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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이 소설을 읽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읽어보라고 억지로 떠넘길 정도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아무도 내가 느낀 그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이건 영화건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애초에 책을 알게 된 계기도 동명의 영화 때문이고 이 소설을 영화 없이 읽는 일은 아마도 절반의 성공이지 싶다. 소설과 영화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을 만큼 수작인지라 영화를 보며 소설을 생각하고 소설을 읽으면서는 영화를 떠올리는 경험은 행복했다. 물론 처음에는 지루하고 따분한 내용일 거라는 소설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천만에, 상식을 깨고 진행되는 소설의 구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로 이뤄져 마치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월리엄 허트가 분한 동성애자 몰리나의 섬세한 연기와 표정에 대해서는 두 말이 필요치 않다. 어딘가 산만하고 균형을 잃은 듯한 여성적인 발성과 몸짓, 어울리지 않게 큰 키와 덩치로, 남자다움의 상징인 정치범 발렌틴을 향해 구애하는 모습의 애잔함이란 가슴 한쪽을 뻐근케 한다. 감옥이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정치범과 강간범이라는 최악의 죄명으로 마주한 이들에게서 로망이라니. 그러나 가능했다. 슬프게도.
발렌틴에게 감옥은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을 눕히고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다. 그러한 곳에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 몰리나가 나타나면서 메마르고 가혹한 현실은 조금씩 따뜻한 일상과 환상으로 채워진다. 형무소 소장과의 거래로 발렌틴에게 접근한 몰리나의 처음의 목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매일 밤, 바깥세상에서 본 영화 이야기로 적막과 공포를 희석시키고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발렌틴을 먹이고 씻기고 돌보며 그는, 그녀는 행복하니까.
“오늘 나는 너에게 슬픈 생각을 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어. 난 이 약속을 지킬 거야. 전혀 힘든 일이 아니야. 네게 슬픈 일을 잊게 하는 게 얼마나 쉬운데........내 능력이 닿는 동안은, 적어도 오늘은...........네게 슬픈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 사랑을 나누기 전의 발렌틴은 우울과 절망, 고문으로 쇠약했으나 사랑을 나눈 후로는 의기소침한 몰리나를 포용한다. 성적으로 여성인 몰리나와 남성으로서의 발렌틴의 자각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그것과 똑같다. 아름답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위태롭고, 희망이 없음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이라니. 몰리나는 잠에서 깨이고 싶지 않다. 감옥을 떠난 바깥이 그에게는 더 이상 집이 아니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라는 몰리나를 향한 발렌틴의 가슴이 저미는 간곡한 바람은 결국 이뤄진다. 그것도 발렌틴의 동지들이 쏜 총에 맞아서. 영화는 몰리나의 죽음을 허무하지도 추하지도 않게 비춘다.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지만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발렌틴을 떠난 몰리나의 삶은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영혼까지도 감옥의 그의 곁에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슬픈 소설이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