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주의


아카데미의 공식 미술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한 회화운동으로서의 야수주의는 당시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했다.
1905년경부터 함께 작업하던 프랑스 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던 마티스, 마르케, 망갱, 카무앵과 르아브르 출신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와 샤투 지방 출신 드랭, 블라맹크, 그리고 장 퓌와 네덜란드 출신의 반 동겐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폴 시냐크 및 신인상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인상주의는 피상적인 회화이며, 빛과 대기를 포함하면서 시각적인 인상을 단순히 캔버스에 담는 데 그쳤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주로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채를 표현수단으로 삼았으며, 회화를 단순히 눈으로 본 현실을 옯기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로 인식하고 과거 화가들보다 색채를 자의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순수한 색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거칠고 충격적인 부조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했다.

야수주의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5년 제3회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그해 10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린 도톤(가을전)에는 앵그르, 마네, 르누아르 등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 예술가들이 제작한 작품 1,636점이 소개된 대규모의 전시회였다.
따로 마련된 전시장에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드랭, 블라맹크 등의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마티스의 밝은 색을 사용하여 그린 <모자를 쓴 여인>과 <선원>, 드랭의 경쾌한 그림 <콜리우르의 항구>, 블라맹크의 아름다운 신기루 같은 <말리의 세느 계곡>이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곳에는 망갱의 <시에스타>와 발타가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린 <선원>도 있었다.(뒤샹 26)
젊은 화가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주위에 모였다.

1887~88년 파리에서 법률가의 자격을 얻은 뒤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1890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하다가 1892년 자신의 취향에 더 잘 맞는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겼다.
모로는 고답파의 몇몇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사라진 문명과 신화 같은 낭만적 수단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고대 세계의 환영을 창조한 화가였다.
15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고 화려한 양식을 구사했으며,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문학적 관념을 중시한 모로의 회화는 당대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모로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러하지 못했으나 교육자로서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르케, 망갱, 카무앵, 루오 등과 함께 공부했다.

마티스가 인상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1897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카유보트의 유작 전시회에서였으며, 이때부터 색채는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고갱, 반 고흐, 세잔의 작품을 접하면서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카리에르에서 작업 중이던 1899년 드랭을 알게 되었고, 드랭은 1901년 마티스를 블라맹크에게 소개했다.
후에 야수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이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던 마티스는 1903년 살롱 도톤의 창설에 참여했고,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1905년 살롱 도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과 블라맹크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인생과 느낌에 대한 재발견에 심취했는데,
이같은 경향은 자연주의 회화에서, 그리고 많은 작가의 문학작품에서 20세기 전부터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리스 드 블롱드는 1895년에 발표한 <자연주의에 관한 에세이>에서 상징주의와 낭만적 퇴폐주의에 반발하면서 적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비실제의 문화, 꿈의 예술, 새 떨림의 탐구 등을 가르쳤다.
선조들은 맥이 있는 꽃, 암흑, 그리고 유령을 좋아했고, 그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의 거대한 범신론적 예술은 아무런 추진력을 주지 못한다.”
소설가 찰스 루이 필립은 189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며 ... 사람들은 자연적 인생의 영상을 가져야만 한다. ... 오늘날은 열정의 시대이다.”

‘야수’라는 명칭은 1905년 <질 블라스 Gil Blas> 지에 실린 평론가 루이 보셀의 1905년 살롱 도톤에 대한 평문에서 비롯했다.
보셀은 야수주의 회화들 가운데에 함께 전시된 알베르 마르크의 조각 <어린이의 토르소>에 대해 적었다.
“이 흉상의 순수성은 순수한 색채의 소란 가운데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
이 명칭은 당시 평론가와 미술품 감식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견해, 즉 야수주의 회화는 유능하고 재능은 풍부하지만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화가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909년에 이르러 이 운동은 종착점에 도달했다.
그룹의 화가들은 대부분 야수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야수주의는 한마디로 조직적으로 나타난 프랑스의 첫 표현주의였다.
20세기 회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야수주의는 그 영향력이 유럽 전역에까지 미쳤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는 야수주의의 새로운 기법이 드레스덴의 브뤼케(다리) 그룹 화가들과 바실리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한 뮌헨의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브뤼케는 같은 해인 1905년에 결성된 그룹으로 독일의 첫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표현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다른 점은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밝은 색을 선호했지만 라틴족과는 달리 원시적 요소가 물신 풍기는 튜튼족 특유의 그림을 그렸다.

