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쑤퉁 지음, 김재영 옮김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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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도 황후의 귓가에 아련히 맴도는 그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것은 자단나무 공이 시간의 표면 위를 굴러가는 소리였다. - p.114

말을 길들일 방도에 대해 묻자, 한 여자는 이렇게 답했다. '채찍으로 말 등을 후려치고, 다음은 철퇴를, 그래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비수로 목숨을 거두겠다.' 그녀가 바로 무미랑. 후궁에 들어가 황후가 되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한 나라를 세워 스스로 여황이 된 무측천, 무조다.

쑤퉁의 소설은 무조가 열네 살에 입궁해 일흔여덟 살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인생을 챕터를 바꿔가며 그녀와 그녀의 아들들 시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액정에서 쓸쓸히 자단나무 공을 굴리던 소녀가 절로 쫓겨났다가 모자를 쓰고 후궁으로 돌아와 황후가 되어 당의 기를 내리고 주의 기를 게양하며 아들에 의해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고 쓸쓸히 눈을 감는 순간까지.

대부분 측천무후를 중심으로 씌여있지만, 사이사이에 씌여진 독백 같은 태자 홍, 태자 현, 예종 시점의 이야기들이 있다. 건강을 되찾은 것을 오히려 불안으로 여기다 독살당한 태자 홍,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의 소생으로 늘 무후를 경계하다 결국 폐위되어 자결한 태자 현, '형의 어깨를 밟고 제왕의 보좌에 올라' 평생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예종. 아둔하다 묘사되었으며, 두 달 만에 어머니에 의해 폐위당하고 후에 주위의 추대에 의해 무후를 몰아내고 복위하는 중종의 챕터는 없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그 어머니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측천무후가 주변에 대단히 공포스럽게 비쳤다는 것을 아들들의 눈으로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가까이 모신 시녀 상관완아조차 여황이 총애하는 미소년과 다소 오래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비수를 휘둘러지고 묵형을 당했다는 에피소드도 그 대표격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만 본다면, 뒤표지에서 '역사학자들에 의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는 측천무후'라는 말은 의아하다. 쑤퉁의 소설에서 묘사된 측천무후라는 개인은 분명 재능은 있었을지 모르나 위대한 황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하여 한때 새 나라를 세우고 여자로서는 황후를 넘어 여황에까지 올랐으니 희대의 인물로 재능이 있긴 하겠지만, 아들들을 희생한 것이나(정치적 수완이 있다고 할지 육친의 정이 없어 비정하다 할지) 당시 밀고가 성행하며 신하들을 숙청하며 혹리들을 등용하고 육식을 금한다는 칙령을 내리는 등, 위대한 황제였냐고 하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소설적 전개를 위해 생략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고 제국조차 한때의 찬탈로 끝났다는 걸 생각하면 어쨌거나 대단하지만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그 한계까지나마 이룬 게 굉장하긴 하다).

이 소설에서 측천무후는 한때 두근거리며 눈물짓는 소녀였으나 차가운 궁에서의 한과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딸의 목을 스스로 조를 정도로 비정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하는 여황, 절대 군주로서 "침대에 누워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얼굴을 훑을 때 그들이 뼛속을 파고드는 차디찬 공포를 느끼게 할 만큼"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나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고, 그것이 바로 독을 넣은 자가 기다리던 소리였다.
나는 그 아름답고도 스산했던 합벽궁을 걸어 나가지 못했다.
나는 부황과 내 동생 현과 철, 욱륜 그리고 여동생 태평공주에게 말해주고 싶다. 죽음이 닥쳐오던 순간, 내 얼굴을 그토록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뜨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천후의 면류관에서 독극물의 흔적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내가 어머니의 그 손을 보았다고 전해달라.
부디 그들에게 어느 운 나쁜 망령의 말을 믿고 천후를, 어머니를, 독으로 얼룩진 그녀의 손길을 조심하라고 전해달라. - p.83 <태자 홍>

 

