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케 그룹


브뤼케Die Brucke 그룹은 젊은 독일 건축학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프리츠 블라일에 의해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의 <브뤼케 그룹 연감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ucke>에는 키르히너가 블라일과 헤켈을 만난 1903년이 창립 연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슈미트-로틀루프가 합류한 1905년에 공식적인 모임이 처음 이루어졌다.
1906년 막스 페히슈타인이 가입하고 1907~08년 에밀 놀데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키르히너는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폴리네시아 미술을 비롯한 여러 원시 미술을 열렬히 찬양한 인물이지만 원시주의 미술품의 영향은 그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후기 고딕 양식의 독일 목판화와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뮤지엄의 민속 자료실에 소장된 목조조각과 같은 윈시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야수주의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다.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일화적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모두 혐오했고,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싹튼 표현주의를 뭉크와 호들러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으로 창조하려고 했다.
실제로 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주로 현대 독일 미술 경향에 작용하게 된 데는 이들의 영향이 컸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놀데를 멤버로 초대하는 편지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적었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것, 이것이 바로 브뤼케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러나 미래의 미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결코 내려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경 브뤼케 그룹의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페히슈타인은 그곳에서 놀데와 함께 신분리파Neue Sezession를 결성했다.
이 그룹은 놀데의 <오순절>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결성된 것이다.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도 신분리파에 가담했으며, 거기서 오토 뮐러를 만나 그를 브뤼케 그룹의 마지막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브뤼케 그룹을 독립적이며 완전한 그룹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곧바로 신분리파를 탈퇴했고 페히슈타인이 계속 신분리파에 집착하자 그를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했다.
드레스덴에서 공부하고 1906년에 브뤼케 그룹의 일원이 된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는 1908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현대미술 논쟁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신분리파 창설을 주도했다.
1912년에 신분리파를 떠나라는 요구를 페리슈타인이 거부하자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 당했다.
그는 프랑스 야수주의, 특히 마티스의 피상적인 특징을 모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의 두 번째 전시회에 함께 참여했지만, 키르히너가 <브뤼케 그룹 연감>에서 밝힌 그룹의 목적과 정책이 1913년 논란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브뤼케 그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01~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그 사이 1903~04년에는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 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드레스덴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은 다른 그룹의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재능은 때로 회화보다는 판화에서, 특히 목판화에서 더욱 충분히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06년 그의 회화양식은 독일 표현주의와 반 고흐의 양식에 기초를 두었으며,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에 보이는 거칠고 강한 색채의 병치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헤켈의 작품은 브뤼케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 비해 다소 서정적인 편이며 그는 병과 내적 고통을 묘사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풍경화에서는 대부분의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이 아닌 장식적인 특징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1911년에 베를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파이닝거, 마케, 마르크와 교류하면서 그의 회화의 형태적인 구조가 힘과 짜임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미지는 거칠게 각이져 비틀리고 표정은 고통스러우며, 몸짓은 딱딱하면서도 산만하게 표현되어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노란색과 흐린 푸른색을 강렬한 빨간색과 거칠게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했다.
1914년부터 헤켈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엔소르, 베크만과 만나게 되었다.
풍경화에서 색채는 좀더 어두워졌으며 구성 요소들을 대립시켜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고, 작품의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1920년 이후의 작품은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본래의 이름이 카를 슈미트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에 비해 그의 양식은 더 활력이 넘치면서도 거칠었다.
이런 특징은 특히 목판화의 투박한 표현방식에서 두드러졌으며, 색조의 변화 없이 대조되는 색채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에도 반영되었다.
1906년 놀데와 함께 알젠 섬에 머물면서 놀데로부터 ‘기념비적인 인상주의’를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1907년 헤켈과 함께 방문한 당가스터에서 그린 풍경화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그의 기념비적인 회화양식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는 흑인 조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색조의 변화가 없는 원색들의 강한 대조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후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원근법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이런 거칠고 평면적인 형태를 수정해나갔는데, 이는 키르히너의 영향 또는 1924년 파리 여행과 1930년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896~98년 드레스덴에서 회화를 공부한 오토 뮐러Otto Muller(1874~1930)는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표현하는 회화를 목표로 삼았다.
뮐러는 다작을 하는 화가였지만 1908년 이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을 나중에 파괴했다.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0년 베를린 신분리파 가입을 거부당했다.
당시 거부당한 예술가들이 모여 개최한 전시회에서 브뤼케 그룹 화가들을 만나 브뤼케 그룹에 동참했으며, 1911년 키르히너와 함께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했다.
뮐러의 양식은 브뤼케 그룹의 영향으로 더욱 거칠고 딱딱하게 변해갔으며 윤곽선을 강조하게 되었다.
풍경 속의 누드 혹은 순수한 풍경화를 그렸으며 1920년 이후에는 집시도 모티프로 사용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기교를 지녔기 때문에 디스템퍼를 사용해 번들거림이 없는 마무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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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시즘


보티시즘이란 명칭은 1913년 말 에즈라 파운드가 혁신적인 이론들의 혼란 속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끌어내고 결집시키는,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힘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는 또한 모든 예술적 창조는 감정적인 돌풍의 상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미래주의자 보초니의 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명칭에 의해 암시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거칠고 각지며 사선을 향하는 새로운 작업의 양식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불화가 잦으며 과장된 보티시즘Vorticism의 근원은 미술 운동의 출현에 있어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며 다다,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보티시즘의 본래 목표는 미래주의의 역동적 스피드와 입체주의의 정적인 기념비적 특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예술가들이 선호한 실내의 작업실 모티프를 단호히 거부하고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열정적으로 묘사한 기계 이미지를 매우 냉정하고 고전적 방식으로 다루어 독창적인 종합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보티시즘 초기에 혼란스럽게 대립되는 경향 하에서도 유지되었던 일관성과 지침은 더 이상 발전해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 운동은 사실상 소멸되었으며, 그것을 되살리려던 이질적인 모임인 그룹 X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보티시즘의 중요성은 나중에 가서야 드러났다.

