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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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무엇이든 가능하다>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이다.

다른 곳에서 추천을 받아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었는데 담담하면서 강인한 삶의 이야기들이 녹아 있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번 신작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한 작은 마을 '앰개시'라는 곳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단편이자 연작소설인데

서로 무관한듯 연결되어 있는 관계의 힘이 참 좋았다.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크든 작든, 아이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고 무게가 있고 비밀이 있고 세상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도 그렇다.

 

-계시

토미 거프틸은 한때 낙농장을 소유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낙농장은 일리노이주 앰개시 타운에서 2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그 일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토미는 낙농장이 홀랑 불타버린 그날 밤 느꼈던 두려움에 휩싸인 채 한밤중에 잠을 깨곤 했다. 집도 깡그리 불탔다. 바람이 헛간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으로 불똥을 날려보냈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 그는 늘 자신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따. 그날 밤 그가 착유기 전원이 꺼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화재가 시작된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불길은 일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번져 그곳 전체를 집어 삼켰다.

여러가지를 느꼈으나, 하느님의 현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을 명백하게 느낀 것은 집의 지붕이 폭삭 주저앉아 바로 아래쪽, 아이들 사진과 그의 부모 사진이 있는 침실과 거실로 무너져내릴 때,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볼 때였다. 그 순간 그는 천사들이 왜 늘 날개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의, 심지어 소리도 아닌 것의 감각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따. 이어 하느님이, 얼굴은 없으나 하느님인 그분이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무언으로 -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 괜찮다, 토미, 라고 그가 알아들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곧 토미는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미는 선글라스를 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그 아이 - 그 어른 - 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유감이구나." 그가 말했다. "자네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줄은 몰랐어."

"저희 아버지는......" 그 순간 피터의 눈에 누가 봐도 눈물로 보이는 것이 글썽거렸다. "저희 아버지는 품위 있는 분이셨어요, 토미."

"저희 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피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토미 쪽으로 얼굴을 조금 돌리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날 밤 그 안으로 들어가 착유기를 작동시킨 거예요. 그리고 그곳이 모조리 불타버린 거고요. 나는 그 일을 결코, 결코 잊은 적이 없어요, 토미. 그러니까,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아버지라는 걸 내가 알고 있다, 그런 말이에요. 그리고 아저씨도 그 사실을 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고요."

토미가 차에 기댄 채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저씨도 그걸 알고 계셨던 거고요." 피트가 마침내 말했다. "그래서 여기 오시는 거잖아요, 저를 괴롭히려고."

'그 일'이 일어나고 토미의 삶이 변했다.

낙농장과 집이 싸그리 불타서 어쩔 수 없이 학교 수위 일을 하게 되고, '루시'와 아이들을 만나고, 그리고 또 피트를 만난다.

화재는 자신의 실수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토미가 '그냥' 자신의 아버지 얘기를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죄를 대신 고백하면서.

가끔 내가 알고 있는 걸 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거야~ 하는 마음에 머릿 속에서 재해석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왜냐면 토미는 진짜 몰랐거든.

과연 누가 불을 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화재는 토미뿐만 아니라 피트의 아버지와 피트, 그리고 그 가족의 삶 전체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토미는 그 말에 '그 일은 그냥 흘러보내라'고, '자네는 이미 충분히 충분히 많은 것들과 싸워왔다'고 그렇게 묻어둔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지만 전혀 생각치도 못한 진실은 더더욱 뒤통수 맞는 충격이다.

하지만 어른인 토미 아저씨는 그렇게 그렇게 그냥 흘려보낸다.

피트의 고백이 내가 느끼기에는,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이라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아버지가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고, 나는 지금 아저씨에게 드디어 고백하는 거고, 아마 아저씨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리라 어림짐작하면서 각자 처음 꺼내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피트의 불편한 진실과 토미의 계시라는 고백을 처음 서로에게 말하면서 마음이 좀 더 편해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더 껄끄러워지고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밀려오고 그동안 지탱해온 믿음까지 흔들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걸 믿으세요?" 피트가 물었다.

"믿는 게 아니야." 토미가 말했다. "아는 거지."

"그 이야기를 아주머니한테도 하지 않으신 거예요?"

... "살다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게 되는 일도 있는 것 같아."

"뭐랄까, 내 생각엔 뭘 할지와 뭘 하지 않을지 사이에는 늘 그런 투쟁이 있는 것 같아." 토미가 재치 있게 말해보려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런 것에 투쟁이 있는 거지. 혹은 다툼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언제나 존재하지. 내가 보기엔 그래.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 -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 - 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토미가 운전대에 한 손을 올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가 말했다.

"지금은 그게 틀림없이 내 상상에 불과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토미가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어. 내가 지어낸 거야." 그가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양손을 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토미. 왜 그 일이 일어났을 리 없다고 생각해? 왜 그 일이 그날 밤 당신이 생각한 대로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순간 토미는 깨달았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내내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한 그것이 사실은 그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이제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할 그것 -그의 의심 - 은 처음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비밀임을. 그가 잡힌 손을 빼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별스럽지 않게 한마디 했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가 말했다. "사랑해, 셸리." 그러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리고 아마 잠시 더, 그는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나도 사람은 만약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불편해하는 마음, 미안해하는 마음, 어찌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피트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 대신 평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묻고 살아온 멋진 토미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래서 더 와닿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토미 아저씨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선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 그의 아내에게 피트의 이야기와 함께 그 날 받은 계시를 처음으로 들려주는데, 그 때 받는 또 다른 깨달음은 새로운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노부부가 앉아서 말을 많이도 아니고 한 마디씩 천천히 나누는 이 장면이 정말 좋다.

서로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고 궂은 날, 즐거운 날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사랑과 동료애로 가득 차 있있어서 좋다.

그리고 모든 게 괜찮아지는 기분이다.

사람은 한 순간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 (좋은 의미로) 변화가 좋아서 책을 읽으면 문장을 모았다.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다" -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어느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모순>, 양귀자

"정작 죽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난 전쟁터에서도 목숨을 건졌고, 집에 돌아와서는 룽얼이 나 대신 죽었으니 말일세. 우리 집안이 조상 묘를 잘 쓴 모양이야. 어쨌거나 난 나 자신에게 말했지. "앞으로는 제대로 살아야지." -<인생>, 위화

"때때로 그저 짧은 만남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영원히 바꿀 수 있다." -<닥터 도티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 제임스 도티

"그는 내게 자기연구실 열쇠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물은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그냥 평범한 선물이 아니었고, 내게 일종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진 듯 하다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존 가드너: 선생으로서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

바로 여기 <무엇이든 가능하다>에서도 단편 단편마다 그런 순간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한 문장을 집을 수가 없고 통으로 좋아서 계속 읽게 되고 밑줄 긋게 된다.

그래서 무엇이든 가능해지고, 무엇이든 괜찮아지고,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기분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다.

엄청 친하진 않지만 오며가며 얼굴을 알고 있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해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바로 내 옆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같은 이 <무엇이든 가능하다> 책으로

무엇이든 가지를 뻗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글은 문학동네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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