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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천년의 질문 1~3 세트 - 전3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9년 6월
평점 :
조정래 작가님의 신작 <천년의 질문 1~3>을 일요일 하루 만에 통으로 읽었다.
인물간의 대화가 실감나고 호흡도 짧아서 한번 잡으면 200쪽 씩은 거뜬히 넘어갔다.
흡사 삼국지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사 전략들과 정치 미드에서 보던 심리 싸움,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와 조폭 영화에 빠질 수 없는 치고박는 장면도 나오는 바람에 이게 소설인지, 영화인지, 고전인지 장르를 넘나든다.
<천년의 질문 1>이 기자 '장우진' 과 대학교 시간 강사 '고석민' 그리고 얽힌 성화그룹 비자금 사건이라면,
<천년의 질문 2>에서는 성화그룹 후계자 안서림 사장과 그의 허수아비 남편 김태범의 진흙탕 싸움 & 최민혜 민중 변호사와 황원준 검사 이야기가,
<천년의 질문 3>에는 이 모든게 어우러져 마무리 짓는 동시에 새로 시작된다.
이 밖에도 <천년의 질문> 속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촘촘히 얽혀 있어서 읽는 내내 이 사람, 저 사람 바꿔가며
"내가 장우진이라면 어떻게 할까?", "김태범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황원준 검사님께
안녕하십니까. <시사포인트> 장우진 기자입니다. 가엾은 김미주 양의 구형 공판이 일단 마무리되었기에 편한 마음으로 이렇게 문자 드립니다. 그동안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삶의 음지에 따뜻한 마음 쪼여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검사님에 대한 마음 쏠림을 그냥 끝내기가 아까워 한번 뵙기를 청합니다. 이건 제 뜻만이 아니라 최민혜 변호사와도 마음이 합해진 것입니다. 셋이서 스스럼없이 오붓한 술자리를 가졌으면 합니다. 술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기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기자라 삽겹살에 소주밖에 못 삽니다. 술이나 안주보다는 대화가 맛있어야 하고, 대화가 맛있으면, 술도 맛있어지고, 술이 맛있으면 그 술자리 인연은 소중하고 알뜰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날짜 정도를 정해 주시면 저희가 맞추겠습니다. 문자가 너무 길었습니다. 문자 보내는 기쁨이 큰 탓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 문자는 '황원준' 검사와 '최민혜' 변호사, 그리고 '장우진' 기자와의 중요한 매개체다.
세 사람의 인연이 공판으로 끝나지 않게 이어가는 소중한 불씨다.
검사는 이 문자를 읽고, 또 읽으며 마음을 사로 잡는 문장들과 문학의 아름다움, 그리고 장우진의 겸손하면서도 강단 있는 글에 매료된다.
이 시대에는 마블의 슈퍼 히어로만 있는 게 아니라
정의감을 놓지 않은 대한민국의 히어로 (초)능력자들을 지켜내겠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나가면서 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 그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다.'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읽은 것이었다. 그때는 그저 '옳은 말씀이긴 한데......' 하는 정도로 넘겼는데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느낀 심정은 혼자의 힘으로 어엿한 무역 회사를 일구어낸 친구 서원섭에 대한 부러움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때는 대기업의 사위로 떵떵거리면서, 구멍가게 같은 무역 회사를 꾸려가느라고 낑낑대는 서원섭을 얼마나 하품 나오게 생각했었던가. 상대생으로서 서원섭이 모범적 성공 인생이라면, 자신은 견본적 실패 인생이었다.
'내가 이 상태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지......?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서 늘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뭐지......?'
김태범은 자신의 의식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열패감과 자괴감만이 무성한 잡풀처럼 뒤엉켜 있을 뿐이었다.
권력과 돈에 취해 정신 못차리던 성화그룹 사위이자 서민 출신의 '김태범'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느끼게 되는 고되들이다.
이 부분을 읽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앞만 보고 달려왔을 땐 몰랐을 터이지만 이젠 악착같이 손 안에 쥐던 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텅빈 김태범의 의식 속에서 이제 화살이 '나'에 대한 물음으로 바뀐다.
비단 개돼지같은 사람은 우뇌한 국민들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에 '나'는 어떤 사람이고 존재인지 묻지 않는 생각이 멈춘 사람도 그렇다.