야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표현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를 왜곡하면서 의도적으로 기법상의 서투름과 부주의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야수주의는 독일 표현주의 정신과는 대비되는, 엄격한 고전적 프랑스 전통의 테두리 안에 늘 머물러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에서는 대개 대상과 이에 대한 화가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지만, 야수주의자들은 균형적이고 통일성 있는 구도를 창출하려고 했다.

표현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각, 음악, 댄스, 영화 등 모든 시각예술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
그는 1908년 선언문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가의 노트>에 적었다.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내게 있어 표현은 그림의 총체적인 배열이다. 신체가 차지할 공간, 그 주변 공간, 그 비율 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구성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야수주의의 주요 화가 앙드레 드랭(1880~1954)은 1895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98년부터 아카데미 카미요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블라맹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작업실을 사용했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군복무를 마친 후 1904년 다시 붓을 잡았을 때 야수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고, 여름에는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와 함께 그림을 그렸으며, 살롱 도톤에서 열린 유명한 야수주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는 1893년부터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전거 경주를 했고,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부모는 음악가였고 블라맹크도 생계를 위해 카페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한편으로 부정부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포르노 소설을 썼다.
1900년 드랭을 만나 샤투에서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면서 어두운색을 사용하며 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어두운 색보다는 격렬함을 지닌 밝은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반 고흐의 표현적인 방식을 극단으로 몰아가며 표현적인 작품을 그렸다.
드랭을 통해 알게 된 마티스는 블라맹크를 설득하여 1905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도톤에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했다.
1906년 화상 볼라르는 그의 작품 전부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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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의 문화현상으로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것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미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는 문학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미래주의가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유는 수준 높은 회화작품이 제작되었고 미래주의가 다른 예술 분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미래주의의 선동가이며 지도자는 시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1876~1944)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이탈리아인 마리네티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후 1899년 제노바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3년 파리에 오면서 아방가르드 문학에 관심이 생겼고 상징주의에 반대하여 ‘본연주의적 naturiste’ 움직임에 동참했다.
1912년 무렵까지 거의 프랑스어로만 시를 썼다.
그는 1905년 밀라노에 거점을 둔 문학 잡지 <포에시아 Poesia>를 창간했는데, 이 문학지는 예술의 자유, 형식의 혁신, 전통의 거부를 표방했다.
마리네티는 이 잡지에 시를 발표했는데, 특히 <속도의 신>과 <자동차에 바침>(1905)에서는 자동차로 대표되는 속도에 중독되고 현대적인 것을 찬양하는 미래주의의 주요한 특징을 예고했다.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르 피가로> 지에 마리네티가 작성한 ‘미래주의 선언문’이 게재됨으로써 출범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르 피가로> 지를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움베르토 보초니(1882~1916)와 다른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리네티는 사상의 지휘자였으며, 그의 현대성에 대한 찬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화가이며 조각가 보초니는 1910년에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했고 그 후 미래주의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2월 7일자 <강경파 L'Intransigeant>에서 보초니를 미래주의 예술가 중 가장 재능 있는 화가로 평가했다.
보초니는 산업화된 밀라노와 마리네티의 사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산업화된 우리 시대의 결실”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보초니, 발라, 카라, 루솔로, 세베리니가 서명한 화가들의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씌어진 것으로 3월 8일 토라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동작은 더 이상 보편적 역동성의 멈춰진 어느 순간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끊임없는 역동적 감각일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이 선언문의 중심 주제는 ‘보편적 역동성’이었다.
그들이 1910년 4월 11일에 발표한 ‘미학 선언문’의 9개 조항에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

