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 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구재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 그래서 쟤가 화가 났구나, 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다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결혼 준비하는 내내 지겹게 봐온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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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 신경증이라는 단어가 고도로 의식적이고 계발된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려는 모양이에요. 신경증의 본질은 갈등이죠.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일, 그것도 삶에 가로막힌 채로 머물지 않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일의 본질 역시 갈등이에요. 사실 전 이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온전할 수 있는이유는 이런저런 단계에서 가로막혀 그저 포기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자신을 테두리 안에 가두고 제한하기 때문에 멀쩡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거죠." .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슬그머니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예상하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그것들에 형태조차 부여하지 못했을 때 말이다. 그것들이 나타났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본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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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쯤 되었을 것이다. 무릎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내가 마더 슈거에게 ‘가정주부 질환‘ 이라 말하던 그것이 엄습했음을 깨닫는다. 내 안의 긴장이 시작되었고 평화는 이미 사라졌다. 스위치가 켜지고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재닛에게 옷을 입히고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낸 다음 마이클에게도 아침을 차려줘야지, 차가 다 떨어졌다는 거 잊지 말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 쓸모없지만 틀림없이 불가피한 긴장과 더불어 원망의 스위치도 함께 켜진다. 무엇에 대한 원망일까? 불공평이겠지. 세세한 것들을 걱정하느라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원망, 이 원망이 마이클을 겨눈다. 머리로는 그게 마이클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나는 정말 그가 원망스럽다. 하루 종일 비서며 간호사며, 온갖 일을 하는 여자들이 뒤치다꺼리를 하며 그에게서 이런 압박감을 덜어줄 테니까.

오래전 마더 슈거와 상담하던 중에 나는 그 원망, 그 분노가 비개인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건 차라리 우리 시대 여자들의 질환이다. 여자들의 얼굴이나 목소리에서, 혹은 그들이 사무실로 보내오는 편지들에서 나는 매일 그걸 목격한다. 그들의 감정은 불의에 대한, 비개인적인 독성에 대한 원망이다. 그게 비개인적인 것임을 알지 못하는 운 나쁜 여자들은 이러한 감정을 남편이나 연인에게 떠안긴다. 반면 나처럼 운 좋은 여자들은 그 감정에 맞서 싸운다. 피곤한 싸움이긴 하다.

그래, 내일. 나는 생각한다. 내일은 책임을 질 거고, 미래를 직면할 거고, 더이상 비참하게 지내는 일 따위는 단호히 거부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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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아닌가 싶어. 어쩌다 한번씩, 아마도 한세기에 한번쯤, 말하자면 신념에 따른 행동이 출현하곤 해. 신념의 우물이 차오르며 얼마 후 한두 나라에서 그것이 거대하게 솟구치고, 그러다 전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움직임이 되는 거야. 그것이 상상력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전 세계를 위한 어떤 가능성을 상상한 결과물이기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우리 세기에 그런 일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중국에서. 이후 그 우물은 말라버렸어. 네가 말한 것처럼 잔인함과 추악함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그런 다음 우물은 다시 서서히 차오르겠지. 그러고서 또 한번 고통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앞으로 나아간다고요?" 그가 물었다.
"그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게 나아간다고요?"
"그래, 꿈은 매번 더 강력해지니까. 사람들이 뭔가를 상상할 수있다면 그 일을 쟁취할 때가 오는 법이야.
"뭘 상상한다는 거죠?"
"네가 말한 그거. 선량함 말이다. 친절함. 더이상 짐승으로 살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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