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 The Great Couples 7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화제의출판: 『The Great Couples』 시리즈(1~7권) | 김광우 지음| 미술문화 刊| 각권 550쪽 내외
다양한 사연의 커플들...미술사의 新풍광 연출
2005년 03월 29일 이은혜 기자, 교수신문 


보다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미술사를 위해 집필하기 시작한 김광우 씨의 ‘위대한 커플’ 시리즈가 벌써 7권째 나왔다.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1, 2’,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1, 2’가 나왔고,
‘미술사와 미술’,
‘루벤스와 렘브란트’도 뒤따라 나올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독특함은 무엇보다 위대한 화가들을 둘씩, 혹은 셋씩 묶어서 커플로 다룬다는데 있다.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파헤친다는 건 기존의 일대기식 계보 접근과는 달리 역동적인 미술사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가 한쌍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둘을 엮을 수밖에 없는 건 이들에 의해 회화의 역사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뭉크, 쉴레, 클림트, 이들 셋은 쉴레가 클림트에게 영향을 받은 것 외엔 연결시킬만한 역사적 사건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그림은 판이하다.
어떻게 이 셋을 묶으려 했을까.
저자는 이들을 함께 보려는 건 동시대를 살다간 세 화가가 누구보다 죽음, 불안, 성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작품은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는 표현주의의 참맛을 보게 해준다.
또 셋은 누구보다 내면세계에 집착했었다는 점에서 묶일 수 있다.
뭉크는 “죽음은 내 안에 있다”라고 고백하며 평생동안 죽음을 표현했고,
쉴레는 스승으로부터 “사탄이 너를 나의 반에 토해 놓았구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그의 그림은 매우 자극적인 표현을 띄어 외설혐의로 수감될 정도였다.
자신에 대한 글이나 자화상을 한점도 남기지 않은 클림트의 그림들은 신화와 애욕주의, 이상주의로 일관된다.
세 화가는 모두 외부세계를 등에 지고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빠져들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혹은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하나로 묶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몇몇 인물들을 연결시켜 접근하는 방식은 사실 서구 미술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작 ‘모네와 마네’, ‘고갱과 고흐’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김광우 씨가 대상으로 삼는 커플시리즈는 무한대다.
‘피카소와 마티스’도 새롭게 쓸 계획이고,
‘클레와 칸딘스키’ 커플을 다룸으로써 당시 바우하우스 주변의 미술사적 이야기들, 그리고 응용미술까지 다뤄나가고자 한다.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뉴욕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미술과 미술비평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일찍부터 뉴욕미술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실감했던 차에 한국에 들어와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집팔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관점에서 접근한 미술사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주변인물들 관계 속에서 화가의 작품을 드러내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위대한 커플’ 시리즈도 기획하게 됐다.

이 시리즈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시리즈를 통해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보다 깊이 있고 재밌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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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The Great Couples 3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중에서
 

에곤 쉴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만남 

 

에곤 쉴레가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45살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을 때 17살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당구를 좋아하던 쉴레가 카페에서 평소 존경하던 클림트를 만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쉴레에게만 감동이었던 것이 아니라 클림트에게도 사건이었다.
클림트의 화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쉴레는 드로잉 몇 점을 갖고 가서 대가의 고견을 듣고 싶어 했다.
클림트는 “음, 좋아, 매우 좋아!”라고 칭찬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쉴레가 자신의 드로잉 몇 점을 줄테니 클림트의 드로잉 한 점을 달라고 제의하자 클림트는 “왜 내 것과 바꾸려고 하느냐? 네가 나보다 더 잘 그리면서 ...”라고 하며 기꺼이 드로잉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누드를 많이 그렸는데, 클림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에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건 인체를 표현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본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으며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이에 반해 쉴레는 누드를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았으므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그는 표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드로잉이 만화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림트는 여자를,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자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나타났다.
그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그렸고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런 점은 쉴레에게서도 발견하며 그는 여자를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존재, 섹스를 갈망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두 사람의 여자관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희망> 연작
클림트는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자 이 시기부터 임산부를 다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면서 <희망 I>에서 임산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병치시켰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아들 오토 짐머만의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헤르마라는 여자를 모델로 고용하려고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모델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림트의 집요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델이란 직업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지만 클림트는 모델들을 각별하게 대했다.
모델 가족의 장례비를 주기도 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해서 모델들은 클림트를 좋아했다.
클림트는 4년 후인 1907~8년에 <희망 II>를 그리면서 양식과 상징의 형태를 달리 했다.
여기서는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고 여인의 뒤로 숨어 얼굴만 빼꼼 드러내고 있다.
모호한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장식적으로 그렸으며 젖가슴을 드러낸 임산부를 아름다운 의상을 한 모습으로 이상화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은 1903년작 <망자들의 행렬>에서 여실히 나타났고, 1916년에 그린 <죽음과 삶>에는 좀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무리와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을 병렬하여 죽음이 삶 가까이에 있음을 지적했다.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이나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숨김 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학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여하튼 실망하게 되고, 행복도 지식도 안겨주지 못하며, 운명은 필히 존재하고 인간의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과 지식을 추구하며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이 당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으로 쉴레에게 계승되었다.