1. 모방된 형태들은 무가치하며, 본래 형태들만이 찬양받아야 한다.
2.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렘브란트, 고야, 로댕의 도움으로부터, 그리고 지나치게 융통성 있는 표현들처럼 ‘좋은 감각’과 ‘조화’라는 말의 폭정에 근원적으로 반발해야 한다.
3. 미술평론가들은 무가치하거나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다.
4. 이미 사용한 적이 있는 주제들은 우리의 무쇠, 자긍심, 열정, 그리고 속력의 소용돌이치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5. ‘미친 놈’이라는 말로 탄압받는 모든 발명가를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우러러보아야 한다.
6. 시에서 운율이 자유롭고 음악에서 대위법이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고유한 보충적인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7. 우주적 동력주의는 회화에서의 동력적 감각처럼 묘사되어야 한다.
8.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에서 가장 근원적인 점은 성실하고 순수해야 하는 것이다.
9. 운동과 빛이 사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파괴한다.

미래주의는 2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1909년의 발단에서부터 1916년 보초니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이며,
두 번째 단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마리네티가 시도한 재건의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시기에서 예술가들은 선언문에서 제안된, 과장된 공식적 표명을 합리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를 성취하고자 했다.
그들은 가에타노 프레비아티(1852~1920)의 분할주의 기법으로 작업하면서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감각을 부여하려고 했다.
프레비아티는 쇠라나 시냐크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색채 이론이야말로 현대 화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현대인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접합”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화가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회화 기법>(1905)과 <분할주의의 과학적 원칙>(1906)을 출간했으며, 1913년에는 <회화에 관하여: 기술과 기교>를 출간했다.

밀라노의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에 8월 24일자 <라 보체> 지에 실린 소피치의 글 ‘피카소와 브라크’와 세베리니의 밀라노 방문을 통해 입체주의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소피치는 입체주의는 인상주의 혁명의 확장이며, 인지된 사실을 보다 통합적으로 평면에 투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카소에 대해 “대상 자체의 주위를 돌면서 그것을 모든 각도에서 시적으로 고찰하고, 여기에서 받은 연속적 인상에 충실하면서 이를 묘사한다.
결국 그는 인상주의자들이 오직 한 순간의 한 측면만을 표현한 것과 같이 자유롭게, 대상의 총체성과 감정적 영속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런 면은 수용하면서도 입체주의자들이 대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순수한 회화적 가치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입체주의를 단지 은폐된 아카데미즘으로 묘사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의 정물 대신 그들 특유의 이미지와 표현을 통해 현대생활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현대성 및 기계 시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표현했다.
또한 입체주의와는 다르게 그림의 중심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루솔로는 1913년 자신의 선언문 <소음 미술 L'arte dei rumori>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음악은 전적으로 자연의 소음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슈토크하우젠과 존 케이지를 예견했다.
카를로 카라도 1912년 자신의 선언문 <소리, 소음, 냄새 회화 La Pittura dei suoni, rumori, odori>에서 이전의 많은 선언문들보다 격렬한 어조로 비시각적인 여러 감각들이 색채와 형태의 추상적 조합으로 표현될 수 있는 회화를 옹호했다.
한편 발라는 색채, 움직임, 소리까지도 포함하는 다양한 재료의 조각으로 이후의 키네틱 조각의 몇몇 양상을 예고했다.

이 시기 동안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점점 더 입체주의적인 언어로 움직임의 종합적 표현을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점차 분열되어 갔으며, 1914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결속력 있는 미학 그룹을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미래주의의 역사는 그룹의 역사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예술가들의 역사이며,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주된 추진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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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국의 팝아트


미국에서의 팝아트는 빌렘 드 쿠닝으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았으나 대체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의 하나로 1950년대 중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이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이미지와 통속적인 키치를 사용했으나, 월등하면서도 두드러지지 않는 훌륭한 기술로 작품 속에서 키치적인 성격을 완전히 제거했다.
미국의 팝아트는 다다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네오-다다로 불리기도 했다.

