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프랑스 왕 샤를 8세(1483~98년 재위)는 1494년 9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해 나폴리를 프랑스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피렌체의 통치자 피에로 메디치는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사르자나에서 샤를을 만났지만,
결과는 피렌체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피사와 렉혼, 그리고 서쪽에 있는 피렌체의 모든 요새들을 전쟁기간 중 프랑스에 내주어 나폴리 원정의 길을 터주었으며 20만 플로린(약 60억 원)을 내놓기로 약속했다.
이런 전시 상황이 전개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에 머물고 있었다.
피렌체와 달리 1495년의 밀라노는 일시적이지만 정치적으로 평화스러웠고 이때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수난>을 주문했다.
<최후의 만찬>은 현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다.
루도비코는 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좋아하여 종종 와서 명상에 잠기곤 했으며 자신과 아내 비트리스, 가족이 이곳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따라서 그는 1465년경 대성당의 건축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로 하여금 성가대석과 앱스를 부수게 하고, 브라만테에게 건물을 확장 완공하도록 했다.
열여섯 개의 아치형 천장으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입방체와도 같은 설교단은 1495년 당시 공사중이었고 2년 후에나 완공되었다.
루도비코는 롬바르드 화가 몬토파르노에게 식당 북쪽 벽에 <십자가 처형>을 의뢰했고, 레오나르도에게는 반대쪽 벽에 8.8m 길이의 <최후의 만찬>을 의뢰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며 수도승들은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고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도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으며 배경을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 중 하나인 현혹적인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을 위해 드로잉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원이 들어 있다.
원은 식당바닥과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작품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즉 원의 중심은 그림의 소실점으로 예수의 얼굴을 그 위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각시킬 수 있엇던 것이다.
수학적이며 완벽한 기하적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다.
중심 인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보조수단으로 삼았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음을 지적했고,
이를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델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하여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모델들의 행동을 연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여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도록 구성했다.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칭된 사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펴서 옆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레오나르도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며,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 회의심, 두려움, 성냄, 부인, 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고,
빌립보는 일어서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오도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거나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의 무죄와 신실함을 주장한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한 제자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요한 옆의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이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하다.
시뇨렐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기를란다요 등 15세기 화가들은 부패한 인간상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묘사할 때 테이블 반대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모든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나란히 함게 앉게 했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후대 화가들은 더이상 유다를 예수 반대편에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의 추기경 측근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했고 손은 파르마의 알렉산드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사리와 지랄디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열한 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이 루도비코에게 불평했다.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전하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면서 변명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일 년 동안 전하도 아시는 것처럼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찾기만 하면 그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의 양식으로 <최후의 만찬>을 드로잉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앤디 워홀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86년 초 화상으로부터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그는 붓에서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색을 칠했으며, 실크스크린으로 뜰 때에는 한 번에 여섯 차례나 색을 사용하여 뜨기도 했다.
워홀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의 원작이 있는 밀라노로 우송되었고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도 이듬해 1월 22일 밀라노로 갔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어서 약 3천 명이 관람했으며 카메라맨들은 그림을 필름에 담느라고 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