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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월은 언제나 신간이 적은 달이다. 출판사들이 지난해 매출을 위해 이미 12월에 나올 책을 다 내버렸을 뿐 아니라, 1월은 회사들이 원래 바쁜 달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몇권의 눈에 띄는 서적들이 보인다. 세권만 적는다.

 

 

 

 

 

 

현대 중국을 만들어낸 그 주변의 책들은 무엇이었을까? 특히 마오가 살아가던 시대에는 책의 영향력이 매울 컷을 터. 어떤 책들이 그의 사상과 삶에 엮여 있을지 그 궁금증을 풀어주길 기대한다.

 

 

 

 

 

 

 

 

 

 

 

 1905년부터 1925년이라는 시기 동안 일본에서 펼쳐진 민주주의적 경향의 시기를 다룬 저서다. 일본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경유해야 할 시기인데, 이 책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길 기대한다!

 

 

 

 

 

 

 

 

 

 

 

한국사회에서 90년대 이후 인기몰이를 했으며, 최근 푸코의 강의록이 새로 번역출간되면서 다시 한번 푸코의 인기가 주가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프랑스철학이 세계적으로 더군다나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사회정치문화적 배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또다른 소비품으로 푸코는 전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푸코 이론이 매력적인 소비품인지 아니면 새로운 변혁을 위한 도구일지 저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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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이 어느날 나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그리고 내가 가르친 말을 이해하고 심지어 쓸 수도 있다면? 그러면 당장 외롭고 피곤한 나를 즐겁게 해주는 내 애완동물의 애완성은 수십배 커질 것이다. 그냥 마냥 나를 즐거워하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주인의 기분까지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던져줄 수 있는 만능 애완동물? 상상만 해도 신기하지 않은가?

 

 

이런 뜬금없는 상상은 사실 거의 보지 않았던 뿌리깊은 나무드라마에서 우연히 시청하게 된 장면 때문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는 밀본이 세종에게 했던 말이 바로 기르던 개가 말을 하게 된다면 어쩌겠냐는 것이었다. 결국 세종은 어찌됐든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성리학을 더욱 널리 알리고자 했으나 결국 이것이 의도치 않게 결국 조선후기 새로운 반체제세력이 등장하는 주요한 민족어로서의 기능을 했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한글의 역설적 효과. 이것이 바로 조선 후기 근대적 인민이 탄생하게 된 계기였고 이러한 인민의 탄생을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본 책이 바로 인민의 탄생이다.

 

 

조선후기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기 위해 기존의 한국사학이 고군분투하던 90년까지의 다양한 연구성과뿐 아니라 90년대 후반부터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새롭게 제시한 식민지근대화론의 관점에서 조선후기를 소농사회라는 균질화되고 정적인 역사상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연구까지 모두 끌어안으면서 거시적 관점에서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인민이 조선후기에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굵직굵직하게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이는 활용한 미시연구의 대표적 책이 내재적 발전론의 대표격인 역사학자 김용섭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주자인 이영훈의 저서와 논문들이 다수 적극적으로 인용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제는 기존의 조선사회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엮어내려는 저자의 의지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하고 그것을 특히 푸코의 담론이론과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 같은 자신이 이미 익혀온 서구개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활용하여 서양과 비교사적으로 어떻게 개인적 주체적 인민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지를 견주어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동시에 동양 삼국이 왜 다른 근대 주체의 탄생의 길을 걸었는지도 최대한 기존 연구성과를 활용하여 그 차이의 발생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거시적 종합의 강한 의지는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자신의 흥미로운 이력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서울대 75학번으로 처음 관악산 캠퍼스에서 문리대가 아니라 사회과학대와 인문대가 분리된 첫 분과학문의 입학생이었다. 이처럼 분과학문의 영역에서 자신의 학문적 이력이 시작된 자신은 서구이론 그것도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적 테두리 안에서 머물렀던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며 누구도 쉽게 감행하기 힘든 역사책과 논문, 그것도 조선시대로의 연구영역을 넓혔다. 이는 서구이론만으로 쉬이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한국사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겸손하게이야기하지만 매우 도발적이고 어쩌면 사회학과 역사학 양쪽에서 모두 무시당할 위험이 다분함에도 시도한 용기있는 저작이다. 특히 중앙일보의 꾸준한 칼럼리스트의 면모를 견지해서인지 상당히 쉽게 읽히고 명확하게 쓰여진 글이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모두 어느정도 달성한 한국사회를 놀라워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특히 경제성장의 기원을 찾기 위해 다양한 연구들이 진척되어 왔고 이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적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저 뜨거운 80년대의 민중의 시대에 민중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열정은 다 어디로 가고, 현재의 민주주의가 도래할 수 있었던 우리들, 우리 주체들의 역사는 더 이상 잘 연구되지 않는다. 경제성장뿐 아니라 지금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제는 과도한 맹아찾기 의지적 연구를 넘어 차분한 시각에서 우리라는 주체의 역사를 탐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구의 큰 맥락을 제시해준 저서가 바로 이 책의 또다른 성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한다면, 우선 정치와 종교, 문예(교육)이라는 조선의 삼중 장치가 와해되어가는 거시적 과정은 잘 드러나지만 역시나 그 안에서 살아간 인민들의 구체적인 목소리가 불가피하게 잘 들리지 않는다. 이는 부득이하게도 저자 스스로 거시적 연구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서술전략이었을지 모른다. 혹은 그런 개별적 사례연구는 이미 충분히 역사학 논문으로 나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곳곳에서 최대한 그런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하지만 그것들이 그렇게 생생하게 들리지는 않는 듯했다.

