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품절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
-11쪽

이야기의 부재는 죽음이고, 이야기의 존재는 삶이다. 삶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가 삶을 만드는 것 또한 진실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는 것.
-14쪽

광야는 길이 아닌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길이 아닌가. 만들어진 ‘하나의’ 길이 없기 때문에 모든 곳이 길이 아닌 곳, 그곳이 광야가 아닌가. 정해진 하나의 길이 없기 때문에, 데려다줄 정해진 경로가 따로 없기 때문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헤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17쪽

공통의 기억이 많은 사람은 많이 운다. 울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다.
-18쪽

공유한 기억이 많으면 헤어지기가 괴롭다. 그와 함께 만든 이야기가 나의 삶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는 나의 이야기, 나의 삶을 충격한다.
-21쪽

참여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작가가 자기 소설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소설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독자가 그 책을 읽음으로써 완성된다.
-23쪽

우리는 읽으면서, 보면서, 들으면서 이야기를 변형시킨다. 우리의 삶이 이야기와 섞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의 자궁이다. 책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많은 책들의 모태이다.
-24쪽

독자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 자전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25쪽

널리 알려진 비유를 들면,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대기를 쓰는 전기작가는 소설가가 세운 것을 허물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6쪽

소설을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 있는 사람은 이미 소설 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27쪽

경험이 없이도 쓸 수 있다. 그가 읽어왔다면. 하지만 읽지 않고는 쓸 수 없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경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읽기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28쪽

"저는 작가들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 즉 작가로서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페루 문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9쪽

소설을 읽은 사람이 소설을 쓴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새로운 소설을 잉태하게 했다면, 그렇게 잉태된 하나의 새로운 소설은 그 한 권의 과거의 책 속에 무정형의, 이를테면 일종의 가능태의 형식으로, 미리 존재했던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32쪽

그러니까 소설을 쓰려는 살마은 자신이 가진 거울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불만과 의혹, 어떤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소설은, 어떻게 말하든 소설을 쓰는 사람의 세계 해석이고, 그 해석의 뿌리는 그의 욕망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39쪽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기 때문에, 쓰는 동안 소설가로 불리는 것이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기 때문에 소설가인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소설가인 것이다.
-40쪽

기억은, 온전히 나에게 속해 있고, 내 안에 있으며, 내 일부이고, 내 존재의 근간이다. 기억에 대해 나보다 더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억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망라한 과거의 모든 유의미한 경험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고 편집된 과거이다.
-42쪽

좋지 않은 발상이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좋은 소설로 태어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소설 쓰기는 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45쪽

이 세상에 씌어지지 않았거나 씌어졌으되 시원찮은 모든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을 소중하게 포착하지 못했거나 아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과장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순전한 과장만은 아니다. 나무를 품고 있지 않은 씨앗은 없다.
-46-47쪽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65쪽

소설가는 신비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궁리하고 추리해야 한다.
-67쪽

삶이, 삶에의 두껍고 깊은 참여가 소설을 만든다.
-69쪽

소설은 막연한 생각이나 실체가 없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교한 조형물이다.
-70쪽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설계도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다 써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
-74쪽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다. 질문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문은 ‘왜’와 ‘어떻게’이다.
-75쪽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교묘한 게임이 소설 쓰기이다.
-88쪽

소설 쓰기는 ‘기르기’보다 ‘만들기’쪽이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93쪽

스토리는 사건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단순하게 늘어놓는 것이다. 플롯은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과관계라든지 전달의 효과라든지 하는 다른 기준에 따라 엮어내는 것이다.
-98쪽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중략)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속으로 스미게 해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108-109쪽

말이 아니라 그림이고,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하는 주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112쪽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되지 않은 사건이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을 옮기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도 함께 듣는 셈이다.
-122쪽

서사는 동사를 필요로 하고 묘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한다.
-147쪽

묘사와 서사, 대화와 설명이 서로 섞여서 소설의 문장을 이룬다.
-148쪽

은유적인 문장은 의미의 전달을 지연시키긴 하지만 의미의 전달을 방해하는 문장은 아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장식으로서의 문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150쪽

문체는 글을 쓰는 이의 개성과 체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간결하면서도 탄력 있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문장도 있고 풍자적인 요설을 앞세우는 문장도 있다.
-152쪽

진실되지 못한 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현란한 수사로 치장을 하게 되면, 그것은 고운 헝겊을 누덕누덕 기워 만든 보자기로 오물을 싸놓은 것처럼 흉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한승원, <바닷가 학교>)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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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6-0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읽으면 소설을 쓰겠다는 분들이 많이 줄어드실듯...요즘 기본이 안되면서 소설을 쓰겠다는 분들은 좀 뜨끔하실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