성화 그룹을 떠나 멋지지만 더럽게 재기하는 김태범의 모습과 딸, 아들 두 아이를 위해 양육권과 면접교섭권을 따내려고 치열하게 소송하는 아빠의 전쟁은 완전한 악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그랬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자기 아이들은 끔찍히 생각하면서 남의 집 귀한 딸,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돈으로 입막음하려 하다니.
너무나 비겁하고 못 됐다.
이 세상에는 두 얼굴의 사람들이 참 많다. 아니, 열 개, 백 개의 얼굴 쯤 되려나.
"그런 안목을 갖추는 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나 요령이 있는 것입니까?"
"네, 많은 분들이 그런 의문과 궁금증을 피력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감식안을 갖추는 데는 무슨 유별난 방법이나 요령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분야의 일이 그렇듯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남다른 관심과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싶은 관심과 하고 싶은 의욕이 생동하게 되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 눈을 크게 뜬 상태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동시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보고, 보고, 또 보는 것입니다. 그 반복 과정을 통해서 '많이 보고, 오래 보고, 깊이 보기'를 하게 되면 마음의 눈은 점점 크게 뜨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보아온 박물관이 아닌 어느 길목의 골동품 가게나, 어느 사찰의 허술한 박물관에서 새 물건을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눈이 번쩍 띄면서 그게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것인지 번개 치듯 판별이 됩니다. 그걸 소위 개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걸 흔히 영감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단순히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고 말하는 영감이 아니고 '그동안 계속 축적되어온 사고가 일으킨 순간적 발화'로서의 영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부터는 어떤 것을 보나 시대 측정, 나라 구분 같은 것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그냥 내가 좋아서 밑줄 그은 문장들.
인지부조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회심리학자 페스팅거의 말 처럼 '사람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이다.
<세상에 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라는 영화평론책이 있는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좋은 문장들을 차곡 차곡 수집하고 있다.
이게 왜 좋으냐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서 인사이트와 혜안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러기 위해선 정도의 방법으로 보고, 보고, 또 보는 것 뿐이고 많이 보고, 오래 보고, 깊이 봐서 알게 되는 수밖에.
"여기 세 권의 책을 골라 보냅니다. 이 세 분은 우리나라 3대 수필가로 받들어도 크게 그릇됨이 없을 것입니다.
... 어느 연로한 소설가가 평생의 화두로 삼아 책상 앞에 써 붙인, 지극히 평범한 듯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일게 하는 경구를 받아다가 저의 책상 앞에도 붙여놓았습니다. 그 꾸밈새를 그대로 흉내내 여기 적어 보냅니다.
문학, 길 없는 길
읽고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쓰고 또 쓰면 열릴 길
'길 없는 길'이란 불교의 <화엄경>이 품고 있는 말이고, '문학'을 '인생'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원래는 불가의 '도'를 이름입니다.
너무 외로워하거나 너무 고달파하지 마십시오. 바라보는 곳이 같으면 마음은 늘 함께하는 것입니다. 건강하시기를.
이것도 장우진의 손글씨 편지에 투영된 조정래 작가님의 말씀이다.
2015년 <정글만리> 출간 인터뷰 당시 이런 글이 남아 있다.
("문학, 길 없는 길"이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지금 이런 나이에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치열성을 갖지 않으면 작가 못해요. 예술가 못한다고요. 아무나 예술 합니까?
<천년의 질문> 책에도 그 치열성과 역사적 의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인생, 길 없는 길'에서 묻고 또 묻는다.
"근데, 안데르손 그 사람 말이야, 정치인이 아니라 어찌 꼭 철학자처럼 말하고 그러냐?"
... "거 있잖아, 특히 감동적이었던 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이것 참 기막히잖아?"
"예, 깊이 있고 멋진 말이에요. 근데 그 정도는 이쪽 정치인들이 갖춘 보편적인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요."
"보편적 수준?"
"예, 이쪽에선 초등학교 때부터 철학 공부를 시작하고, 독서를 일상화하고, 중·고등학교에서 토론 수업과 리포트 쓰기가 기본이고, 대학에서는 학년마다 에세이 쓰기를 인정받지 못하면 졸업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철학적 깊이와 논리적 사고 능력이 강할 수밖에요."