신룡 원년 동짓달 스무엿샛날 밤이었다. 비가 그치고, 여황이 일흔여덟 살을 일기로 상양궁에서 급작스레 붕어했다. 당황한 궁인들은 여황의 입속에 자단나무 공 하나가 물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그것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여황의 마지막 행위가 무슨 뜻인지를 놓고 용상 앞에서 이 궁리 저 궁리를 했다. 자단나무 공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기에 망자의 입에 물려 있단 말인가?
사후에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천상에서마저 침묵을 지키기 위함인가? 그 마지막 수수께끼는 누구도 쉽사리 풀어내지 못했다. 마치 누구도 그녀의 일생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떤 것처럼. - p.327 <여황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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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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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뤼팽 시리즈 가운데서 순위를 다툴 정도로 좋아하고, 그 정도로 불만도 있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앙브뤼메지 성에서 시작된다. 어두운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상한 소리, 총을 들고 용감하게 나선 아가씨 레이몽드, 쓰러진 성주 제스브르 백작, 살해당한 백작의 비서, 무언가를 짊어지고 간 범인의 그림자, 그러나 도둑맞은 물건은 없다……이 해괴한 사건에서 그의 호적수로 나타난 것은 이지도르 보트를레. 기자로 변장해 사건을 살피고 있던 고등학생 소년이다.

기암성은 거의 뤼팽과 이지도르의 대결이다. 뤼팽의 공언된 라이벌 가니마르 경감, 영국의 명탐정 홈스를 제쳐두고 그는 눈부신 활약을 한다. 뤼팽의 부하가 흘린 암호문을 풀어내고, 뤼팽에게 한 발 앞서 납치당한 아버지와 레이몽드를 구출하는 등... 그러나 인질들을 붙잡아둔 곳이라고만 여겼던 '에기유 크뢰즈'에 대한 암호문이 사실은 프랑스 왕가와 관련된 어마어마한 재화가 잠들어 있는 곳을 표시하는 암호이며, 뤼팽의 행동 하나하나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야기는 반전한다. 역사적 허구를 얽어내 촘촘하게 짠 기암성의 수수께끼. 일찍이 뤼팽이 걸었던 길을 이지도르가 따라 걸으며 푸는 과정을 읽노라면 그야말로 희열을 느끼게 한다. 또한 아름다운 히로인 레이몽드를 중심으로 한 로맨스 역시 이야기의 흥미를 더한다.

그리고 이 소설 최악의 문제, 홈스라는 캐릭터. 홈스가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기암성은 내게 있어 뤼팽 시리즈 베스트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홈스는 흔히 말하는 셜록 홈즈, 모리스 르블랑의 캐릭터가 아닌, 아서 코난 도일의 캐릭터다. 조롱하기 위해 강제로 끌려나온 것 같은 홈스는 시종일관 악역인 듯 행동하더니 결말에서는 기암성 최대의 악역을 맡으며 바닥까지 떨어진다. 시리즈 전개를 생각할 때 필요없는 역할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걸 꼭 홈스에게 맡길 이유가 있었을까? 어릴 때 축약본으로 처음 읽었을 때는 이 홈스가 참 미웠는데, 이 완역판을 접하고 이 홈스가 그 홈즈를 끌어온 것까지 알게 된 지금은 작가한테 어이가 없어졌다.

악의가 느껴지는 오마쥬, 홈스의 존재만 제외한다면(속 편하게 홈즈와 홈스를 분리하고 홈스를 마음껏 미워하기로 할까;) 정석적 도난 사건으로부터 괴도의 행방을 수색하며, 탐정과 괴도 간에서 이루어지는 줄다리기, 역사적 과거의 수수께끼, 잊혀진 보물, 로맨스, 추리 앞에 나타나는 역경의 벽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실제로 뤼팽 시리즈를 한 권 추천하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도 기암성이고. 나무랄 데 없는 수작에 어울리는 깔끔한 번역에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지만, 역시 홈스의 존재 때문에(별개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 영;) 별 네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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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텐스 - 내 영혼의 향기로운 한 문장
공선옥.서명숙 외 58인 지음 / 플럼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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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같은 반에 정말 싫은 녀석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 녀석은 정말 매우 퍽 참말 무척 진짜로 싫은 녀석이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는 그렇게 생겨먹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반드시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녀석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생긴 문제들을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해결하기 위해 그런 인격으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녀석이 그 모양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전부 완전히 이해할 수 잆다면 그 녀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은 사라질 것이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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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텐스 - 내 영혼의 향기로운 한 문장
공선옥.서명숙 외 58인 지음 / 플럼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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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끔은 영화. 한 구절 혹은 여러 줄.
책을 읽는 사람들이 책 가운데서 인상깊게 여겼던 문장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써서 엮어낸 책이다. 작가, 언어치료사, 기자, 디자이너, 연구가, 교수, 번역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이 책에서 한데 묶은 것은 독서다. 사랑, 행복, 용기, 성공, 사람, 지구, 인생 등의 챕터로 나뉘어 있으니 대강 챕터명을 보면 어떤 문장들이 있는지 짐작갈 듯싶다. 