나르시즘적 자화상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난 인생의 어두운 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쉴레이다.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지만 쉴레가 그린 기괴한 형태의 자화상에서 클림트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클림트는 모델의 다양한 제스처와 장식적 요소를 혼용하여 그리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카메라의 발명은 초상화에 변혁을 초래했고, 화가들은 모델의 내면의 힘이나 특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당시 입센과 스트린드베르크의 작품이 비엔나에서도 애독되었는데, 두 사람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 비이성적인 것 혹은 잠재의식으로 여겨졌다.
이런 요소가 쉴레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화가로서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산 쉴레는 인생의 어두운 곳들만 찾아 헤맨 예술가였다.
그는 100점도 더 되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기괴한 모습들이 많아 거울 앞에서 얼마나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나르시즘에 빠졌는지 짐작된다.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자화상>은 쉴레가 아니면 취하기 어려운 제스처이며 <팔을 올린 자화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제스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의 나르시즘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는데 거의 모든 드로잉에 사인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사인을 다른 스타일로 바꾸기도 했으며 자신을 알리는 일에 여간 관심이 많지 않았다.
초상화는 그의 주요 장르가 되었고 자화상을 많이 그림으로써 자신이 회화의 중요한 주제임을 알렸다.
쉴레는 다양한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1910년에 그린 출판업자 <에두아르 코스맥>은 에드바르트 뭉크가 1894년에 그린 <사춘기>에서 포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1909년 벨기에, 프랑스 화가 외에도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작품이 포함된 전시회가 비엔나에서 열렸고 쉴레는 전시회에 가서 뭉크의 작품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현재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춘기>는 1894년에 그린 것이지만, 이를 처음 유화로 그린 것은 1886년이고 1890년에 소실되자 다시 그린 것이다.
원래의 작품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가장 우수하며 뭉크의 표현주의 회화를 대표할 만하다.
벗은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소녀는 양팔을 앞으로 모으고 관람자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뒤로 드리워진 불분명한 커다란 그림자는 소녀의 기대와 불안을 상징한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뭉크 특유의 포즈와 배경의 어두운 그림자로 표현했다. 

풍경화
클림트의 풍경화는 방을 품위 있게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는 인공적 자연을 만들어 관람자의 즐거움을 증가시켰다.
빼어난 자연주의 묘사 기술과 섬세한 색상 그리고 장식적 요소는 관람자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에는 눈에 즐거운 것이 마음에 즐거운 것이라는 쾌락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극도로 이상화된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인공적 자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그가 원하는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연에서 장식적 소재를 찾아 회화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바꾸었다.
쉴레의 풍경화에서는 그의 누드화에서 보았던 이그러진 비정형적인 요소와 장식적인 요소가 있다. 고독한 사람의 눈에 비치는 쓸쓸한 자연이 보이는데 이는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담은 풍경화이다.
<수령초가 있는 가을 나무>는 회화의 주제로 삼기에는 기형적인 불구의 나무처럼 보인다.
클림트가 숲을 선호한 데 비해 쉴레는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상징하는 앙상하고 야윈 불구의 나무를 선택했다.
<죽은 동네>는 동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동네로 바라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흑사병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도 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럽에서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의 수보다 더 많았다.
그해 1월 11일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클림트도 독감에 걸려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0월 28일에는 쉴레의 아내 에디스가 독감으로 죽었는데 결혼 한 지 3년이 조금 지난 그녀는 임신 6개월 중이었다.
쉴레도 독감에 걸렸고 사흘 후 아내의 뒤를 따랐는데 그의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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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아름다움은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그룹전에서 호평을 받은 고갱은 고무되어 좀더 회화에 열중할 계획으로 1886년 7월 중순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브르타뉴의 작은 항구 퐁타방으로 갔습니다.
조그만 항구 마을 퐁타방은 매우 원시적인 곳으로 인구가 1,516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퐁타방에서는 농업, 제분업, 어업 등이 소규모로 이뤄졌으며 1860년대 이후 경제적 수입은 그 지역을 찾는 관광객이나 작가들의 숙식 제공에 의존했습니다.
고갱은 캥페를레 인근의 촌락이면서 바다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퐁타방의 여행자집’으로 알려진 메종 글로아느 여인숙에 묵었는데,
그곳은 예술가들이 즐겨 묵던 곳으로 보나의 제자 샤를 라발도 묵고 있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와 메이어 드 한을 만난 것도 이 여인숙에서였으며 나중에 그는 그곳으로 여행 온 폴 세뤼지에도 만났습니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이라서 약 20년 전부터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을 위해 이 지역에서 발행한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퐁타방에는 브르타뉴의 어떤 마을보다 유리한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개성있는 전통의상을 고수하므로 화가들의 모델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또 부수입이 생겨 아주 좋아합니다.

