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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온!! 2기 상권 LE : 1~15화 - 한정판 (5disc) - 필름컷 모양의 북마크 5종 + 클래스 메이트 카드포함
야마다 나오코 감독 / 미라지엔터테인먼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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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케이온 1기와 2기를 보면 조금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외형적인 스토리에서는 일상적인 소녀들의 이야기로 통해 웃고 즐기는 것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 중에서 특히나 상업 애니메이션이란 시청자로 하여금 즐거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에 너무나도 많은 집착을 가지게 된다면 작품의 원론적인 미학적인 가치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당초부터 선악 내지 라이벌로 구성된 이원화된 작품세계에서는 그런 가치를 주인공 시점에서 가지고 있다. 보통 카메라의 시점은 1인칭과 3인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인칭은 개인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고, 3인칭은 다른 사람이 개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을 중심으로 하는 1인칭 내지 3인칭 서사전개는 이미 그 영웅에 따라 모든 이야기가 결정되는 것이다.

분명 어느 세계에 내던져짐으로 많은 고통과 위기 속에 헤쳐 나가는 것을 보고 또한 그것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기쁨을 느꼈다면 단지 그런 스토리텔링에 대한 즐거움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스토리텔링 이면 감추어진 서사 즉 이야기구조들은 어떻게 우리는 봐야할 것인가?

케이온은 그런 이원화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취약하다. 왜냐하면 케이온의 작품세계에서는 작품의 내의 세력의 대립구도로 충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케이온은 작품 내의 대립을 유발하기 보다는 작품 외의 현실을 대립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대립적인 부분을 이해하기란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영화, 소설, 각종 서사매체들은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여 그것을 우리가 훔쳐보는 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단순히 작가와 영상제작자들이 설정해 놓은 세계로만 보는 것이다. 그것을 외적인 부분으로 인용하고 나타낸다면 다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는 작품 내에서는 nerv라는 비밀결사조직으로 통해 미확인 존재 사도를 격퇴하는 이원화적인 대립구도로 보였으나 실제 그 대립구도의 내면에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문명,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타인과 본인, 외부의 자아와 내면의 자아가 끊임없이 대립된다.

그것으로 통해 이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단순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통하여 세상을 봐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 내의 텍스트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것을 맞추어본다는 것은 일방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사회적인 현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전에 만화애니메이션영상기호론이란 서적을 보면서 외부의 기표와 그 기표의 의미에 해당되는 기의가 도출되어 다시 그 기의를 기표로 하여 기의를 의미하는 2차적인 분석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구조주의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적인 해석이다. 그냥 단순해 보이는 표상의 이미지가 내면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기표는 기의에 미끄러진다는 이야기처럼 케이온이란 작품은 그렇게 해석함이 바른 작품이다.

케이온에서 보이는 카메라 구도나 혹은 소품, 배치,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영상이미지에 대해 그냥 스쳐가는 잔상으로 기억하나 케이온은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아직 영상기호학에 대해 초보적인 단계에 있으나 미쟝센이란 기법으로 케이온을 본다면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보인다.

