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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이 어느날 나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그리고 내가 가르친 말을 이해하고 심지어 쓸 수도 있다면? 그러면 당장 외롭고 피곤한 나를 즐겁게 해주는 내 애완동물의 애완성은 수십배 커질 것이다. 그냥 마냥 나를 즐거워하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주인의 기분까지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던져줄 수 있는 만능 애완동물? 상상만 해도 신기하지 않은가?

 

 

이런 뜬금없는 상상은 사실 거의 보지 않았던 뿌리깊은 나무드라마에서 우연히 시청하게 된 장면 때문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는 밀본이 세종에게 했던 말이 바로 기르던 개가 말을 하게 된다면 어쩌겠냐는 것이었다. 결국 세종은 어찌됐든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성리학을 더욱 널리 알리고자 했으나 결국 이것이 의도치 않게 결국 조선후기 새로운 반체제세력이 등장하는 주요한 민족어로서의 기능을 했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한글의 역설적 효과. 이것이 바로 조선 후기 근대적 인민이 탄생하게 된 계기였고 이러한 인민의 탄생을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본 책이 바로 인민의 탄생이다.

 

 

조선후기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기 위해 기존의 한국사학이 고군분투하던 90년까지의 다양한 연구성과뿐 아니라 90년대 후반부터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새롭게 제시한 식민지근대화론의 관점에서 조선후기를 소농사회라는 균질화되고 정적인 역사상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연구까지 모두 끌어안으면서 거시적 관점에서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인민이 조선후기에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굵직굵직하게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이는 활용한 미시연구의 대표적 책이 내재적 발전론의 대표격인 역사학자 김용섭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주자인 이영훈의 저서와 논문들이 다수 적극적으로 인용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제는 기존의 조선사회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엮어내려는 저자의 의지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하고 그것을 특히 푸코의 담론이론과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 같은 자신이 이미 익혀온 서구개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활용하여 서양과 비교사적으로 어떻게 개인적 주체적 인민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지를 견주어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동시에 동양 삼국이 왜 다른 근대 주체의 탄생의 길을 걸었는지도 최대한 기존 연구성과를 활용하여 그 차이의 발생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거시적 종합의 강한 의지는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자신의 흥미로운 이력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서울대 75학번으로 처음 관악산 캠퍼스에서 문리대가 아니라 사회과학대와 인문대가 분리된 첫 분과학문의 입학생이었다. 이처럼 분과학문의 영역에서 자신의 학문적 이력이 시작된 자신은 서구이론 그것도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적 테두리 안에서 머물렀던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며 누구도 쉽게 감행하기 힘든 역사책과 논문, 그것도 조선시대로의 연구영역을 넓혔다. 이는 서구이론만으로 쉬이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한국사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겸손하게이야기하지만 매우 도발적이고 어쩌면 사회학과 역사학 양쪽에서 모두 무시당할 위험이 다분함에도 시도한 용기있는 저작이다. 특히 중앙일보의 꾸준한 칼럼리스트의 면모를 견지해서인지 상당히 쉽게 읽히고 명확하게 쓰여진 글이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모두 어느정도 달성한 한국사회를 놀라워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특히 경제성장의 기원을 찾기 위해 다양한 연구들이 진척되어 왔고 이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적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저 뜨거운 80년대의 민중의 시대에 민중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열정은 다 어디로 가고, 현재의 민주주의가 도래할 수 있었던 우리들, 우리 주체들의 역사는 더 이상 잘 연구되지 않는다. 경제성장뿐 아니라 지금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제는 과도한 맹아찾기 의지적 연구를 넘어 차분한 시각에서 우리라는 주체의 역사를 탐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구의 큰 맥락을 제시해준 저서가 바로 이 책의 또다른 성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한다면, 우선 정치와 종교, 문예(교육)이라는 조선의 삼중 장치가 와해되어가는 거시적 과정은 잘 드러나지만 역시나 그 안에서 살아간 인민들의 구체적인 목소리가 불가피하게 잘 들리지 않는다. 이는 부득이하게도 저자 스스로 거시적 연구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서술전략이었을지 모른다. 혹은 그런 개별적 사례연구는 이미 충분히 역사학 논문으로 나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곳곳에서 최대한 그런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하지만 그것들이 그렇게 생생하게 들리지는 않는 듯했다.