미국 팝아트 예술가 중 두드러진 인물로는 훌륭한 소묘 솜씨로 보잘것없는 주제만을 그린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톰 웨설만,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마리솔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매체와 대량생산된 소비상품이 지배하는 현대 거대 도시문화에 대한 관심과 상업 광고와 포장에 마비된 현대인에게 즉각적인 충격을 주기 위한 눈에 거슬리는 표현양식이다.
팝아트에서 파생된 것들 중에 아상블라주와 해프닝이 있다.

추상표현주의에 가장 먼저 도전한 사람은 라우센버그였다.
그는 드 쿠닝의 그림을 한 점 산 후 자신이 작품을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드 쿠닝은 당혹스러웠지만 허락했다.
라우센버그는 드 쿠닝의 작품을 가능한 한 지울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지운 후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제스처로 소개하면서 어떤 추상표현주의 화가도 공격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
라우센버그와 함께 작업하던 존스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붓놀림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납화법encaustic을 통해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런 색조로 그린 미국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지도 등은 대중적인 이미지이면서 또한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시위했다.
두 사람은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리히텐슈타인과 워홀은 1960년 이전부터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만화를 그렸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수미술로 끌어온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이 개인전을 통해 먼저 만화작품을 소개하자 그와의 충돌을 피해 워홀이 그린 것이 캠벨 수프 캔이다.당시 수프 캔 시장점유율이 약 80%에 달해 캠벨사를 선택한 것은 캠벨 수프가 가장 대중적이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첫 개인전을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화랑에서 열면서 32점의 수프 캔 그림을 소개했다.

이때 팝아트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언론이 관심을 갖고 팝아트 예술가들의 행위를 주시했다.
1962년 5월 11일자 <타임>은 ‘케이크 한 조각 화파’란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일군의 화가들은 현대문명의 가장 진부하고 저속하기조차 한 장식물도 캔버스로 운반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리히텐슈타인, 워홀, 로젠퀴스트 등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면서 워홀의 사진도 게재했다.
캔오프너로 켐벨 수프 캔을 막 따려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워홀이 한 손에는 캔을 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는 시늉을 하는 사진이었다.
<타임>이 워홀의 사진을 소개한 것은 그가 팝아트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했다.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영국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는 1962년 봄학기에 학생들에게 워홀의 수프 캔, 코카콜라 병, 하인즈 케첩 그림에 관해 강의하면서 워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또한 슬라이드로 워홀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토론을 제안했으므로 팝아트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커졌다.

페러스 화랑에서 개인전이 끝난 다음날인 1962년 8월 5일 미국 남자들의 ‘성의 우상’ 매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그녀의 자살기사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스타로 헐리우드의 공주였던 매를린이 무엇이 부족하여 세상을 버렸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은 몇 주에 걸쳐 매를린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배우로서의 활약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을 파헤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한 그녀를 동정했다.
워홀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매를린을 자신의 예술을 위한 전리품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에 매를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사서 그녀의 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매를린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또는 20개씩 병렬하기도 했다.
매를린의 초상도 수프 캔이나 우표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회화에서 워홀의 위상이 높아질 무렵 조각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심취해 있던 그의 조각은 잠재의식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는 “자연의 형태가 기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면 내용은 에로틱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올덴버그는 손목시계, 파이 한 조각, 모자, 바지, 치마, 깃발, 음료수 등을 실제처럼 단순한 형태로 제작한 후 색을 칠했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을 좋아했지만 막상 돈을 주고 사는 것을 꺼려했다.

