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란 회화를 벽에 걸거나 조각을 배치하는 등 전시회에서 사물들을 배열하는 것에 매우 폭넓게 적용될 수 있으나, 보다 구체적으로 화랑과 같은 특정한 실내 공간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그 장소를 채우기 위해 고안되며, 종종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같은 일회성 작품을 일컫는 용어이다.

아상블라주는 1953년 뒤비페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으로 그는 1954년 이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시켰다.
그는 ‘콜라주’라는 용어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만든 그림들에만 따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상블라주라는 용어는 1961년 뉴욕의 모마가 개최한 ‘아상블라주 미술’전에서 채택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자 아상블라주라는 용어가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이 용어의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이 전시회 이후 이 용어는 점차 다양한 오브제들을 모아 상자 같은 것에 담아 놓은 작품에만 보다 엄격하게 제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도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단적인 한 예가 슈비터스의 콜라주 개념을 3차원으로 확장시킨 라우셴버그의 ‘콤바인 회화’이고 다른 한 예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확장시킨 아르망의 집적 작품이다.

설치의 선례를 찾는다면 ‘장소 특수적 site-specific’인 작품의 전통으로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치의 개념에 적합한 것은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전시회, 쿠르트 슈비터스의 방안을 가득 채운 <메르츠> 구성물, 1958년 <공백>이라는 제목으로 된 이브 클랭의 빈 방 전시이다.
클랭의 작품은 오늘날의 설치 개념에서 최초의 선례로 간주되고 있다.
설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으며 몇몇 작가들이 설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설치 미술’이라는 분야가 확고한 장르가 된 것은 1980년대에 와서였다.
설치 작가들은 “설치 미술이 오늘날의 여러 미술 형식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활발하며 창의성이 풍부한 미술”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의 설치는 일반적으로 비영속적이었으며 이는 당시 수집 가능한 미술품이 유행하던 것에 대한 저항의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설치 작업이 영속적인 전시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고 소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작품들조차 소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설치 미술 미술관이 런던에 문을 열었다.
설치미술을 이해하기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는 곧 동시대의 특징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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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미술의 영향


보스가 스헤르토겐보스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초기 작품을 보면 위레트흐트에서 지낸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나타난 성숙한 양식에서 보여지는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 남쪽을 여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는 중에 <성 율리아노의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of St. Julia>을 그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휴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1440년경~82, 1467~82년에 주로 활동)의 포르티나리 세쪽 제단화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외교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형제회 기록에 남아 있는 건
15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해 8월 9일 형제회 친구들이 성 요한 교회에서 그를 추도하는 장례미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보스에 관한 내용은 시문서와 형제회 기록이 거의 전부지만
17세기의 몇몇 자료를 통해 그의 작품 몇 점이 성 요한 교회에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가 제단 위에 있었고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모 마리아 제단에 장식되었다.
1504년 부르고뉴의 미남 공작 필리프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Jeronimus van Aeken으로 불리운 보스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는데,
<최후의 심판>으로 양날개 패널에 <천국>과 <지옥>이 묘사된 세쪽짜리 커다란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빈 소재 세쪽 제단화를 필리프가 주문한 작품의 축소판 복제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작은 1629년 프레데리크 헨리Frederick Henry 왕자의 네덜란드 군대가 스페인으로부터 스헤르토겐보스를 탈환했을 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톨릭의 번영시대가 칼뱅주의자들의 금욕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뮤지엄 그리고 개인이 소장한 상당수의 보스 작품은 원작을 복제 또는 모방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30여 점에 불과하고 그림과 소품 드로잉들이다.
원작을 보려면 마드리드의 프라도 뮤지엄에 가야 한다.
보스와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주요 제단화 세 점과 소품 몇 점이 그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 중 초기에 제작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상이 심하고 후세 사람들이 덧칠을 했으므로
작품에 나타난 양식과 기교의 미묘한 차이를 들어 연대순을 확정짓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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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뮤지엄


