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미니멀리즘과 프로세스 아트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
1960년대 성행하던 미니멀리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경향을 지칭한 명칭으로 미국의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 Witten(1935~)이 1971년 11월호 <아트 포럼>에 기고한 글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미니멀리즘의 가치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1980년대 후반까지 대지미술, 퍼포먼스 아트, 프로세스 아트, 비디오 아트 등과 같은 현상들 모두 다뤘다.
이러한 현상들이 포스트미니멀리즘이란 말로 한 데 묶어지게 된 점은 미술계를 장악해 온 상업주의, 미니멀리즘의 두드러진 물질적 특성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예술이 상업화된 데 대한 반성으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미니멀리스트들은 콜렉터들의 수집품이 되는 오브제를 가능한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핑커스 위튼은 다양한 미술 경향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란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용어는 막연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사어로 사용되었다.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닌 창조와 관련된 과정 그리고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 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적인 측면을 보인다.
프로세스 아트 예술가들은 재료를 선택할 때 소멸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시간의 경과를 주용 방법으로 삼는다.
그들의 행위는 얼음, 풀, 흙, 펠트, 눈, 톱밥, 기름, 물감, 심지어 콘플레이크와 같은 물질을 작품의 재료로 선택하며 이런 재료를 뿌리거나, 쌓고, 바르는 등 임의적이고 구조가 없는 방법으로 한 장소에 놓고 작품을 완성시킨다.
나머지는 중력, 온도, 공기 등과 같은 자연의 힘과 시간에 맡긴다.
프로세스 아트의 예로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벽 아랫쪽에 녹은 납을 뿌리는 리처드 세라의 <뿌리기>(1968), 수증기 구름으로 만들어진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1967~73) 등이 있다.
어떤 프로세스 아트 작품은 좀더 영속적인 수명을 가지지만 고정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 부드러운 물질로 만들어지는 조각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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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자화상의 효시로 알베르티(1404-72)가 그린 것을 꼽는다.
<미술가 열전>의 저자 바자리에 의하면 플로렌스의 팔라 루첼라이 가의 저택에 그의 자화상이 있었다고 한는데 이것은 현존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청동으로 부조한 고대 메달 형식의 부조상은 현존한다.
현존하는 또 다른 자화상으로 145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 푸케(1420년경-77/81)의 것이 있다.
두 사람에 의해서 자화상이 하나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자아의식이 명료하게 표현된 자화상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린 것이다.
그를 가리켜서 자화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뒤러는 13살 때 자화상을 그려 더욱 유명하다.
그가 1484년에 그린 자화상은 독일 최초의 자화상이자 최연소자의 것이란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데생 오른쪽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것은 1484년 내가 소년일 때 나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그린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뒤러의 자화상에 나타난 자기 과시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최초의 자화상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 내지는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으며 이런 성격은 후세에 나타난 많은 자화상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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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초상을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Portrait 내지는 Portraiture라 하고,
독일어로는 Blidnis 내지는 Portrat라고 하는데,
Bildnis를 제외하고 모두 라틴어 Protraho에서 유래했으며 '끌어내다' '노출시키다'라는 뜻이다.
상상의 인물 묘사는 예외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묘사할 경우 그 인물과 닮은 점, 즉 초사성이 요구된다.
인물의 독자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초상화의 목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목구비와 신체의 특징과 더불어 표정이나 제스처가 개성을 나타내는 요소로 사용된다.

