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르발 아니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해
이균형 엮음, 정택영 그림 / 정신세계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총평 : 재치 있고 위트 있고 센스 있는 비르발 뿐만 아니라, 이를 너그러이 받아주는 아크바르 황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둘의 케미스트리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재미-중, 난도-하)

엮은이 ‘이균형‘은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영성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며 출판사 <정신세계사>의 수많은 서적을 번역하고 있다. 해당 저서는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에서 생활을 하며 엮은 이야기로 보인다.
2009년에 『비르발의 지혜 문답』으로 개정 출간되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무굴 제국의 세 번째 황제 ‘아크바르‘와 그의 명재상 ‘비르발‘의 짧은 우화 5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끔 감정적이긴 하지만, 마음이 넓고 현명한 황제 ‘아크바르‘가 받아주기 때문에, 명재상 비르발이 재치를 마음껏 뽐내며 활약할 수 있다.

단순한 플롯이다.
1. 황제가 다양한 질문이나 요구를 한다. (부당한 처사에 대해 약자들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비르발을 시기하는 인물들이 질문을 하기도 한다.)
2. 비르발이 느낌표 같은 대답을 한다.
3. 황제가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비르발을 칭찬하거나, 문제가 해결된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우화 모음집이다.
황제의 질문에 대해, 비르발과 함께 답변을 생각해 보면서 읽는 재미가 있다.

한 가지 우화를 간략히 보여주자면 다음과 같다.
- 아침 첫 번째로 재수 없는 사나이의 낯짝을 보니, 하루 종일 피곤한 일이 생기는구나. 그를 처형하라.
(답) 폐하, 폐하께선 이 자의 얼굴을 본 것이 어제의 그 모든 말썽을 일으킨 화근이라고 주장하십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어제 아침 맨 처음으로 폐하의 얼굴부터 봤기 때문에 애꿎게도 목숨을 잃게 되었노라고 주장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누구의 재수가 더 나쁜가요?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기분 좋고 가볍게 일독할 수 있는 책이다. (우화 속에서 갖가지 깨달음을 발견하는 건, 독자의 몫.)
악바르 대제와 Birbal(버발)에 대해 찾아봤는데, 무굴 제국 궁중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픽션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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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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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 일상적인 이야기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빠진다. 깊은 이해를 원한다면 작가의 삶을 선행학습하기를 추천한다.
(재미-중, 난도-이야기 감상은 하/이해는 중상)

Cathedral.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번.
미국의 단편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이다.
당대 미국 서민의 일상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 12개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은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평이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각각의 단편을 읽었을 때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불분명하여, 내용적으로는 불친절하다.
특히 몇몇 단편들은 끝까지 다 읽어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명확히 알기 힘들다. (<보존>은 아직도 모르겠다.)
표제작이자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대성당>을 읽을 때는 큰 기대를 했지만, 끝내 물음표를 지우지 못했다.
이야기들이 작가 인생의 부침, 경험들과 큰 관련이 있으니, 작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독서하기를 추천한다.

그렇다고 이야기 자체가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1900년대 중반 미국 서민의 일상의 단면을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 된다.
결말을 비롯한 아리송한 부분을 제외하면, 단편 하나하나를 음미하기에 무리는 없다.

『대성당』의 단편들은 다 같이 독특한 내음을 풍긴다.
1. 작가 특유의 문체가 빚어내는 고즈넉한 분위기. (읽어보면 안다.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2. 갈팡질팡 고민하고, 걱정과 생각이 많은, 행복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등장인물들.
3. 약간은 찜찜하기도 한 아리송한 결말. 하지만 계속될 것만 같은 녹록지 않은 일상.
어울린다고 할 수 없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서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안락의자라서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단편 12편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스스로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소설 뒤에 실린 옮긴이의 해설을 읽으며 뒤늦게 아는 척 맞장구치는 것으로 독서를 마무리했다.
단편집 전체를 조망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단편들을 나름대로 맛본 것으로 만족한다.
단편집의 전체적인 흐름과 깊이는 수년 후에 재독할 때 제대로 감상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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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6ㆍ25전쟁사 KODEF 안보총서 63
남도현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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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총평 : 저 애국심 없는 사람인데... 왜 감정을 실은 채로 이 책을 읽고 있죠?
6.25 전쟁을 잘 모르는 사람도 세부적인 흐름을 쉽게 알 수 있는 대중 역사서.
(유익-중상, 난도-하)


저자 ‘남도현‘이 역사학도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방부와 육군, 해군 등이 발행하거나 관리하는 매체에 군사 관련 글을 기고하는 걸 보면, 전문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한국 전쟁(6.25 전쟁)을 다루는 대중 역사 서적이다.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안보총서 63번째 책이기도 하다.

