 있는 입장이지요.조금 더 낚시밥은 던져보고 그냥 돌아갈지 말지 생각해 볼 작정입니다.^^

로쟈 2007-10-03 12:32   좋아요 0 | URL
푸코 연구자들이 이 책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거 같습니다.^^

기인 2007-10-03 21:52   좋아요 0 | URL
오 드팀일보 잘 봤습니다 :) 저도 요즘 '감시와 처벌' 개역판을 주문했는데, 방에 있던 판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많이 '개역'되었으면 좋을텐데.. 신판(2003판)에 대해서는 마지막부를 제외하고는 좋다고 하더라고요. ㅎㅎ

드팀전 2007-10-03 21:57   좋아요 1 | URL
제가 본 건 무슨 판인가요? 5-6년전에 봤는데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나남출판사...
그나저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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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리 실버의 <노동의 힘>은 '세계체제론'이라는 뿌리에서 출발한다.하지만 '세계체제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노동의 힘>을 읽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실버는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서  '헤게모니의 순환론'을 기본틀로 삼는다..아리기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가 체계적인 축적을 통해 마지막으로 금융적 축적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고 말한다.그리고 잠시 동안 화려한 벨에포크라는 정점을 지난다.이후 헤게모니는 다른 국가로 넘어간다.그는 16세기부터 네번에 걸쳐 헤게모니의 이전이 있었다는 점을 살핀다.북부 이탈리아도시 국가,네덜란드,영국,그리고 20세기 미국의 시대가 그것이다.아리기는 헤게모니 국가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독특한 축적구조를 갖는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순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월러스틴이 세계를 기축적 분업에 의해 구분한 것에 비해 아리기는 하나의 세계적인 축적구조의 순환이라는 견지에서 역사적 자본주의를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동학을 읽어내고 예견한 공에도 불구하고 세계체제론의 가장 큰 약점은 '노동'의 문제였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체제론은 '자본'의 입장에서(자본가의 입장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성과 역사적 확장,그리고 변천을 살핀 것이다.체제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저항담론과 자본에 대한 상대역으로서 대중운동의 동학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이러한 한계에 대해 '세계체제론'의 입장에서 '노동의 동학'에 대한 연구 결과가 실버의 이 책이다.

저자는 우선 '노동 위기론'에 대한 진단부터 시작한다.현재 노동문제를 둘러싼 담론에는 두가지 경향이 존재한다.현재의 자본주의 변화가 전례 없는 것으로 전지구적 경제과정을 변화시켜 노동 운동의 기반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노동운동에 연연하는 것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또 다른 쪽에서는 자본주의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모순과 갈등이 반복될 것이고 말한다.실버는 역사적으로 자본의 동학에 따라 노동의 동학도 함께 간다는 입장에 서 있다.실버의 주장을 한 가지 테제로 정리하면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는 것이다.

실버는 세계화 시대에 전향적으로 등장한 '노동위기'에 대해 '담론'의 위기가 오히려 이를 주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물론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움직임이 꼭 담론 영역에서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금융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움직임은 노동운동 자체에도 실질적으로 타격을 주었다.하지만 문제는 '대안은 없다'라고 손을 놓아버리는 담론 환경 형성에 있다.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노동자들이 지닌 힘의 중요한 원천이었다.세계화는 이처럼 노동자들에게 힘이 있다는 한 세기나 된 신념에 구멍을 냈으며 대중의 정치적 사기를 극적으로 꺽고 변화를 위해 싸우려는 의미마저 꺽는 담론환경을 만들어냈다."(프란시스 피븐& 리처드 클라워드)