가령 케이온 작품 내의 주인공인 히라사와 유이가 아침에 등교하기 위해 급하게 옷을 입고 나오는데, 처음에 학교에 갈 적에는 기타가방이 없었고, 2번째는 기타가방이 있었다. 문제는 기타가방이 없을 적에는 마루바닥에 자신의 레깅스와 접촉으로 통해 마찰력을 유지할 수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게 된다. 그러나 기타가방을 들고 다시 현관으로 급하게 달려갈 때 넘어지지 않는다. 기타가방이 유이의 신체적인 구조에서 균형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장면의 의미는 유이가 경음부에서 친구들과 만나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그동안 허둥지둥 달리면서 넘어지게 되었는데, 이제는 넘어지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케이온이란 작품은 밴드를 하는 음악장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밴드로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가령 이런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인문학자인 매릴린 옐롬 교수의 유방의 역사라는 여성학 관련 도서를 본다면 조금 참고가 될 것이다. 그것은 기존 사회적 구조가 남근중심이란 점과 특히 그런 남근중심의 사회구조가 강력한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들의 지위적인 문제를 환상적인 면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환상에 대한 열정과 희망에 대해 매우 잔뜩 이야기했으나 그 이야기의 종말은 졸업이란 테마로 환상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사실 기정화했다. 단지 그 환상을 꿈꾸고 싶은 생각은 기존 남근중심적인 일본사회에서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반영된 점을 케이온에서 조금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원화된 구조인 선과 악, 남자와 여자, 문명과 자연, 인간과 기계, 능동과 수동 등에서 전자는 우월한 것으로 보고 후자는 열등한 것으로 보아 지배 내지 배제해야할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점들을 다시 새롭게 보려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 비평적인 관점에서 맞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 적은 리뷰에서는 어문들이 미사어구로 비추어질 수 있을지 모르나, 단순히 쾌·불쾌로 보는 작품 감상이 과연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귀결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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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Ⅲ-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4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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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1-1, 1-2. 그리고 2권에 대해 읽어보면 자본에 대한 근본을 찾아내고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각종 자본주의적 병폐로 통해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어떻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지 대해 기술하였다.

마르크스의 필력을 본다면 그가 가진 마음이란 가히 나라는 사람이 측정하기 어려웠다. 약하고 고통 받는 약자에게 한없는 관심과 검토를 하였으며, 그들을 착취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아주 꼼꼼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에서는 속물근성으로 가득 찬 경제학자까지 비웃었다. 논리도 없고 현실파악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의 유토피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는 단순히 그런 문제까지 보았을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부분이었다. 그는 정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뿐만 아니라 그 사회 말고도 정치, 외교부분까지 고려하여 자본을 서술하였다. 특히나 국내시장경제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까지 고려하였고, 여기에 세계시장으로 통해 기존 자본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에 대한 필연성까지 기술했다.

가장 인상이 남는 부분은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기 전의 왕권이 사회를 지배하는 봉건사회에서 부터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처음에는 지식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왕권과 귀족사회의 통제로 인해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유럽 이후부터 각 국가에서는 국가 발전을 위해 무역거래와 식민지개발에 무단한 힘을 기울였다.

이때 부르주아 계급들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어 꾸준히 자신들의 부를 축척해갔다. 하지만 그 축척이 어느 순간에 도달해도 그들의 삶에는 변화 없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루이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했는데, 문제는 그 사회가 기존의 왕권이 있었던 봉건사회에서 계급으로 정치력을 가늠하게 했다면 이제는 재산력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특히 산업혁명으로 통한 자본주의 가속화는 왕정시대의 지배계층 자리를 왕족과 귀족에 대신하여 부르주아 계급이 등급되었다. 문제는 유럽사회에서 왕족, 귀족,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에게 가장 착취를 당하던 농노와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회가 온다고 해서 형편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더 불리하게 되었다.

기계의 빠른 진화가 높은 생산력으로 통해 수공업으로 통한 적은 물량의 생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에서 해고당했으며, 자본의 축척을 새로운 자본을 낳기 위해 대규모 자본가들은 토지를 합리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자영농의 숫자는 급속히 줄어드는 반면 소작농들은 여전히 착취당했다. 게다가 자영농의 감소는 농촌의 일자리 부족으로 도시로 흘러들어가고, 이들은 다시 도시에 살고 있던 기존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와 경쟁관계로 놓인다.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은 이미 오래전 유럽에서 큰 혼란을 야기하였고, 이런 지적들이 한국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다. 물론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본다면 이런 문제는 필연적인 문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현실적 무관심은 노동 및 근로로 통해 생계수단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약자에 위치한 노동자를 고찰하고 그들이 그렇게 전략하게 되게 하는 사회적 구조를 자본이란 서적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반드시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2에서는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이외에도 사업을 하고 자신의 공장을 꾸려가는 자본가에 대해서도 고찰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어느 사람이 자본가로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시장경제와 회사운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일반론적인 세견에 의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의 운영에 대해 깊이 통찰하였으며, 자본가의 자본이 어떻게 하면 소모되는지도 기술했다.