‘북한의 남침,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밀리던 남한의 반격과 북진, 중공군의 참전과 남진, 휴전.‘
이렇게 간단하게만 알고 있던 나조차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한국 전쟁의 흐름과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잘 쓴 편이라고 칭찬하고 싶다. 지루한 부분이 전혀 없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역시 과하지 않다. 이 책으로 시간적 흐름에 따라 한국 전쟁의 세세한 사건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군단 등의 규모에 대한 설명의 부재와 수록된 지도의 수가 적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지도 없이도 대략적인 상황과 판도를 이해하는데 걸림은 없지만, 중요한 전투에 대해서만이라도 지도를 첨부했더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전쟁과는 다르게, 한국 전쟁은 불과 70년 밖에 되지 않은 우리의 역사라서 그런지, 더 와닿는다.
불리한 형국에서 활약하는 부대를 볼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지만, 유리한 상황에서 자만하여 큰 화를 당할 때는 답답해진다. 순간순간의 선택이 불러일으키는 결과에는 조마조마 해진다. ‘현실‘이라는 감각 때문인지, 북한에 분노하는 마음이 일기도 했다. (욕도 좀 했다.) 공산군의 행태를 읽으며, 정말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평양 철수 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또한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수십만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전쟁 내내 남북간 인구 이동 추이를 보면 약 200만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온 반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올라간 인구는 극히 미약하다.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피난민들의 통계는 체제의 우월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다. (160쪽)

그로부터 1시간 뒤 중공군이 서울에 무혈입성했다. 천신만고 끝에 수복한 서울을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적에게 내준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나 병자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서울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공군은 몹시 당황했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도대체 너희가 지난 여름에 서울에서 무슨 일을 벌였기에 도시가 텅 비었냐?˝라고 질책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67쪽)


독서 좀 한다는 놈이 27년을 살면서, 이제서야 한국 전쟁에 대한 책을 처음 읽어봤다.
포항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서 받은 감명을, 이번에는 책을 통해 또 한 번 느끼기도 했다.
(나 원래 이렇게 애국심 있는 사람이 아닌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국군 장병 선배님들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개전 당일 12시경,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의 진해통제부 사령관은 PC-701 백두산함에 즉각 출동을 명령했다. 백두산함은 1949년 변변한 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통탄한 초대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제독 이하 해군 장병들이 봉급의 10퍼센트를 갹출하여 마련한 기금과 국민의 성금 및 국고의 지원으로 어렵게 장만한 함이었다.
사실 함이라고 명명했지만 15명의 구매단이 미국으로 건너가 해양대학의 구형 실습선을 구입하여 직접 수리 및 도색을 한 후, 진주만에서 구입한 미 육군의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경비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을 떠나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진해로 입항했을 때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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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왕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앙투앙 오자남 지음, 박경은 그림, 김지현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총평 : 우중충하고 외로운 현실 속에서 상상 속 왕국을 만들어가는 노인.
그의 왕국이 주는 위로가 독자에게도 닿을까..?
(재미-중하, 난도-중하)

놀랍게도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합작 만화이다.
한국인 미술전공자 ‘박경은‘과 프랑스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아트 디렉터 겸 시나리오 작가 ‘앙투안 오지남‘이 함께 만들었다. 박경은의 첫 책이기도 하다.
제목은 원제 『 LE ROI BANAL 』를 직역했다.

(줄거리) 노인 ‘미아오‘는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 그는 본인의 왕국이 실존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하고, 왕국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유엔으로 편지를 보낸다. 한편, 임신한 딸(플로랑스)와 우편 분류원 사위(질)의 사이는 좋지 않다. 장인의 편지를 발견한 질은 가정에 소홀해지고, 플로랑스는 질을 질책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스르륵 넘어가는 짧은 만화지만, 마냥 소화하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필자는 초독 직후 결말이 아리송하여, 바로 다시 읽었다. 그림의 디테일에 집중하면서 재독하다가, 특정 부분을 오독했음을 알아챘다. (63, 76쪽)
만화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편이지만, 급조한 듯한 극적인 결말에서 갑자기 쨍하고 밝아진다.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읽으면 좀 더 깊은 독서가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노인의 외로움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왕국 탄생 이전의 미아오는 분명 무료하고 외로운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주인공 미아오뿐만이 아니다. 임신한 플로랑스는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지만, 남편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해 줄 만한 위인이 아니다. 남편 질 역시 반복되는 업무에 지쳐가고, 한편으로는 소설가로서의 성공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 우중충한 현실 속에서 인물들은 빛을 찾아 아등바등 거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아오는 ‘왕국‘이라는 판타지를 현실에 대입하면서 부정적인 감정과 겨루고, 이는 훗날 타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미아오의 현실 극복(겸 회피) 도구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지 않을까?