실버는 에릭 올린 라이트를 인용하여 노동의 힘을 시장교섭력작업장 교섭력으로 구분한다.시장교섭력이라는 것은 노동 시장의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생기는 힘이다.요즘 같이 실업과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시대라면 시장교섭력이 별로 없다.반면 작업장 교섭력은 노동자집단이 산업부문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때문에 생기는 힘이다.몇 명 안되는 화물연대 파업이 저녁뉴스 앞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작업작 교섭력이라는 것이다.화물유통이라는 전략적 위치가 주는 힘이다.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기 발 밑에서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힘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산업의 발전이 노동자의 연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실버는 이를 비유하여 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시장교섭력을 약화시킬 수 있지만 작업장 교섭력과 연합적 힘을 모두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노동의 힘>은 노동소요를 중심으로 노동동학을 살핀다.이 책은 전세계노동 소요의 패턴을 그리기 위해 세계 헤게모니 국가의 두 신문 ,영국의<타임스>와 미국의<뉴욕타임스>의 신문기사를 통계자료로 활용한다.즉 거시적인 역사 변동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이 책에서 세계 노동의 장기적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두가지 노동소요를 상정한다.하나는 '폴라니식 노동소요'이고 다른 하나는 '맑스식 노동소요'이다.'폴라니식 노동소요'란 전지구적인 자기조절 시장의 확산에 반격하는 저항이다.기존의 사회협약이 축소되면서 전지구적인 경제적 전환탓에 해체되어 가는 노동계급의 저항이다.맑스식 노동소요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과거 노동계급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노동계급을 형성하게 되고 이 계급이 투쟁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노동의 힘>은 19세기 섬유산업과 20세기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자본-노동의 동학을 파헤친다.자동차 산업은 자본주의의 대변화였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핵심이었다.포드주의 생산양식은 분업화를 특징으로 한다.이것은 비숙련노동자를 양산하고 노동계급을 분절화한다.그렇지만 동시에 한 공정이 멈추어 서버리면 나머지 공정도 작동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이 지점에서 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이 커지게 된다.자동차 산업은 최초 미국에서 시작되지만 이후 유럽으로 동아시아로 이전된다.이때마다 자본-노동의 갈등은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해왔다.이 유사한 패턴을 자료를 통해 입증한 실버는 데이비드 하비의 '재정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쫓고 쫓기는 술레잡기를 설명한다.

먼저 자본은 '공간재정립'을 통해 노동 소요를 회피하는 방식을 취한다.즉 다른 지역으로 생산을 재배치하는 것이다.미국 자동차 산업이 팽창하고 이에 따라 노동 소요 역시 커지게 되자 미국 자동차 업계는 처음에는 미국 남부로 이전한다.이어서 유럽 그리고 한국 등지로 자본을 이동시킨다.결과적으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공간재정립'은 별 효과가 없이 갈등을 이전하고 있을 뿐이다.'기술재정립'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조직혁신 통해 노동-자본관계의 전환을 도모한다.흔히들 JIT 모델로 알려진 린 생산방식이 대표적이다.유연작업,하청체계,효율적 부품조달방식,수직적 생산통합,탄탄한 품질관리 시스템...린생산방식은 핵심노동력에게는 고용안정성을 부여하고 특권없는 노동자를 완충장치로 쓰는 이중적 린생산 방식을 기초에 두고 있다.하지만 실제 미국이나 유럽의 다국적 기업의 경우 핵심노동력에게도 고용안정성을 주지 않는 인색한 린방식을 채택한다.하지만 이 린 방식이라는 것 역시 부품공장과 수송부문의 파업에 대해서 포드주의 방식 만큼이나 취약하다.또한 일본의 경우 다층적 하청체계에 의해 생산의 대부분을 동남아시아로 옮겨갔다.문제는 노동시장의 이중성이 새로운 공간적 형태를 띠는 경우,국적,인종,종족성 같은 이유들이 노동소요에 동원되어 문제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즉 린생산방식은 '완충장치'들의 안정성이 필수인데 이것이 흔들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제품재정립'이라는 방식으로 자본은 이윤압박에 대응한다.혁신적이고 더욱 이윤이 높은 새로운 생산라인과 산업으로 자본을 이동하는 것이다.이렇게 되기 위해선 혁신기업이 거둬들인 독점적 초과 이윤과 안정적인 노동-자본의 타협이 필요하다.그렇지만 제품 주기의 혁신단계에서는 독점적 이윤이 가능할뿐 이후 성숙단계와 표준화단계에 뛰어든 국가의 경우 사회협약을 감당할 이윤확보가 불가능하다.예를 들어 미국의 포드주의적 시스템은 독점이윤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에게 대량소비의 신화를 심어주었다.그리고 실제 임금상승을 통해 자본-노동간 담합을 이루어내었다.일명 '헤게모니적 공장체제'가 만들어진것이다.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시점에 뛰어든 반주변국가에게는 노동자들에게 던져줄 떡고물이 없다.이는 남북 문제와도 공간적으로 연결되면서 전지구적 노동소요의 항구성을 지속시킨다.마지막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말에 공통되게 발견되는 '금융재정립'이다.자유방임주의 환경속에서 사회적으로 보호된 생계원천을 파괴하는 세계적 자본축적의 재구조화가 발생한다.(아리기의 축적의 마지막 단계로서 금융축적과 유사하다.)이에따라서 금융과 투기를 향한 투자의 주요변동이 생기게 된다.산업에서 발을 뺀 자본은 금융으로 몰려든다.기존 생산양식은 혼란을 겪게 된다.이 시기에는 반노동공세와 노동소요의 쇠퇴가 진행된다.그렇지만 19세기의 경우 노동소요의 쇠퇴가 짧았고 20세기 초 대규모 폴라니식 그리고 맑스식 노동소요물결이 진행된다.실버는 조심스럽게 현재의 위기가 '대안없는'위기가 아니라고 말하며 희망을 놓치 않는다.