노동수단이 기계나 선박 등의 불변자본만이 아닌 움직이는 인간이 만드는 살아있는 노동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더하여 자본 3-1은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더 넓은 시야로서 통찰한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 그 자체가 착취당하는 존재로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자본이란 것은 혼자 가만히 있거나 부동한 자세로 있다면 결코 자본은 자기를 재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 자본을 운영하고 시장경제에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가라고 하여 모두가 공장시스템이나 혹은 시장경제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생산을 기능하는 곳에서 움직이는 산업자본가와 그 산업자본가에게 자신의 자본을 대여하는 화폐자본가가 있다.

화폐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산업자본가에게 대여함으로 산업자본가가 창출한 이윤에 대해 자신이 대여해준 자본 일부분을 이자로 받아 자본을 축적한다. 따라서 자본가라고 하여 모두가 자본가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실제 우리 현대사회에서도 어느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나 거기에 대한 기초자본이 필요하다.

그렇게 자본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자신이 소요한 자본, 즉 경제적 활동을 도모할 수 있는 화폐를 보유해야 하나, 그 액수가 충분치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대여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긴 것은 돈을 보관하고 빌릴 수 있는 은행이다. 물론 은행이란 합법적인 금융기관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도 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자신의 돈을 타인에게 양도해주어 사회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정해놓은 이윤율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윤을 청구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한다.

어째든 금융기관의 활동은 가속화되는 자본주의에서 더욱 가속화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그것은 상품의 생산이 계속 대량화되자, 각종 업체들이 경쟁이 붙어서 가격할인을 제시하고 가격할인으로 통해 그들의 원래 자본을 회수하려면 생산의 순환횟수를 늘리거나 그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금액회수를 위해서는 많은 생산품을 내놓아야 했고, 거기에 따라 공장설비의 확충 및 노동자의 근로시간 및 강도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시장의 상품과다 확장으로 상품은 계속 늘어만 가는데, 오히려 수요는 뒤받쳐주지 못하게 되어 경제상황이 악화된다.

따라서 과대 지출된 금액은 환수되지 못하고 계속 소비됨에 따라 공황이라는 경제적 여파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카르텔을 형성하기도 하나 마르크스는 이런 가속화되어 가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언젠가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이미 예언한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어음이라는 것을 분석하여 금융시장에서 자본가들에게 당장의 자본인 화폐가 없더라도 그 자본가의 신용에 따라 은행에서 돈을 인출 받아 활동할 수 있는데, 위와 같은 문제와 자본의 회수가 늦음에 따라 자본가 스스로 몰락하는 경우도 지적했다. 이런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거나 대금청구 결재의 연기 및 지연에 따라 기업의 운영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을 목격한다. 

물론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그런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고 나열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문제는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결국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노동착취문제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통용하는 자본가 역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것을 지적했다.