초상화에서는 묘사대상인 인물에 얼마만큼 충실해야 하는가가 과제이다.
인물의 결점도 묘사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소 수정을 가해 이상화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1920년에 신설된 함부르크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파노프스키는 초사성과 이상화의 양극 사이에서 화가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작품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제와 의미가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초상을 전문으로 그린 초상화가가 출현한 것은 16세기이며 한스 홀바인 2세(1497/98-1543), 이탈리아의 모로니(1525년경-1578), 네덜란드의 모르(1517/21-1576/77), 스페인의 산체스 코엘로(1531/32-1588)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궁정에 살면서 궁정초상화를 발전시켰다.
17세기에 초상화를 세련되게 더욱 진전시킨 화가들로는 반 다이크(1599-1641)와 벨라스케스(1599-1660)를 꼽을 수 있다.
초상화의 여러 가지 기본형식은 르네상스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다 빈치(1452-1519), 라파엘로(1483-1520), 티치아노(1488/90-1576)가 여러 종류의 초상을 그렸다.
뒤러(1471-1528)가 1500년에 그린 <자화상>은 위의 계열에 속한다.
이는 화가가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는 증거이다.
정신성을 강하게 표현한 많은 자화상을 남긴 사람으로 17세기의 대가 렘브란트(1606-1669)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엄격한 인물묘사로 유명한 고야(1746-1828), 빼어난 데생력으로 초상을 그린 앵그르(1780-1867), 광인의 초상을 그려 유명한 제리코(1791-1824)가 있다.
이후 카메라의 발명으로 초상화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사진이 초상화를 대신하게 되자 인상 통찰을 심화시킨 표현주의 초상화가 두드러졌는데 뭉크, 클림트, 쉴레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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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표현주의와 오토마티즘 2


추상 표현주의 화파에는 드 쿠닝과 폴록과는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한 그룹에 대해 또 다른 그룹을 이룬 이런 계열의 화가들 가운데 바넷 뉴먼과 라인하르트가 두드러졌다.
뉴욕 주 맨해튼 태생의 바넷 뉴먼Barnett Newman(바루흐 네브만Baruch Newman, 1905~70)의 부모는 폴란드계 이민자이다.
뉴먼은 1922~26년 아트 스투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1927년 뉴욕 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후 부친의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1929년 공황으로 파산한 뒤 1937년까지 어렵게 경영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고, 1934년 뉴욕 시장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런 믿음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새롭게 출발한 뉴먼은 1940년대 후반 점차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켰는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합일>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또한 1948년에 로스코, 배지오티스, 머더웰 등과 협력하여 예술가의 주제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1950년대 초반 추상 표현주의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했던 잡지 <호랑이의 눈 Tiger's Eye>의 부주필로 활약하기도 했다.

뉴먼은 뉴욕 화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기술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래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추상 표현주의 이후에 나타난 여러 새로운 양식의 선구자로, 모노크롬의 색면 회화, 전체론적 회화 또는 비관계적 회화, 그리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의 등장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셰이프트 캔버스는 1960년대 전통적인 직사각형 형태에서 벗어난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를 일컫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비직사각형 그림이 당시에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고딕과 르네상스 시대의 제단화는 종종 윗부분이 뾰족했고,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에는 타원형의 캔버스가 특히 유행했다.
그러나 현대 회화의 문맥에서 셰이프트 캔버스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림이 다른 어떤 것을 베끼거나 참고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림의 ‘사물성’을 강조하는 추상 회화의 종류를 의미한다.
셰이프트 캔버스의 가장 유력한 발명자는 프랭크 스텔라로서 그는 V자형, 마름모꼴, 원형의 조각 형태를 이용했다.
그 뒤를 잇는 가장 독창적이고도 헌신적인 추종자는 엘리자베스 머레이였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뉴먼은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을 사용해 크기에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로도 꼽힌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뉴먼의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마크 로스코, 라인하르트, 클리퍼드 스틸, 애드 라인하르트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55년 초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파티잰 리뷰>지에 뉴먼의 작품을 극찬하는 글을 기고했다.