우선 실버는 새로운 노동소요의 거점으로 중국을 지적한다.중국은 이미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잡고 있다.(자본이 있는 곳에 노동소요가 따라간다.) 중국이 가진 경제적 잠재력만큼이나 중국 내부의 모순과 결합된 노동자 소요는 앞으로 전세계적 노동운동의 거점이 어디로 이동될 지 예상할 수 있게 한다.또한 산업적으로도 노동 소요의 거점 몇 개를 예로 들고 있다.반도체산업,생산자서비스산업,교육산업,개인서비스업 등이다.사실 여기에 열거된 산업들은 생산이 수직적으로 분절화되어 있고 조직력도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다른 말로 하면 구조적인 교섭력이 없는 직종이라고도 말한다.그러나 실버는 19세기 섬유산업 노동자들의 환경을 예로 들면서 강력한 연대의 거점이 형성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실버의 <노동의 힘>은 세계체제론의 약점을 보완한 측면도 있지만 또한 몇 가지 문제도 지적된다.백승욱은 <자본주의 역사강의>에서 실버가 '노동계급 동일성 신화'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물론 실버는 경계긋기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이 국가,민족,성,인종 등에 의해 분할되어 있음을 지적한다.하지만 전체적으로 노동자 소요를 중심으로 살펴보다 보니 노동자 계급을 동일 집단으로 설정한 경향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또한 노동의 문제를 분배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린 점도 지적된다.백승욱은 폴라니식 시계추 운동과 스미스식 자유주의 저항이라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듯 하다.실버는 '노동의 힘'의 핵심은 '연합의 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특히 지역사회와의 연대같은 것을 예로 든다.문제는 이 '연대'가 훨씬 복잡한 그물망을 가지고 있고 실버 본인이 이야기한 경계긋기에 의해 철저하게 나뉘어 있다는 점을 크게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런 노동자 계급의 분할과 복잡성을 회피하고 하고 할 수 있는 연대라는 것이 기껏해야 고진이 이야기하는 '소비자운동'정도 일 듯 보인다.자본이 빠져나가서 동시에 노동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반주변국' 내에서 노동위기문제에 대해서 실버는 아무것도 말할이 없다.물론 이것은 <노동의 힘>이 다루고 있는 부분은 아니다.처음부터 괄호치고 시작한 부분이긴 하다.전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중심국과 주변국 내에서 노동소요는 항상 제로섬게임이 되버린다.일국 내에서 노동 소요는 상당히 구체성을 띠는 사건임에도 결국 이러한 구체성이 총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좌변에서 우변으로 옮기는 정도로만 파악된다는 것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푸하...