그런 문제가 실제로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했고, 현재까지 이어온 역사적으로 그러하다. 자본의 무절제한 투자와 소비 그리고 경쟁은 어느 순간 국가경제 큰 중추역할을 하는 국가은행 및 민간은행에 타격을 입힌다. 자본의 심각한 유출은 은행잔고를 비게 하여 은행대출 이자율을 상승시키고. 이것은 자본의 동결로 인해 시장경제에 자본이 유통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황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발발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은행자본에서 눈여겨 본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귀금속의 보유다. 귀금속의 하나인 금과 은, 특히 금의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이다. 만약 대외무역으로 통해 경제활동을 하는 상인이라면 분명 그 타국의 화폐는 중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의 달러나 일본의 엔화가 매우 소중한 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폐는 그 나라의 경제상황이나 자국의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다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가치가 하락할 경우 오로지 변동 없이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은 것이 금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금 1㎏이 1억원이라고 하자. 그런데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돈 1억원에 대해 800만엔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날 일본 엔화가 가치가 하락하여 800만엔이 한국에서 5천만원으로 유통된다고 보자. 그런 순간 당초의 1억엔으로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엔화가 아니라 금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이미 간파했다. 금의 보유는 그 나라의 자본의 현황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어느 국가에서 지독한 가뭄으로 다른 국가로부터 식량을 수입했는데, 그 수입대금의 자국의 화폐가 아닌 금이었다. 대신 금의 손실은 그 나라의 자본보유에 치명적인 여파를 끼쳤다. 마르크스가 보는 자본주의 사회란 단순히 우리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편견으로만 판단하면 안된다는 점을 자본 3-1에서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자본의 유통과정에서 생기는 경제적 불황은 결국 최소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인 인자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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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 세계 역사를 바꾼 위대한 선언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7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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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참으로 독특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상당한 엘리트 계층이었다. 우선 마르크스는 당대 독일의 학문열풍으로 일으킨 헤겔 변증법에 대해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역사, 문학, 철학까지 두루두루 면모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여기에 엥겔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공장주로 있어서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해 죽는 그날까지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 2사람이 만나 만든 공산당선언의 가치는 매우 역사적으로 이례적으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20년 전후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함부로 거론되면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당시 중학교 갓 들어온 나에게 공산주의(共産主義)는 무조건 나쁜 사상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라는 북한은 그야말로 최악의 국가였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보고 후에도 북한은 나에겐 최악의 국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오히려 북한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진정한 국가가 아닌 것이다. 거기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단적인 정치(政治)라는 미명(美名)아래 오히려 독재가 일어나는 사회다. 

르크스는 노예 없는 주인 세상을 원했다. 독재(獨裁)로 인해 피해보는 것은 언제나 권력을 가지지 못한 약자들이다. 약자를 위해 일어섰다고 정의를 외치는 그들은 어느 순간 약자들을 억압하는 폭군이 되어 버렸다. 그런 형태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 정권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고 하나 사실 그것은 하나의 국가자본주의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국가비밀경찰 조직을 설립하고, 그 전에 자신과 같이 활동하다가 반대되는 파들을 숙청했다. 그런 이후로 마르크스가 울부짖던 원래 가치는 상실했다. 이런 실정에서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에 맞추어 미국에 매카시라는 의원이 미국 정부 내에 공산주의자가 있어서 그들을 정치적인 숙청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발동되었다.

웃기게도 이런 비판의식이 결여한 이데올로기는 먼 곳에 있던 일본과 한국에서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 당시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과 연합군의 진영으로 나눈 한국에선 정치적 노선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스탈린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 사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을 반대했다.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도 아닌 정의로 전쟁의 씨앗이 발발하고, 우리나라 역시 분단과 휴전 중이라는 긴장감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서 마르크스가 선언한 공산당선언은 별개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사실 제일 진실로 믿음이 깊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은 형이상학(철학)에 대한 깊이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교조적인 자신들의 자세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보다는 1가지 틀에 얽매여 2원화적인 대립으로 행동한다.

전에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란 도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나 역시 조심해야할 내용이나 모든 사람들이 조심해야할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이런 바르지 못한 정보와 왜곡된 내용들이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가령 마르크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먼저 자본(資本)을 봐야 한다. 자본 1권만 보더라도 왜 그런 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알 수 있게 한다. “하루에 14시간 넘게 노동한다. 안전장치 부실로 다치거나 죽어도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 기준을 어겨 각종 질병에 노출된다. 먹을 것조차도 깨끗한 음식이 아니라 오염된 음식을 사먹는다. 미성년자 그것도 이제 4살 된 아이를 고용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부려먹는다. 아동들을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하여 14세 된 여자애가 엄마가 되고, 그 엄마가 된 소녀의 아이들은 다시 노동을 착취한다.”에서 현대에 살아가는 누구라도 이런 행위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아니 납득을 하는 인간이 더욱 이상하고 바르지 못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당시 19세기 유럽에서는 이런 비정상적인 일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지나친 고통은 인간의 신체를 노화시키며, 정신적으로 파멸을 일으켜서 대부분은 오래 살지 못한 채 괴롭게 죽어가야만 했다. 이런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란 도서는 인간이 느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미학에 관한 도서에서 빈곤의 문제에 기술했다. 본래 문구는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프랑스의 사상가 및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이며 대표서적으로 사회계약론)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에서 번역자 이렇게 주석을 이렇게 달아놓았다.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는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강의 XXV, 1417"