미아오의 ‘왕국‘은 정말 공감되는 소재이다.
상상으로의 대피. 상상을 창작하면서 느끼는 몰입과 즐거움.
나 역시 한때 나만의 왕국을 상상하고 꿈꿨고, 이를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즐겼었다. 그 당시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상상의 요소는 책 곳곳에 드러나는데, 극적인 결말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한참을 생각해도 결말이 아리송한 걸 보면, 급작스럽다는 나의 감각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마침표를 확실히 찍는 기분 좋은 마무리라서, 나름의 깔끔함과 상쾌함은 있다.

백범 김구를 닮은 프랑스 노인과 그의 가족의 일상에 대한 현실적인 만화. 짧고 어렵지 않아서 분석하면서 읽기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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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펭귄클래식 13
허균 지음, 정하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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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 서얼 스승의 한을 풀어주는 팬픽일 수도?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 + 짧고 쉬우니까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재미-중, 난도-중하)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고소설.
저자는 조선의 선비 ‘허균‘으로 알려져 있지만, 100퍼센트 정확한 건 아니다. 당시 허균은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으며, 각종 규범에 크게 얽매이지 않아 여섯 차례나 파직을 당했다. 쉰 살에 당쟁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된다.

경판 24장본과 완판 36장본, 그리고 해설과 목판 방각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에 가까운 경판과 후세에 살이 붙은 완판의 큰 줄거리는 흡사하다. 간결하고 짧은 경판을 먼저 읽으며 이야기를 찍먹한 다음, 고색창연하고 묘사가 많은 완판으로 본격적인 식사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와 세세한 이야기에서 보이는 차이점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완판의 사극 문체가 특히 마음에 든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소설의 재미와 플롯은 평이한 편이다.

(줄거리) 서울 홍대감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재주는 많으나 서얼의 신분으로 호부호형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중에, 홍대감의 애첩이 길동을 시기하여 해하려고 하자 먼저 하직한다.
도적 무리를 이끌고 <활빈당>을 결성, 조선을 뒤흔드는 의적 활동을 주도한다. 이후 조선 왕에게 병조판서 직위를 요구하여 받은 후에는, 장난을 멈추고 성도라는 섬에서 자리를 잡는다. 부친 타계 이후, 율도국을 점령하여 왕이 된다.

‘홍길동‘을 막연히 한국의 슈퍼히어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던 홍길동과 소설 속의 홍길동이 다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마냥 선인은 아니다. 초반부터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2인을 참살하고, 도적들을 이끌고 합천 해인사를 습격하고, 훗날 아무런 죄도 없는 율도국을 무력침공하는 등 잔혹하고 과감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관아를 습격하여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의 선인 코스프레도 잊지 않는다.

홍길동의 활극을 통해 현실 극복 판타지를 보여주지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좀 더 정확하게는 주자학)의 한계를 끝내 넘지는 못한다.
서얼이라는 출생 신분을 재주와 도술로 극복하여 병조판서에 임명되지만, 곧바로 ‘성도‘라는 섬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한다. 조선을 전복한다거나 서얼 제도를 폐지한다는 혁명적인 내용까지 닿지는 못한다. 또 집을 떠나기 전, 신분이 낮은 자객과 관상녀는 직접 죽이지만, 배후에 있던 아버지의 애첩에게는 손을 뻗지 않는다.
숭유억불 사상 때문인지, 뜬금포로 합천 해인사에 모함을 씌워 곡식을 훔쳐 가는 내용은 특별히 놀라웠다. 임금이 홍길동을 추궁할 때, 그의 답변에서 불교 비판적인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불도(佛道)라 하는 것이 세상을 속이고 백성을 빠지게 하여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백성의 곡식을 빼앗으며, 길쌈하지 아니하고 백성의 의복을 속여 입으며, 부모께 받은 머리털을 훼손하여 오랑캐 모양을 숭상하며, 군부를 버리고 세금을 내지 않으니 이보다 더한 불의가 없사옵니다.˝ (81~82쪽)

『홍길동전』은 어쩌면 로맨틱한 소설일 수도 있겠다.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소설의 탄생 배경이 그렇다.
저자 허균의 스승 ‘손곡 이달‘은 서얼 출신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허균은 그런 스승을 위해 『손곡산인전』이라는 짧은 소설을 썼지만, 현실을 위로할 뿐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부당한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내용의 『홍길동전』을 통해, 스승을 위하는 것이다. 서얼 신분의 홍길동이 조선팔도를 호령한 뒤 병조판서 자리까지 차지하고, 결국 새로운 국가의 왕이 되지 않는가!
만약 이달이 『홍길동전』을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홍길동에 자신을 이입해서 끓어오르는 가슴을 움켜쥐었을까?
어쩌면 이 소설을 한국 최초의 팬픽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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