.....몇 주전 모 신문사에서 양대 노총 위원장 대담을 기획했다.미묘한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 위기론'에는 둘 다 공감하고 있었다.'위기'를 양산하는 원인에 대해서도 조금 더 목소리를 싣는 방향이 다르긴했다.지금의 절망적 상황이 실버가 말하는 것 처럼 '지나가는' 위기였으면 좋겠다만....희망을 잃지는 않겠지만 의지만으로 낙관하자고 말하는 건 너무 나이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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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9-27 16:08   좋아요 0 | URL
알겠지만..포드주의 노사타협이란게 오래도록 작용해온 것이 그런 방식 아니었던가...저자 역시 직접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야기를 하진 않지만 일본의 경우를 들면서 하청체계가 노동소요의 거점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일본의 경우는 2차부품업의 임금이 1차부품업 수준까지 상승했다고 하더군.일본은 해외로 다층적 하청체계를 만들지만 우리는 일국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기때문에 내적 모순이 존재하지.그래서 비정규직 문제가 앞으로 태풍의 눈이 아니겠는가 싶고 또 투쟁의 전위가 될 듯 싶어.조직화의 문제와 기존 노동운동의 벽도 장애가 될 듯 하지만.

내 요즘 고민은 이 '노동귀족'(모든 정규직이 그런건 아니겠지만..)들을 '노동자'라고 해야 하나는 문제야.다 직장인이고 소비자고...아무도 노동자는 없어보여.우스개 소리지만 네그리도 하도 답답하니까 '다중'이라는 주체를 만들어낸거 아닌가 싶기도 해..'연대'와 '소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대단한 일인가 새삼 느낀다.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서점을 바다에 비유해보자.

예전에 나는 바다에 숨어있는 책들을 훌훌 넘겨보며 날것들을 잡아왔다.그 땐 배를 타고 나가 막 잡은 생선을 회 떠서먹는 즐거움이 있었다.물론 오늘은 어떤 고기를 잡아야겠다라는 목적은 가지고 서점에 간다.하지만 실제 낚시꾼의 어망에 애초에 목표했던 물고기만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다.서점을 빠져 나올 때는 의외의 맛난 고기들도 덤으로 얻어가곤 했다.요즘은 인터넷 서점으로 책을 받다보니 편하지만 바다 나갈 일이 없다.그래서 서점 진열대에서 책장을 넘기는 손맛도 잃어버렸다.규격화된 포장에 담겨진 책들을 받는다.무를 왕창 깔고 가지런히 포장 배달해온 횟감같다.포장을 뜯고 나서야 비로소 책에 대한 손맛을 느낀다.아날로그에 대한 추억이라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서점이라는 놀이터를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가끔 서점을 갈 때면 약속시간을 잊어버리곤 한다.버틸 수 있는 선이 가까와지면 초초해지곤 한다.아날로그에 대한 추억이라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내가 지금도 서점이라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면,나는 <로빈슨크루소의 사치>라는 잡어를 그냥 놓아주고 왔을 것이다.태풍 때 횟집에서 떠내려간 양식 광어같은 책이다.(이게 좀 설명하기가 그러한데...부산에서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럭,광어를 가장 맛없는 회,또는 회 먹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마..무난하게 먹는 회' 라고 말한다.바닷가에 사시는 분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안다.)

<로빈슨크로소의 사치>는 소비사회에 대한 정경을 그다지 새롭지 않게 설명한다.이유는 간단하다.저자는 과거 학문적 성과를 설명하는데 책 전체를 '소비'하고 있다.저자가 대중적인 시각에서 풀이하고 있는 저작들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베블렌의 <유한계급론>,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부르디외의 <미술에 대한 사랑>등이다.그 외에도 리파트의 '팝아트'개념이나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개념들이 중간 중간에 소비사회의 정경을 풀이하기 위해 이용된다.

먼저 저자는 유명한 이 책들의 주요 개념들을 쉽게 풀이한다.이런 접근 자체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책 제목에 '00론' 만 들어가면 이등병이 사단장 만난 것 처럼 떨거나,물 싫어하는 고양이처럼 피하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접근이 필요하다.인문학이 상아탑에서 앉아서 '인문학 다죽네' 울기만 하는 것 보다도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그나마 '앉아서 울다 죽는 것'보다는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뒤에 가려 있는 단점은 몇 몇 장점으로 상충하기 힘든 치명적인 것들이다.가장 큰 문제는 저자가 이론들을 시의적절하게 재구성한다고 하면서 위의 저자들이 그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바를 과감하고 용감하게 삭제 해버린 것이다.(어떤 신문사의 편집방식과 상당히 유사한데...비판 자체를 유치한 정치스펙트럼 도상에 올려 놓고 제단하려는 움직임들이 많아서 그 이야긴 더 이상하지 않겠다.) 우선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책들과 거기서 저자의 취사선택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들 대해 이야기하자.그리고 다음으로 저자 자신의 과도한 피해의식과 정치적 입장 그리고 그가 인용하고 있는 좌파이론들(?)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기모순에 빠진 부분을 짚어보자.