어떻게 본다면 칸트의 생각에서도 당시 루소의 사상을 판단력비판에 인용하였고, 그 이전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였다. 칸트는 교조적이고 회의적인 인간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특히 교조적(敎條的)으로 편협한 사고를 하는 인간의 이성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성의 비판에서 칸트는 논리(論理)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倫理)였다.

윤리는 제1의 철학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그토록 혁명을 외치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성이 달려있는 윤리적인 부분이었다. 사실 이런 부분은 현대철학에서도 중시된다. 가령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이며 공리주의(功利主義) 대가인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인간의 인권에 대해 매우 중시했으며, 각 개인에 대한 자유와 사유재산을 중시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태생이 같을 수가 없으므로 최소수혜자에 대한 기본보장으로 통해 공리주의적인 면을 강조했다. 다소 공산주의와 공리주의는 다른 곳에 출발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권문제이다. 사실 공산당선언과 마르크스의 자본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올라와있다. 인터내셔널(The Second International)의 조직으로 통해 그들은 인간 기본 권리를 보장했다.

지금에 와서 웃기는 사실이나 우리는 하루 일일 노동 및 근로시간 8시간 정도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노동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수당이나 보상이 뒤따른다. 그러나 150년 전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사회에서 이 선언은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 선언이 일어난 시기에는 정말 목숨이 오고가는 일이었다.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돌아보면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아직도 막강한 영향을 내리고 있다. 직접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학문과 사상, 심지어는 예술과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사상이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로 입체주의 미술을 펼쳤다. 그는 전쟁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그려 전쟁의 잔혹함을 폭로했고, 또한 가난하고 굶주린 약자를 생각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로 그의 작품인 붉은 돼지는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사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 근현대 역사의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사람들에게 허무한 유토피아만 주는 환상이 되었다. 물론 원론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그의 사상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마르크스의 유지를 이어 국가를 보전하고 발전시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생각 중에 마음에 정말 드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이념 속에서 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원래 동양사상인 유교(儒敎)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교는 종교적인 기능으로 누구를 믿는 것보다는 어떻게 정치를 잘하는 가를 다루는 사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리학의 오류로 인해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탐관오리들은 하늘 무서운 것도 모르고 오만 패악만 일삼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다산 정약용은 그런 성리학 안의 틀에서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백성을 보고 그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념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이념 때문에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미지가 매개로 인간사회가 나타나는 이른바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이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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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 -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리얼 연애 클리닉
김태훈 지음 / 시공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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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나는 사랑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 그 단어는 매우 많이 남발되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은 많이 남발되는 만큼 말하기가 매우 쉬우면서도 어려운 단어다.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얼굴에 심취하여 한 송이의 수선화로 태어난 나르시스적인 인간이라면 몰라도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 살 수 없다. 즉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영원한 정치적인 동물인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기술발달로 인해 인터넷이란 매체가 발달되어 직접적인 대면은 안하더라도 인터넷으로 통해 계속 소통이란 인간의 기본 욕망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토리텔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 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재미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 소재를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으면서 가장 스릴이 넘치는 이야기는 아마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란 단어는 이미 세상에 넘쳐버린 단어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2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사랑은 게임이라 지칭한다. 게임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2명 이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게임이란 것은 승자도 있듯이 패자도 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구분되어 있기가 애매모호하다. 사랑의 승리자가 된 사람은 그 게임의 대전자를 패배자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같이 승리하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이란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에는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실전에 대한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런 사랑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본다면 사랑은 커녕 인간사회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행동 자체도 어긋난 인간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인간은 생각하는 바와 행동하는 양식이 다르니 말이다. 그래도 인간은 사랑이란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인간은 혼자라는 공간에서 외로움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외로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오로지 사람과의 만남과 그 만남에서 꽃 피우는 이성과의 사랑이다. 물론 사랑의 최종목표는 결혼이란 크나큰 의례가 있다. 하지만 사랑의 최종목표가 결혼일망정 사랑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1가지 거대한 서사가 끝나면 그 서사를 이어받는 거대한 서사가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거대한 서사 속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많은 이야기를 낳는 것이다. 이 책에서 위대한 문학가 도스토예프시키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걸작을 쓸 수 있다. 자신이 이야기를 쓰면 되니까..” 그런 말 중에서 사랑이란 이야기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걸작이다.