<천년의 질문 3>에서 장우진은 스웨덴 국회에 가서 '에릭 안데르손'이라는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민의 힘은 결국 개인의 철학적 깊이와 인문적 사고, 그리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진정성과 연대감이 중요함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스웨덴이나 스위스처럼 시민의 힘이 강하고, 정치가 깨끗하고, 국력이 강한 나라는 일상에서도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예전에 주 4일이었나, 수업 시간을 아주 조금 늘리는 바람에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울면서 다같이 떼를 지어 시위를 하는 뉴스 기사와 사진이 떠올랐다.
우린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놀토'(노는 토요일)이니 뭐니 주 5일하면 세상 망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던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요즘 애들은 아마 '전화해~' 라고 말하며 엄지와 약지로 전화기 모양을 만드는 것과, 고대 유물처럼 보이는 ☎ 이런 이모티콘의 생소함과 더해
주 6일의 일하는 토요일을 자료에서만 접할 것이다.
그리고 스위스와 스웨덴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일상의 여유가 느껴져서 참 멋있었다.
치고 박고 싸우면서 한 몫 크게 해 먹는 배 뚱뚱한 국회의원이 아닌 진짜 일하는 정치판을 둔 국민의 클래스였다.
"'모든 권련은 횡포하고, 타락한다. 그러므로 줄기찬 감기 감동이 필수다. 그 역할을 대신 맡는 게 시민단체들이다.' 시민단체의 필요성과 역할을 밝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국민은 제각기 자기들 생업에 정신없이 바쁘고 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권력 집단들에게 신경을 쓴다 해도 놓치게 되고,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발명해 낸 것이 바로 시민단체 활동입니다. 1차적으로 시민단체 회원으로서 후원금을 내서 활동가들이 상시로 감시 감독과 함께 저항 고발케 하고, 더 거대한 힘이 필요할 때는 2차로 회원 전체가 앞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작년의 촛불혁명 때처럼.
그럼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을 새로 태어날 시민단체 '너나" 사모'의 회원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까 '너나"사모'의 캐치프레이즈가 '1,000만 명이, 1,000원씩, 100개의 시민단체'라고 했습니다. 그와 나란히 걸리는 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시민단체, '너나" 사모'의 대화의 시간이라는 외침 연설 중 나오는 발언이다.
이는 '너와 나 나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원래 '너나나사모'가 되기 때문에 '나나'가 두 번 나와 문장부호 쉼표 두 개인 " 를 응용하여 만든 이름이다.
'너나" 사모'의 캐치프레이즈는 흡사 독립운동, 그리고 일제강점이 운동을 연상케 한다.
과거 민립대학 설립운동에서도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 이라는 구호가 있지 않았는가.
역사를 떠올리며 현 시대를 연결하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 실감나는 웃음을 'ㅋㅋㅋ'과 'ㅎㅎㅎ'등을 그대로 표기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옛날 인터넷 소설과 귀여니가 유행하던 시대로 잠시 돌아간 것 같았다.ㅋㅋㅋ
아마 어떤 텍스트도 'ㅋㅋㅋㅋ'와 'ㅎㅎㅎㅎ'를 대체하기 어려운 미묘한 뉘앙스를 실감나는 자음 웃음 그대로 살린 걸꺼다.
또 주요 인물인 냉철한 사회학자 '고석민'과 기자 '장우진'의 눈과 입을 빌리면서 OECD 순위나 지니 계수 등 실제 데이터와 통계자료를 근거로 조목조목 설명하는 부분은 우리를 또 한번 개안시킨다.
그 자료가 다 어디서 나왔는고하니 책 사이의 멋진 홍보지에 "장편 소설 <천년의 질문> 탈고 후 3,612매의 원고, 130여 권의 취재수첩과 함께한 작가."라고 적혀 있었다.
조정래 작가님의 작업실 사진에서 느껴지는 수 많은 노고를 통해 역시 작품과 삶의 치열한 단컷을 엿볼 수 있었다.
과연 그래서 장우진과 고석민과 안서림, 김태범 등 눈 뜨이고, 눈 먼 사람들은 어찌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지.
질문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이어진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해냄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