1974년 리처드 코크는 적었다.
“지금에서야 보티시즘이 1930년대 영국의 두 번째 추상 운동을 자극한 선례라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감탄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침체된 섬나라의 진취적이지 못한 성향을 비난한 사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보티시즘Vorticism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이념에 붙여진 명칭으로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 미술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이 운동은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속한 예술가들 사시의 불화로 시작된 것으로 프라이와 윈덤 루이스의 개인적인 다툼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런던 태생으로 화가이며 평론가 로저 엘리엇 프라이Roger Eliot Fry(1866~1934)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이학 학위를 받은 뒤 1891년 이탈리아, 이듬해에는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프라이의 비평은 당시의 기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1901년 <디 애시니엄 The Athenaeum> 지의 평론가였고, 1905~10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관장을 역임했으며, 1910~19년 <벌링턴 매거진> 편집자로 활약했다.
1906년 폴 세잔을 발굴하면서 현대 프랑스 회화 유파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 아래 영국에 소개했다.
프라이는 프랑스 화가들 쇠라, 시냐크 등의 신인상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후기 인상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당시 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는 독일적 취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13년 프라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겉치레의 ‘지나치게 꾸민’ 인공물 대신 매일 사용하는 잘 디자인된 물건들을 생산하기 위해 오메가 공방을 만들었다.
그의 목적은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하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을 주변에 모이게 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기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프라이는 윈덤 루이스와의 개인적인 불화로 루이스 및 그의 동료들과 결별했고, 이들은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하여 보티시즘 운동을 발전시켰다.
후에 프라이는 런던 그룹이 캠던 타운 그룹에서 파생되었을 때 이 그룹에 가입했다.
화가로서 프라이는 블룸즈버리 그룹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반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루면서 꼼꼼하지만 평범한 자연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영국 화가, 소설가, 평론가 퍼시 윈덤 루이스Percy Wyndham Lewis(1882~1957)의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을 조상으로 둔 영국인이다.
1898~190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뮌헨, 네덜란드, 스페인, 파리를 여행했고, 그 중 6개월 동안을 뮌헨의 하이만 아카데미에서 작업했다.
1909년 영국에 정착하여 1911년 캠던 타운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회부터 3회까지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1913년 7월 연합예술가협회 살롱에 출품했으며 같은 시기에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참여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해 10월 프라이와 의견 충돌을 빚은 뒤 프레더릭 에철스Frederick Etchells(1886~1973), 에드워드 워즈워스Edward Wadsworth(1889~1949), 커스버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과 함께 오메가 공방을 떠났으며 스스로를 ‘반란자’라고 부르면서 마리네티를 숭배하는 네빈슨이 그를 기념하여 주최한 공적인 저녁 만찬에서 자신들이 미래주의의 선동자 마리네티를 지지한다고 밝힘으로써 반항심을 드러냈다.
이들의 분열이 프라이의 후기 인상주의 미학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한 추상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반감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1913년 12월~1914년 1월 퍼시 러터의 기획으로 브라이턴에서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출품된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는 모든 다른 양식과 그룹이 공통적인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의도를 지닌 포괄적인 성격의 런던 그룹의 형성과 연결되었다.
루이스는 전시회에 포함된 입체주의 전시실의 도록에 도전적인 서문을 썼고 이 글은 런던 그룹 탄생의 기원이 되었다.
반란자 그룹은 ‘입체주의 전시실’이라는 분리된 장소에서 전시했으며 루이스는 그 전시회를 위해 미래주의와 블룸즈버리 그룹의 미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이 전시회에서 데이비드 봄버그라는 젊고 명석한 화가가 그룹에 가담했다.
그들은 1914년 3월 공식적인 제1회 런던 그룹 전시회에 참여하여 정통적인 평론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조각가 엡스타인과 저술가 에즈라 파운드, T. E. 흄이 그룹에 가담했다.
루이스는 이 그룹 전시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시기에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했는데, 여기에서 보티시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피혁업에 종사한 폴란드계 이민자의 아들 데이비드 봄버그David Bomberg(1890~1957)는 석판화가의 도제로 일하면서 시티 앤드 길즈 인스티튜트의 야간반에서 월터 베이스에게 배웠고 1911~13년에는 유태인 교육 자선회의 도움으로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봄버그는 루이스의 보티시즘 운동에 동조했으며 1914년 봄 화이트 채플 미술관이 기획한 ‘20세기 미술’ 전시회의 개최를 도왔고 자신도 그 전시회에 출품했다.
같은 해 런던 그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봄버그는 1915년 보티시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을 전시했다.