 

 

이러한 불가피성보다 좀더 아쉬운 점은 자꾸 한국의 근대를 지체된 근대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서양보다 개인적 주체적 비판적 주체가 늦게 등장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서구의 시민사회가 등장한 과정이 마치 보편적 길인 듯히 설정해놓고 우리는 거기에 왜 미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책 전체에 흐르는 듯했다. 조선의 강고한 지배체제와 상업과 시장을 멸시한 국가가 결국은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늦추었다는 끝없는 비애가 책 전체를 관통한다. 그러나 반드시 서구식 자유를 바탕으로 한 시민사회만이 과연 유일한 근대의 길이었을까? 성리학과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강고한 지배체제는 조선후기의 다양한 민란을 단지 억압하기만 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자각하는 인민들을 끌어안는 새로운 또다른 근대를 창조할 역량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조선이 망해야만 그것도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무너져야만 비로소 서구식 시민사회나 자유로운 개인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혹은 서구식 시민사회나 개인에 기반한 인민이 아니라 새로운 근대적 인민이 당시에 탄생할 기회는 없었던 것일까?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한국사의 경로가 반드시 지체된 근대로서 서구보다 시민사회와 개인적 주체의 등장이 늦었음을 애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사실 서구의 시민사회도 반드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책 전체적으로 비교 대상이 서구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런 인상이 남았은지도 모르지만, 서구의 근대화 경로를 으로 놓고 우리의 근대화 경로는 지체된문제적 경로였다는 가치평가가 은연중에 스며들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이 책에서 푸코의 담론과 하버마스의 공론이라는 것이 주요한 개념으로 활용되는데, 저자는 푸코의 담론이 사회에 전체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분절된 것으로 설정하고 공론은 이러한 담론들 중에서 실질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는 작동기구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푸코의 담론과 하버마스의 공론을 새롭게 관계짓는 해석인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는 논리구조인지 궁금했다.

 

 

한국 학계에서 이제는 멸종위기에 처한 이러한 통합적 거시적 연구가 오랜만에 나와서 매우 반가웠고, 이 책에서는 근대적 인민이 등장한 무렵으로 설정한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게 된 1860년 이전까지를 다루었던 반면 본격적으로 그러한 인민이 어떻게 한국사를 수놓았는지를 밝히겠다는 그의 제2권이 빨리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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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사회에서 대학등록금 문제 등 양극화 문제가 주요 문제로 등장하는 요즘, 다시금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가에 대한 문제가 논쟁중이다. 이 책은 미국인이(그것도 중산층) 자신의 나라보다 유럽이 더 좋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의료보험이든 교육이든 민간 시장이 공공재를 분배"하는 미국은, 실제 정부지출이 늘어나서 유럽과 격차가 현재는 꽤 줄어든 수치를 보이지만, "미국인이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하듯 늘어나는 정부지출에 대응하여 세금을 많이 납부할수록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회사, 의사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는다"며 단순한 복지 지출의 수치만으로 진정한 양극화 해소는 어려움을 잘 지적한다.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은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복지지출을 늘리는 데 과연 그 지출의 수치만이 국가와 언론에서 이전보다 커졌다는 식으로 주장되지만, 정작 '서민'의 삶은 그러한 지출의 따뜻한 온기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물가지수가 안정화됐다고 하지만, 정작 서민에게 필수품이 물가지수들은 꽤 상승한 경우처럼, 실제 수치로는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효과에 속지 말고 진정 '서민' 스스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과 정당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판적' 노력이 필요한데, 서민은 그럴 시간에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여, 결국 자신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매우 힘든 조건이다.

 

