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
5.18 기념재단 엮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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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87월 대한민국은 충격의 문건을 발견한다. 과거 기무사령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동조자들의 정치적 권력에 도전하는 시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수천 명의 군사병력과 탱크 그리고 장갑차를 이끌고 수도권에 밀집하고, 계엄을 선포할 때 국회마저 계엄군 수중에 넣어 통제하려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어느 국회의원이 군부대가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다는 충격적 발언을 했다. 발언이 일어나자 군부대는 아무 일이 없다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뒤에서 계속 은밀하게 공작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국민을 감시하고, 체증카메라로 촛불시위하는 시민들을 몰래 촬영하여 군 지휘부 쪽으로 계속 정보를 제공했다. 편의대, 사복을 입고 정보를 수집하고 첩보를 실행하는 군사조직이 있다. 예비군 훈련을 하면서 그런 편의대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계엄발령을 실행하면서 우린 끔찍한 일들을 역사에서 배웠다. 제주도 43사건은 제주주민들의 한으로 남았다. 아직도 살인에 동조세력에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살해당해야 하는 그 통한과 여전히 피해자를 불순분자로 모는 사회적 죽음이 작용한 것이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경우 대부분 민간인의 신원은 회복되기 어렵다. 그들을 살해한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으로 밟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주체가 이양되기란 어렵다. 정치적 권력은 이데올로기적 지배논리 헤게모니를 더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한 학살과 은폐, 조작, 왜곡은 죽음 이후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영원한 사슬인 것이다. 박근혜의 몰락은 최순실 게이트가 있었지만, 그 전초는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에서 보여준 참사가 얼마나 끔찍하고 슬프고 화가 나고 분노로 일색 할 수밖에 없는 비극 중에 비극이다.

 

그 비극적 역사에서 사고 그 자체는 우연일 수 있지만, 사고 후의 일들은 우연이 아닌 하나의 인위적인 통제였다. 피해자 식구를 마치 반국가세력 내지 이권단체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애를 죽었는데, 어떤 부모들이 그 돈을 노리려 할 것인가? 물론 그런 사람은 있었다. 이혼 내지 별거하여 평소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춘 자가 이제 보상금 문제가 슬슬 나오자 하이에나처럼 튀어나오는 경우를 말이다. 인간에게 돈은 있으면 좋지만, 자신의 인간성을 모조리 팔아먹는 존재들도 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세월호 사건이 있을 때 가장 괴로운 이들은 바로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님이다. 물론 다른 희생자들도 있지만, 단원고의 피해가 가장 심했고, 죽은 자식은 1명이나, 그 자식의 부모와 형제, 친구와 친구 가까운 이웃마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 자식을 많이 낳던 시대에 자녀 1명이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부모 역시 병들어간다. 요새 같이 아이를 1명 내지 2명을 낳는 시대에 오직 하나뿐인 핏줄이 그렇게 사라진다면 부모의 가슴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에게 짓는 가장 큰 죄는 부모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단원고 학생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부모에게 가장 큰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식의 죽음을 규명하고, 더구나 자식들의 유해와 유품마저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들은 삶 그 자체를 포기하란 말과 같았다. 이런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느 뉴스기사에 518 엄마가 416 엄마라는 제목을 보았다. 1980년 무더운 5월의 광주, 518의 비극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가에 의해 버림받고 농락당한 416 엄마는 국가에 의해 자식을 빼앗기고 통한의 시절을 보낸 518 엄마를 만난 것이다. 이번 계엄문건을 보면서 518의 그 끔찍한 일이 다시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소름이 끼친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할 때 모습은 정말 순화된 모습이다. 나는 아직도 광주의 주남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잊을 수 없다. 책을 보면서 어린 아이들이 더운 날에 주남마을에 있는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래저래 놀 때 군인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아이는 얼굴 반이 날라 갔다. 뇌수가 터지고 피가 범벅된 아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그냥 길거리에 다니다가 총을 받고 가슴 뒤에 사라진 학생도 있었다. 어느 여학생은 가슴마저 칼에 의해 베어졌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것도 같은 나라 사람, 같은 민족에게 포악하게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울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슬프고 화가 나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죽은 이의 마지막 모습만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사연을 담으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이 필요하다.