저자는 증여를 소비사회의 원형으로 기억한다.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 인용되는 부분이다.포틀라치가 위세의 증표라고 말한다.그리고 이런 포틀라치적인 '낭비'가 '분배'의 형태로 이용된다고 말한다.여기까지는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저자는 이 논의를 현대로 끌어온다.빌 게이츠의 대 저택이나 도널드 트럼프의 초호화 결혼식 같은 것들이 현대적 의미의 포틀라치 축제라는 것이다.그들은 포틀라치의 '대인'들 처럼 현대의 '영웅'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이 저자의 '증여'에 대한 논리이다. 그렇게 고대로 갈 필요가 있을까? 가까이가보자. 레이거니즘의 경제철학인 '트리클다운'을 말하는 거다. 이 공급중심의 경제학에 사회생물학적 전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저자는 멀리간다. 그래서 서로 전혀다른 맥락의 원시부족과 빌게이츠의 소비방식을 연결시킨다. 아무리 대중서라지만 좀 그러하지 않는가. 보는 눈도 있는데.  '포틀라치'는 위세와 분배의 두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보면 자립적인 공동체 부족간에 생산력 격차를 해소하는 분배적인 요소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틀라치'가 위세의 증표로 이용되지 않았던 종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에스키모족이나 부시멘 족,세마이족들은 경쟁적 재분배를 통해 신분을 추구한다거나 흥청망청 낭비하는 행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혜적 경제관계에 있어서도 선물을 준 사람이 그것으로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고 그것이 위세 증표로 이용되는 것도 꺼렸다. 에스키모인들의 격언에는 이런게 있다고 한다."채찍이 개를 만들 듯,선물은 노예를 만든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포틀라치'적 방식이란 것도 사실은 경쟁적 축적 상태 이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마치 '포틀라치'를 현대 사회의 원형처럼 이야기하는데 그 원형을 이야기하자면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대는 '호혜성 경제원칙'이 유지되는 시기였다.

저자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중 이 구절을 여러 번 인용한다. "우리는 옛날의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모스가 말하고자 지향했던 바는 결국 가라타니 고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호혜성원리'가 살아 있는 '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지점을 '사적 축적'이 이루어진 단계로 이해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트리클다운'식의 분배를 통한 평등을 이야기한다.쉽게 이야기하면 부자들이 펑펑 써줘서 경제를 살려야된다는 것이다.'호혜성 원리' 가 부자들의 지갑에서 나온다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부자의 정체성에 충실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국의 부자들은 자기 아들에게만 '포틀라치'한다.한국 부자의 대명사이인 모 그룹 회장께서는 그 '포틀라치'를 법에 어긋나게 했다.또 어떤 부자께서는 자신의 위세를 모르고 아들에게 깝짝거린 술집 종원업을 직접 응징하셨다.주먹 '포틀라치'다. 포틀라치든 스캔들이든 사건이 터지면 부자들께서는 전부 병이 나서 휠체어 타시고 공항 가신다.영국 파이낸셜 타임즈가 꼬고 있는게 그거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소비사회 분석을 거의 보드리야르 이론에 기댄다.(소비를 기호학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차이화의 강제,구획되어진 개성,과소소비,가제트,르시클라주화된 외모,육체 등등) 그렇지만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유희성이 자기인식의 비극성'으로 발전하는 상황에 대해 우려했던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다.물론 결론 부문에서 '소통'을 이야기하긴 한다.그러나 '소통'을 단절하고 '소외'를 획책화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게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 궁금하다.보드리야르가 성장위주의 소비자본주의가 갖는 구조적 위험에 대해 언급한 것은 쏙 빠져 있다. 