뉴먼의 영향을 받은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는 라트비아의 드빈스크 태생으로 1913년 미국으로 와 1921~23년 예일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 회화를 시작했으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에게 잠시 배운 것 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그는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참여했다.
로스코, 고틀리브 등이 참여한 텐The Ten 그룹은 1935년에 창설되어 1940년까지 전시회를 개최했다.
텐 그룹의 화가들은 추상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룹을 1898년 존 위치먼이 결성한 같은 명칭의 인상주의 그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로스코는 1940년대 초에 미로, 고르키, 배지오티스 등이 그랬던 것처럼 생물 형태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을 결합시키면서 추상적인 초현실주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
1943년 방송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 작품들의 제목은 잘 알려진 고대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상징들이기 때문에 다시 사용했다.
그것은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과 동기를 상징한다. ...
현대 심리학은 그것이 외부 생활 조건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꿈과 일상어와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취향은 점차 사라졌으며, 1947년 무렵부터는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로스코는 캔버스를 2개 혹은 3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작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 구름과 같은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
그는 관람자가 완전히 총체적 색채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로스코는 1958년 말했다.
“형상이 나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와 동료들은 형상을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고틀리브의 작품이나 나의 작품 그 어느 것도 추상화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색채-공간 배열을 창조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주제를 희석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제목에 내포되어 있는 주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나는 친밀한 상태를 창조하기 원하므로 대형 그림을 그린다.
대형 그림은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한다.
이 대형 그림은 너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로스코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 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0년대 말 타계하기 바로 직전에 균일하게 반짝이는 색채로 이루어진 두 개의 불균등한 직사각형 영역으로 나누는 기하적 분할의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화파의 어느 화가보다도 미국과 해외에서 가장 널리 전시되었다.

로스코의 가까운 친구 틀리퍼드 스틸Clifford Still(1904~80)은 노스다코타 주 그랜딘 태생으로 스포캔 대학과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1935~41년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41~43년 전쟁 산업에 종사한 뒤 1946~50년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가르쳤고, 1951~60년 뉴욕에 거주할 때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63년 은퇴한 후에는 메릴랜드 주의 웨스트민스터에 거주했다.
스틸은 여러 양식들을 실험한 후 1946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확고한 추상 표현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대형 그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 달리 스틸은 두껍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들을 그렸다.

뉴욕 태생으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1921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한 애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1903~74)는 미국으로 돌아와 1923년 쿠퍼 유니언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가담했고 이듬해 연방 예술 프로젝트Federal Arts Projet에 참여했다.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1935년 미국 정부가 제창한 사업으로 194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경제 공황의 타격을 받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국가의 예술적 잠재력을 공공건물과 장소의 장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뉴 딜 정책의 일환으로 앞서 수립된 프로젝트들을 토대로 기획되었다.
1933년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1933년 겨울부터 1934년에 걸쳐 예술가들은 주급제로 공공사업에 고용되었다.
프로젝트가 종료된 1943년 6월까지 약 3,600명의 예술가들이 1,600점에 달하는 작품에 동원되었으며, 1,200점 이상의 벽화가 의뢰되었다.
안타깝게도 연방 예술 프로젝트 하에 제작된 벽화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한두 점의 예비 습작만이 전해진다.

고틀리브는 1930년대 후반 원시미술과 미국 인디언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런 관심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완숙기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 시기의 풍경화는 특히 비현실적 공간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1937년부터 거주한 애리조나 주 사막의 풍경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고틀리브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1941년 이후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접촉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예술적 소재의 근원으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초현실주의 논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욕 화파의 일원인 그는 특히 1941~51년의 <상형문자> 연작으로 잘 알려졌다.
이 작품들은 여러 구획으로 나눠져 있으며 각각의 구획은 도시적인 형태로 채워져 있는데 이런 형태는 무의식적 연상 작용을 통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프로이트의 상징이나 추상적인 신화의 개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틀리브는 매우 독창적인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으며 세계 각지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뉴욕 주 버펄로 태생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67)는 1931~3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36~37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와 미국 미술가 학교에서, 그리고 1945~51년에는 뉴욕 대학의 파인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1944~45년 전쟁 동안에는 미국 해군 사진사로 일했고 1944~47년에는 뉴욕의 신문 <PM>지의 평론가와 만화가로 일했다.
1937~47년 미국 추상 미술가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라인하르트의 회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식상 급격하게 변화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추상이었다.
193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양쪽으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아 뚜렷하고 윤곽선이 분명한 기하적 양식을 사용했다.
1940년대에는 올오버 회화 단계를 거쳐 1940년대 말에는 몇몇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머더웰의 작품에 가까워졌다.
그는 머더웰과 공동으로 <미국의 현대 예술가들 Modern Artists in America>(1950)을 펴냈다.

