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펭귄클래식 13
허균 지음, 정하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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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 서얼 스승의 한을 풀어주는 팬픽일 수도?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 + 짧고 쉬우니까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재미-중, 난도-중하)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고소설.
저자는 조선의 선비 ‘허균‘으로 알려져 있지만, 100퍼센트 정확한 건 아니다. 당시 허균은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으며, 각종 규범에 크게 얽매이지 않아 여섯 차례나 파직을 당했다. 쉰 살에 당쟁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된다.

경판 24장본과 완판 36장본, 그리고 해설과 목판 방각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에 가까운 경판과 후세에 살이 붙은 완판의 큰 줄거리는 흡사하다. 간결하고 짧은 경판을 먼저 읽으며 이야기를 찍먹한 다음, 고색창연하고 묘사가 많은 완판으로 본격적인 식사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와 세세한 이야기에서 보이는 차이점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완판의 사극 문체가 특히 마음에 든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소설의 재미와 플롯은 평이한 편이다.

(줄거리) 서울 홍대감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재주는 많으나 서얼의 신분으로 호부호형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중에, 홍대감의 애첩이 길동을 시기하여 해하려고 하자 먼저 하직한다.
도적 무리를 이끌고 <활빈당>을 결성, 조선을 뒤흔드는 의적 활동을 주도한다. 이후 조선 왕에게 병조판서 직위를 요구하여 받은 후에는, 장난을 멈추고 성도라는 섬에서 자리를 잡는다. 부친 타계 이후, 율도국을 점령하여 왕이 된다.

‘홍길동‘을 막연히 한국의 슈퍼히어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던 홍길동과 소설 속의 홍길동이 다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마냥 선인은 아니다. 초반부터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2인을 참살하고, 도적들을 이끌고 합천 해인사를 습격하고, 훗날 아무런 죄도 없는 율도국을 무력침공하는 등 잔혹하고 과감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관아를 습격하여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의 선인 코스프레도 잊지 않는다.

홍길동의 활극을 통해 현실 극복 판타지를 보여주지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좀 더 정확하게는 주자학)의 한계를 끝내 넘지는 못한다.
서얼이라는 출생 신분을 재주와 도술로 극복하여 병조판서에 임명되지만, 곧바로 ‘성도‘라는 섬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한다. 조선을 전복한다거나 서얼 제도를 폐지한다는 혁명적인 내용까지 닿지는 못한다. 또 집을 떠나기 전, 신분이 낮은 자객과 관상녀는 직접 죽이지만, 배후에 있던 아버지의 애첩에게는 손을 뻗지 않는다.
숭유억불 사상 때문인지, 뜬금포로 합천 해인사에 모함을 씌워 곡식을 훔쳐 가는 내용은 특별히 놀라웠다. 임금이 홍길동을 추궁할 때, 그의 답변에서 불교 비판적인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불도(佛道)라 하는 것이 세상을 속이고 백성을 빠지게 하여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백성의 곡식을 빼앗으며, 길쌈하지 아니하고 백성의 의복을 속여 입으며, 부모께 받은 머리털을 훼손하여 오랑캐 모양을 숭상하며, 군부를 버리고 세금을 내지 않으니 이보다 더한 불의가 없사옵니다.˝ (81~82쪽)

『홍길동전』은 어쩌면 로맨틱한 소설일 수도 있겠다.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소설의 탄생 배경이 그렇다.
저자 허균의 스승 ‘손곡 이달‘은 서얼 출신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허균은 그런 스승을 위해 『손곡산인전』이라는 짧은 소설을 썼지만, 현실을 위로할 뿐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부당한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내용의 『홍길동전』을 통해, 스승을 위하는 것이다. 서얼 신분의 홍길동이 조선팔도를 호령한 뒤 병조판서 자리까지 차지하고, 결국 새로운 국가의 왕이 되지 않는가!
만약 이달이 『홍길동전』을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홍길동에 자신을 이입해서 끓어오르는 가슴을 움켜쥐었을까?
어쩌면 이 소설을 한국 최초의 팬픽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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