올덴버그는 107 이스트 2번가에 있는 상점을 세내어 작업장으로 사용했는데 그곳에는 석고로 제작한 옷, 음식물, 구두, 바지, 케이크와 파이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백화점 같았다.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팝이미지 조각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평론가들이 반겼다.
워홀보다 한 살 많은 올덴버그는 우리가 매일 대하는 물질을 확대하여 새삼스럽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한 예술가였으며 사람들은 그런 관람을 즐거워했다.
그는 앨런 캐프로를 만난 후 그의 해프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즉흥적인 표현주의 방법으로 액션 페인팅을 하기도 했다.
1960년부터 석고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반죽에 흠뻑 적신 모슬린이나 올 굵은 삼베로 여러 가지 사물을 만들어 에나멜로 채색하기도 하고, 캔버스천으로 만든 거대한 사물을 기포고무로 채우기도 하면서 자동차만한 크기로 274cm가 넘는 <대형 햄버그>(1962)를 만들었고 <대형 아이스크림 콘>(1962)의 길이는 304cm가 넘었다.
이런 작품들은 비닐을 꿰맨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들이었는데 바느질은 그의 첫 번째 아내 팻이 도왔다.
이처럼 일상적인 물질을 크게 확대한 그의 작품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으로 보였으며 거대하게 확대된 낯익은 물체는 관람자를 시각적으로 유쾌하게 했다.
또한 비닐을 이용하여 전화기, 빵굽는 기계, 변기, 선풍기, 타자기 등을 부드러운 형태로 재현했는데 유머는 그의 작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다.
그는 “크기에 수반되는 가치에 늘 매료되었다”면서 1961년에 발표한 선언문에 적었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예술은 정치적, 호색적, 신비적이며 뮤지엄 꽁무니에 앉아 있는 것 그 이상이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을 모방하고 필요하다면 코믹하고 과격하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예술로 행위한다. ...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마치 담배연기와 신발냄새와도 같다.
나는 예술을 위해 존재하며 입었다 벗은 바지와 같고 구멍 날 양말과 같으며 먹어치울 파이 한 조각과도 같다."

올덴버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총체적으로 요약했다.
“나의 예술의 원천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파이나 햄버그이다.
접시 닦기의 경험은 내가 재생하고자 했던 감각적 효과를 알게 해주었다.
나는 음식을 먹기보다 만지기를 더 좋아한다.
다시 경험해 보고 싶은 요소를 과장한다. 캐리커처처럼 단순화하고 특정한 효과를 강조하는 것이 내 구미에 맞지만, 캐리커처는 아니다.
결과를 합리화시키는 작업이다.
자기 현시욕이 강한 나로서는 솟아나오는 기쁨을 감추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동물적인 욕구는 아름다움에 앞선다. 동물적인 욕구에 근거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나약하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러한 자책감이 나를 이성으로 이끈다.”

워홀의 친구 로버트 인디애나도 대중적인 이미지로 작업하면서 팝아트 운동에 가세했다.
워홀보다 열 살 어린 인디애나는 사실주의 방법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기교가 매우 뛰어나 미국의 정밀주의 예술가들의 후예라는 말을 들었다.
1950년대 중반 은행 나뭇잎과 아보카도를 바탕으로 한 기하적 패턴을 사용하면서 하드에지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1950년대 말 풍화된 강철과 쓰다 남은 목재로 구성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생활의 진부한 사물을 주제로 선택했으며, 특히 인쇄활자와 광고 간판을 전문으로 다뤘다.
생생한 색채는 막연하게나마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모호함을 창조한다.
그는 단어를 초보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어릴 때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 걸린 ‘식사 Eat’라는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려 제작한 <식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 기억 속의 많은 것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한 작품이다.그는 1964년에 워홀과 함께 영화 <식사>를 공동 제작했으며 만국박람회의 뉴욕관을 위해 6m 높이의 ‘EAT’ 간판을 제작했다.

파리 태생 미국 조각가 마리솔(1930~)은 1949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다.
1950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한스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했다.
1955년경부터 나무로 등신대의 인물상을 조각하기 시작한 그녀는 작품의 주제로 가족, 사교계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를 다루었는데, 전자의 예로는 <가족>, 후자의 예로는 <여인과 개>, <파티> 등이 있다.
마리솔의 인물은 상자 모양으로 된 나무 몸통에, 종종 마리솔 자신의 얼굴이나 팔다리를 석고로 형을 떠서 제작한 얼굴이나 팔다리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또한 인물상에 목걸이, TV 수상기, 거울, 꽃병, 우산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여 거의 아상블라주와 유사하게 제작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뉴욕에서 그녀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이때는 팝아트 전성기였고, 마리솔의 작품에도 팝아트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녀의 작품은 유머와 사회 풍자,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보여주었다.