그러나 이처럼 고도의 '선전'전략을 잘 꿰뚫기 위해서라도, 이 책처럼 과연 무엇이 진정한 복지이고 더 나은 사회인가에 대한 소개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유럽의 복지시스템이 미국보다 더 낫다는 것을 개인의 경험에 빌려서 설명하다보니, 근거와 논증보다는 '경험'에 따른 판단에 많아서, 읽는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글쓰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경제학자가 아니고서야 정확한 논리를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아쉬움 점은 그러한 경험의 자의성을 넘어서기 위한 좀더 논리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으로 논리가 구성됐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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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 책은 ‘결정적 이미지’에 관한 책인 듯합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를 과거의 물속에서 보았던 지리산의 푸른 하늘과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본 강렬한 은하수라는 두 이미지에서 찾았듯, 하나의 시가 만들어진 것은 어떤 결정적 ‘이미지’를 자신만의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고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설명한 철학서를 함께 놓고서 그것을 한아름 풀어놓기 때문에 이 책은 ‘결정적 이미지’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철학, 사랑, 사회, 자본주의, 여성, 신, 미디어, 저항, 역사, 감각, 글쓰기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시를 소재로 삼아 그 시가 형상화하는 결정적 이미지를 다양한 ‘책’들로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또한 장별로 들어간 색색이 아름다운 이미지는 더욱더 이런 ‘결정적 이미지’들의 모음집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저자의 솔직한 글쓰기와 잘 버무려져 적재적소에 배치된 그림들은 인문서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줍니다.