고갱은 파리에서와 달리 가난을 절실히 느끼지 않아도 되는 퐁타방을 고향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에게서 ‘종합’이란 말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종합이란 자연을 덜 모방하는 걸 의미했습니다.
종합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추상과 같은 의미이며 사물을 덜 모방하는 데서 추상이란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종합이란 그의 말에는 사물의 형태를 축소시키는 기교와 밝은색을 사용하여 사물을 단순하게 정렬시킨다는 뜻도 내포되었습니다.

그는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주로 그리면서 피사로, 세잔, 드가로부터 익힌 화법들을 두루 응용해 독창적인 기법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형식과 기법을 발견하지 못하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없음을 이미 경험한 그로서는 스스로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해야 했습니다.
그는 <브르통의 네 소녀>를 그리고 이 작품을 위한 습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1880년대 브르통 소녀들이 이런 전통의상을 늘 입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녀들에게 돈을 주고 전통의상을 입고 모델이 되게 한 것입니다.

10월 중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자신과 클로비의 생계를 위해 도예가 에르네 샤플레와 함께 도자기를 제작했습니다.
퐁타방으로 가기 전에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을 통해 알게 된 샤플레는 일본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도예를 되살리는 일에 전념한 유명한 도예가였습니다.
파리에서 이미 도자기를 제작하던 고갱은 샤플레를 만나자 더욱 도자기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 페루를 점령하기 전 원주민들이 제작해 사용한 원시주의 조각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원시주의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자기를 장식하면서 불에 구울 때 색이 섞이지 않도록 인물과 사물의 윤곽에 선을 그려넣었고 형상을 가능하면 단순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시주의 도자기가 파리 사람들에게 낯설음과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습니다.
그는 에나멜로 광택이 나도록 장식했고, 또 가장자리를 다른 색으로 테를 둘러 장식적인 느낌이 나도록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아름다움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기 화병에는 전통의상을 한 퐁타방 처녀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도자기를 미술품으로 취급하기를 꺼려하자 고갱은 이에 대해 항변했습니다.

도자기를 빚는 것은 한가로운 여흥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도자기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늘 아꼈던 물건이다.
신은 한 줌 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다.
한 줌 흙으로 우리는 귀중한 돌을 만들 수 있다.
한 줌의 흙과 한 줌의 재주로 말이다!

고갱이 제작한 많은 단지들은 전통적인 소박한 모델이고 그 외의 것들은 환상적이며 손잡이가 크고 장식적이었습니다.
공통점이 없이 다양한 형상을 한 이런 단지들은 페루의 전통단지를 상기하게 하지만 아름다움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실용성을 늘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들입니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페루·멕시코·로마 양식의 단지들이 많이 그려져 있어 그가 다양한 이국적 단지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또한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파리 오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아한 댄서들을 장식해 사변적으로 부조화의 미를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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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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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영웅의 꿈에 날개를 그려넣다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화가, 영웅의 꿈에 날개를 그려넣다.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왕관을 쓰고 아내 조제핀에게 직접 관을 씌우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황제가 됐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역사적 순간을 가로 9.9m, 세로 6.69m의 거대한 화폭에 담아냈다. 이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1805~1807)에는 꼭두각시로 앉아 있는 교황 앞에서 이미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씌울 또 하나의 관을 높이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극적인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평민 출신으로 26세에 치안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좌에 올라 프랑스 군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나폴레옹은 1797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원정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다비드를 만났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와 당대 최고의 화가는 서로 만나고 싶어했고, 이때부터 다비드는 나폴레옹과 그의 영광을 화폭에 담았다. '생 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1800~1801), '서재에서의 나폴레옹'(1812), 그리고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 '역사적 배경 속에서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한 연작을 내놓고 있는 저자는 나폴레옹의 시대 속에서 다비드의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한다.
황제는 대관식이 끝난 후 다비드에게 '황제 최고의 황가'라는 영예를 수여했고, 다비드는 그의 그림을 통해 나포레옹을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비드는 1750~1830년 유럽에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부활시켜 단순한 형태와 색채로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적 화풍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과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선전을 위해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저자는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성과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 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이었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 03.09.20 동아일보 김형찬 기자