 

남은 가족들의 구술기록은 그야말로 통한이다. 부모의 반수에 가까운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총을 맞고 칼에 찔리고 몽둥이를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또한 시체조차 참혹하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빨갱이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에 몸과 마음에 병들기 시작한다. 건강한 시골농부인 아버지들은 술만 의지하다 몇 년 안에 간암으로 뒤따라가고, 순박한 시골아낙들은 사나운 맹수가 되어 투쟁을 한다. 1명의 죽음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그것도 모자라 군경은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게 한다.

 

늘 감시하고 따라 다니고, 직장까지 찾아오며, 518유족들이 모이면 방해하고 심지어 어디 멀리 데려가 낯선 곳에 버리고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치장에 갇혀 형사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시위하다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온 몸에 멍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518 엄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낳고 기른 아이는 착하고 평범하며,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데 어떻게 빨갱이고 폭도란 말인가? 단지 집에 있는데 총알이 날아 들어와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 자기들끼리 오인사격으로 열 받은 군인들이 화풀이하기 위해 마을청년을 총으로 살해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 죽음마저 농락한다. 심지어 시체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얼굴과 전신에서 악취와 액이 흘러나온다. 부패한 살집 속으로 구더기를 나오며, 심지어 신체조차 절단되어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소문을 듣고 자신의 시신을 찾아 광주일대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그들, 암매장에서 찾아낸 자식의 옷과 흉터나 점, 죽은 자식을 부여잡고 통곡하던 그들의 시계는 이미 멈추었다. 그들이 받은 굴욕과 모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작년 518 행사 때, 어느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에 태어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부모님이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산모의 머리에 총격을 가했고, 뱃속의 8개월 아이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2사람의 생명은 1발의 총알로 사라졌다. 맹수조차 새끼를 배에 품은 암컷을 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도 눈앞에 있던 임산부의 머리를 정확히 노렸다. 이런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자식의 죽음을 가슴 속에 품고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배상비는 그 죽음에 대한 정당한 가치로서 나오는 게 옳으나, 부모들은 돈이 원해서 배상비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 죽음에 대한 정당한 반성과 의미를 두기를 원한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서 보상비 많아 좋겠다고 말하는 인간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았다. 세월호 사망자 보상금이 억이든 몇 백억이든 그게 있다 해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518희생자의 가족이 남긴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해 5월 탱크와 군인들이 광주를 짓밟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518망월동 묘역이 민주화의 성역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어느 희생자의 가족이 거기서 일을 하는데, 군인과 경찰이 과거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존재인데, 이제 군인과 경찰이 518망월묘역을 찾아와 추모한다는 게 가끔 믿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도 광주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과거 독재정부의 마수가 남아있다는 점이 무서운 일이다. 광주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오면 생수통도 안 판다는 말이 있었다. 피해자의 그들이 오히려 반국가적 세력이 되어야 한 슬픈 일들, 416 세월호 역시 비슷했다. 518이나 416을 보면 518 당시 공안정치검사, 폭력경찰, 살인군대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416 때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이런 비극이 일어나도 그들은 국민을 속이고, 피해자의 가족을 억압했다. 심지어 쿠데타 음모까지 꾸며 전 국민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려 했다. 지금 내 고모 1분이 광주에 사신다. 연세가 칠순 정도 되셨다. 광주에 일어난 비극을 생각하자니 그 당시 군부세력을 용서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 든다. 시골에 내려가면 집안대대로 우리가족과 친분이 있던 먼 친척집안 1사람이 518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분은 518 당시 살해당하지 않았지만, 518의 업보를 평생 지고 살아간 사람이다. 그가 수배될 때 가족식구를 데려가 고문하였다. 지금은 그 분의 고향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추모제를 열어준다.