그런 인생의 결정적인 이미지인지는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저에게도 그런 ‘강렬한 이미지’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시골의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동은 그 단지의 가장 외곽에 있었고 베란다 반대쪽 문으로 바라보면 멋진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정중앙에는 자그만한 저수지가 있었고 그 뒤쪽에는 수영장이 그리고 양쪽으로 아기자기한 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논과 밭이 놓여있고 그곳에 작은 시골집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저녁 6시쯤엔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아직 비는 안오고 천둥이 쳤습니다. 상당히 더운 날씨여서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창가로 갔습니다. 몇초만에 엄청 많은 비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시꺼먼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쳤는데 왠지 모를 행복감과 편안함이 나를 급습했습니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 그 바람에 실려있는 땅내음과 공기내음 그런 것이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바람과 비를 즐기고 있던 순간 평생 잊지 못하는 멋진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양 옆 두 개의 산을 사이에 두고 정중앙 저수지. 그리고 그 앞쪽에 논, 밭과 시골집을 사이로 갑자기 아주 선명한 번개가 땅으로 내리쳤습니다. 갑작스러운 밝음은 주변의 어둠과 강렬히 대조되는 절대 밝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번개로 인해 만들어진 양 쪽 대칭의 균열은 마치 번개가 세상이라는 도화지를 반으로 완전히 찢어 버린것 같았습니다. 그 절대 밝음 속에는 무언가 새로운 세상과 통하는 통로가 열려있는 것 같았습니다. 곧 번개는 사라졌고, 다시 세상은 같은 어둠의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지만 저의 눈에는 아직도 그 번개가 세상의 도화지를 반으로 찍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나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나에게 그 어둠을 관통하는 번개의 선명한 이미지는 무언가 새로운 열망을 심어주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는 그러한 신천지를 꿈꾸는지 그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자주 떠오르곤 합니다. 이 이미지가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제가 저자처럼 어느 정도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이 오면 드러나겠지요.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잘짜여진 이 책을 굳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과거 느꼈던 강렬한 이미지처럼 시와 철학, 사회 관련한 언어들이 강렬한 이미지로 한 챕터를 읽어나갈 때마가 머릿속에 박히며, 그 박힌 것들은 그저 아름답고 매우 생생하여 저 또한 괜히 그런 아름다운 이미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물론 책에 이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들이 어쩌면 문명의 보물이 아니라 야만의 흔적일 수 있다는 등의 인문사회학적 통찰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굳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과거 느꼈던 강렬한 이미지처럼 시와 철학, 사회 관련한 언어들이 챕터마다 잘 엮어 또다른 멋진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히며, 그 박힌 것들은 그저 아름답고 매우 생생하여 저 또한 괜히 그런 아름다운 이미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책에 등장하는 꼭 소개하고픈 시 하나가 있습니다. 허연의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입니다. 특히 요즘 ‘애완묘’를 기를까 한참 고민하면서 자주 펫숍에 들러 창문에 진열된 고양이를 유심히 보거나, ‘길양이’를 우연히 마주칠 때도 귀엽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앞서곤 해서인지 더욱 이 시에 등장하는 상황과 ‘통찰’이 저에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 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 전 사바나의 기억 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 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했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선 나직이 쓰레기봉투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저자가 잘 해석했듯이, 평범한 고양이와 평범한 인간이 출근길 아침 골목길이라는 야생의 세계에 마주하는 순간을 이 시인은 포착했고 그것을 보고 그저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불쌍한 ‘길양이’로 안쓰러운 눈길을 던지며 쓱 지나가는 ‘저’와 달리 새롭게 바라봅니다. “비록 인간사회 근처에서 쓰레기봉투나 뒤지며 살게 된 운명이지만, 고양이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아직도 ‘오래전 사바나의 기억’, 즉 자유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인은 자신이 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제목도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이고 그 추함은 후배에게 들은 말이자 동시에 자유로운 고양이 앞에서 등을 돌려 출근시간까지 정해진 곳에 도달해야 하는 속박된 직장인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강신주의 해석처럼 시인은 고양이를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로 다시보고 있습니다. 여지껏 애완동물 혹은 길양이로만 보아오던 저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청춘’들도 그런 것 아닐까요? 앞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요즘 시대의 청춘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고 이에 따뜻한 말을 건네준 책에 ‘환호’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라는 것이 마치 내가 길양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위로가 아닐까요? 어쩌면 점점 가질 것이 없어진 그 청춘들이 진정 세상을 바꿀 ‘자유로운 청년’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까지 세상을 뒤흔들어온 존재들은 보통 그런 ‘잉여’이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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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1970년대 독일의 급진혁명 단체 적군파(RAF) 이야기를 담은 <바더 마인호프>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1967년 서독에서 이란의 전제 군주 방문을 반대하는 한 집회에서 대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부터” 시작된 학생운동이 이후 혁명을 꿈꾼 ‘테러리스트’가 되어 활동하는 1970년대 독일의 상황을 묘사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 돌을 던지면 ‘폭력적 불법행위’이지만 다함께 던지면 ‘정치행위’”라는 말이었던 듯하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혼자서만 터뜨리면 그건 ‘묻지마 살인’이지만 여럿이 모여서 함께 광장으로 나가 터뜨린다면 그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면 혼자만 끙끙 앓아서는 안된다. 분노하더라도 혼자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결국 모여야만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이러한 무시무시하면서 매력적인 ‘대중운동’이 어떻게 탄생하며 어떻게 성장했다가 소멸하는지를 다룬 책이 바로 『맹신자들』이다. 떠돌이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독학으로 1951년 이 책을 발표하고 일약 미국의 유명한 사회철학자가 되었으며 이후 여러 책을 남겼고 1983년 세상을 떠나면서는 레이건 대통령한테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1951년 하면 6.25전쟁이 한창이고 미소냉전이 점점 커져가던 ‘극단의 시대’였다. 미국은 ‘자유’를 자신들의 가치로 내세우며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과거 독일의 나찌즘처럼 개인을 억압하는 집단주의라며 비난했다. 개인(민주주의)와 집단(전체주의)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만들고자 했고 따라서 이러한 시대에 대중운동의 본질을 논한 이 책이 성공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후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유훈장’을 받을 정도로 개인의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추어올리며, 개인의 자유를 집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납’하는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 것이 어찌 매카시즘이 최고조이던 미국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저자는 나름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대중운동에 사람들이 이끌리는지에 관한 매커니즘을 최대한 분석하려고 애썼으며 3세계 민족주의처럼 후진 국가를 빠르게 선진국가로 변모하는 데는 이같은 대중운동이 필요악이며 마지막에 좋은 대중운동과 나쁜 대중운동을 구별하면서 유익한 대중운동도 있을 수 있음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유익한 대중운동의 대표라는 것이 “일본이 성취한 경이로운 쇄신과 위업”(240쪽)과 인도와 터키의 사례를 제시하는데 이러한 성공한 대중운동은 서양 ‘선진문물’을 익힌 지식인들이 먼저 불씨를 던졌고 이것이 대중운동으로 커져서 성공했다는 해석은, 1930년대 결국 이러한 성공을 기반으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일본의 역사를 간과한 서구중심주의적 평가일지 모른다.