1950년대 라인하르트의 완숙된 양식은 예술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에서 발전되어 나왔다.
그는 빈 형태, 공허, 반복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다가올 1960년대의 미니멀 아트를 예견했다.
1950년대에는 색채를 어둡게 하고 색채의 대비를 억제하기 시작하여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적 형태를 배경 색과 약간의 명도 차이만 있는 색채로 칠하여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한 모노크롬 회화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1952년경에는 화면을 대칭적으로 3등분 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각 부분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검은색’ 양식으로 나아갔다.
1947~67년 브루클린 칼리지, 1959~67년까지는 헌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 와이오밍 대학, 예일 대학, 시러큐스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양식적 발전에 대한 지적 근거를 제시하는 교조적인 글을 자주 썼다.

일군의 새로운 예술가들, 특히 필립 거스턴, 콘래드 마카-렐리, 제임스 브룩스, 브래들리 워커 톰린 등이 1950년대 초에 추상 표현주의 기법을 받아들여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의 상징적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의 미국 화가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1913~80)은 1916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0년 로스앤젤레스의 오티스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석달 동안 공부한 후 유럽을 여행했고 1934년 멕시코 벽화가들을 알게 되었다.
1935~42년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벽화를 제작했는데 이를 통해 멕시코 벽화에서 얻은 경험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으며 동시에 대규모로 구상적 추상을 실험할 수 있었다.
1941~44년 아이오와 주립 대학, 1945~47년 워싱턴 주에 있는 여러 대학, 1951~59년 뉴욕의 여러 대학, 1953~57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가르쳤고, 짧은 기간 동안 다른 여러 곳에서도 강의했다.
1940년대 초에도 여전히 초현실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까우면서도 고유한 구상적 방식으로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거스턴은 1940년대 말 즈음에 도시의 풍경을 어렴풋이 암시하는 추상을 실험했으며 어느 정도는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성주의보다는 낭만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표현적, 기하적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1950년경에는 작품에서 구상적인 요소를 제거했다.
그의 이와 같은 방식은 ‘추상적 인상주의’로 묘사되었으며 마카-렐리와 같이 추상 표현주의자들 가운데 좀더 서정적인 화가들과 연관되었다.
1955년경부터는 형태와 분리된 추상적인 색채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색채의 형태’에 관해 언급한 화가들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엷고 부드럽게 처리한 배경의 중앙에 밝고 강렬한 색채의 영역들을 배치함으로써 화면 위의 상호 작용과 연관되어 이미지들이 육중하고 지배적인 효과를 갖도록 했다.
1960년대에는 회색조의 색채가 이전의 밝은 색채를 서서히 대체했고, 희미하게 대상을 연상시키는 특성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풍자적이며 고야처럼 그로테스크한 새로운 구상적 방식을 도입했다.
거스턴은 만화적 기법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색채를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야만적인 방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KKK단을 주제로 한 장면과 허나상적인 사회적 비평을 그렸다.
1975년 일련의 회화 작품을 제작하면서 1950년대의 풍부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되돌아갔고 이전의 작품에서 나타났던 KKK단의 ‘두목들’은 밝은 적색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후기 작품에 대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거스턴은 주로 뉴욕 화파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추상 표현주의자 그룹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에 적었다.
“우리가 추상 미술에서 이어받은 신화 속에는 무언가 우스꽝스럽고 탐욕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회화는 자율적이며 순수하고 스스로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 구성 요소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결정함을 이룬다.
그러나 회화란 ‘순수하지 않다’. 회화를 지속시키는 것은 ‘순수하지 않음’을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자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존재들이다.”

