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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1970년대 독일의 급진혁명 단체 적군파(RAF) 이야기를 담은 <바더 마인호프>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1967년 서독에서 이란의 전제 군주 방문을 반대하는 한 집회에서 대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부터” 시작된 학생운동이 이후 혁명을 꿈꾼 ‘테러리스트’가 되어 활동하는 1970년대 독일의 상황을 묘사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 돌을 던지면 ‘폭력적 불법행위’이지만 다함께 던지면 ‘정치행위’”라는 말이었던 듯하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혼자서만 터뜨리면 그건 ‘묻지마 살인’이지만 여럿이 모여서 함께 광장으로 나가 터뜨린다면 그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면 혼자만 끙끙 앓아서는 안된다. 분노하더라도 혼자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결국 모여야만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이러한 무시무시하면서 매력적인 ‘대중운동’이 어떻게 탄생하며 어떻게 성장했다가 소멸하는지를 다룬 책이 바로 『맹신자들』이다. 떠돌이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독학으로 1951년 이 책을 발표하고 일약 미국의 유명한 사회철학자가 되었으며 이후 여러 책을 남겼고 1983년 세상을 떠나면서는 레이건 대통령한테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1951년 하면 6.25전쟁이 한창이고 미소냉전이 점점 커져가던 ‘극단의 시대’였다. 미국은 ‘자유’를 자신들의 가치로 내세우며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과거 독일의 나찌즘처럼 개인을 억압하는 집단주의라며 비난했다. 개인(민주주의)와 집단(전체주의)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만들고자 했고 따라서 이러한 시대에 대중운동의 본질을 논한 이 책이 성공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후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유훈장’을 받을 정도로 개인의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추어올리며, 개인의 자유를 집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납’하는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 것이 어찌 매카시즘이 최고조이던 미국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저자는 나름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대중운동에 사람들이 이끌리는지에 관한 매커니즘을 최대한 분석하려고 애썼으며 3세계 민족주의처럼 후진 국가를 빠르게 선진국가로 변모하는 데는 이같은 대중운동이 필요악이며 마지막에 좋은 대중운동과 나쁜 대중운동을 구별하면서 유익한 대중운동도 있을 수 있음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유익한 대중운동의 대표라는 것이 “일본이 성취한 경이로운 쇄신과 위업”(240쪽)과 인도와 터키의 사례를 제시하는데 이러한 성공한 대중운동은 서양 ‘선진문물’을 익힌 지식인들이 먼저 불씨를 던졌고 이것이 대중운동으로 커져서 성공했다는 해석은, 1930년대 결국 이러한 성공을 기반으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일본의 역사를 간과한 서구중심주의적 평가일지 모른다.
어쨌든 1950년대 냉전의 한복판인 미국사회에서 탄생한 이 책은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반공주의적이고 자유지상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는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단상의 나열들이라서 어떤 논리적이고 명증적인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맹신자’를 다루는 책의 서술방식 자체가 ‘맹목적’이라며 불평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우리는 대중운동을 고민하게 만드는 몇 가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대중운동이 한국현대사의 역사 자체를 만들어왔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1987년 이후에도 여전히 정당정치 시스템보다는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가는 ‘대중민주주의’적 움직임이 활발한 한국사회에는 더욱더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들이 있다. 2002년 광장을 가득 채운 ‘붉은 악마’나 2008년 ‘촛불 소녀’처럼 무언가 집단적 현상이 발생하면 보수진영에서는 ‘좌빨’들의 선동의 따른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불평으로 치부하거나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과도한 집단주의가 자칫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모습으로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며 그 집단의 과격함에 경고를 보내곤 한다. 이처럼 대중이 모이면 좌와 우의 기존 지식인 혹은 정치인들은 상당히 경계심을 내비친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다수의 정치인 ‘민주주의’를 우매한 정치라며 비판했듯이.
이렇게 ‘두려운’ 대상인 대중운동의 탄생과 죽음은 어떠한 과정을 거칠까? 저자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들은 자기부정을 갈망하게 되고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고자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좌절과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어떤 집단적 가치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사회일수록 대중운동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가난한 사람, 신생빈민, 극빈자, 부적응자, 이기적인 사람, 권태에 빠진 사람, 죄인 등이 잠재적 전향자로서 이들은 여러 단결을 촉진하는 연극성과 강령 등 여러 이데올로기적 테크닉이 가미되면 하나의 대중운동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이 배태되는 것은 사회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대중운동으로 발현되는 것은 ‘희망’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때라는 통찰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이택광이 이미 프레시안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안철수 현상'도 이런 호퍼의 주장을 제대로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랜 민주화의 '역군들'인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이 아니라 안철수나 박원순 같은 '시민의 우상'을 지지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호퍼의 분석은 유용하다.”
이처럼 대중운동에는 ‘희망’이라는 긍정적 화법이 필수적이라는 저자의 통찰보다 내게 더 흥미로웠던 사실은 1951년 저자가 가졌던 맹신자가 되기 쉬운 잠재적 전향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실패원인을 세상 탓으로 돌리는 습성“(22쪽)이 흔하다는 사회분위기였다. 사실 1951년이면 20세기 초반 격렬했던 다양한 대중운동이 펼쳐졌고 또는 (3세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내게는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한국사회는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퍼뜨리기 시작한 ‘자기계발’의 담론들에 둘러싸여 취업실패와 명예퇴직 등을 모두 자신의 ‘무능’이라는 ‘내탓’으로 돌리는 사회이다. 그런데 저자가 설명하던 1950년대 미국은 적어도 좌절을 ‘내탓’보다는 ‘사회탓’으로 돌리려는 시대적 분위기가 당연했고 이는 저자가 스스로 이미 이런 사람들이 많고 그것이 지금까지 대중운동의 추동력이었다는 설명 자체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역자가 “the true believer”를 맹신자라며 부정적 어감으로 번역했듯이, 저자는 분명히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억압하는 집단적 대중운동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는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중운동이 시작되는 것은 ‘내탓’이 아니라 ‘남탓’이라는 의식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달리 1950년대에는 이러한 남탓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것이 바로 언제든지 대중운동이 가능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금 전세계적으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나 저개발국가에서 ‘민족주의 혁명’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기계발’ 담론이 퍼뜨린 ‘내탓’의식에 사람들이 빠져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세상을 향해 모여서 돌을 던질 궁리를 하기보다 자포자기에 빠져 생을 포기해버리는 것 아닐까? 그래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운동의 불씨가 살아 있다. 그 불씨를 키워서 변화를 이끌기 위해 대중들에게 희망을 선사할 ‘인물’이나 ‘가치’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내탓’을 당연시하게 만드는 무수한 자기계발 담론의 해체와 극복도 동시에 이뤄져야 할 듯하다.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맹신자들’을 대중운동에 참여하게끔 ‘희망’을 제시할 뿐 아니라, 자기계발이 성공과 실패의 유일한 길이라는 이 ‘신화’도 동시에 해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