미국계 영국 조각가 제이컴 엡스타인 경Sir Jacob Epstein(1880~1959)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1년 낮에는 청동공장에서 일하면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야간 소묘 강좌를 수강한 후 조지 그레이 버너드의 조수로 일했다.
1902~05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루브르 뮤지엄을 드나들며 고대 및 원시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엡스타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으며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엡스타인은 1905년 런던에 정착하고 2년 후 영국 시민이 되었다.
1912년 피카소, 브란쿠시, 모딜리아니를 만났으며 이는 향후 5년 동안 그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볼티모어 뮤지엄과 예일 대학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의 <비너스>는 단순한 기하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윈덤 루이스와 그의 그룹이 주장한 기계문화 개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하고 독특한 작품 <착암기>는 보티시즘 그룹이 표방하는 바에 더욱 근접했다.
1913년 영국으로 돌아와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의 ‘입체주의 전시실’에 출품했다.
1914년 런던 그룹 전시회에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화이트 채플 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미술’ 전시회에도 출품했다.
그는 레벨 아트센터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잠시 보티시즘 예술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954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4년 3월 오메가 공방에 대항하여 레벨 아트센터가 그레이트 오먼드 가 38번지에 세워졌다.
제시카 디스모어Jessica Dismorr(1885~1939), 로렌스 앳킨스Lawrence Atkinson(1873~1931),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1895~1980), 프랑스 조각가 앙리 고디에-브제스카Henri Gaudier-Brzeska(1891~1915) 등이 반란자 그룹에 가담했다.
레벨 아트센터는 흄과 루이스 사이의 불화로 인해 곧 분열되었고, 그러는 동안 봄버그는 이런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1914년 7월 셔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엡스타인도 이런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네빈슨의 지지를 받던 마리네티파가 무분별할 정도로 강하게 밀고나와 어느 정도 단결이 회복되었다.
1913년 6월 콜리세움에서 ‘위대한 미래주의 소음 음악회’가 열렸으며, 마리네티의 연극적인 태도는 이 음악회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는 그런 태도를 통해 미래주의가 런던에서 가장 최신의 유행이며 관심의 대상임을 증명했다.
그는 네빈슨과 함께 6월 7일 <옵서버> 지에 “생명이 넘치는 영국 미술의 진보적임 힘과 위대한 미래주의 화가들 및 선구자들의 천재성을 지지하고 보호하며 찬양할 것을 영국 대중에게” 요구하고 ‘반란자들’의 이름으로 서명한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모두의 비난을 받았다.
7월 2일 루이스 편집한 <블라스트 Blast> 창간호에 보티시즘의 선언문이 실렸다.
1914년 6월과 1915년 7월에 발행된 두 권의 편집을 루이스가 맡았다.
<블라스트> 제2호는 이듬해에 간행되었으며, 1915년 6월 보티시즘 전시회가 도레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1917년 1월 미국 소장가 존 퀸이 파운드의 권유로 보티시즘의 뉴욕 전시회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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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아트


미니멀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의 몇몇 특징과 액션 페인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5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경향을 말한다.
미니멀리즘이란 용어와 개념을 러시아계 미국 화가이며 이론가 존 그레이엄John Graham(1881~1961)이 1937년 <미술의 체계와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이미 사용했으며,
앞서 다비트 부를리우크는 1929년 듀덴싱 화랑에서 열린 그레이엄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미니멀리즘은 작업 수단의 최소화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 미니멀리즘 회화는 주제가 곧 회화 자체가 되는 순수하게 사실적인 것이다”라고 적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는지 또는 어디서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레이엄이 쓴 글에 의하면 가보, 리시츠키, 다비트 부를리우크,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알고 있었고, 그의 초기 작품은 광선주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말레비치,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행하던 신지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20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다.
뉴욕 화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모더니즘의 대변자라는 평을 들었고 미국 미술과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연결시키는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그레이엄은 미국에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법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이미 이것을 언급했으며 미니멀리즘의 논리를 예견했다.
그는 <미술의 체계와 변증법>에서 신비철학, 신비주의, 현대 미술의 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브를리우크는 미니멀리즘이 회화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면서 그레이엄을 선구자로 꼽았다.

현대 미술 운동의 동향을 설명하는 많은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미니멀 아트는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
영국 평론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현대미술의 개념>(1974)에 기고한 ‘미니멀 아트’에서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적었다.
“여기에서 논의된 모든 미술 운동 중에서 미니멀 아트는 가장 불분명하며, 가장 독립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미술을 통틀어 이보다 더 현대 미술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니멀 아트에는 두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단일 색채로 균일하게 채색된 캔버스처럼 미니멀 작품은 거의 차별화 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이 된다.
둘째, 작품이 뚜렷하게 차별화 되어도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도에 머무르는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량생산품이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사용되어 이들이 서로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니멀 아트란 명칭은 평론가 바버라 로즈가 1965년 <아트 인 아메리카> 10, 11월호에 기고한 논문 ‘ABC 아트’에서 사용했다.
미니멀 아트 중에서도 최소한의 내적 차별성을 지닌 한 부류에만 주목한 로즈는 1950년대에 일어난 새로운 감수성으로의 전환에 대해 언급하고
“공허하고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비인격성을 지녀 앞서 등장한 낭만적이고 자전적인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격심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관람자가 감정과 내용의 명백한 부재를 목격하고서 얼어붙도록 만드는” 미술에 대해 서술했다.
로즈는 새로운 종류의 미술이 독창성, 감상적이거나 표현적인 내용, 복잡성과 같은 전통적인 필요조건들을 의도적으로 폐기 처분했다고 지적했다.