사랑은 인간을 행복하게 혹은 절망으로도 보낼 무섭고도 아름다운 양면의 동전이다. 그런 동전에서 우리는 언제나 좋은 희망적이고 즐거운 사랑을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우리는 자세를 취하야 하는가에서 이 책의 주요 핵심사항이다. 

누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두 그렇지만 나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타자에게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보편적인 사회와 인간살이에서 이 책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해 어떤 일이 있는지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묶은 책이다.

다소 이론적인 부분보다 실재 있던 일을 이론적인 도서로 묶은 실용적인 도서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라도 여기에 모두 해당 내지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특별하나 사회적으로 보편적이다. 그러나 뭔가 사람과 사람에서 일어나는 일은 엄청나게 클리셰적이다.

옛날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이 책은 어떻게 본다면 어느 개인 즉 한 인간의 역사들을 모아 만든 책이나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한편의 비극시 혹은 서정시와 같다. 사랑의 파멸은 절망이고 사랑의 이어짐은 희망이니 말이다.

ps 나를 위해 멀리서 내려와 이 책 한권을 준 어느 동생 녀석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을 보고 난 뒤에 내가 사랑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었는데, 도서 품평만 적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 부끄러운 형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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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혁명
라울 바네겜 지음, 주형일 옮김 / 이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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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영어철자로 spectacle이며, 그 영어적인 풀이는 look on, remain a spectator이다. 즉 그저 방관하는 사람,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이다. 보통 스펙타클이라고 하면 대부분 스펙타클한 연출, 세계, 공연, 화려함을 말하지만 사실 스펙타클이란 그렇게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스펙타클을 오히려 긍정적인 단어로 혹은 뭔가 있어 보인다로 생각한다. 흔히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뽀대가 난다”라는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스펙타클이다.


사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같의 사회 관계를 뜻한다. 스펙타클하다는 것은 곧 이미지 인간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인간들 자신이 만들어 버린 각종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은 존재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한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인간 자체가 능동적으로 살아온 것이 이제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된다.


또한 스펙타클은 계속 인간들로 하여금 계속 재생산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거대한 급류이다. 하지만 그런 스펙타클은 인간들을 지배하기도 하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조장되기도 한다. 흔히 우리 현대사회를 소비의 사회로 불리기도 하고 혹은 시뮬라시옹(Simulation) 세계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정말 진실을 앞에 두고 보지 못하는 장님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스펙타클이라는 인간을 수동적으로 변하게 하는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상황주의자 사상가이면서 전위예술 영화감독인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를 읽어보았다. 스펙타클에 의해 소외되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던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기 드보르와 함께 국제상황주의자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스펙타클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이들은 인간 스스로에 대해 자기 존재감을 성립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위해 투쟁을 하였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2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스펙타클로 작용하는 것을 우려하여 각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