책이 많은 것만큼이나 책에 대한 책도 많다. 그런 것처럼 이 책에서도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있지만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문장도 있었다. 그렇게 책을 넘겨가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도서 목록을 하나 완성했다. 이 책들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 한 번 센텐스를 읽어볼까 한다. 물론, 그 때는 내가 그 책에서 인상깊은 문장 하나를 뽑아내서.

예를 들어, 같은 반에 정말 싫은 녀석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 녀석은 정말 매우 퍽 참말 무척 진짜로 싫은 녀석이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는 그렇게 생겨먹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반드시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녀석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생긴 문제들을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해결하기 위해 그런 인격으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녀석이 그 모양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전부 완전히 이해할 수 잆다면 그 녀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은 사라질 것이다.
_자녀교육과 관련된 일본 서적 중 - p.190 

번역가 천채정 님이 뽑은 문장. 출처를 기억하지 못하신다는 게 정말로 아쉬웠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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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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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현악기 월금과 섬 형태가 닮아 '월금도'라 불리는 작은 섬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후예라 칭하는 섬 최고의 자산가 다이도지 가문이 있다. 다이도지 가문의 후손인 고토에는 월금을 켜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쇼와 7년 섬을 방문한 학생의 아이를 가져, 8년에 여자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19년이 흘러 쇼와 26년, 고토에의 딸 다이도지 도모코가 만 18세가 되는 해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뱃속에 있을 때 친부를, 다섯살 때 친모를 잃은 도모코는 만 18세가 되었을 때 도쿄에 있는 의붓아버지의 곁으로 가서 살게 된다. 그런데 그녀를 월금도 밖으로 불러내서는 안 된다는 경고장이 날아든다. 위기를 느낀 가노 변호사는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동행을 부탁한다. 그리고 도모코가 섬을 나온 순간, 정말로 그녀의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전 도모코의 친부가 남긴 편지, 그가 죽은 사건에까지 얽혀, 긴다이치 코스케도 한 발짝 남기고서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피투성이 참극으로 전개된다.


지금까지 요코미조 세이시 하면 떠올리는 강렬함이 조금 덜한 작품. 물론 2대에 걸쳐 모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질척질척하기까지 한 애정의 굴레, 핏자국을 남기고 봉인된 방,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현재의 사건과의 관계, 음습한 경고문 같은 건 여전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여왕벌로 묘사되는 도모코의 외모나 그녀의 변화하는 분위기, 월금 형상의 섬, 가부키 공연 등 시각적으로 배경이 화려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영상화가 가장 많이 된 작품이라고 한다. (책 해설에 나와 있는 각 영상의 배역을 맡은 연기자 비교 : www7.ocn.ne.jp/~yokomizo/haiyaku/jououbati.html)  

이 작품을 읽으며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본연의 추리만큼이나 도모코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신경쓰였다. 도모코 친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변장을 하고 도모코 주변에 출몰하는 정체불명의 노인 등. 긴다이치 코스케는 역시나 "많은 사람이 살해당한 후에 처음부터 그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니 도리로도 할 말이 아니니까요." 라는 대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실제로 범인은 추리해내기 꽤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왕벌 도모코의 주변을 맴돌다 죽어간 남자들만큼이나 사건 해결도 여왕벌의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될 거라 생각되는 전개라, 역시 이 소설에서 제일 인상깊은 건 도모코라는 캐릭터 자체다. 후일담도 그런 의미에선 만족했다(도모코의 상대에 대한 조금 남은 불만은 차치하고). 좀 불안하긴 하지만 결말은 어쨌든 여왕벌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최선의 해피엔딩(?)이랄 수도 있겠다. 

전체적으로 추리 드라마적 요소들을 잘 섞어담아 깔끔하게 써낸 작품이란 느낌이다. 적당히 강렬하고, 적당히 음습하고, 적당히 재미있고.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소설'적 면이 좀 강조된 것 같지만, 그게 괜찮다면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특히 도모코같이 특징적인 캐릭터에, 분명 글자를 읽어내려가고 있는데도 캐릭터들이 영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미지적 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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