재즈 음악가이기도 한 프랑스 화가 클랭은 유럽의 네오-다다 운동의 주도자였으며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와 함께 누보 레알리즘 운동을 시작했다.
레스타니는 1960년에 누보 레알리슴 선언문을 발표했다.
클랭은 1946년에 이미 한 가지 색으로 균일하게 칠한 비대상 회화인 모노크롬을 작업했지만, 1950년에 런던에서 비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1955년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에서는 거부당했다.
1956년 파리의 콜레트 알랑디 화랑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IKB)’이라고 부른 독특한 푸른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폰지 부조를 제작한 ‘푸른색 시기’를 맞이했다.

1959년 소르본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클랭은 자신의 모노크롬 회화 이론은 색채에서 주관적인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색채가 갖는 개성을 없애고 색채에 형이상학적 특징을 부여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설명했으며,
“그리고 내가 점차적으로 빗물질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색채를 통해서였다”고 했다.
이 강연의 일부는 1973년 김펠 피스 화랑이 기획한 회고전 도록에 다시 실렸다.
클랭은 자신이 푸른색을 선호한 이유를 밝혔다.
“푸른색은 어떤 특징도 없으며, 특징이라는 한계를 초월하지만 다른 색채는 그렇지 않다.
다른 색채들은 거의 심리적인 의미로 확대 해석되는데, 열을 발산하는 것으로 미리 상정되는 붉은색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든 색채는 심리적으로 물질적이거나 실체적인 개념을 연상시키지만, 푸른색은 바다와 하늘 정도만을 암시할 뿐이다.“

클랭은 1958년 흰색으로 칠해진 텅 빈 화랑을 보여준 <텅 빈 전시회>로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52년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된 일련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고 이어서 전체적으로 검정색으로 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찢기고 구겨진 신문이 붙어 있고 검정색 에나멜 물감으로 인해 표면이 불규칙적이고 전체가 검은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그는 미니멀리티를 실험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였다.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은 기교를 감축하고 전통적인 미술의 방식을 거부하는 미술에 더 포괄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 모리스 루이스는 종종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잭슨 폴록의 후기 작품에서 헬렌 프랭컨탤러로 이어진, 초벌칠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얼룩을 만드는 기법을 루이스가 도입하면서 물감의 회화적인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니멀 조각가들로 토니 스미스,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 도널드 저드 등이 있다.
1933~36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 1937~38년에는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토니 스미스Tony Smith(1912~80)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현장 감독으로 견습생활을 했으며, 1940~60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다.
1940년경 조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960년대 초에는 미니멀 아트 조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스미스의 작품은 규모가 크고, 강철 또는 채색한 강철로 제작된 단순한 기하 형태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조각은 잘 들어맞는 모듈 단위체나 직사각형의 상자들로 구성되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은 표현성과 환영을 배제하고 미술작품을 오브제 그 자체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미니멀 아트의 미학을 동시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브란쿠시 제자로 나무 조각을 시작으로 조각에 몰두한 칼 안드레Carl Andre(1935~)의 초기 작품에서 브란쿠시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쉽다.
1960~64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서 일했으며, 그 경험으로 상호 교환이 가능한 규격화된 단위의 사용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66년 뉴욕의 유태 미술관에서 열린 ‘기초적 구조’ 전시회에 선보인 그의 작품 <지렛대>는 139개의 내화 벽돌을 각각 분리시켜 일렬로 배열해놓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그 중 일부는 시리얼 아트 및 체계적인 미술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 재료들을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인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1965년경부터 간단한 수학 원리에 따라 직각의 격자 모양으로 작품을 바닥에 수평으로 배치했다.
또한 대지 미술도 시도하여 이 분야의 선구자로 꼽힌다.

1948~51년 캔자스시티 대학, 캔자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한 후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1931~) 1953~55년에 오리건 주의 리드 칼리지에서 수학하고 1966년에는 헌터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 주창자 중 가장 뛰어나며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로 꼽힌다.
그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 non-relational’ 혹은 ‘전체론적 holistic’인 미학을 표방했다.
1965년 뉴욕의 그린 화랑에서 기초적 구조 작품들을 전시했으며, 그후 부분과 내부 구조가 없는 기본적인 다면체와 같이 즉시 명시할 수 있는 단순한 오브제들을 발표하면서 기교를 거부하고 극도의 지적인 단순화를 추구했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에서 조각가이면서 이론가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단일한 형태 unitary forms’라고 명명한 기초적 구조 이론은 1966년 <아트 포럼> 2월호와 10월호에 기고한 논문 두 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이 논문들은 1968년 그레고리 뱃콕이 엮은 <미니멀 아트>에 재수록되었다.
모리스가 용의주도하게 가장 쉽게 지각되고 이해되는 형태, 더욱 단순한 다면체를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추상표현주의가 신봉하던 즉흥적이며 개성적인 표현에 대한 반발이었다.
동시에 그는 몬드리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원칙, 즉 미술작품은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통일된 체계라는 입장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 작품에서는 모듈의 변화와 연속적인 반복을 점차 중시함에 따라 형태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또한 모리스는 1960년대에 칼 안드레와 함께 예술가의 작업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 방식을 탈피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스튜디오나 화랑 같은 제한된 공간을 넘어 환경 속에서 미술품으로도 가능하도록 설계된 ‘현장 in situ' 조각작품 개념을 주창했다.