프랑스 혁명은 황제 나폴레옹을 낳았고, 나폴레옹은 화단의 권력자 다비드를 낳았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비드 작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모나리자' 다음으로 인기를 갖고 있지만 정작 화가 자신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았다. 저자는 객관적인지 기회주의자인지, 또 나폴레옹이 시대의 영웅인지 전쟁의 영웅인지 독자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다비드 이 셋의 관계를 이바지하지 못하면 그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술사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위해 기획된 '위대한 커플(Great couples)'시리즈 네 번째 책으로 충분한 컬러도판이 이해를 돕는다.
// 03.09.20 경향신문 이상주 기자

영웅의 정치와 화가의 미술이 보여주는 운명적인 만남의 모습.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좋아했고 미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인식한 나폴레옹과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절했던 다비드의 삶을 보여준다.
// 03.09.20 세계일보


화단의 나폴레옹 다비드
그는 기회주의자인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유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루브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세로 6.3m, 가로 9.8m의 이 대작은 나폴레옹 황제 당시 궁정 수석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것으로 나폴레옹이 그 앞에 양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황후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기 위해 두 손으로 관을 높이 쳐드는 장면을 담고 있다.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개척자 다비드 그는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프랑스 화단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에는 부뤼셀로 망명하는 등 나폴레옹과 같은 인생 곡선을 그린 인물이다.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김광우지음, 미술문화 펴냄)은 나폴레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다비드의 일생과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미술비평가인 저자는 다비드의 어둡고 외로웠던 어린시절 로마 유학, 소승인 조제프 마리 비엥 개빈 해밀턴을 만나 신고전주의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 나폴레옹과 만남, '황제의 제1화가'로서의 절정기, 나폴레옹 몰락에 따른 벨기에 망명과 사망등을 연대순으로 다룬다.
다비드를 이야기하려면 신고전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1750년에 시작돼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미술, 특히 고대 그리스 미술을 규범으로 삼아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꾸밈이 없고 기하학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인 바로크의 로코코 양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저자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설명과 함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경제적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순수한 미학적 동기에서 그렸다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적잖은 사실들이 왜곡됐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단순하고 명료한 양식은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내용면에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다는 비난도 면치 못한다. 다비드는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 해답도 없고 유효기간도 없는 의문이다.

<대한매일 02.09.17 김종면기자>


김광우의 The Great Couples 4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이제 막 출고되어 언론에서 먼저 주목하고 있습니다.
좋은 책은 누가봐도 좋은 책이니까요... ^^


9월 15일 KBS 930뉴스 '눈에 띄는 신간'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이자 프랑스 화단의 황제였던 다비드의 평전입니다. 화가의 전기인 동시에 시대의 영웅과 화가의 교분을 통해 본 프랑스 혁명사이기도 합니다...KBS뉴스 신성범입니다.


9월 15일 '호남신문'
미술비평가 김광우씨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나폴레옹 시절 궁정화가 다비드 삶과 작품
나폴레옹 황제 당시 궁전수석화가였던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작품세계와 인생을 엮은 책이 나왔다.
미술비평가 김광우가 펴낸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19세기초 프랑스 화단에 황제로 군림했던 신고전주의의 개척자 다비드는 나폴레옹과 운명을 함께한다. 그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그린 작가로 예술,정치적으로 프랑스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부뤼셀로 망명했다.
책은 어둡고 외로웠던 어린시절, 로마 유학, 스승인 조제프 마리 비엥과 개빈 해밀턴과 만남으로 신고전주의자로 자리잡기까지. 정치와 인연, 나폴레옹과 만남, '황제 최고의 화가'로서의 절정기, 나폴레옹 몰락에 따른 벨기에 망명과 사망 등을 연대순으로 기술했다.
신고전주의 전반에 대한 해설과 함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경제적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특히 다비드의 예술성 못지 않게 정치적 성향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여러점 남긴 그는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렸다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단순하고 명료한 양식은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내용면에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것은 이 때문. 책은 다비드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에 대해 묻고 있다. / 정윤희 기자


9월 16일 '서울 경제'
무수히 살롱전에서 탈락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최고의 화가로 선임된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의 일대기. 19세기초 프랑스 화단의 '황제'로 군림했던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의 개척자로서 르네상스 이후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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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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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의 정신과 물감 흘리기 기법


