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품절


철학은 교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전문 지식이며 전문 기술이다. 교양이란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으며, 있으면 조금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는 않다. 교양이 있어야봐야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이며 가혹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교양과 결부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문화주의, 즉 교양주의 영향이 주원인이었다.-16쪽

한국 철학계에는 기본적으로 합의된 시대정신이나 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이나 주제로 철학자들을 분류하지 않고, 어디서 유혹했느냐 아니면 전공하는 철학의 국적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한국 철학계가 외래 철학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철학과 교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나 문제의식이 아니라 세력 균형이다. 대리전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자기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수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240쪽

한국 철학에서 원전 해석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외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철학을 구축하고 전개하는 능력과 자세가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철학은 자기 철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할 뿐이지,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하느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전형적인 훈고학적 태도이다. 물론 더 정확한 원전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원전을 이해하여 자기 철학을 구축하는 것이 철학자의 기본 임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다. 한국 철학은 여전히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원전 해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자존심을 걸고 논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은 예뻐한다. 대신 자기 철학을 전개하려는 사람은 학문적이지 않다고 한마디로 폄하한다.-242쪽

철학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철학이 위기에 처하려면 잘나가던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철학은 별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잘나가던 시절도 없었다. 그저 학과가 존재하고, 학생이 존재하고, 교수가 월급을 받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특별히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적도 없고, 한국 지성사에서 토대가 되는 작업을 한 적도 없으므로 새삼스레 위기라고 말할 것도 없다. 있다면 앞서 말한대로 교수의 밥그릇 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외부 환경이 바뀌고 있다. 즉 시대가 격변하며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졌으므로 철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늘고 있다. 문제는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밥그릇을 지키는 데만 최선을 다하는 교수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한 철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이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런 구실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지금 눈먼 연구 기금이 쓸모없는 프로젝트에 대량으로 투여되고 있다. 이런 것이 진짜 위기다.-251쪽

문제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학생들이 요구하는 지적 호기심과 지적 경외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철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철학 과목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용 영어나 법 관련 과목이나 컴퓨터 관련 과목, 다시 말해서 돈이 되는 과목에 몰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 중략 ...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지,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등. 진정 알고 싶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 대학은 이런 욕구를 채워줘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학생들은 취직에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영어는 학원에서도 할 수 있고 취업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학원도 많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더욱더 인문학적 지식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253-254쪽

사회적 역할이란 철학이 사회 문제에 얼마만큼 발언권이 있느냐를 말한다. ... 중략 ... 이에 반해 철학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앞서 기술한 철학계 현황에 따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침묵해왔고 따라서 별로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사회적 발언권도 약화돼 이제는 사회 문제가 있어도 철학자를 별로 찾지 않는다. ... 나는 이런 역할 부재의 원인이 전적으로 철학과 교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교수는 자신의 철학 지식을 현실 문제에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이보다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다. 사회 전반에 대해 어느 정도 두루 알아야 하고 역사나 문화에 대한 소양과 상식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미비하다. 한마디로 문학 평론가와 토론하면 말발이 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58쪽

철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 철학 저술가 양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철학책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김용옥 외에는 없을 것이다. 철학책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철학 저술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철학 대중화에 결정적 장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읽으려면 전문기술이자 전문 지식인 철학을 다시 가공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자가 대중적인 철학책을 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자의 관심은 현실과는 무관한 학문적 세계다. 현대 논리 철학의 창시자인 프레게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면, 그 지식을 일반화할 틈도 마음의 준비도 돼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물론 쓸 수도 있겠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다. 학자는 쉽게 쓰낟고 쓰지만 대중에게 아주 어렵기는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술 성과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저술가가 필요하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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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적으로,
철학은 교묘한 말재간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한국의 현실에 특히 유용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