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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평점 :
한은형 작가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를 읽었다. 표지가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읽다보니 그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아마도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술을 마신 경험담 중에서도 가장 왓따로 여겨질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굴의 형상을 한 인간이 샤블리를 가득 채워주고 광물의 맛을 느껴며 한달 내내 그 맛을 음미했다고 하니 표지가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당장 파리에 갈 이유를 거뜬히 만들어주는 굴과 샤블리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먹거리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에 얼마나 다른 자연환경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본능에 의해 인간이 존재해 왔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지 않을까 싶다면 너무 멀리 나간 거려나.
술을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못하지만 술에 대한 에세이를 종종 즐겨 보게 된다. 대리만족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대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술을 마셔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랄까. 사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무척 부럽기 때문이 오히려 가까울 것 같다. 20대를 고통스러운 술자리를 견디며 지나고 보니 술이라면 사실 진저리가 처지고 누군가 술을 권하면 도끼눈을 뜨고 무안을 준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도,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누군가가 지금부터 마시면 술이 는다느니, 아직 제대로 마셔보지 않아서 그런거라느니 라는 나름의 친분을 나누고 싶은 멘트를 들을 때면 친목이고 뭐고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참았으니 망정이지, 성질나는데로 했었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ㅋㅋ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살펴봐도, 아니 그렇게 거창할 필요도 없이 살다보면 술 한잔 나누며 편안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좋아보인다. 원래 맨정신에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의논해야하겠지만, 의외로 술자리에서 생긴 친분이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술상무라는 말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커피 맥주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말했듯이, 술은 사람의 몸을 이완시키고, 커피는 각성시키는 정반대의 성분이 담겨 있다. 그런데 커피 맥주를 마시면 이완되면서도 각성이 되는 야릇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몸이 노곤해지면서도 불현듯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술이라면 적당히 취하면서도 실수 하지 않고 좋은 마무리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ㅋㅋ
제목이 밤은 부드러워 이니 술을 마시면서도는 아니더라도 왠지 밤에 리뷰를 써야할 것만 같았다. 저자가 사계절로 구분지어 열거한 술에 대한 48가지 에피소드들은 세상에 술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았나 싶기도 하고, 또 그 술을 사람들이 즐기기까지의 역사과 얽힌 이야기들이 꽤나 좋은 술안주가 될 것 같았다. 누군가 매달 한 번 모임을 할 때마다 새로운 술을 가지고 와서 그 술에 얽힌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해준다면 그 모임은 얼마나 싱그럽고 설레일까. 그리고 그 술의 기원을 듣고 누군가가 지금 느끼는 이야기를 나눠준다면 아마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만 같다. 그럼 나 같이 술에 취약한 사람들도 한 잔을 아껴 마시며 경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유럽에 살아본 경험 덕분인지 몇 가지 술은 마셔보기도 잠깐이나마 즐기기도 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고 그나마 좋아했던 술은 당연히 와인류인데, 여름에 즐기는 Spritz Aperol과 겨울에 마시는 Gluhwein(vin brule)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와인을 즐기는 문화는 색깔도 너무나도 매혹적인 오렌지색과 끓어서 더욱 짙어진 자주빛깔이다. 또 더블린에 갔을 때에는 기네스팩토리에서 기네스 따르는 법을 배우며 기네스에는 철분이 많아서 임산부도 마신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까지 들어서 그런지, 더블린에 머무는 내내 펍에서 기네스만 마셨던 기억이 난다.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블룸스데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문외한에서 그나마 [율리시스]나 [더블린 사람들]은 시도조차 할 생각도 않고 그냥 제목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안분지족으로 한 걸음 나아간 정도랄까.
그 외에 저자의 책에 소개된 다양한 술은 읽을 때는 우와 신기해하며 검색창에 이름을 넣어 실물을 보고 블로그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술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난해함을 매 장마다 경험하게 된다. 아마도 나중에 어쩌다 우연히 저자의 책에 나온 술을 접할 기회가 있더라도 이렇게 그 술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진이니 번이니 위스키니 평생 마실 일이 없을 것 같은 술이라도 이렇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누구보다도 술을 좋아해서 ‘마셔’라고 큰소리 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 밤도 이렇게, 아니 겨울밤은 유난히 길고 봄이 오는 밤은 부드러울테니 책에 나온 몇 가지 술을 적어두었다가 ‘마셔’라고 권하고만 싶어지는 순간이다.
“눈 뜨자마자 스카치를 마시고, 점심에 샴페인 한 병, 저녁에 또 샴페인 한 병, 새벽까지 브랜디와 와인을 마시는 게 매일의 일정이었다고 <다키스트 아워>에 나온다. 남들이 보리차를 먹듯이 스카치를, 탄산수를 먹듯이 샴페인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과시적인 음주 일정료를 본 적이 없다. 비싼 브랜디와 샴페인을 쉬지 않고 들이마시는 매일매일이라니.(131)” 이 영화를 꼭 봐야만 할 것 같다.
“바텐더라는 말은 오묘하다. ‘바bar’와 ’텐더tender’라는 말이 결합되었는데, ‘텐더’에는 온갖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 ‘부드러운’, ‘연한’, ‘상냥한’, ‘다정한’, ‘애정 어린’이라는 형용사와 ‘부드럽게 하다’, ‘소중히 하다’ 같은 타동사를 생각하면 무릎이 녹는 느낌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감미로워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바텐더라는 단어를 발음할 자격을 박탈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텐더는 바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루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고, 하루 중에서도 밤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마음에 대한 최고의 기술자랄까.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정신 상담소일 수도 있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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