기 드보르는 국제상황주의협회를 탈퇴한 뒤 시골 오두막에서 지내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서적처럼 자신이 군중들에게 스펙타클로 존재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당겨 심장병에 대한 고통을 모두 해소한다. 여기에 반해 라울 바네겜은 최대한 자신의 모습에 미디어에 노출되기를 거부했다. 물론 그도 기 드보르처럼 스펙타클 요인으로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런 인물들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는 순간 왜 그런가를 생각하고, 이들을 단순히 쫓아가기 바라는 것보단 이들의 생각과 의미를 돌아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 사회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기도 하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정치적인가 아니면 타인의 속박에 의한 정치적인가가 중요하다. 이른바 헤게모니적인 요소로 어느 집단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여 여러 인간들을 속박시키게 하거나 그런 속박을 위해 문화의 장치로서 스펙타클의 사회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는 노동자와 예술가가 자유로운 사고를 표출해야하나 오히려 표출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미디어에서 그런 자유로운 사고를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미디어에 의존하고 그것의 방향에 따라 우리도 변해간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생각나던 노래가 있었다. 가수 김종서의 플라스틱 신드롬(Plastic Syndrome)이란 노래였다. 이 노래는 예전 학창시절 김종서 노래를 자주 따라 부른 나의 추억의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들을 보면 마치 스펙타클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걸 다가지려 하지만 꿈은 꿈대로 남겨둬 오늘 늦은 밤 TV토크쇼 너를 천사로 만들 패션 매거진 세상은 슈퍼맨만을 기억해 거리엔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

나는 나 너는 너 서로 비교하려 하지마 나는 나 너는 너 모두 똑같이 살 순 없어

세상 모든 걸 다가지려 하지마 꿈은 꿈대로 남겨둬 세상 모든 걸 꾸미려고 하지마 지금 이대로 살면 돼

너의 화려한 겉모습보다 네안에 숨어 있는 향기를 사랑해 지갑속 가득한 신용카드가 영원한 행복을 줄거라 믿지마


스펙타클로 채우진 이 세상은 인간의 욕망이 그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책에서 자크 라캉 편에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정말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가 아니라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자기의 존재는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가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는 문화라는 것이 필수불가결적으로 따라 다닌다. 그런데 이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소비의 사회라고 한다. 인간의 문화는 소비로 통해 이루어진다면 결국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라진다. 누가 어느 것을 시작한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따라할 의무도 없이 따라한다. 그것이 곧 스펙타클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스펙타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른바 군중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스펙타클의 영향을 받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계속하여 타인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또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본인의 의지가 아님에 따라 계속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은 자신의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소비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라는 말이 있다. 본래 상품적 가치는 본래 기능에 비해 반도 못 미치지만 그 상품을 산다는 것은 기호를 소비하게 되어 그 기호의 소비로 통해 군중은 문화의 소비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스펙타클은 계속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에 의해 재생산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시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문화적 소비를 계속 하게 된다. 인간이 문화사회를 접하는 순간 스펙타클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스펙타클이 인간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다.


이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역자의 말을 본다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청소년은 이미 스펙타클의 지배로 통해 이 사회에 길들어져 있다.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나 육체적으로 어른 못지않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중간에서 그들은 소외된 부류로 되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다. 그런 처지를 비관하여 어른으로 가고 싶으나 어른이 되는 순간 자신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가에 고민한다.


왜냐하면 모든 어른들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다시 소외가 더욱 심해지고 기계적인 인간생활로 전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도 불안하나 내일의 미래도 더욱 불안하다. 군중 그리고 그 중에서 노동자의 삶을 방관하게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가?


이 책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혁명 중에서 5월 혁명을 이끌어 낸 책이다. 1968년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여성들이 인권을 위해 일어섰다. 솔직히 말해 나는 5월 혁명은 잘 몰랐다. 프랑스하면 떠오른 혁명은 1789년 7월에 일어난 루이정권을 전복한 혁명이다. 역사책에서는 그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나 결코 성공한 혁명만은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는 계속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인물들이 소개된다. 이른바 아나키스트라는 반정부주의자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는 별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면서 싸울까? 물론 폭력이란 이름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이 “노예 없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노예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제도를 넘어 인간 그 자체가 노예도 아닌 주인도 아닌 인격체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권력이란 이름이 정의의 심판으로 변질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책표지 뒷부분에 나오는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은 것은 권태뿐이다!” 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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