어쨌든 1950년대 냉전의 한복판인 미국사회에서 탄생한 이 책은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반공주의적이고 자유지상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는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단상의 나열들이라서 어떤 논리적이고 명증적인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맹신자’를 다루는 책의 서술방식 자체가 ‘맹목적’이라며 불평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우리는 대중운동을 고민하게 만드는 몇 가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대중운동이 한국현대사의 역사 자체를 만들어왔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1987년 이후에도 여전히 정당정치 시스템보다는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가는 ‘대중민주주의’적 움직임이 활발한 한국사회에는 더욱더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들이 있다. 2002년 광장을 가득 채운 ‘붉은 악마’나 2008년 ‘촛불 소녀’처럼 무언가 집단적 현상이 발생하면 보수진영에서는 ‘좌빨’들의 선동의 따른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불평으로 치부하거나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과도한 집단주의가 자칫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모습으로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며 그 집단의 과격함에 경고를 보내곤 한다. 이처럼 대중이 모이면 좌와 우의 기존 지식인 혹은 정치인들은 상당히 경계심을 내비친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다수의 정치인 ‘민주주의’를 우매한 정치라며 비판했듯이.

이렇게 ‘두려운’ 대상인 대중운동의 탄생과 죽음은 어떠한 과정을 거칠까? 저자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들은 자기부정을 갈망하게 되고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고자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좌절과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어떤 집단적 가치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사회일수록 대중운동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가난한 사람, 신생빈민, 극빈자, 부적응자, 이기적인 사람, 권태에 빠진 사람, 죄인 등이 잠재적 전향자로서 이들은 여러 단결을 촉진하는 연극성과 강령 등 여러 이데올로기적 테크닉이 가미되면 하나의 대중운동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이 배태되는 것은 사회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대중운동으로 발현되는 것은 ‘희망’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때라는 통찰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이택광이 이미 프레시안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안철수 현상'도 이런 호퍼의 주장을 제대로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랜 민주화의 '역군들'인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이 아니라 안철수나 박원순 같은 '시민의 우상'을 지지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호퍼의 분석은 유용하다.”

이처럼 대중운동에는 ‘희망’이라는 긍정적 화법이 필수적이라는 저자의 통찰보다 내게 더 흥미로웠던 사실은 1951년 저자가 가졌던 맹신자가 되기 쉬운 잠재적 전향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실패원인을 세상 탓으로 돌리는 습성“(22쪽)이 흔하다는 사회분위기였다. 사실 1951년이면 20세기 초반 격렬했던 다양한 대중운동이 펼쳐졌고 또는 (3세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내게는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한국사회는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퍼뜨리기 시작한 ‘자기계발’의 담론들에 둘러싸여 취업실패와 명예퇴직 등을 모두 자신의 ‘무능’이라는 ‘내탓’으로 돌리는 사회이다. 그런데 저자가 설명하던 1950년대 미국은 적어도 좌절을 ‘내탓’보다는 ‘사회탓’으로 돌리려는 시대적 분위기가 당연했고 이는 저자가 스스로 이미 이런 사람들이 많고 그것이 지금까지 대중운동의 추동력이었다는 설명 자체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역자가 “the true believer”를 맹신자라며 부정적 어감으로 번역했듯이, 저자는 분명히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억압하는 집단적 대중운동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는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중운동이 시작되는 것은 ‘내탓’이 아니라 ‘남탓’이라는 의식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달리 1950년대에는 이러한 남탓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것이 바로 언제든지 대중운동이 가능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금 전세계적으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나 저개발국가에서 ‘민족주의 혁명’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기계발’ 담론이 퍼뜨린 ‘내탓’의식에 사람들이 빠져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세상을 향해 모여서 돌을 던질 궁리를 하기보다 자포자기에 빠져 생을 포기해버리는 것 아닐까? 그래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운동의 불씨가 살아 있다. 그 불씨를 키워서 변화를 이끌기 위해 대중들에게 희망을 선사할 ‘인물’이나 ‘가치’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내탓’을 당연시하게 만드는 무수한 자기계발 담론의 해체와 극복도 동시에 이뤄져야 할 듯하다.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맹신자들’을 대중운동에 참여하게끔 ‘희망’을 제시할 뿐 아니라, 자기계발이 성공과 실패의 유일한 길이라는 이 ‘신화’도 동시에 해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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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1-1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맹신자를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주니 좋은데요.
저는 이 맹신자의 특징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정치판과
기독교회가 아닐까 싶은데,,, 제발 정신 나간 소리이고 틀렸길 바랍니다..^^

크네히트 2011-11-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 감사합니다^^
정치과 종교는 그래서 비슷하다고 저자도 말했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