프라도 뮤지엄Museo del Prado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다.
루브르 뮤지엄의 전신인 나폴레옹 뮤지엄의 설립과 내셔날리즘의 대두에 자극을 받아 19세기 전반 유럽 각지에서 생겨난 뮤지엄들 가운데 하나이다.
프라도 거리에 있던 자연사박물관의 건물을 새롭게 치장하여 1819년에 '왕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설립했다.
스페인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건물로 현재도 뮤지엄의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후 왕실의 각 시설에 분산 소장되어 있던 미술품이 점차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수집도 충실히 이루어졌다.
1868년 혁명에 의해 명칭도 국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변경되었다.
1872년에는 183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 때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들을 모아놓은 마드리드의 트리니다드 뮤지엄을 흡수 합병했다.
1912년에는 정식 명칭을 프라도 뮤지엄으로 정해졌고
20세기에 들어와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소장품의 수도 더욱 늘었다.
소장품 대부분은 유화로 약 3만 점에 달한다.
역대 스페인 국왕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육적 목적에 따라 계통적으로 작품을 수집한 뮤지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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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프랑스 왕 샤를 8세(1483~98년 재위)는 1494년 9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해 나폴리를 프랑스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피렌체의 통치자 피에로 메디치는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사르자나에서 샤를을 만났지만,
결과는 피렌체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피사와 렉혼, 그리고 서쪽에 있는 피렌체의 모든 요새들을 전쟁기간 중 프랑스에 내주어 나폴리 원정의 길을 터주었으며 20만 플로린(약 60억 원)을 내놓기로 약속했다.
이런 전시 상황이 전개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에 머물고 있었다.
피렌체와 달리 1495년의 밀라노는 일시적이지만 정치적으로 평화스러웠고 이때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수난>을 주문했다.
<최후의 만찬>은 현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다.


루도비코는 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좋아하여 종종 와서 명상에 잠기곤 했으며 자신과 아내 비트리스, 가족이 이곳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따라서 그는 1465년경 대성당의 건축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로 하여금 성가대석과 앱스를 부수게 하고, 브라만테에게 건물을 확장 완공하도록 했다.
열여섯 개의 아치형 천장으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입방체와도 같은 설교단은 1495년 당시 공사중이었고 2년 후에나 완공되었다.
루도비코는 롬바르드 화가 몬토파르노에게 식당 북쪽 벽에 <십자가 처형>을 의뢰했고, 레오나르도에게는 반대쪽 벽에 8.8m 길이의 <최후의 만찬>을 의뢰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며 수도승들은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고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도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으며 배경을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 중 하나인 현혹적인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을 위해 드로잉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원이 들어 있다.
원은 식당바닥과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작품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즉 원의 중심은 그림의 소실점으로 예수의 얼굴을 그 위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각시킬 수 있엇던 것이다.
수학적이며 완벽한 기하적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다.
중심 인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보조수단으로 삼았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음을 지적했고,
이를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델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하여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모델들의 행동을 연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여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도록 구성했다.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칭된 사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펴서 옆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레오나르도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며,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 회의심, 두려움, 성냄, 부인, 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고,
빌립보는 일어서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오도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거나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의 무죄와 신실함을 주장한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한 제자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요한 옆의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이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하다.