미니멀 아트의 주도적인 인물이며 이론가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94)는 1946~47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1953년 컬럼비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마이어 사피로의 지도를 받아 미술사학을 공부하여 1962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드는 1959~65년 <아츠 매거진>의 미술비평가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화가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저드는 이 시기의 작품을 “불완전한 추상 half-baked abstractions”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에는 표면의 질감을 강조한 단색조의 부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3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상자와 같은 똑같은 직사각형 형태를 벽에 설치된 사다리처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특수한 오브제’라고 했으며, 1965년 <아츠 이어북 Arts Yearbook>에서 처음 출간한 ‘특수한 오브제’란 제목의 글에서 땅 위에 놓여진 이런 조각을 옹호했다.
“실제 공간은 평편한 표면의 회화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력하고 특별하다.”
처음에는 주로 나무로 작업했지만 1963~64년 뉴욕의 그린 화랑에서 열린 성공적인 전시회 이후 공업용으로 제조된 다양한 금속과 채색된 퍼스펙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 저드는 작품을 전시할 특별한 장소에 맞추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야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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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 회화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방법에 의한 것으로 1951년 잭슨 폴록이 시작했다.
이런 방법을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뉴욕 태생으로 1949년 버몬트의 베닝턴 칼리지를 졸업한 프랭컨탤러는 아슐리 고르키와 잭슨 폴록의 영향 아래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개했다.
특히 새로운 색채 배합 방법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950년경 캔버스의 넓은 면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색만을 칠한 양식으로 주목받았다.
1950년대 초에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 염색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폴록으로부터 이어받았으며 이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회화적인 붓자국을 없앨 수 있었다.
1952년작 <산과 바다>는 모리스 루이스와 케니스 놀런드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이들의 양식 전개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프랭컨탤러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회화로 연결되는 비약적인 발전의 중요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62년경부터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으나 염색 기법을 고수하여 그려진 이미지와 캔버스의 표면이 완전히 일치하도록 했다.
프랭컨탤러는 1958년 로버트 머더웰과 결혼했고, 1968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일 대학 캘훈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정되었다.
1973년에는 스미스 칼리지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이며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프랭컨탤러는 형상-바탕의 환영적인 대비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고 색채를 순전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서정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염색 기법과 뿌리기 기법은 이전에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온 회화적이고 촉각적인 표면 효과를 없앴다.
이 기법을 받아들인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1912~62)는 이전보다 더욱 순수한 시각적 색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태생의 루이스 아버지는 러시아 이민자였다.
그는 1939년경부터 화가로서 루이스라는 성을 사용했다.
1929~33년 볼티모어 순수응용미술학교에 다닌 뒤 1936년 뉴욕으로 가서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이젤화 부문에 참여했고, 당시 두코 에나멜 물감을 사용하여 기법적인 실험을 하던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와 다른 화가들의 작업실에 합류했다.
1940년 볼티모어로 돌아와 개인 지도를 했으며 1948년부터 마그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4년 케니스 놀런드와 함께 뉴욕의 쿠츠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시기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루이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4년 루이스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여 회화 양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프랭컨탤러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 <산과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때부터 루이스는 묽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면포에 초벌칠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부분적으로 풀을 먹이고 그 위에 물감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층을 이루는 대신에 염색용 염료처럼 스며들었다.
루이스는 캔버스 자체를 움직이거나 캔버스를 살짝 고정하고 있는 틀을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조정했다.
1954년과 1957~60년에 제작한 <베일> 연작에서는 캔버스 위에 부은 물감의 반투명한 색들이 부분적으로 겹쳐 줄무늬를 형성했다.
물감을 붓는 기법으로 인해 루이스는 작품에 개성이 개입될 여지를 없앴으며 액션 페인팅의 제스처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기법으로 추상적 이미지가 사라져 구상의 마지막 흔적도 제거되었다.
따라서 이 염색 기법은 최종적으로 물감을 칠한 회화의 표면에서 항상 느낄 수 있기 마련인 촉감을 차단하여 색채가 지닌 순수한 시각적 효과만을 보여주었다.
이 기법은 특별히 정밀한 실행을 요구하여 일단 제작된 뒤에는 수정이나 변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이스는 1955년에 제작한 작품 대부분을 폐기했으며 1957년 뉴욕의 마사 잭슨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으나 팔리지 않은 작품 대부분도 폐기했다.

루이스는 1960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120점의 <펼쳐짐 Unfurleds> 연작을 그렸다.
이 연작에서는 캔버스의 오른편과 왼편에 대각선 색띠를 넣어 각기 피라미드 반쪽 형태를 만들었는데, 피라미드의 나머지 반쪽은 화면 밖에 위치하는 것이 되므로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캔버스의 넓은 중앙 부분은 신기하게도 여백이 아닌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영역이 된다.
또한 <펼쳐짐> 연작에서는 색띠의 윤곽선이 더욱 명확해졌으며 색채도 겹쳐짐 없이 순수한 상태로 나타난다.
1961년 봄 루이스는 <펼쳐짐> 연작을 중단하고 그의 마지막 연작이 된 <띠>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에서는 수직 색띠 다발이 빈 캔버스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 겹쳐짐은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일한 순색으로 이루어진 수직 띠들의 윤곽선은 매우 명확하고 단지 색채 조화와 대비를 위해 부분적으로 조금 번져 있다.
색띠의 너비도 색채 고유의 색감 정도나 체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루이스가 이루어낸 색채의 비물질화로부터 그의 계승자들은 미술작품의 비물질화까지 끌어냈다.
이런 예로 순수하게 시각적인 색 안개와 같은 줄스 올리츠키의 모노크롬 스프레이 회화와 물감이 흠뻑 스며든 색면 위에 찍힌 래리 푼스의 진동하는 다원형 점, 로버트 어윈의 구부러진 색 원반을 들 수 있다.