 

 

이러한 불가피성보다 좀더 아쉬운 점은 자꾸 한국의 근대를 지체된 근대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서양보다 개인적 주체적 비판적 주체가 늦게 등장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서구의 시민사회가 등장한 과정이 마치 보편적 길인 듯히 설정해놓고 우리는 거기에 왜 미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책 전체에 흐르는 듯했다. 조선의 강고한 지배체제와 상업과 시장을 멸시한 국가가 결국은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늦추었다는 끝없는 비애가 책 전체를 관통한다. 그러나 반드시 서구식 자유를 바탕으로 한 시민사회만이 과연 유일한 근대의 길이었을까? 성리학과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강고한 지배체제는 조선후기의 다양한 민란을 단지 억압하기만 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자각하는 인민들을 끌어안는 새로운 또다른 근대를 창조할 역량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조선이 망해야만 그것도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무너져야만 비로소 서구식 시민사회나 자유로운 개인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혹은 서구식 시민사회나 개인에 기반한 인민이 아니라 새로운 근대적 인민이 당시에 탄생할 기회는 없었던 것일까?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한국사의 경로가 반드시 지체된 근대로서 서구보다 시민사회와 개인적 주체의 등장이 늦었음을 애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사실 서구의 시민사회도 반드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책 전체적으로 비교 대상이 서구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런 인상이 남았은지도 모르지만, 서구의 근대화 경로를 으로 놓고 우리의 근대화 경로는 지체된문제적 경로였다는 가치평가가 은연중에 스며들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이 책에서 푸코의 담론과 하버마스의 공론이라는 것이 주요한 개념으로 활용되는데, 저자는 푸코의 담론이 사회에 전체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분절된 것으로 설정하고 공론은 이러한 담론들 중에서 실질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는 작동기구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푸코의 담론과 하버마스의 공론을 새롭게 관계짓는 해석인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는 논리구조인지 궁금했다.

 

 