시뇨렐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기를란다요 등 15세기 화가들은 부패한 인간상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묘사할 때 테이블 반대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모든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나란히 함게 앉게 했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후대 화가들은 더이상 유다를 예수 반대편에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의 추기경 측근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했고 손은 파르마의 알렉산드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사리와 지랄디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열한 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이 루도비코에게 불평했다.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전하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면서 변명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일 년 동안 전하도 아시는 것처럼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찾기만 하면 그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의 양식으로 <최후의 만찬>을 드로잉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앤디 워홀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86년 초 화상으로부터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그는 붓에서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색을 칠했으며, 실크스크린으로 뜰 때에는 한 번에 여섯 차례나 색을 사용하여 뜨기도 했다.
워홀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의 원작이 있는 밀라노로 우송되었고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도 이듬해 1월 22일 밀라노로 갔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어서 약 3천 명이 관람했으며 카메라맨들은 그림을 필름에 담느라고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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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파리의 루브르 뮤지엄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뇨리의 일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초상이다.
조콘도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1495년 몬나 리자라는 과부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499년에 죽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의미가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동안 여러 차례 몬나 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장으로 와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으로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입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의상의 우미한 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1898)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아주 살포시 지은 미소이다.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이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소가 16세기에는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모나리자의 갈색 눈은 광채를 드러내는 15세기 식의 눈길이 아니라 흐려진 눈길이다.
눈 아랫부분은 대단한 감수성과 피부 밑에 섬세한 신경이 숨어 있음을 말해준다.
눈썹이 없는 것이 눈에 띈다.
뵐플린은 눈두덩이의 부풀어오른 부분이 바로 높은 앞이마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에는 넓은 이마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눈썹과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지만,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그려진 눈썹을 예로 들며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눈과 동일한 색의 밤색 머리카락이 머리 위에 덮어쓴 물결치는 베일과 더불어 살짝 곱슬거리며 양쪽 볼로 내려온다.
그녀는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그토록 부드러운 상태에서 목을 꼿꼿이 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분명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지체 높음을 보여주려는 꼿꼿한 자세인 것이다.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에서 귀부인들이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방문할 때 목을 꼿꼿하게 한다.
뒷날 이런 자세의 유행도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진 자세 또한 초상화의 자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레오나르도는 과거 화가들과는 달리 흉상이 아닌 반신상으로 그렸다.
약간 옆으로 앉은 모델의 상반신을 반쯤 틀어 얼굴이 거의 정면을 바라보게 묘사했다.
왼팔은 안락의자 팔걸이에 올려져 있고 오른팔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어나오면서 오른손이 왼손 위에 살며시 포개졌다.
편안한 동작이 모델의 성격이 차분함을 말해준다.
그는 입체감을 회화의 혼이라고 했으며 이 작품에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아주 섬세하게 튀어나오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조콘도는 방문자들에게 아내의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고 보여줄 수 없어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소장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나 <라 조콘다>로 알려졌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4천 크라운을 주고 구입하여 자신의 퐁텐불루 궁전에 걸었다.
이후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로 불리웠고 영어로는 <모나리자>로 알려졌다.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관한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그중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의 막내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라는 설이 유력하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된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는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고 있다.


바사리는 이 작품을 주문한 사람이 구입하지 않은 이유를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이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프랑스로 갖고 가서 완성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대부분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다.
패널 양쪽 7cm 가량이 잘려나갔으며 그 위에 덧칠되었고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서양사람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을 표했다.


마르셀 뒤샹은 1919년에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엽서로 프린트한 것을 사서 연필로 염소수염을 그려넣었다.
레디메이드ready made 혹은 기성품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인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양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통에 대한 반발을 상징한 행위였다.


앤디 워홀은 1963년에 모나리자의 크고 작은 여러 이미지를 회화적 목적으로 배열하고 채색하여 실크스크린으로 떴는데,
뒤샹과는 달리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부정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나의 이미지보다는 많은 이미지가 더 낫다는 ‘다다익선’의 논리와 더불어서 채색하기에 따라서 배열하기에 따라서 이미지에 변화가 생긴다는 관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변용’을 시도하면서 여러 개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적인 이미지를 대중적인 이미지로 격하시켰지만, 여전히 르네상스 대가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팝아티스답게 워홀은 한 사람을 위한 초상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초상으로 변형시켰다.
반복과 변용은 그의 주요 미학이다.


재스퍼 존스는 1969년에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숫자와 함께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무관한 이미지의 병렬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일 뿐이다.
새로운 시각예술의 자유와 폭을 확장하기 위해 모두가 익히 아는 모나리자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팝아티스트 로버트 아르네손은 1976년에 <콜로마 목욕을 하는 조지와 모나>를 조각품으로 제작했다.
실재했던 모나리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목욕을 즐겼을 것이다.
아르네손은 그녀를 우상화하는 데 반대하기 위해 모나리자를 대중적인 인물로 격하시켰는데 이는 팝아트의 본질이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무제>와 <리자 몽롱상태 #1>을 그렸다.
그는 <무제>에서 <모나리자>를 의자 등받침대로 사용함으로써 전통미를 부정했으며, <리자 몽롱상태 #1>에서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지우며 거꾸로 오버랩되게 하여 새로운 회화의 언어로 변형시켰다.
이렇듯 후세 예술가들은 모나리자를 서양미술의 규범적 상징물로 보았으며 <모나리자>를 분쇄하고 파괴하며 부정해야만 새로운 회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만큼 <모나리자>는 분쇄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부정되지 않는 고유한 이미지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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