보스턴 태생의 콘래드 마카-렐리Conrad Marca-Relli(1913~2000)는 쿠퍼 유니언에서 1년 동안 공부했으나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1945년까지 미국 육군에 복무한 후 유럽과 멕시코를 여행했으며, 1950년대에 매우 독창적이고 극적인 콜라주 회화 기법을 발전시켜 추상 표현주의 제2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마카-렐리의 기법은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형태들을 형태의 윤곽선을 이루는 검정 풀과 표현적인 조합을 형성하도록 바탕이 되는 캔버스에 붙이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부조 회화와 구성을 실험했는데, 보다 객관적이고 절제된 후기 회화적 추상의 양식과 유사했다.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태생의 제임스 브룩스James Brooks(1906~92)는 1925~26년 댈러스 아트 인스티튜트, 1927~31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다.
1930년대에 연방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힘차고 기념비적인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고, 1940년대에 추상 미술로 전환하여 성숙한 화풍을 구사했으며, 1950년대에는 추상 표현주의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뉴욕 주 시러큐스 태생의 브래들리 워커 톰린Bradley Walker Tomlin(1899~1953)은 1917~21년 시러큐스 대학을 다닌 후 파리의 아카데미 콜라로시와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초현실주의적인 구상의 요소를 담고 있는 입체주의 정물화를 그리다가 머더웰을 통해 오토마티즘 기법을 접하면서 1940년대에는 추상 표현주의로 전환했다.
1940년대 말경 톰린은 표의문자를 그려 넣은 독특한 구성 양식을 발전시켰다.
절제 있고 규칙적인 붓질로 유사 기하적인 형태를 만들어냈는데, 이런 형태는 기본적인 격자형 위에서 자유롭게 결합되거나 일정한 형을 이루었다.

추상 표현주의가 미술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부분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킨다는 전통적인 구성 방식과 대조적인 ‘전체론적’ 구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은 것으로, 몬드리안도 이런 구성 개념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그림 전체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이, 일정한 체계가 없는 무한한 회화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가 되었다.
모노크롬에 가가운 뉴먼, 라인하르트, 로스코의 그림이나 좀더 표현적인 클리퍼드 스틸, 클라인, 거스턴의 추상화들, 그리고 폴록의 올오버 그림들이 모두 이런 회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이라는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어떤 특정한 초점이나 자연스러운 경계가 전혀 없는 올오버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상 표현주의의 명성은 대단했는데, 이는 1971년 모리스 터치먼이 1965년 전시회 카탈로그 개정판에 기고한 서문에 잘 요약되어 있다.

“미국에서 지난 15년 동안 이름을 떨친 주요 예술가들은 모두가 사실상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성과를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대부분 유럽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입체주의의 창안을 도입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추상 표현주의는 미국 미술로서는 처음으로 유럽 화단, 특히 에콜 드 파리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미술은 추상 표현주의와 더불어 비로소 국제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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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표현주의와 오토마티즘 1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뉴욕 화파에 속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훌륭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 화파-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제1 세대 회화’ 전시회에 뉴욕 화파로 알려지게 된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사실상 양식적인 일관성은 거의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도 일치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미술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이 그들을 하나의 화파로 묶을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모든 작품이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것도 아니어서 추상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인 액션 페인팅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자기 표현적 붓놀림을 구사하지도 않았다.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 속의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오토마티즘automatism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우연의 효과를 노린 데서 확산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오토마티즘을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사용했던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을 통해 무의식을 탐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오토마티즘을 한 구절로 언급했는데, 문학 작품의 창작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드로잉과 회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마술적 예술의 비밀들 ... 다른 이들로 하여금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를 갖다 주게 하라.
마음을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에 가장 좋은 상태로 돌입하라.
너를 가장 수동적이고 수용적으로 만들어라.
네 자신을 자신의 천재성, 자신의 재능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재능과 천재성으로부터 떼어 놓아라.”

후에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와 회화 Le Surrealisme et la peinture>(1928)에 적었다.
“초현실주의의 근본적인 발견”은 “어떤 선입견적 의도도 없이 쓰기를 재촉하는 펜과 그리기를 재촉하는 연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최소한 시인이 자신 안에 감추어 둔 감정적인 모든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매우 고귀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르네 파스롱의 <간추린 초현실주의 백과사전>(1984)에 의하면 “오토마티즘적인 초현실주의 드로잉의 진정한 발명가”는 앙드레 마송Andre Masson(1896~1987)이다.
“1923년 혹은 1924년경 마송의 드로잉들은 여기저기에 짐승이나 색의 윤곽선을 암시하는 듯한 ‘방황하는 선들’로 발전했다.”
마송은 곧 보다 정교한 오토마티즘 기법을 개발했는데 접착성 물질로 캔버스에 드로잉한 후 색 모래를 흩뿌려서 색을 입히는 방법이었다.