 

유흥준 교수님이 그 분의 집을 해마다 방문하신다. 유홍준 교수님은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셨다. 광주에서 군부에 저항하다 사라진 그들, 군부에 의해 살해당한 그들, 모두 살기를 원했지만 죽음을 삶의 의지를 비켜가지 않았다. 죽은 자는 살기를 바랐고, 죽은 자의 가족은 같이 살아가길 바랐다. 그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리고, 그들을 살해한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모두 드러날 때 그들의 죽음은 다시 삶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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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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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라비, 알고보니 사회노동포럼연대 이영희님이다. 오랫동안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신 분이고, 그동안 한국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메갈리아 사태부터 계속 비판했고, 이번에도 비판했다. 저분의 명언은 어떤 사상이든 휴머니즘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성난 승냥이떼를 보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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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5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에 대해 다들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신영복 교수가 어떤 분인지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남겼는지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 네 글자만 들어보면 누구나 !’하고 탄성을 낼 것이다. 소주이름 처음처럼이다. 소주 처음처럼은 이미 대중들이 자주 마시고 있는 메이커 중에 하나이다. 그 글귀 원본이 신영복 교수님이 적은 글이다. 신영복 교수님은 사상적으로 어마어마한 사유를 지닌 분이기도 하나, 서예가로서 또한 서예와 같이 그림을 그려 넣는 예술가의 혼을 느낄 수 있다.

 

한국과 세계를 돌아봐도 이렇게 뛰어난 학식과 이성, 그리고 인품과 근성, 더 나아가 예술적 감성과 감수성을 지닌 분은 흔치 않다. 신영복 교수님의 책 몇 권이 시중에 나온 것을 알아도 이때까지 읽어보지 않았다. 단지 신영복 교수의 책보다 매년 나오는 달력을 구매하여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 적은 있다. 달력에서 날짜와 더불어 그 달에 대한 그림도 역시 중요하다. 겨울이면 눈과 눈사람이 나오고, 가을이면 맑은 하늘과 과실이 달린 나무가 우리 정서를 풍부하게 한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은 마치 맑은 가을하늘 아래 감나무에 맺힌 맛있는 단감 같은 느낌이다.

 

나무가 씨앗을 뿌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려면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교대로 하여 수 년 이상을 보내야 한다. 태풍에 잎사귀가 떨어지고, 가뭄에 가지가 말라간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단감은 배고픈 이들에게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내가 단감을 떠올린 이유는 결혼 전 내가 살던 집 마당에 감나무 2그루가 있다. 도심지 내 감나무라 맛은 없지만, 그래도 감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부모님은 농촌출신이고, 다들 배고픈 시기를 보냈다. 배고픈 배를 뒤로 하고 집 마당에 감나무가 열리면 나무를 타고 감을 딴다.

 

단감 몇 개를 먹으면 주린 배도 채우고, 단감 과실에서 상큼하고 단맛이 올라온다. 신영복 교수님은 마치 단감나무와 같은 분이다. 비닐하우스에서 폭풍과 홍수, 가뭄도 겪지 않은 현재 엘리트 지식인들과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게다가 동서양 고전을 모두 읽었고, 최근 프랑스철학자이던 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의 서적도 거론한다. 그의 지평은 동서양이란 공간적 영역에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까지 넓히는 시간적 영역을 통찰하는 지식인이다. 최근 진보성향 지식인 내지 정치인에게 실망한 적이 많았다.

 

그 이유는 시대적 흐름, 산업적 환경, 경제적 조건, 세계화 흐름이 있을 것이다. 엘리트들의 대학은 언제나 좋은 대학교이다. 진보정치인 내지 엘리트들은 주류대학교 출신이 많다. 그들은 진보의 이름을 내걸지만, 한편으로 엘리트주의가 보여주는 지식의 폭력성을 반성하지 않는다. 성리학을 만든 주자의 저서 중에 <대학(大學)>이 있다. 젊은 지식인 엘리트들의 대학은 상위학력을 지닌 대학교지만, 신영복 교수에게 대학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감옥이었다. 2020, 그 기나긴 시간 속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군부독재가 자리 잡은 암울한 60년대 후반, 사관학교 교관으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은 반정부 세력으로 몰려 자유를 빼앗겨야 했다.