워홀보다 세 살 어린 톰 웨설만은 만화를 그리다가 여인의 몸을 주로 그리기 시작했다.
신시내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만화를 그렸고, 그후 신시내티 미술 아카데미와 뉴욕의 쿠퍼 유니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웨설만은 콜라주와 혼합매체를 사용한 구성을 위해 추상표현주의를 포기했고, 실제 세계와 미술 세계 사이의 긴장이나 모호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재현과 실재를 함께 도입했다.
1961년부터 이미 <위대한 미국인의 누드>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에로틱한 느낌을 주면서 미국 국기의 색이기도 한 빨강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했다.웨설만은 앙리 마티스의 유명한 <핑크 누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핑트 누드>와 비교가 되는 순진한 모델을 <핑크 누드>의 자세를 취하도록 한 후 에어브러시를 사용하여 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했다.
여인의 몸 부분을 확대하여 그리거나 콜라주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와 관련이 있으며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일반적인 환상주의의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누드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몰개성화된 색스 심벌이 되었다.

제임스 로젠퀴스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로 전향한 예술가이다.
1950년대 말부터 로젠퀴스트는 상업 회화에서 파생된 기법을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대 산업문화와 포스터 광고의 가벼운 이미지로부터 도상을 끌어냈다.
그의 작품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파편화된 이미지들과 규모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이미지는 사진 확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확대되고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조각내고 이것들을 원래의 환경으로부터 이탈시켰다.
그의 작품은 워홀과 라우센버그의 신랄함이 결여된 부드러운 불명료성을 지니고 있다.

1960년부터 주로 잡지에서 주제를 구하여 커다란 그림을 그린 그는 말했다.

“우리는 라디오와 TV 그리고 시각 매체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
그것들은 힘 있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것들을 바라볼 때 나는 놀라고 흥분하며 그것들에 매료된다.”

“나는 그림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피하여고 한다”고 말한 그의 그림에는 자전적인 개인 상징이 있다.
1962년에 그린 <모세관 현상>은 나무가 한 그루 있는 풍경화로 영화 포스터처럼 커다란 그림에 여러 개의 작은 캔버스를 부착했다.
<머스 커닝햄의 무도회>(워홀 101)는 커닝햄의 구두를 신은 발을 확대한 캔버스를 따로 삽입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환각을 일으키게 했다.

로젠퀴스트의 작품에 정치적인 요소가 등장했는데 특히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부통령이든 린던 존슨이 대통령 직을 계승했다가 이듬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자초했으며 로젠퀴스트도 반전운동에 동참하여 정치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시위했다.
그의 대작 <F-111>은 이런 작품 중 하나이다. 26m가 넘는 이 벽화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 벽을 꽉 채웠다.
그는 그림에 파이어스톤 타이어와 케이트를 집어넣고 스파게티를 확대하여 캔버스 바닥에 깔고 비치파라솔 아래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그려넣어 전쟁이 인간의 소박한 삶을 파괴함을 시위했다.
소녀의 머리를 말리는 헤어드라이어는 미사일의 윗부분처럼 보인다.
로젠퀴스트는 미국 전투기가 북베트남을 공격한 것을 비난하면서 벽화로 항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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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해프닝은 조립예술과 환경예술에 가깝지만 

 

예술과 인생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해프닝은 조립예술과 환경예술에 가깝지만 조립예술과 환경예술은 고정되고 정지된 반면, 해프닝은 예술가가 움직임으로써 주위의 사물들에 의해서 조절당하면서 사물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케이지는 창작과정에서 우연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해프닝의 의미는 “자연발생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극적인 이벤트이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참여나 반응을 어느 누구에게도 바라지 않으며, 관람자나 해프닝의 행위자 모두 의식이 바뀌기를 목적으로 할 뿐”이라고 말했다.
해프닝에는 대화가 없고 연기가 없으며 상상적 분위기의 연출 또한 없고, 해프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단지 물리적으로 지루함을 보여줄 뿐이다.
해프닝은 넓은 의미에서 머스 커닝햄의 춤과도 관련이 있고 케이지의 음악과도 관련이 있다.
미학의 발전과 함께 해프닝은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캐프로의 아이디어들은 유럽에까지 알려졌고 이브 클랭(그림 64)과 현대판 무당이라고 불리우는 요셉 보이스의 정치적인 행위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브 클랭의 누드를 이용한 해프닝은 영화 〈몬도가네〉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그림 65).

