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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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남편과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잘 자라는 인사는 꼭 한다. 물론 내용은 그날그날에 따라 구체적으로 추가될 수도 있다.

르 클레지오의 말처럼 나는 나의 인간성과 나의 육체를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우리를 끊임없이 타인의 삶과 고백 속으로 탐험하도록 밀어 넣는 것 같다._76p

늦은 밤 피곤한 몸을 누이는 침대에서 각자의 하루를 읊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 시작한 새로운 개발품은 어떤 것인지, 근래 화두가 되는 직장 내 이슈가 뭔지 내 호기심을 충족하기에는 남편이 쏟아내야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돈 버느라 고생했다는 짧은 말로 대신한다. 그 속에는 더 자고 싶은 눈꺼풀을 억지로 일으키고 욕실로 들어서는 남편의 뒷모습에 대한 애잔함이 묻어있다.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의 말보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했던 시간들에 전하는 위로와 토닥임은 고단했던 하루의 마지막을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밤이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인가보다.

    

 

며칠에 한 번 습관적으로 클라우드 어플에 접속한다. 1년 전 오늘, 5년 전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나눈 사람과 공유하기도 하고 그날의 일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사진을 찍지 않은 수많은 날들은 어디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겨지지 않은 우리의 지난날들은 A를 보면 B가 떠오르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BA와 얽힌 추억을 가진 어느 한 사람일 수도, 누군가의 한 마디일 수도, 내 지난날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나는 자잘한 기억을 잘 하는 편이라서 사물을 보면 동시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감정이 많다.

살다보면 기억을 포맷까지는 아니더라도 파일 조각모음도 디스크 정리도 해야 하건만, 자질구레한 조각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정작 중요한 생각을 못하네. 그럴 공간이 없네._102p

소소한 추억에 가려져 사라져버린 진짜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객관성을 잃고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버린 기억은 또 무엇일까. 용량만 늘리면 순서대로 차곡차곡 저장되는 클라우드처럼 내 뇌에서도 순차적이고 정확한 기억들이 쌓인다면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일상은 때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인되고 본능적 필요에 따라 지워진 덕분에 완성된 모습이다. 각자의 용량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기억되고 정리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2018년 오늘내 모습이 사진으로 뜨지 않아도 크게 서운하지가 않다.

 

이 책은 잃어버린 것 같았던 내 시간들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게 했다. 내 인생에서 없었던 날인 듯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도 없어도 분명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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