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 책은 ‘결정적 이미지’에 관한 책인 듯합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를 과거의 물속에서 보았던 지리산의 푸른 하늘과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본 강렬한 은하수라는 두 이미지에서 찾았듯, 하나의 시가 만들어진 것은 어떤 결정적 ‘이미지’를 자신만의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고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설명한 철학서를 함께 놓고서 그것을 한아름 풀어놓기 때문에 이 책은 ‘결정적 이미지’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철학, 사랑, 사회, 자본주의, 여성, 신, 미디어, 저항, 역사, 감각, 글쓰기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시를 소재로 삼아 그 시가 형상화하는 결정적 이미지를 다양한 ‘책’들로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또한 장별로 들어간 색색이 아름다운 이미지는 더욱더 이런 ‘결정적 이미지’들의 모음집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저자의 솔직한 글쓰기와 잘 버무려져 적재적소에 배치된 그림들은 인문서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줍니다.
그런 인생의 결정적인 이미지인지는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저에게도 그런 ‘강렬한 이미지’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시골의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동은 그 단지의 가장 외곽에 있었고 베란다 반대쪽 문으로 바라보면 멋진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정중앙에는 자그만한 저수지가 있었고 그 뒤쪽에는 수영장이 그리고 양쪽으로 아기자기한 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논과 밭이 놓여있고 그곳에 작은 시골집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저녁 6시쯤엔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아직 비는 안오고 천둥이 쳤습니다. 상당히 더운 날씨여서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창가로 갔습니다. 몇초만에 엄청 많은 비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시꺼먼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쳤는데 왠지 모를 행복감과 편안함이 나를 급습했습니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 그 바람에 실려있는 땅내음과 공기내음 그런 것이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바람과 비를 즐기고 있던 순간 평생 잊지 못하는 멋진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양 옆 두 개의 산을 사이에 두고 정중앙 저수지. 그리고 그 앞쪽에 논, 밭과 시골집을 사이로 갑자기 아주 선명한 번개가 땅으로 내리쳤습니다. 갑작스러운 밝음은 주변의 어둠과 강렬히 대조되는 절대 밝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번개로 인해 만들어진 양 쪽 대칭의 균열은 마치 번개가 세상이라는 도화지를 반으로 완전히 찢어 버린것 같았습니다. 그 절대 밝음 속에는 무언가 새로운 세상과 통하는 통로가 열려있는 것 같았습니다. 곧 번개는 사라졌고, 다시 세상은 같은 어둠의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지만 저의 눈에는 아직도 그 번개가 세상의 도화지를 반으로 찍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나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나에게 그 어둠을 관통하는 번개의 선명한 이미지는 무언가 새로운 열망을 심어주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는 그러한 신천지를 꿈꾸는지 그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자주 떠오르곤 합니다. 이 이미지가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제가 저자처럼 어느 정도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이 오면 드러나겠지요.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잘짜여진 이 책을 굳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과거 느꼈던 강렬한 이미지처럼 시와 철학, 사회 관련한 언어들이 강렬한 이미지로 한 챕터를 읽어나갈 때마가 머릿속에 박히며, 그 박힌 것들은 그저 아름답고 매우 생생하여 저 또한 괜히 그런 아름다운 이미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물론 책에 이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들이 어쩌면 문명의 보물이 아니라 야만의 흔적일 수 있다는 등의 인문사회학적 통찰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굳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과거 느꼈던 강렬한 이미지처럼 시와 철학, 사회 관련한 언어들이 챕터마다 잘 엮어 또다른 멋진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히며, 그 박힌 것들은 그저 아름답고 매우 생생하여 저 또한 괜히 그런 아름다운 이미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책에 등장하는 꼭 소개하고픈 시 하나가 있습니다. 허연의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입니다. 특히 요즘 ‘애완묘’를 기를까 한참 고민하면서 자주 펫숍에 들러 창문에 진열된 고양이를 유심히 보거나, ‘길양이’를 우연히 마주칠 때도 귀엽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앞서곤 해서인지 더욱 이 시에 등장하는 상황과 ‘통찰’이 저에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
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 전 사바나의 기억
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
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했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선 나직이
쓰레기봉투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저자가 잘 해석했듯이, 평범한 고양이와 평범한 인간이 출근길 아침 골목길이라는 야생의 세계에 마주하는 순간을 이 시인은 포착했고 그것을 보고 그저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불쌍한 ‘길양이’로 안쓰러운 눈길을 던지며 쓱 지나가는 ‘저’와 달리 새롭게 바라봅니다. “비록 인간사회 근처에서 쓰레기봉투나 뒤지며 살게 된 운명이지만, 고양이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아직도 ‘오래전 사바나의 기억’, 즉 자유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인은 자신이 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제목도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이고 그 추함은 후배에게 들은 말이자 동시에 자유로운 고양이 앞에서 등을 돌려 출근시간까지 정해진 곳에 도달해야 하는 속박된 직장인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강신주의 해석처럼 시인은 고양이를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로 다시보고 있습니다. 여지껏 애완동물 혹은 길양이로만 보아오던 저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청춘’들도 그런 것 아닐까요? 앞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요즘 시대의 청춘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고 이에 따뜻한 말을 건네준 책에 ‘환호’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라는 것이 마치 내가 길양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위로가 아닐까요? 어쩌면 점점 가질 것이 없어진 그 청춘들이 진정 세상을 바꿀 ‘자유로운 청년’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까지 세상을 뒤흔들어온 존재들은 보통 그런 ‘잉여’이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