 

단지 청구회 활동이 권력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자기가 처음 간 수감방에 사형수와 무기수가 머물던 방이다. 실제 같은 방에 있던 감방 수감자가 사형을 당했다. 죽음과 마주한 곳, 자유를 박탈한 곳, 세상과 단절된 곳, 더 나아가 암울한 시대를 반영해주던 차가운 교도소는 신영복 교수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신영복 교수님이 저술한 <감옥으로부터 사색>이란 글은 엄청난 내용이었다. 물론 교도소에서 서신을 확인하기 때문에 신영복 교수님 자신이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글은 매우 깔끔하고 청조하며, 맑은 정신에서 드러난 인품 그 자체였다.

 

학자로서 아버지와 대화하는 지식인, 가족과 친지를 위해 따스한 글을 남기는 삼촌, 옆에 수감되어 있는 일반 교도소 수형자를 바라보는 인간적 시선, 이 모든 게 인상적이었다. 신영복 교수님은 이 세상의 어둠을 없애는 것이 옳다고 봤지만, 그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해 거만하게 보는 것을 무척 경계했다. 교도소에 처음 온 어느 청년은 너무 가난해서 치약도 없고, 죄수복 안에 속옷도 없었다. 치약과 속옷을 다른 이들이 주자 그 청년은 화를 내며 거부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청년은 교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사유를 물어봤다.

 

마치 자기가 그대로 타인의 호의를 받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 자신에 대한 삶의 정체성이 부정당할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한 시선이 늘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오만함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들의 기준, 보편성의 기준에서 물론 대상자는 틀리거나 전혀 좋은 방향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거나, 타인의 간섭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아니고선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아마 지금 진보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이런 신영복 교수님의 경험과 깨달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세상은 관계성에서 시작한다. 관계성에 대한 부분에서 더불어 나가는 길은 자신의 선에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길 가끔 못난 사람들이 오기를 부린다고 하지만, 오기는 불친절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단이란 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님이 바라본 교도소는 완벽한 인간학의 공간이었다. 교도소에 오는 범죄자 중에서 죄질과 심성이 나쁜 사람은 있지만, 대부분 보통 사람과 비슷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시스템이란 인클로저 앞에서 더 이상 몰릴 곳이 없어 교도소로 온 사람도 많았다. 고의성보단 우발성, 그 우발성을 만들어낸 사회의 차가움, 우리 사회는 너무 차갑게 변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물건 내지 상품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돈은 최고의 가치이다. 돈은 모든 가치를 화폐라는 단위로써 나타내는 수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우리 현대인들의 삶이다. 그 삶이 시간으로 제단 되어 지불수단의 척도로 변모된다. 시간을 규정함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그 시간 안에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여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돈은 화폐지만, 돈을 위해 노동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노동력을 돈으로 산다 해서 그 인간의 인간성 내지 존엄성까지 구매한 것은 아니다. 전에 집에 에어콘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에어콘 설치 시 다행히 휴일이라, 작업할 때 나도 같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에컨 설치는 9시 반 ~11시 반 사이였다. 날이 그래 무덥지 않으면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는 에어콘 설치 설비기술자들이 작업할 때, 아침을 먹지 않은 나와 와이프는 지켜보고 있었고, 와이프는 아침을 먹지 않아 배고파 10시 정도 라면을 먹고 싶다 했다.

 

나는 지금 에어컨 설치작업 중이니 먼지가 날릴 수 있고, 그리고 작업 중인데 우리가 라면을 먹고 있는 게 조금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내 집에서 그냥 라면 먹는 게 어떠냐는 말을 와이프는 했지만, 내가 다소 말렸고, 나중에 작은방에 가서 조금 쉬어달라고 했다. 나는 음료수 2개를 미리 사왔고, 그분들에게 드렸다. 물론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옆에 없어도, 라면을 먹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나는 그들을 그저 돈만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볼 뿐이지, 그들의 입장과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들은 우리 집의 손님은 아니나, 방문자들이다. 우리 집에서 에어컨을 설치하여 거기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불해도 그들은 사람이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이나 혹은 <자본론>과 같이 노동을 하는 있는 노동자의 노동력이 그저 돈으로만 따지게 된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 인생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신영복 교수님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야하고, 가슴에서 발로 움직여야 한다 했다. 본인 자신도 편한 곳에 있기보다 보통 수형자들과 같이 지내고, 작업반에서 직접 기술을 배우고 일도 한다.