우아즈의 바라니 태생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은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1912년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 중의 경험은 마송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호기심, 모든 사물의 상징적 통일에 대한 모호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철학적으로 진전시킬 만한 지성이 부족했던 마송은 예술 활동을 통해 그런 사고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했다.
1950년에 쓴 <그린다는 기쁨 Le Plaisir de Peindre>에 적었다.
“이것은 본능보다 사고가, 아니면 흔히 영감이라 불리는 것보다 지성이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화가이자 시인들이 다루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무의식과 의식, 직관과 이해는 초의식 상태에서 눈부신 일치를 이루도록 변화되는 것이 분명하다.”

마송은 1919년 파리로 돌아갔고 입체주의, 특히 후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앙드레 드랭의 영향도 받았다.
1922년부터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인 미로, 에른스트, 시인 미셀 레리스, 조르주 랭부르와 친교했으며, 랭부르는 마송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써주었다.
브르통의 주목을 받아 마송은 1924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오토마티즘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실행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무의식의 힘에 대한 탐구’로 여기면서 1928년 브르통과의 의견 충돌 후 초현실주의 운동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 기법으로 작업했다.
물감 대신 풀을 이용해 캔버스 위에 오토마티즘적인 그림을 그린 후 채색된 모래를 뿌려 색채를 입히는 방식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암시적이며 상징적이었다.

1940년 미국으로 간 마송이 뉴욕 그룹의 피신해 온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초기 단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마송의 모래 회화에 나타난 오토마티즘과 잭슨 폴록이 실행한 미국 액션 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는 1946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이듬해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다.
마송은 매우 뛰어난 기법과 때로 모호하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내적 시각, 외형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눈을 결합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그린다는 기쁨>에 적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에서 놀라움의 효과가 사라진 뒤 나타나는 진정한 힘은 다음 세 가지 조건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첫째는 선행한 명상의 강도,
둘째는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셋째는 이 시대 미술에 걸맞는 회화적 수단을 알아내고자 하는 필요성이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송과는 다른 오토마티즘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들 중 몇몇은 꿈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이는 기계적인 오토마티즘에 반대되는 심리적 오토마티즘의 한 종류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을 받아들여 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이를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 증상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미술이나 시의 창작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어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종 라파엘 전파와 연결되는 섬세한 회화 기법을 사용하여 환각적 현실감을 창출했는데, 이것은 때때로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렸으며, 그가 묘사한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 이미지의 기이하고 환각적인 측면과 대조를 이루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때대로 엄격한 오토마티즘 방법보다는 우연을 이용하여 최초의 이미지를 얻는 방법으로 데칼코마니, 푸마주, 프로타주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오토마티즘 회화에 사용된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1936년경 오스카르 도밍게스Oscar Dominguez(1906~58)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뒤에 막스 에른스트에 의해 유화에 적용되었다.
테네리페 태생의 스페인 화가이며 조각가 도밍게스는 1934년에 파리에 정착했고, 브르통과 엘뤼아르를 만났으며,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1945년까지 몸담았다.
처음에는 달리의 화풍을 본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으나 1935년경부터 오토마티즘 기법을 채택했다.
그는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했다.
그 결과로 얻어진 작품에 호나상의 동굴, 밀림, 또는 바다 속의 생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상하지 않고 그림을 만드는 데 있다.
도밍게스는 자신이 고안한 데칼코마니 오토마티즘 기법을 사용한 작품을 초현실주의 잡지 <미노토르 Minotaure>에 소개했다.

푸마주fumage는 1930년대 말 오스트리아계 멕시코 화가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1907~59)이 도입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파렌은 종이 밑에 촛불을 대고 움직여 그을린 자국으로 기이하고 꿈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이는 무의식에 의한 자유로운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의 우연에 관한 이론의 좋은 예이다.
유화에 적용된 이 방법은 매우 유연한 리듬의 오토마티즘적인 붓질을 가능하게 했다.
팔렌은 1932~35년에 추상-창조 그룹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1936~40년에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푸마주 기법을 ‘암울한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림 속에 유성과 같은 줄무늬를 그려넣었으며 훗날 이를 숨겨진 신의 얼굴이라고 설명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개발한 오토마티즘 기법 중 하나인 프로타주frottage는 원칙적으로 놋쇠 기념패를 탁본하는 과정과 유사한 방법이며 이를 막스 에른스트가 고안했다.
에른스트는 1925년 8월 10일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무결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것을 종이 위에 옮겼다.
그는 이를 <자연사 Histoire naturelle>(1926)에서 밝혔다.
이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현대 회화의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인 패턴을 회화 디자인의 기초로 이용했다.
이 방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잠재의식의 접근하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오토마티즘에 대한 관심은 추상 표현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 몇몇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욱 진전시켰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일단 이미지가 오토마티즘적이거나 우연한 방법으로 형성되고 나면 그것을 완전히 의식적인 목적으로 신중하게 이용했지만, 폴록과 같은 액션 페인팅 화가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전체 창조 과정에 오토마티즘이 속속들이 배어들어 있다.

