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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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를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심신을 달래주었던 유일한 책이 여행 산문집이었다. 모든 화살이 나한테 몰려오고 있는 듯한 느낌에 숨쉬기조차 힘들 때 여행 에세이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 주었다. 언젠가는 그들이 지나온 자리에서 나도 그곳의 채취와 풍경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말이다.

참 오랜만에 읽은 여행 산문집이다. 다큐 PD라는 직업보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읽은 기억 때문에 작가와의 거리감은 좁힐 수 있었다. [멀고도 가까운]도 여행 중에 읽은 책이다. 그 뒤로 다시 한 번 더 읽어야지 했던 책이기도 한데 [건너오다]를 읽으면서 더 곱씹으며 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치에 방향치에 인생치다. 그래서 늘 한발 늦게 시작하고 한치 늦게 깨닫는다. 그렇다고 뭐 딱히 크게 손해 본 건 없는 듯하지만 후회되는 순간도 더러 있다.(원래 잘 후회하지는 않는다.) 대학생활은 내게 있어 너무나 급작스럽게 변한 환경이었다. 거주지가 바뀐 것부터 두려움이었으니 세상으로 나갈 용기도 없었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챙겨 줄 형편이 안되었었고 정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이었다. 그때 텅텅 빈 영혼을 글로라도 채웠었더라면 삼십 대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가 베케트의 무덤 앞에서 많이 울었다던 장면을 보며 들었던 감정이다. 나는 왜 그때 아무것도 붙잡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저자는 직업상의 일이었지만 여행지에서 느꼈던 모든 순간을 생각으로 채워 넣는다. 낯선 풍경뿐 아니라 일상의 순간,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은 그가 늘 품었던 생각들을 줄줄이 엮어 낼 수 있게 해 준다. 여행지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을 자랑삼아 늘어놓기만 했다면 결코 특별할 것 없는 산문집이었을 것이다. 경험이 주는 특별함을 정신이 온전히 받아들일 때 여행은 더욱 특별해진다.

동경하던 작가의 흔적을 발견하고 상상하던 그곳을 직접 눈으로 보는 일, 여행지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들과 낯선 경험들. 이 모든 것들은 떠나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수확이다. 게다가 극한의 체험들은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게도 하고 경계에선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저자의 말처럼 경계를 넓히는 일은 피곤함과 두려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내면은 더 꽉 차게 된다. 항공사의 실수로 수하물이 늦어진 며칠을 그냥 그렇게 보내며 얻은 깨달음이나 밤하늘의 별처럼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들 때문에 변화하는 것의 두려움 따위는 떨쳐버릴 수 있다는 것들처럼. 그리고 힘겨운 촬영 뒤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때의 행복감 같은 것들 말이다.

유독 기억에 남았던 일화 중 일본 오키야마의 침팬지의 쓸쓸한 멍 때리기가 떠올랐다. 수놈끼리의 경쟁에서 패배한 놈은 가끔 먼 곳을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 위로라는 개념은 없다. 그런 그들에게 연구원들은 he와 she를 붙여서 부른다. 저자는 그 모습을 보며 그들과 인간이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된다고 반기를 든다. 제아무리 인간 사회가 승자만을 기억하는 사회로 전락한다지만 아직은 패자를 향한 너그러운 시선과 응원의 시선이 남아 있어야 함을 말한다. 먼 곳을 바라보는 침팬지와 이십 대의 내가 동일하게 느껴져서일까. 왠지 울컥하고 뭉클했다.

태국 치앙마이의 눈먼 아이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내린 교육의 정의가 참 와닿았다. 교육이란 그렇게 서로 다른 개인의 언어들이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일 것이다.-p.158라는 말에서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소제목을 자꾸만 곱씹어 보았다. 함께 느낄 수 없더라도 계속 공감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그 결과가 냉소적이 되거나 겸손해지든지 간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은 피해야 하겠다.

여전히 미혼에다 여행을 즐기는 절친이 부러운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건너오고 나니 내가 보인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존 버거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는데도 어쩌면 내 생각과 문장은 당분간 제자리걸음이겠지만 심적으로 허우적대지는 않을 여유는 생겼다. 그래서 내면의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이 좋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이렇게 와닿을 줄이야. 크흐~~

타인에게 자랑할만한 낯설고 특별한 경험들은 없지만 매일을 새롭게 살아갈 마음만은 단단해지고 있다. 삶은 단정 짓거나 확신하기에 변수가 너무나 많다. 싫고 좋음, 옳고 그름, 예쁘고 못생김, 잘 살고 못 살고,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 착하고 못된... 양분된 속성 속에도 다양한 감정과 의미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냥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면 내려놓게 되기도 하니까.

 

 

 

요즘은 주말마다 숲으로 간다. 사람들의 흔적이 새겨진 길 위를 걷는 기분이 참 좋다.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단단해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비록 다독의 길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지만 자연의 변화 속에서 움직이는 순간들이 참 좋다. 책 속 문장들이 편안해서 떠오르는 순간도 많아진다. 캠핑 불빛이 하나 둘 사라지면 더욱 두드러지는 별들, 가쁜 숨에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마저도 절실한 기억, 마주 오는 이들과 나누는 짧은 농담에 멀어져 가는 웃음소리, 장작이 타던 소리가 주는 안정감...
그렇게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생각도 심어본다. 풍경을 담던 그 순간의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서일까. 나의 건너 온 자리들이 나를 더 단단히 이어 주는 듯하다. 고도를 기다리듯 나는 주말을 기다려야겠다.

 

 

★★★

 

 

 

나는 이제 나의 '자리'가 궁금하지 않다. '되고 싶은' 어떤 자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런 자리라는 것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목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나를 인정하며 지내는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결과'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전에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는 비법 같은 건 없다는 걸 먼저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 나면 나와 화해할 수 있다. -p.20

 

 

 

약속은 하나의 세계를 긍정하는 최종적인 매듭이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그 약속을 바라며 살아온 세상의 완성이고,

그건 꽤나 뿌듯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때론 약속은 너무 성급했고, 그 약속을 다짐했던 세상은 너무 자주 깨지곤 했으며, 그러고 나면 경계 너머의 새로운 세상에서 과거의 약속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었다.

경계에서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을 느낀 건 그렇게 약속이 깨어질 때의 서운함과 다르지 않았다. -p.65

 

 

 

변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는 무언가는 위로를 준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화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아쉬워한다.
'길들여진 상태'가 편안한 만큼 의지와 달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아는 상황은 서운하고 때론 아프다. -p.136

 

 

 

경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경계가 아니라 경계 앞에 선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욕심이고, 욕심에의 다른 이름인 미련 혹은 집착이고, 두려움이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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