러시아계 미국 화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는 1939~42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1940~47년 뉴욕의 보자르 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 후 자드킨 조각학교와, 1949~50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54년 뉴욕 대학에서 미술 교육으로 학위를 받고, 1956~63년 롱아일랜드의 포스트 칼리지, 1963~67년까지 베닝턴 칼리지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올리츠키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여 프랭컨탤러와 루이스가 시작한 염색 기법을 채택하여 발전시켰다.
1960년대 초의 이른바 ‘중심핵’ 그림들은 놀런드의 동심원과 루이스의 <펼쳐짐>을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윤곽선을 결합한 것이다.
1964년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올오버 회화를 시작했다.
윤곽선이 없어진 그의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 단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제작하는 색면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는 주로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에서 올리츠키는 형태나 물감의 물리적 영향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색감이 만드는 순수한 시각적 장을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염색 기법과 그 이후의 스프레이 뿌리기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유사한 톤의 색띠들이 이루는 미묘한 대비와 함께 신비롭게 떠다니는 색채 안개로 밝고 현란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형태나 원근법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색채만으로 환영적 공간을 창조했다.
1970년대에는 색채의 범위를 줄여 회색과 갈색의 미묘한 변화를 주로 다루었으며, 간혹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화면에 도입된 표현적인 표면 효과는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면을 구사한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개성 있는 방식을 전개했다.

도쿄 태생 미국 화가 래리 푼스Larry Poons(1937~)는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와 뉴욕의 신사회 과학원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지도를 받은 뒤 1958년 보스턴 미술관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푼스는 프랭컨탤러와 루이스와 더불어 색면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개인적인 양식은 색면 회화와 차이가 있다.
푼스는 강렬한 색채 위에 계란형의 점들을 그렸는데 이는 시지각의 작용에 의해 후퇴하는 듯이 보이며 신기한 잔상을 만든다.
이처럼 독특한 시각 경험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는 한때 옵 아트 화가들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그의 작품은 좀더 회화적이 되어 색채는 더욱 엄격해지고 점은 박테리아를 현미경으로 확대시킨 것과 유사한 줄무늬들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그림에 깊이감과 공간감이 생겼으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색채의 시각적 경험이었다.

미국 화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1928~)은 지각 심리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1966년부터는 작품을 통해 지각적 조작과 공간 변경을 위한 조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구성 요소들의 수적인 측면이나 복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끊임없이 단순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1968~69년에 제작한 ‘원반 회화’ 연작은 유명한데 이는 원반 형태를 벽에 걸고 주의 깊게 빛을 비춰 굴절시킨 것으로 정확한 형태라든가 정해진 위치 없이도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색채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초에는 조심스럽게 자르고 광택 처리하여 프리즘처럼 무지개 빛이 나는 아크릴 수지를 재료로 원주를 제작했으며,
캘리포니아 주 노스리지 시의 의뢰를 받아 10m 높이의 조각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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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니즘