또 다른 오토마티즘의 유형으로는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0)가 스스로 ‘유령주의’라고 명명한 방법이 있다.
192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계에 명성을 쌓은 미쇼는 1924년 파리로 갔고, 1926 처음으로 회화와 소묘를 제작했다.
1937~40년에 본격적으로 회화에 매진하여 유령주의로 명명한 검정색 배경 위에 과슈로 그리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선호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그린 이 서정적이면서도 꿈과 같은 추상 작품들은 심령 이미지, 신화, 유령이 존재하는 모호한 세계를 창출해냈다.

오토마티즘은 마타Matta(로베르토 세바스티안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 1911~)를 통해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고르키와 머더웰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산티아고 태생의 칠레계 프랑스 화가 마타는 1931년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933년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간간이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서 제도가로 일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1936년 스페인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나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받았다.
마타는 달리를 통해 파리의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에 의한 제작 원리를 실행한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9년부터 초현실주의와 결별한 1948년까지 뉴욕에 거주하며 미국의 초현실주의, 특히 고르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 칭한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오토마티즘 기법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끔은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1941년 멕시코 여행 후 이런 자각에 이르러 대지의 힘과 성적인 힘, 우주적인 힘이 만나 폭발적인 대격변을 일으키는 모습을 표현했다.
1940년대 초 작품에서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고 충돌하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들로 인해 역동적인 측면이 점점 증가되었다.
이런 공간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마타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화가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보스다니크 마노크 아도이안Vosdaning Manoog Adoian, 1905~48)는 1909년 터키인의 박해를 피해 아르메니아 연방의 수도 예리반으로 와서 인쇄공과 제본공으로 일했다.
192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의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뉴욕으로 이사하여 그랜드 센트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적 추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는 기하적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 기법을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1940년대 초에 뉴욕에 거주하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비로소 고유한 양식에 도달했다.
이런 영향 하에서 미로의 양식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이 있는 추상화를 그렸다.
고르키의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의 작품을 솜씨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말년의 작품에서는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초현실주의와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워싱턴 주 애버딘 태생의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은 유년 시절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고, 잠시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1932년 스탠터드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이었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937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들라크루아의 <일기 Journals>에 나오는 미학 개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40년 뉴욕으로 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뉴욕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특히 오토마티즘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한 후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머더웰은 1951년 뉴욕의 헌터 칼리지의 부교수로 임용되었고 1959년까지 재직했다.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했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1940년대 초 머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비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머더웰은 “이젤화의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벽화로서의 회화 개념을 완성시켜 화면의 통일성을 간직한 채 끝없는 측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두 번째 주제인 ‘광활 Open’이 등장했는데 이 연작은 기하적 형태와 짙은 색채를 사용한 색면 회화로 대형 화면을 이용해 색채의 감각적 효과를 탐구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판화가로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추상 표현주의 초기의 표현적인 강렬함과 장엄함을 바탕으로 1960년대 초의 작품 <아프리카>에서 이미지를 따온 세 번째 주제가 등장했다.
머더웰을 포함하여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는 점점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고,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대 말 뉴욕 화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하나는 드 쿠닝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이 그룹의 예술가들은 유럽의 제스처 회화에 해당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 작품을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 과정 중에 있는 예술가의 내적 정신 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테르담 태생의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97)은 1916~20년 상업 장식 회사에서 견습 생활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조형 예술 및 기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26년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지만 곧 아슐리 고르키 및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다른 예술가들로 구성된 서클에 가입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말기 입체주의로부터 유래된 보다 발전된 추상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1930년대에 여러 기법으로 그렸고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쟈코메티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켰는데, 이는 1970년대가지 그의 작품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동시대 화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물을 주제로 삼은 화가로 처음에는 남성을 후에는 여성을 그렸다.