 

손바닥에 고생을 하지 않은 채 펜대만 돌리는 글은 세상을 제대로 들어다 본 글이 아니다. 지금 진보정치인과 엘리트들의 문제점이 뭔지 잘 알 수 있는 글이다. 시대적으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시기에 활발히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치고, 이들을 대변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다쳤다. 이때 산업구조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뀌고, 대부분 산업구조가 공업으로 바뀌었다. 당시 노동운동을 하던 분들은 많았지만, 현재 노동운동이 진보정치의 중심 틀에서 보기에 많은 우려감이 들었다.

 

현재 산업구조는 공업이 아니라 서비스 위주이다. 서비스이기에 농업과 공업은 극대화된 기계화로 생산력을 증가했다. 하지만 농업인구는 감소하고, 공장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사회적 재화를 누리기 위해 늘 생산된 물품에 대해 노동력을 더하여 또 다른 상품으로 전환된다. 상품의 전환에서 죽은 노동이란 불리는 재료는 그 재료로 변모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이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간 죽음노동의 탄생을 위한 노동력은 주시하지 않는다.

 

옷을 하나 입을 때, 옷감이 폴리에틸렌 계열이고, 폴리에틸렌은 석유에서 나온다. 석유는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으니, 석유를 반입하려면 선박이 직접 산유국에 가서 구매한다. 석유를 화물로 적재할 때 투입되던 선원들의 노동력, 그리고 배를 움직일 때 노동력, 한국 부두에 도착해서 석유를 이송할 때의 노동력, 공장에서 가공할 때의 노동력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진 최신의상일 뿐이다. 우리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모든 것은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노동들의 의미가 단순히 돈의 논리로 모조리 해명된다면 그동안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때까지 일하는 노동자의 의미는 없어진다. 물론 생계를 위한 활동으로 노동을 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너무 처량하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인원 비율을 넘어서고, 임금상승비율보다 물가상승비율이 오를 때 우리의 삶은 피폐해져 간다. 이럴 때 가끔 내가 아주 어릴 적 시골집에 갈 때가 생각난다. 아직 어린 나와 형이 엄마 뒤를 따라 종종 걸음으로 따라 시골집에 간다. 늦은 저녁 가로등도 보이지 않은 시골길에 오래된 무덤들을 지나간다. 그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골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반겨주고, 할머니가 부엌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만든 밥과 누룽지를 먹으면 매우 좋았다. 이제 전통농촌사회를 기대할 수 없고, 여성에게 모든 가사를 요구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어린 시절 느끼던 그런 추억과 따뜻함은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차가운 공간에서 차갑게 시간으로 제단 되어버린 인간 속에서 우리의 삶에 오아시스는 있는가? 신영복 교수님은 인간학을 중시했다. 인간이 중심 되는 그 세상에 인간은 오히려 외부로 소외되고 있다.

 