1962년 잡지 《플럭서스 Fluxus》의 창간자이자 대지예술가 조지 매시우나스는 독일 코롱에서 50명의 음악애호가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음악적 이벤트를 벌였다(그림 63).
그들은 피아노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매시우나스는 음악이란 소리를 내는 물질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들면 망치로 쳐서 나는 소리가 피아노 소리라고 했다.
또한 “똑같은 이유로 인간의 언어나 음식을 씹어 먹는 소리가 예술적 노래 부르기보다 더 확실한 소리다”라고 주장했다.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은 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케이지는 음악의 전문분야에 대한 개념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매시우나스와 동료 예술가들은 뒤샹을 비롯한 다다이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을 거꾸로 뒤집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림을 그린다든가 물체를 제작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다.

플럭서스 선언문에서 반(反)음악, 반시, 그리고 반예술을 주장하는 문구가 나타났는데 이는 곧 다다의 정신이었다.
플럭서스 그룹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요셉 보이스가 그룹에 가세하면서부터였고 백남준은 보이스를 만난 후 그룹에 동조했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신사실주의라고 불렀는데 팝아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네오다다로 이해했다.
팝아트는 세계적인 주류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에 편승했으며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그리고 친구 예술가들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위를 한 행운의 예술가들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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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오른의 탱세브레 태생의 브르통은 정신 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은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 왔다고 믿었으므로 그느 제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비평지 <문학>의 편집인이 되었다.
당시 브르통은 마르셀 뒤샹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선언문은 주로 초현실주의 문학과 관련 있었지만,
회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5년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회 ‘초현실주의 회화전’의 기획을 도왔다.


‘초현실적 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서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왔던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실재를 믿으며, 꿈의 편재성과 무관심한 사고 작용을 믿는다.
이는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시스템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동주의는 브르통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1920년 친구 필립 수포와 함께 자유 연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창작한 글을 실은 <자장 Les Champs magnetiques>을 출간했으며, 이것은 자동주의 방법의 첫 예가 되었다.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초현실주의가 회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총체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 또한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회화를 혁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들의 첫 전시회가 1925년 피에르 화랑에서 열렸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르프, 데 키리코, 에른스트, 클레, 만 레이, 마송, 미로, 피카소, 그리고 피에르 로이였다.
이브 탕기가 이들 그룹에 가세한 것은 전시회가 끝난 후였으며,
르네 마그리트가 그해 늦게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했고,
24살의 달 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첫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작성했는데,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통탄할 만한 임기응변”이라면서 초현실주의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막스 에른스트의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하면서 1929년에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장담했다.
이쯤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다.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띄였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파리에서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 국제전들은 초현실주의의 국제적인 확장을 말해준다.
미국의 초현실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발생했다.
그들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과 줄리언 레비 화랑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들 가운데는 탕기, 에른스트, 마타, 샤갈, 브르통, 마송, 첼리체프, 쿠르트 젤리히만 등이 있었다.
그들이 접촉한 미국 예술가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얼마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때때로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의 미국 인디언 미술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런 화가들 중에 아슐리 고르키, 한스 호프만, 애돌프 고틀리브, 윌리엄 배지오티스 등이 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변형한 것은 자동주의의 원리, 즉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계획되지 않고 즉흥적인 구성이었다.
로버트 머더웰은 추상표현주의 흐름 가운데 서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즉흥적인 구성의 원리를 가장 완전하게 확대시킨 작품에 ‘추상적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을 붙였다.


영국에서는 1936년 런던에서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개최되어 1930년대의 정체기에 충격적인 돌팔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독일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예술 모두에서 중요한 운동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을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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