잭슨 폴록(1912~56)은 1912년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고, 1925년부터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는 동안 잠시 조각에 관심을 가졌지만 1930년 가을 열여덟 살 때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미국인의 삶의 특색을 그린 토머스 하트 벤턴으로부터 수학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0년대 초 미국 예술가들에게 멕시코의 벽화예술가들의 영향이 대단했으며 폴록은 1936년 형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6~1974)의 조수가 되어 드로잉 없이 물감을 직접 칠하며 그리는 대담한 기법을 영향 받았다. 시케이로스는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개선한 복합 원근법과 왜곡의 방법을 이용하여 환영적인 장치들을 만들고, 이를 포토몽타주 기법과 함께 벽화에 응용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메시지가 주는 충격을 확대했다. 서른아홉 살의 시케이로스는 1935년과 이듬해에 뉴욕에 실험 공방을 열고 새로운 합성 재료와 공업 재료들, 포토몽타주 및 물감 뿌리기 기법을 선보였다. 폴록은 자진해서 이 실험 공방에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회화방법을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시케이로스는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연히 나타나는 이미지를 창조했으며 이런 방법이 폴록을 감동시켰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시케이로스의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법을 실험했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단계에 불과했던 폴록의 물감 흘리기 기법은 이런 기법으로 폴록이 유명해진 후 평론가들로 하여금 언제, 그리고 누가 먼저 사용했느냐 하는 문제를 삼아 다투어 글을 발표하게 했다. 폴록이 정확하게 이 기법을 언제 누구로부터 발견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겠지만 부분적으로 시케이로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폴록은 피카소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를 보고 입체주의의 효과를 알았다. 폴록은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게르니카>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 <남자, 황소, 새>이다. 황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투우 관람을 즐긴 피카소가 선호한 주제였다. 폴록은 피카소가 스물여섯 살 때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고 “내게 지독하게 중요한 그림이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예술과 무의식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보았다. 폴록에게는 정신분열 증세가 있었으므로 더욱 그런 점에 매료되었다.
1938년 폴록의 정신분열이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폭음했으므로 증세는 돌발적이었으며 위험했다. 학문적 성과를 위해 폴록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는데 조셉 헨더슨으로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였다. 9년 동안 유럽에서 유학하고 1938년에 귀국한 그는 1939년 5월부터 폴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폴록을 만난 후 헨더슨은 폴록이 네 가지 개성인 직관, 느낌, 감각, 사고의 기능이 통합적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그의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을 보고 그의 무의식세계를 탐험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보았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헨더슨은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하여 그의 드로잉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로 그린 그림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작품들은 훗날 ‘정신분석적 드로잉’으로 불리면서 학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대 중반까지 폴록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세 점을 그렸는데 <속기술적 모습>, <달 여인>, <남성과 여성>이었다. 이것들은 좀더 복잡하고 고유한 작품이다. <속기술적 모습>은 반추상의 이미지로 비스듬히 기댄 누드화였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 작품이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두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견해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이것은 피카소와 미로의 영향과 생리적 현상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작품이다. 폴록의 작품은 나중에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원래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모마의 관장 알프레드 바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화에 붙인 말이었고 이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부터였다.
폴록은 1943년에 <암이리>를 그렸다. 암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이리이다. <암이리>는 이런 신화를 참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두 동물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황소 그림을 연상하게 하며, 오른쪽의 것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미국의 5센트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는 들소처럼 보인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화살은 인디언 회화에서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암이리>는 유럽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은 인디언의 화살 같은 것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되었다.
폴록을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물감 흘리기 기법은 1946년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1946년에 여러 가지 물감을 실험했다. 유채 외에도 상업용 에나멜 페인트, 배관공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페인트, 그리고 가정용 페인트도 사용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마치 무대에서 행위를 하듯 그렸으므로 그의 그림을 액션 페인팅이란 명칭으로 부른 것은 잘 어울렸다. 그는 유채물감을 묽게 타서 깡통에 담고 막대기로 물감을 젓다가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면 캔버스에는 아주 가는 선들이 나타났으며 물감이 막대기에서 거의 흘러내렸을 때는 더욱 가는 선들이 나타났다. 이런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소개하자 평론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4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폴록은 말했다.
“난 회화기법에 관해 어떤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법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절로 생기지만 기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폴록 작품의 특징은 올오버 회화이다. 이는 전체 화면 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전통적 의미의 구성을 포기한 양식이다. 폴록의 그림은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려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를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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