삶의 경쟁에서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나 우리의 지난 것도 버리지 않은 것도 중요하다. 지난 것들에서 잘못된 점이 많다면 새로운 것 역시 잘못된 게 많다. 그래서 넓게 스펙트럼을 보고, 그 안에서 다양한 것들을 보는 것이 우리 삶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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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6-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님이 계시던 감옥은 몸을 구속했지만, 정신을 구속할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반면, 감옥 밖의 세상은 몸 대신 정신을 구속당했던 것을 보면, 지난 시절은 참 어두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리 밝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 세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만화애니비평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중심의 세상이 되어야 겠지요. 그리고,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 이전에 먼저 우리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개인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6-19 15:46   좋아요 1 | URL
요새 보면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기사가
아파트 경비실 직원이 마음에 조금 안든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욕하고 때리고 억압하는 태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자기 업무에 대해 일하는 분이지, 주민 시중들기 위해 계시는 분들이
아닌데 말이죠. 인간(타인에 대한 관계성)중심이 아닌 개인중심으로 치중된 세상에서
잠시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시작인듯합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사회에 오면서 우리는 진짜라는 의미에 많은 열정을 부여하게 되었다. 영화, 스타, 스포츠, 정치사회 이데올로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물어보면 뭔가 상세하게 답변하거나, A에게 질문에 답변내용이나, BC, 더 나아가 그밖에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특별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보편성이 작용할 줄 모르나, 보편성이란 하나의 상식에 기인하나, 개성이나 자기 안의 열정은 보편적 상식에 의해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개성에 대한 보편성은 대다수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는 캐릭터라 불리는 개인성이 어느새 보면 개인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관점을 띠게 되는 점이 많아졌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관, 자신만의 가치에서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사유는 자신에게 나올 수 없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여건, 그리고 교육적 특성과 사회적 변화 모두 개인의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이들이 그런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것만은 아니다. 결국 사회적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나, 개인성은 사회적인 영향만으로 다 성립되지 않은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런 요소가 잘 보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는 20세기와 달리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한 미디어 환경이 구축된 게 아니라 PC, 인터넷, 더 나아가 스마트 폰의 등장 아래 네트워크 시스템 및 모바일 세계로 확장되었다.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공간적 활동제약은 매우 축소되었다. 누군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침실에 누워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을 누르면 금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읽는데, 한국 전통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시장은 매일이 아니라 5일에 1번 열려 5일장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그 시장에 가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적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가는 것일까? 늘 같은 생활과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5일장은 늘 새로운 이야기와 소문 그리고 거기서 피어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통을 원하는 존재다.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던 인간이 이제 인터넷 창으로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보이지 않기에 마음 속 깊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나, 정작 그것을 털어놓는 내 자신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수용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진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장벽에 자신이 만들어낸 진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앤드류 조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현대사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도서이다.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오길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와 다르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현명한 인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느 지식을 알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알고 있다는 지성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인간은 모르고 알고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 내지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 어느 누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몰려 각종 덧글을 단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이버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이버공간이 아니라 일상세계를 파괴한다.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 하차대기 중, 뒷문에 어느 어린 아이가 뛰어내렸다. 그 아이가 뛰어내리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버스기사는 다음 정류소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내려주었다. 그게 인터넷에 소개되자, 버스기사의 삶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CCTV로 통해 보호자의 문제라고 드러나자 이제 아이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비판을 할 수 있어도 각종 욕설과 비난이 오고가는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인간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험악한 발언을 날리는 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 여긴다. 왜냐면 누군가 잘못했으니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사람이니 비난을 날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전후맥락이 필요하다. 앞뒤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최종적으로 문제를 지적하여 개선하는 게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는 뒷전이고, 오로지 공격만 존재하고, 적나라한 욕을 통해 자신이 악인을 응징했다는 착각의 세계에 빠진다.

 

착각은 곧 진정성에서 기인한 기만이다. 왜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것인가? 현대사회는 정보가 망라된 첨단사회다. 소통의 장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열린 게 아니다. 자신만 아니라 자신 이외의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과거 100년 선거할 경우 시장후보가 곳곳을 돌며 얼굴을 마주해야 하나, 이제 TV토크쇼에서 후보들을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정책안에 대해 관심 있게 듣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이 보는 것은 상대방 얼굴과 몸에 드러난 이미지다. 즉 겉모습에 나오는 분위기가 많은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어눌하게 말을 해서 혹은 말실수를 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도 토론회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몰아넣으면 역효과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이성보단 순간적 감성이 따르고, 그 감성을 드러나는 이들에게 하나의 진정성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란 이토록 감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란 말인가? 기 드보르가 저술한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미디어로 보여주는 방송매체 혹은 신문 또는 인간생활 그 자체만으로 스펙타클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주변은 이미지로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세계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스펙타클로 구축된 이미지 왕국의 세계이다. 진정성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 나온 최신유행인기가요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그것이 길거리에서 들려야 한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성향보단 지금 억지로 고의적으로 은폐된 사실에 모두가 열광해야 한다. 열광 속의 스펙타클러는 자신이 의지가 아닌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세계에 더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 시대에 흘러나온 이미지의 부산물에 같이 떠밀려가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도 20세기 중반과 후반은 민주주의와 노동투쟁으로 많은 진보를 일구어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진보는 그렇지 않다. 이성적 판단력과 구체적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느낀다는 하나만으로 열광한다.