"사회계급의 하층에 있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그 여하한의 형태로 재분배하는 것보다 생산을 가속도적으로 증대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그러나 이런 종류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틀렸다...경제성장의 중심자체체 확립되는 것은 왜곡의 과정이며 성장에 구조와 그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은 이 왜곡 비율이다."

저자의 친기업적 성향은 부자를 돈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생산현장에서 뛰는 사람으로 묘사한다.유한계급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무한계급이라는 것이다.그러면서 '과소소비'가 진정한 부자들의 차이를 위한 양식인 것처럼 말한다.물론 많은 CEO들이 돈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그런데 왜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는 지 알 수 가 없다.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을 보자.거기도 귀족들이 바빠서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할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거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대리소비'개념이다. 주인의 부와 명예를 천하에 알리고 다린 타자가 필요하다.베블렌은 하인과 귀족 부인이 그 대상이라고 말한다.요즘은 하인이 없으니 부인과 그의 자녀들이라고 이야기하자.20살 갓 넘은 애가 무슨 수로 BMW나 벤츠를 타고 다니겠는가...부의 세습과 계급의 세습에 대해서 저자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저자는 베블렌이 말하고 있는 부의 세습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고 넘어간다.그러면서 당당하게 베블렌의 '과시적 소비'개념은 폐지해도 된다고 말한다.지나가는 멍멍이도 웃을 일이다.CEO들이 타고 다니는 유명 외제차들은 '과소소비'의 증표인가  '과시 소비'의 증표인가? 정말 '과소소비'를 하고 싶으면 이건희 회장님이 '마티즈'를 타시던가 해야지 않을까? (저자가 논증하는 방식을 그대로 흉내내본다.)

조소를 금치 못하는 '청빈한 기업인과 지저분한 386정치인'비교.그대로 인용하자

"도덕과 정의를 독점한 듯한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이 고급 스포츠와 산해진미를 즐기고 있을지언정 정작 돈 많은 '유한계급'은 돈을 쓸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생산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를 이해한다. 그동안 무리 없이 잘 배우고 좋은 집안사람들과 일하며 편안해 하다가 돌던지고 천막 안에서 농성하던 애들이 높은 자리에서 까불거리니 밉상일 것이다.개인적으로 나는 386엘리트들과  정권의 무능에 대해서 입에 거품 물면서 비판한다.또한 시대적 한계성도 있겠지만 그들의 인식과 실천의 한계에 대해서도 비판을 한다.그런데 저런 류의 악질적인 투덜거림은 코웃음만 날 뿐이다.저 글을 보고 '좌파들 뜨금하겠군' 하는 사람들은 코웃음 두 번 나게 한다.먼저 정치하는 386엘리트들이 좌파도 아니고 유한계급들이 고급스포츠와 산해진미를 외면하지도 않는다.오히려 둘을 비교하는 것보다 둘이 어깨동무하는 것이라면 이해하겠다. 둘이 만나서 골프치고 요정다니고 그래서 정치자금 얻고 사업 특혜받고...

저자는 이제 '돈'이 상류계급을 지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한다.저자는 문화주의적 입장을 취하는데 이게 또 아주 문화주의를 욕먹이는 저급한 방식이다. 불평등은 그대로 존재하긴 하지만 금력이 지녔던 이점들 권력,향락,위세,특별 대우등을 더이상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저자는 지식과 문화,그리고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상류계급이라고 말한다.일정 정도 틀린 말은 아니다.예전에 비해 돈의 힘이 떨어졌다기 보다는 힘이 다원화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그럼에도 저렇게 쉽게 '금력'을 뒤로 밀어버리는 태도는 속류 문화주의적 태도일 수 밖에 없다.저자가 의도적으로 빼놓고 있는 보드리야르를 인용해보자.

"돈에서 교양으로 이행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특권을 절대적으로 유지한다.그런데 '경제적 특권율의 경향적 저하'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주장이야말로 신용할 수 없는 것이다.왜냐하면 돈은 위계 상의 특권으로,권력 및 문화의 특권으로 끊임없이 변신하기 때문이다."