한국 학계에서 이제는 멸종위기에 처한 이러한 통합적 거시적 연구가 오랜만에 나와서 매우 반가웠고, 이 책에서는 근대적 인민이 등장한 무렵으로 설정한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게 된 1860년 이전까지를 다루었던 반면 본격적으로 그러한 인민이 어떻게 한국사를 수놓았는지를 밝히겠다는 그의 제2권이 빨리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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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한해가 새로 시작됐으나, 지난해 연말 주목 도서를 간추려본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인보다 한국사 전공자보다 한국현대사를 더 잘 아는 미국인이다. 그가 쓴 여러 거대한 저서들은 한국현대사의 역사 자체였다. 그가 미국사를 동아시아, 태평양의 관점에서 다시금 서술했다고 한다. 방대한 저작이지만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라 생각한다.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움직이며 도드라져 보이는 인물들이 실제 한국의 역사를 바꿔온 듯하지만, 어쩌면 그 밑바닥에 '복지부동'하고 있는 하급행정관들이 한국사의 연속성을 그대로 이어왔을지 모른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떠한 구조하에서 작동했으며 특히 그동안 왕과 양반 중심의 서술이거나, 혹은 그 안티테제로서 민중의 삶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하찮으나 존엄한" 9급관원들이 형성하고 있던 조선사회와 국가란 과연 어떠했을까? 그 매커니즘과 그들의 속살을 잘 드러내주길 기대한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달러를 벌어 한국경제는 성장했지만 그곳에 우리는 무수한 '학살'의 가해자였다. 그런 역사를 직시하고 우리의 성장의 '뿌리'를 잊지 않을 때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정당히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고, 이공계 박사이자 교수이신 분이 써낸 일종의 베트남 평화 기행문이자 반성문이 어떻게 쓰여졌을지 궁금하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가능했을지를, 미국의 영향력에 초점을 맞춰 특히 문화 분야에서 조명한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한국현대사를 Nation Building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네이션을 여기서 대한민국이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이 저자의 의미에 딱 들어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자는 2000년대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학계의 새로운 흐름과 무엇이 비슷하며 다른지를 염두에 두고 읽어볼만할 듯하다.

 

 

 

 

 

 

바버라 에런라이히라는 저자의 이력이 특이할 뿐 아니라 여전히 고령의 나이에도 왕성한 저작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특히 미국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직시하게끔 하면서도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의 '상식'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주었다. 전작 '긍정의 배신'을 개인적으로 2011년 올해의 책이라 생각했는데 마침 2011년이 다 가기 전에 다시 한권이 나왔다. 기대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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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8세기 유럽의 두 사상가 루소와 로크의 사상을 그들이 만나게된 어는 공간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사실 아직 완독을 하지 못하여, 심층적인 글을 쓰지 못했지만, 리뷰 마감이 지나서 우선 쓰고 추후 보충하려고 한다.

 

이 책처럼 어떤 어려운 철학을 당대의 역사적 사건과 뒷이야기들로 잘꾸며낸 책들이 한국에서는 잘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대중적 글쓰기는 더욱더 한국 독자들에게 반갑다.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당시 유럽 궁정과 살롱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 책을 좀더 진득하게 읽어보아야겠다. 이번달 안에 완독하여 이 페이퍼를 다시 보충할 것임을 알리며..( 이 책의 표지처럼 이상야릇한 이 책의 내용이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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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사회에서 대학등록금 문제 등 양극화 문제가 주요 문제로 등장하는 요즘, 다시금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가에 대한 문제가 논쟁중이다. 이 책은 미국인이(그것도 중산층) 자신의 나라보다 유럽이 더 좋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의료보험이든 교육이든 민간 시장이 공공재를 분배"하는 미국은, 실제 정부지출이 늘어나서 유럽과 격차가 현재는 꽤 줄어든 수치를 보이지만, "미국인이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하듯 늘어나는 정부지출에 대응하여 세금을 많이 납부할수록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회사, 의사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는다"며 단순한 복지 지출의 수치만으로 진정한 양극화 해소는 어려움을 잘 지적한다.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은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복지지출을 늘리는 데 과연 그 지출의 수치만이 국가와 언론에서 이전보다 커졌다는 식으로 주장되지만, 정작 '서민'의 삶은 그러한 지출의 따뜻한 온기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물가지수가 안정화됐다고 하지만, 정작 서민에게 필수품이 물가지수들은 꽤 상승한 경우처럼, 실제 수치로는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효과에 속지 말고 진정 '서민' 스스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과 정당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판적' 노력이 필요한데, 서민은 그럴 시간에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여, 결국 자신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매우 힘든 조건이다.

 

그러나 이처럼 고도의 '선전'전략을 잘 꿰뚫기 위해서라도, 이 책처럼 과연 무엇이 진정한 복지이고 더 나은 사회인가에 대한 소개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유럽의 복지시스템이 미국보다 더 낫다는 것을 개인의 경험에 빌려서 설명하다보니, 근거와 논증보다는 '경험'에 따른 판단에 많아서, 읽는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글쓰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경제학자가 아니고서야 정확한 논리를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아쉬움 점은 그러한 경험의 자의성을 넘어서기 위한 좀더 논리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으로 논리가 구성됐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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