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 -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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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선뜻 부엌을 보자고 한다면 민낯이 드러나는 기분이 들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리에 별 취미가 없다. 전혀 재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귀찮은 일 중 하나다. 만드는 열정도, 먹는 즐거움도 그다지 없다. 배만 안고프면 된다는 생각에 여태껏 식에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시부모님과 합친 후 부엌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시간들은 더 큰 스트레스를 낳았었다.

 

하지만 내게도 싫든 좋든 부엌에 관한 추억은 쌓였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했던 일들이 단순히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었음을 되짚어 보니 내 삶도 그곳에서부터 영글기 시작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집 저집 음식 냄새를 타고 퍼져나가는 사연들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느끼는 마음들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부엌을 쓰고 닦는 동안 많은 이들과의 연을 채워간 이도 있을 것이고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충실하지 못한 삶을 부엌에서 위안 받거나 새로운 시도로 마음을 다잡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부억취재기가 담겨있다. 저자는 취재를 하는 동안 이곳에서 사람사는 냄새를 진하게 느낀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개된 열아홉 집의 모습을 보며 부엌을 홀대했던 순간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식도락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요리를 즐기는 이들도 많아지고 또 결혼 후 함께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는 부부도 흔하다. 함께 장을 보고 장단 맞춰 식사 준비가 끝나면 즐겁게 식사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더 정겹게 흘러간다. 그래서 가족이 한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긍정적 기운을 불러온다. 그래서 우리집도 되도록이면 저녁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 하려한다.

부엌은 그렇게 함께 하며 서로의 식성과 취향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

마주는 앉았지만 각자의 음식에만 몰두한다면 식사시간이 즐거울 리 없다. 아내의 채식 식단 앞에서 "뭐야, 당신, 잘난 척 그만해." -p.13라고 내뱉는 남편이라면 굳이 밥상 앞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터졌을 것이다. 취향을 존중받지 못하는 사이라면 한쪽이 감당해야 할 상처는 더 커져간다.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깨닫는데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들인 공간은 그만큼 가치가 깃든다는 말이 부엌과 그리 잘 어우러질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부엌과 그리 친하진 않아도 다른 집의 부엌을 들여다보니 정겨움이 느껴진다.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듯 조리도구 및 주방용품이 빼곡한 집도 있는 반면에 초라해 보이는 집도 있다. 욕심나는 주방기구를 설치한 것으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고 인테리어에 제법 공을 들인 집도 있다. 그러나 노숙자 생활을 방불케하는 노부부의 부엌을 보면서 앞날보단 당장의 위생과 건강이 염려되기도 했다.

 

 

 

부엌이란 공간과 삶을 엮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혼 후 미각을 잃은 여자가 부엌에서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찾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친구가 해준 충고가 떠올랐다. 내가 나 스스로를 제대로 대접하는 일은 제대로 된 식사에 있다며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조언을 남긴 친구의 말과 그녀가 정의한 요리는 '입지 확인'이다라는 말이 닮아 있는 듯 하다.

 

다시 한번 혼자만의 생활로 돌아와 땅에 발을 붙이고 현실이 살아가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생활에서 최저한의 부분은 지키고 싶어요. 힘차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 요리는 제게 그 입지를 확인하는 일이에요. -p.92

 

시집살이의 부엌일은 고달팠으나 마당 텃밭에서 길러낸 제철 채소들로 부침개를 부쳐 나눠먹던 일(여름이면 식탁이 각종 채소로 풍성했다), 힘든 육아 시절 남이 해 준 밥은 다 맛있구나를 경험한 일(내가 먹은 감자볶음 중 최고였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아빠의 요리 갈치구이(비주얼은 엉망이었는데 맛은 끝장이었다), 명절 때마다 그 좁은 부엌에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내오던 요술쟁이 같던 엄마(그렇게 차려놓고도 차린 게 없단 소리는 빼놓지 않았다), 싸운 뒤 분위기가 서먹할 때 나는 떡볶이로 남편은 라면으로(역시 먹는 게 남는 건가), 작년 겨울에 담은 김장김치가 성공한 일(마음가짐을 달리 먹었다. 즐기기로)들이 막 떠올랐다.

최근에는 "방학이라 삼시 세끼 챙기다 하루가 다 가. 내 공간이라곤 부엌 식탁뿐인 것 같아."라며 신세한탄하던 친한 언니의 투정도 떠오른다.

 

난 이 책을 계기로 부엌에 대한 느낌이 많이 바뀌었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부엌에서 써 내려갈 레시피가 나의 인생 레시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더 애정을 쏟고 싶어진다. 요리는 생활의 질을 높이고 맛있는 음식은 입안뿐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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