베블렌은 이렇게 말한다. "...재력에 대한 비교는 그 변별력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다.이런 비교들은 특히 현재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지적 심미적 능력이나 그 숙련도의 등급을 판별하는 일반적인 기준을 생산하고 있다.그 결과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오로지 재력의 격차에서 비롯된 차이를 번번이 심미적 혹은 지적 능력의 차이로 해석하게 되었다."

저자는 문화적 소양의 향상을 위해 부르디외가 말한 <미술에 대한 사랑>을 인용한다.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이어서 영어 교육을 예로든다.돈 있는 사람만 영어 조기 교육을 보내기 때문에 현재의 불평등 구조를 깨려면 공교육이 이걸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을
좌파들이 '국적 없는 교육'이니 '미국 식민지'니 해서 막고 있어서 오히려 교육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모순에 빠져있다는 것이다.영어에 대한 공교육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공교육을 통한 영어 교육의 강화는 정말 좋은 말이다.그런데 저자는 기억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책
앞부분에서 신자유주의적 발상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주류 정치가나 학자들은 베블런-캘브레이스로 이어지는 반자유주의적 경제의 신봉자들이다.....양극화 해소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 들여 정부지출을 늘이겠다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생각은 그런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내실 있는 영어의 공교육화를 위해서 교육예산이 필요하다.예산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나? 세금을 더 걷을 수 밖에 없다.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예산을 교육예산으로 돌려야된다.복지예산을 돌리고 싶겠지.그러나 우리나라 복지예산은 유럽의 20년전 수준도 안됀다.그렇다. 국방예산을 교육예산으로 돌리면 된다.미국이 전투기 강매하는데 덜 사면된다.그런데 그건 또 한미관계에 위협을 주니까 하면 안되지 않는가?  또 프리드먼 비율을 생각하면서 기업활동을 위해서는 세금은 줄여줘야 할 거 아닌가? 결국 방법은 하나다.노회찬식으로 말하자면 기업과 자영업자의 탈루세금 끝까지 추적해서 100조정도 걷어내면 된다.(어떻게 하냐? 노회찬은 노무현보다 더 좌파아니냐?)그걸 왕창 영어 공교육에 쏟아부으면 되겠다.그러나 그 때가 되면 또 '정권의 탄압이네' 하지 않을까 싶다.언론기업 세무조사 했을때 언론탄압이라고 했던 것 처럼 말이다.

<로빈슨크루소의 사치>....제목은 참 잘 뽑았다.언제가 말했지만 나는 '범좌파'다.(야만의 사회에서 인간다운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을 '파'로 나누고 싶다면 나는 '무당파'든 '소림파'든 다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 전혀 뜨금해지지가 않는다. 실소가 나오는 주장과 정치적 목적에 맞춘 아전인수에는 '양파'든 '쪽파'든 별로 고민할 것 같지 않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 '좌파'들이 마음 불편해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좌파'들 그렇게 무시하지마라...^^ 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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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9-13 17:49   좋아요 0 | URL
원래 많았습니다 ^^ 대략 무시하고 눈에 띄면 찾고 합니다.이 긴 글이 등록되지 않아서 옮겨다가 붙이고 ..휴

mong 2007-09-13 17:24   좋아요 0 | URL
아날로그에 대한 추억이라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드팀전님 서재가 좋은 이유였구먼요
호오-

드팀전 2007-09-13 17:51   좋아요 0 | URL
뭐가요? 아날로그가 좋아구요...오늘 핸폰 바꾸었는데...아기가 핸폰던져서 자꾸 켜졌다 꺼졌다해서요.이거 요즘 핸드폰 왜 이렇게 복잡해요.그냥 전화걸고 받고 문자보내고 받고 하면 되는데...요즘 그런건 안나온다네요...생산이 소비를 견인하고 있다는걸 몸소 느낀다니까요.
제가 간 매장은 효도폰이란 것도 없데요..ㅜㅜ

바밤바 2007-09-18 21:49   좋아요 0 | URL
이야.. 간만에 제가 읽은 책이 나왔네요 ㅎ 이책 제목보고 이끌려서 도서관서 빌려 읽었는데 내용은 별거 없더군요. 그냥 견강부회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정도.. 저는 학생인데도 서평 남기기 귀찮아서 안 쓰는데 팀전님은 대단하신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