 

진정성의 의미와 사실적 관계, 사회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단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신봉하는 진정성만 남게 되었다. 거짓만 넘치는 진정성은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가득하다.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면 그 행동의 원인 사회적 연결성이 있지만, 그 자체가 사회를 대표하는 인식은 아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성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인용하는 셈이다. 자신이란 존재가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자신의 존재성은 사라지게 된다.

 

시대적 흐름은 읽고 변화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란 홍수에 몸을 내맡기면 안 된다. 홍수에 휘말린 사람의 최후는 상상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루소가 소개되는 점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당시 명사들의 오류처럼 인간이 숲에 들어가 곰처럼 사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세계인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듯이 실제 자연에 대해 예찬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되고, 인간사회의 인간은 본연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다고 루소는 숲속의 곰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을 누비며 식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루소처럼 자신의 본연으로 갈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농촌은 이미 인구가 말라 황폐화되어가고 있고, 경치 좋은 곳은 펜션과 호텔, 그리고 카페들만 즐비하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존재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관광지로 변모된 것이다. 그나마 자연이 가득한 관광지를 가면 힐링이 되겠지만, 그곳조차 갈 수 없는 이들은 늘 일상의 빡빡함만 기다린다. 과거 인간은 자동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민주주의 국가 이전에 왕국과 봉건영주국가였다. 게다가 교회세력이 왕족과 귀족하고 연합하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자신들의 결속력을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왕은 단두대 아래 사라지고, 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소부르주아로 되거나 심하면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이게 인간의 역사이다. 민주주의 가치가 도래하기에 바람직하나, 거기에 반해 문제점도 있다. 인간의 진정성은 각 개인과 국가적 관계로 대비한 근대국가로 이행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은 붕괴했다. 한국사회도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대가족은 이미 사라진 문화제도이다. 일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은 거의 드문 케이스가 되었고, 그런 장소조차 관광문화지역으로 설정되어 버렸다.

 

강제소속이 없는 반면 자신의 정체성에서 모호하게 변질되었고, 정체성에 대한 심리적 빈곤은 진정성에 대해 감각적인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차라리 스포츠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약할 수 있다. 적어도 그라운드 위의 선수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이미지 메이킹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어떨까? 그래도 대중은 거기에 열광한다. 열광은 진정성이 아니라 허구성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 사회는 이성에 의해 사회문제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적 비판 없이 무비판적 열광이 남은 사회는 그저 같은 문제만 돌고 돈다. 진정성이란 참된 진실은 결국 이성의 눈이다.

 

근대화에 의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부여받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이성에 대한 자율성을 완전히 부여받지 못했다. 탈근대화 시대는 감성과 소통의 세계는 맞다. 하지만 감성의 소통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과의 조우라면 문제가 발생된다.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아니기에 전혀 다른 관점이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리하게 부여받은 동질성은 자신의 판단력이 아니라 기 드보르가 지적한 스펙타클된 사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우리가 피를 흘러 쟁취한 자유의 대가이다. 자유를 원했는데, 고독의 시간이 도래했다. 고독을 탈피하고자 계속 진정성을 내세우나 이 책에서 말하듯 그건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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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요새 진보세력의 방향을 생각 후, 사회경제적 관점을 보면 참으로 답답해보인다. 생산의 조건은 ˝재생산의 기반˝에서 시작된다. 내일도 모레도 10년 뒤나 20년 뒤나 사회적 인프라를 없이 살 수 없으면서 정작 거기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다소 생각해야 할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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