윌러비 샤프는 1967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광선, 움직임, 공간’ 전시회 도록에서 처음으로 루미니즘Luminism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루미아Lumia란 용어는 토머스 윌프리드(1889~1968)가 20세기 전반기에 자신의 광선 구조물을 설명하며 이미 사용한 적이 있었다.
덴마크계 미국 실험예술가 윌프리드는 덴마크, 런던,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뒤 1916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광선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지 않고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매체로 생각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1905년부터 백열등과 담배상자 안에 집어넣은 채색된 유리조각들을 이용하여 광선 구조물을 실험했다.
1919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건과 이들을 연결시키는 색깔 있는 연동장치로 이루어진 5개의 건반과 6개의 주된 영사기 및 여러 개의 보조투광기로 구성된 장치를 가지고 최초의 ‘클러빌럭스 Clavilux’를 제작했다.
이것은 회전하며 조절되는 거울들과 채색된 유리 슬라이드들을 통해 빛의 흐름이 스크린 위에 투사되도록 조종되고, 스크린 위에는 미묘하고 복잡한 색채의 변화와 혼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28년에는 자동으로 조작되는 클러빌럭스를 처음 제작했다.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작품을 20개 이상 제작했으며,
시카고의 셔먼 호텔에 있는 64m 길이의 <움직이는 벽>(1929)과 1964년 뉴욕 모마 강당 라운지에 설치된 <루미아 조곡 Op. 158> 등 빛을 이용한 많은 다른 구조물을 제작했다.
1930년 빛을 미술의 영역에서 사용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라이트 아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윌프리드는 1948년 12월 <미학과 미술 비평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더욱 위대한 리얼리티, 조화로운 의식, 인간의 본질과 위대한 공통분모 사이의 균형, 즉 보편적이고 리드미컬한 흐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미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경에 생긴 ‘색채 오르간’ 개념은 다색 광선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거나 음악은 없더라도 음악을 연상시키는 구성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며, 예수회 신부이자 수학자인 루이 베르트랑 카스텔(1688~1757)이 1734년에 처음으로 색채 오르간인 <클레브생 오퀼레르>를 연주했다.
다색 광선의 움직이는 형태와 음악을 조화롭게 일치시키거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연상시키려는 시도는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과 러시아 추상화가 바라노프-로시네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알렉산데르 스크리아빈(1872~1915)은 1915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열린 <프로메테우스> 공연에서 음악과 광선이 어우러진 환경을 구축했으며, 블라디미르 바라노프-로시네(1888~1942)는 <색채 피아노>를 제작했다.
그는 <색채 피아노> 위에서 시각적 연주를 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회화를 수학한 바라노프-로시네는 1910~16년 파리에 머물면서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입체주의에 이르는 현대 미술을 섭렵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추상화와 추상 구성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No. 1>(1913)은 뉴욕 모마에서 소개한 것으로 다색의 목판과 잘게 부순 계란껍질 및 판지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193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비구상적인 색채 구성으로 음악적인 소리와 같이 공명하는 비구상 미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표현적 추상을 이끌어냈던 19세기 말의 주요 미술 개념 중 하나였으며 이런 경향은 쿠프카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보헤미아 동부의 오포치노 태생 구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는 소년 시절 그 지방에서 강신술사자로 알려져 비밀 종파를 이끈 마구제조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이때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 나타나자 강신술과 비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신지학에도 관심을 쏟았고, 특히 신지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1888년 야로메르에 있는 미술실업학교에서 알로이스 스투드니치카Alois Studnicka(1842~1927)의 지도로 미술 수업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프라하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코의 나자렛 화파의 추종자였던 스투드니치카의 영향으로 쿠프카는 장식미술과 추상미술의 표현력 있는 색채와 체코 화가 요세프 마네스Josef Manes(1820~71)와 미쿨라시 알레시Mikulas Ales(1852~1913)에 대해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프카는 프라하에서도 역시 나자렛 화파의 종교 화가인 프란티세크 세크벤스Frantisek Sequens(1836~96)에게 지도받으며 정신적 상징주의 미술을 주창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쿠프카는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모든 추상적인 것들을 묘사할 수 있는 수단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를 창조하기로 하고 스스로를 ‘색채 교향악가’라고 했다.

쿠프카는 움직임의 묘사와 에티엔-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프chronophotograph 기법,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비재현적인 추상 형태로 움직임을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09년 음악의 법칙에 따른 움직임과 연속운동을 묘사한 파스텔화와 소묘 연작을 내놓았다.
그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음악에서 유추한 미술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라슬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는 1920년대에 ‘광선 조절기’를 제작하면서 ‘프로그램이 입력된 광선 로봇’으로 묘사되어 온 광선 전시 기계를 만들어 영화 <광선 전시, 검정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1925~30)의 제작에 사용했다.
헝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모홀리-나기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1918년 부다페스트에서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모임인 오늘이라는 의미의 마MA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 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말레비치, 리시츠키, 가보의 영향을 받았다.
1923~28년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하며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실험영화, 연극, 산업디자인, 사진, 타이포그래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1928년 그로피우스와 함께 바우하우스를 그만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 베를린에서 주로 무대디자인과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1935년 런던으로 가서 <서클>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그룹에 합류하여 광선회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런던에서 공간 조절기Space Modulators로 명명한 구조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37년 시카고로 활동무대를 옮겨 뉴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고, 조지 케페시와 함께 디자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모홀리-나기는 구성주의 화파에서 가장 실험정신이 강하고 다재다능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미술에 광선, 움직임, 사진, 영화,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소위 순수미술은 전체 환경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구성주의 원리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21년 한스 리히터(1888~1976)는 V. 에겔링과 함께 광선을 투사하여 자신의 첫 번째 추상영화인 <리듬 21>을 제작했다.
베를린 태생 독일 화가 리히터는 1917년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다다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때부터 추상 작품을 제작했지만 표현주의적 성격을 띤 목판화와 리놀륨 판화도 계속해서 제작했다.
1918년 스웨덴 추상화가 에겔링을 만나 오랫동안 교류하며 함께 음악의 리듬과 대위법에 바탕을 둔 추상적 ‘두루마리’ 소묘를 제작했다.
1920년에 신조형주의와 구성주의를 접한 후 1921년부터 추상영화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검정색, 흰색, 회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커다란 캔버스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효과를 실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투사기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레 파르크, 리폴드, 게르하르트 폰 그레베니츠, 페테르스, 비아시 등은 광선을 투사하기 위해 회전하거나 곡면을 지닌 거울과 반사기, 편광, 렌즈와 프리즘을 이용한 굴절 조절, 막힌 부조 표면 등을 이용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아르헨티나 실험예술가 훌리오 레 파르크Julio Le Parc(1928~)는 1958년 파리로 건너가 잠시 빅토르 바자렐리 밑에서 작업한 후 시각예술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옵 아트, 키네틱 아트, 광선을 이용한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라 작업했으며, 작품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고, 시각예술연구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제작을 선호했다.
그는 관람자의 주관적인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각 반응을 찾았다.
1960년경에는 색채와 광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프리즘과 입방체를 사용하여 모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했는데,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은 투명성과 반사광 면에서 계산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가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부조도 제작했고, 여러 재료의 다양한 표면 질감을 이용하여 반사광을 얻었다.

