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오른의 탱세브레 태생의 브르통은 정신 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은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 왔다고 믿었으므로 그느 제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비평지 <문학>의 편집인이 되었다.
당시 브르통은 마르셀 뒤샹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선언문은 주로 초현실주의 문학과 관련 있었지만,
회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5년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회 ‘초현실주의 회화전’의 기획을 도왔다.
‘초현실적 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서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왔던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실재를 믿으며, 꿈의 편재성과 무관심한 사고 작용을 믿는다.
이는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시스템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동주의는 브르통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1920년 친구 필립 수포와 함께 자유 연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창작한 글을 실은 <자장 Les Champs magnetiques>을 출간했으며, 이것은 자동주의 방법의 첫 예가 되었다.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초현실주의가 회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총체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 또한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회화를 혁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들의 첫 전시회가 1925년 피에르 화랑에서 열렸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르프, 데 키리코, 에른스트, 클레, 만 레이, 마송, 미로, 피카소, 그리고 피에르 로이였다.
이브 탕기가 이들 그룹에 가세한 것은 전시회가 끝난 후였으며,
르네 마그리트가 그해 늦게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했고,
24살의 달 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첫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작성했는데,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통탄할 만한 임기응변”이라면서 초현실주의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막스 에른스트의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하면서 1929년에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장담했다.
이쯤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다.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띄였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파리에서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 국제전들은 초현실주의의 국제적인 확장을 말해준다.
미국의 초현실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발생했다.
그들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과 줄리언 레비 화랑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들 가운데는 탕기, 에른스트, 마타, 샤갈, 브르통, 마송, 첼리체프, 쿠르트 젤리히만 등이 있었다.
그들이 접촉한 미국 예술가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얼마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때때로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의 미국 인디언 미술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런 화가들 중에 아슐리 고르키, 한스 호프만, 애돌프 고틀리브, 윌리엄 배지오티스 등이 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변형한 것은 자동주의의 원리, 즉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계획되지 않고 즉흥적인 구성이었다.
로버트 머더웰은 추상표현주의 흐름 가운데 서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즉흥적인 구성의 원리를 가장 완전하게 확대시킨 작품에 ‘추상적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을 붙였다.
영국에서는 1936년 런던에서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개최되어 1930년대의 정체기에 충격적인 돌팔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독일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예술 모두에서 중요한 운동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을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