그는 동갑내기 가장 가까운 친구 고르키와 그 밖의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유기체적이고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들죽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1948년까지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드 쿠닝의 곡선 형태를 담은 차분한 회색 색조의 추상과 모호하게 암시된 생물 형태적 형태는 1940년대 초 뉴욕 화파의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48년 찰스 이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드 쿠닝은 폴록과 함께 자발성과 액션 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상 표현주의 화파의 비공식적인 리더가 되었다.
드 쿠닝의 공간 구성, 표현적 붓놀림에 담긴 에너지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드 쿠닝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여성 주제도 함께 발전시켜 나갔다.
이따금씩 이것을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으로 바구어 갔는데, 인물화에서도 이전의 보다 순수한 추상화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는 인물의 모델링을 생략하고 울퉁불퉁한 윤곽선만을 사용하여 인물과 환경이 뒤섞여 흐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환경의 혼합체인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를 ‘비환경’이라고 칭했다.
그는 때때로 해부학적 형태를 분해하고 위치를 옮겨 격렬한 선적 추상을 만들어냈다.
드 쿠닝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비록 순수 추상만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표현주의에서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추상 표현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와이오밍 주 코디 태생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이었다.
1929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폴록은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3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곧 그 화랑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금세기 미술 화랑은 페기 구겐하임이 연 화랑으로 초현실주의의 온상과도 같은 화랑이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에 캔버스를 마루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각, 혹은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으며 미국에서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액션 페인팅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제스처 회화gestural painting는 좀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제스처 회화는 하나의 그림은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화가의 행위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몸짓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행위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제스처란 명칭은 특히 물감을 사용하는 태도와 붓놀림이 시각적으로 확인되고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회화에 적용된다.
이 용어는 이따금 앵포르멜 또는 타시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폴록은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 양식을 도입한 화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화면 전체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하기 불가능하게 균일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회화 양식인 올오버는 폴록의 ‘뿌리고 튀기는’ 기법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 뒤로 이 용어는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1928~)처럼 ‘휘갈겨 쓴’ 구성 요소를 사용하거나 색면 회화 화가들처럼 색채를 사용하여 캔버스 전체를 비교적 단일하게 처리한 회화 작품을 일컫는다.
1950년대 중반부터 추상 표현주의에서 이탈하여 일명 후기 회화적 추상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미술 운동을 시작한 트웜블리는 ‘쓰여진 이미지들’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끄적거림이나 낙서와 외형상 유사했다.
그는 전통적인 구성 개념을 거부하고 폴록이 시작한 올오버 양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폴록의 것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웠다.
그는 중앙에 선을 그어 면을 나누거나 거의 색조의 변화가 없는 거대한 표면에 낙서가 된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조각들을 붙여 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트웜블리의 작품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탈분화 dedifferentiation’ 미술과 비교되기도 한다.
독일어로눈 ‘슈트로이-콤포지치온 Streu-Komposition’이라고 하는 올오버 양식의 그림은 관람자의 주의를 화면 전체에 고르게 분산시키며 균형, 조화, 리듬 등에 의해 서로 연결되는 중심 부분들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림은 미니멀 아트의 기초적 구조들과 유사한, 구분이 없는 하나의 시각적 단일체가 된다.
이런 방법으로 연결된 요소들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종속시키거나 포함하지 않으므로 올오버 회화는 비관계적이다.

폴록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라져 있기도 하다.
이후 이런 회화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의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감을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폴록은 1950년대에 올오버 양식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상적이거나 유사 구상적인 흑백 작품 그리고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했다.
해럴드 로젠버그를 비롯한 진보적인 평론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난해한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폴록은 20세기 미국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일반적으로 안정받았으나 화가들은 이미 그 운동에 반발하고 있었다.
폴록은 뉴욕 화파 중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많은 지역에서 전시회를 가진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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