미국 조각가 리처드 리폴드Richard Lippold(1915~)의 아버지는 기계공학자였다.
리폴드는 1933~37년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1940~41년 미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중 철사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거의 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은 금속선과 금속대를 사용하여 긴장감 있게 구성된 구조물로 무게가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광선과 키네티시즘에 주로 의존하며, 특히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에서 움직임이 발생하는 기법을 이용했다.

네덜란드 실험예술가 헨크 페테르스Henk Peeters(1925~)는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눌Nul 그룹의 일원이었다.
눌은 네덜란드 신경향 미술을 대표하는 구성주의, 실험예술가들의 그룹으로 1961년 페테르스를 비롯하여 얀 스혼호벤, 헤르만 데 브리스가 결성했다.
독일 그룹 제로Zero와 유사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종종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페테르스는 1960년에 추상화로 스위스 상을 수상했다.
주로 흰색의 일상 재료들로 콜라주와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뒷면에 투명 나일론을 댄 탈지면으로 된 패널이다.
또한 빛과 물의 효과를 탐구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예를 들면 1965년 겔젠키르헨에 있는 할프만스호프에서 전시한 <물-천장>이다.
빛을 독립된 미적 매체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에서 프리즘과 렌즈를 이용하여 빛의 굴절을 통제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실험예술가 알베르토 비아시Alberto Biasi(1937~)는 그루포 N의 일원이었다.
그루포Gruppo N은 1959년 파도바에서 결성된 그룹으로 여기에 비아시를 비롯하여 엔니오 키조, 조반니 안토니오 코스타, 에도아르도 N. 란디, 만프레도 마시로니가 속해 있었다.
주로 기하 추상, 특히 옵 아트, 환경 미술, 관람자의 참여에 관심을 가졌다.
비아시는 자그레브에서 아르테 프로그라마타 협회 및 신경향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고, 산마리노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주로 프리즘을 통해 굴절된 빛의 분산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된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가보의 <광선 축제>(1929)이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1938년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작품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이 작품이 현대의 ‘소리와 광선’ 공연의 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폰타나와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 특히 피네, 마크, 워커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다.

제로는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오토 피네Otto Piene(1928~)와 하인츠 마크Heinz Mack(1931~)가 결성한 그룹으로 두 사람 모두 키네틱 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으며, 뒤에 귄터 워커Gunther Uecker(1930~)가 그룹에 가세했다.
그룹의 주장은 그룹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의 정기간행물 <재로>를 통해 발표되었다.
제로는 새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이런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순수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위해 구체적인 형상과 형태를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피네는 작품 ‘빛의 발레’에서 색깔이 있는 투명한 가스가 채워진 풍선을 이용했다.
이 그룹은 신경향 운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공동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1948~53년 뮌헨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953~57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피네는 1965년부터 뒤셀도르프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주로 단색조의 그림을 그렸지만 차폐장치를 사용하여 광선을 조절함으로써 화면 위에 보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반사경, 일광 반사 신호기 등을 이용하여 광선에 대해 연구했다.
1959년 무렵부터 양초 모양의 검정색으로 된 패턴을 사용하여 그림자 소묘와 그림자 회화를 제작했다.
동시에 무용수 대신 기계가 그림자를 투사하는 광선 발레도 제작했다.

피네는 자신의 광선 발레에 관해 말했다.
“나는 광선이 벽 위에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투영되는 거대한 반원형의 공간을 생각한다.
관객들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전기 광선과 플렉시글라스로 오브제를 만들어 그것을 헬륨 조형물Heliumplastik이라고 불렀고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하기도 했다.
피네는 루미니즘과 다감각적인 환경 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한 선구자이다.

1950~53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마크는 1965년 마르조토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파리 비엔날레에서 1등상을 차지했다.
마크는 스스로 ‘역동적인 구조물’이라고 부른 광선 오브제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매끄럽게 광택을 낸 금속판들을 플렉시글라스나 휘어진 유리판 뒤에 놓고 전기 모터를 통해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전달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반사 광선을 생성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1968년애는 광선 오브제에 눈부신 태양 광선을 반사시켜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구현해내는 ‘사하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한 TV 영화를 위해 11m 높이의 광선 기둥을 세운 것도 특기할 만하다.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한 워커는 1950년대 후반부터 흰색 못을 사용한 독특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바탕 판에 흰색 못을 용접하는 방식으로 오브제를 제작했다.
이 오브제는 공간 안에서 특별한 광선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광선 숲>(1959)에서 못의 머리 부분은 그 크기가 일정하지만 못의 길이는 약간씩 불규칙하여 못들이 꽂혀 있는 판 위로 물결이 치는 듯한 또 하나의 새로운 표면이 만들어진다.
1960년대에는 광선 상자와 회전하는 원반을 이용했으며 후에는 네온 튜브를 사용하여 광선 조각을 실험했다.
그의 작품은 옵 아트, 키네틱 아트, 루미니즘과 유사하다.

미술작품에 광선을 이용한 실험예술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이 사용한 기법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선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으로, 광선은 매우 환상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되어 한마디로 규정지어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새로운 광선 연구에 깊이 몰두한 예술가들 중 일부는 새로운 방법과 기구에 몰두하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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