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헤드 - 익숙해 보이지만 결코 알지 못했던 미국, 그 반대편의 이야기 알마 인코그니타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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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0 : 펄프헤드 Pulphead, 존 제러마이어 설리반 저, 2023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위 그림은 초 현실주의 화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의 대표작으로 제목부터가 재미있다. 마그리트는 제목에서부터 우리의 인식 체계를 유머러스하게 비꼬고 있는데, 그 의도를 살펴보면 수긍이 간다. 실제로 그림은 물리적으로 캔버스위에 물감 덩어리의 분포에 따른 어떤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물리적 실체를 보지 않고 그림이 표방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역설적인 상황이 그것이다. 이는 보들리아르 Baudrillard 가 "시뮬라시옹"에서 실체에 대한 이미지의 전복(그리고 잠식) 으로 매우 중요한 철학적 담론으로 지적한 바 있다. 이쯤에서 나는 당신들에게 문득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에게 미국 America 은 무엇인가?..."

아마 다양한 이미지가 여러분들 머릿속에 떠오르며, 오만가지 대답이 교차할 듯 하다. 예를 들어, 뉴욕의 마천루, 넓디 넓어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광활한 대자연, 화려한 라스베가스나 마이애미의 불빛들이 반짝이는 기회의 땅 등등... 기존에 우리가 가진 미국의 이미지는 크고 광활한 대륙, 전 세계의 중심인 패권의 나라,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대중 문화의 끝판왕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그들을 우리와 최근의 현대사(해방이후 6.25전쟁, 베트남전) 를 함께한 "혈맹" 으로 간주하고, 늘 부러운 대상으로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친근함을 느끼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문득 나는 우리의 이 모습이 마치 큰 코끼리의 몸 여기저기를 부분적으로 만지며 느낀데로, 그 거대한 전체의 집합인 코끼리를 속단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든다. 누군가 미국인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설명해주지 않겠어?"라고 부탁하면, 전혀 예상치못한 대답이 나올거라는 기대마져 하면서 말이다. 소위 "디커플링" 시대에 들어서 이제는 그들을 객관적으로 봐야할 상황이 자꾸 발생하니, 적어도 그들의 민낯은 고사하고 도데체 무어라 우리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개하는지 이해를 하고 싶은 마음에 특히 더 그러하다. 그리하여 다음의 질문을 또다시 던져본다.

"과연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2. 저자의 의도...

이 책의 저자인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John Jeremiah Sullivan 은 미국 중부 테네시 출신의 기자 겸 저널리스트이다. <GQ>, <하퍼스 매거진> 등을 비롯 유수의 잡지사에 기고를 하고, 현재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전속 필진으로 활동중인 작가이다. 본 작, 펄프헤드로 2011년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이후로 언급할 "뉴 저널리즘 New Journalism"으로 특징되는 에세이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이 뉴 저널리즘은 영미권의 잡지들에서 관찰되는 특징으로서 기사와 에세이의 절충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은 장르이다. 일반적인 신문 기사들이 그렇듯이 시계와 같이 딱딱하고 정확한 사실 전달, 기자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건조한 문제가 아니라, 마치 문학의 그것처럼 세부 표사의 극적인 디테일, 필자의 의도나 느낌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개입까지 한다. 따라서 논픽션의 기틀은 유지하되 소설적인 기법을 다양하게 차용하여 독자와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마치 사건을 "목도하게" 만드는 호소력이 있다.

본 작은 이러한 뉴 저널리즘의 현재적 대표작으로 볼 수 있으며, 한국에서는 잘 접하지 못한 그 특유의 문체를 경험해보기 좋은 작품이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피상적으로 가진 미국의 이미지와 다른, 미국인 저자가 느끼는 진짜 그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접해보기에 상당히 강점이 있다 하겠다.(그리고 책 말미에 출판사의 후기에서도 이 목적을 언급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이미 잡지에 기고한 에세이를 모은 일종의 모음집 성격을 가지고 있고, 각 글들의 주제나 동기는 정말 제각각이지만 근본적으로 작가가 가진 주제의식 한 가지는 일관되게 느껴진다. 그것은 현재 미국을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써, 동시대에 느끼는 자신들의 모습과 그 뿌리, 그리고 나아가는 여정을 그들의 시각으로 그려내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효과적인 답을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3. 인상적인 부분...



처음 이 책을 접하면 - 약간이나마 이 책에 대해 전달받은 사전 정보와 달리 -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분명 에세이 집이라고는 하는데 소위 벽돌 두께의 큼지막한 분량이란! 더군다마 펼쳐든 목차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 미국 문화에 꽤 익숙하다고 평소 자부하던 나부터도 도데체 종잡을 수 없으니... 그러나 호기심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던진 내 질문을 스스로 찾아보리라는 의무감마져 동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그 제목들을 선정한 작가의 심정을 이해하고, 또 다른 면을 접해본 기쁨이 나름 존재했다. 

기대 반, 우려 반인 그 외형과 달리 선정한 주제들은 꽤나 현시적이다. "트럼피즘"의 지지 기반이 된 미국 보수 복음주의의 반동을 연상케하는 대형 "크리스쳔 록 페스티벌"을 다룬 첫 장 "이 반석 위에서"로 서두를 시작한다. 그리고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상흔이 남은 태풍 "카트리나"의 기억들, 그 속에서 벌어진 일련의 재난 영화같은 일화들을 그 이후의 장에서 다룸으로써, 현재 미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분명히 큰 트라우마를 안겼음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더욱 노골적인 표현이 엿보이는 "아메리칸 그로테스크"에서는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는 면을 보여준다. 전前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뿌리깊은 인종 차별과 매카시즘적인 공격들은 결국 "메디케어 Medicare"로 대표되는 복지정책에 대한 극렬한 반대 시위로 귀결되며, 이 준동의 밑바닥에는 "폭스 뉴스"로 대변되는 극우 레서시 미디어와 티파티 Tea-party 로 잘 알려진 보수 공화당을 지지하는 로비스트들을 등장시킨다. (심지어 이 자들이 자기 친척들이다.) 짐작컨데 민주당 지지자인 저자가 느끼는 이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행태에서 훗날 "미 의회 점거 폭동(2021)"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건 나만의 우려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가진 과도한 황홀감도 어두움도 없다. 다만 현장으로부터만 느낄 수 있는 날 것의 생생함이 묻어있다. 이러한 현장감이 내가 당신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길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들을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아직도 대륙(유럽)에 대해서 느끼는 문화적, 역사적 열등감의 발로라고 느끼기에는 이미 오래전에 미국은 패권주의에 익숙해진 시점 아닌가. 오히려 그것보단 자신들의 고립된 대륙에서 아직도 그 기원에 대해 불분명한 고대의 문명들의 탐사와 재발견("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굴들")이라든지 "남부"로 대표되는 자연주의(때론 낭만주의)적 문학 운동의 마지막 장의 결말("미스터 라이틀:에세이), 미국 대중 문화의 한 부분이었지만 과소평가된 "블루스"의 알려지지 않은 흔적들과 그를 둘러싼 문화적 의의 평가와 보전에 대한 글("알려지지 않은 시인들") 등을 통해 자신들의 서사를 외부 시선과 상관없이 쌓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렇게 갈망한 자기들만의 서사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는 "자부심"의 발로로 보인다. 결국 "전통"이란 것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형성되어 그것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역량과 세대의 자세에서 생겨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어느덧 우리가 기억할법한 헐리우드 고전영화의 많은 작품들이 이제는 당당시 "고전 Classic"의 반열에 올라 끊임없이 오마쥬를 바치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밴드 출신의 저자 자신의 경험은 숨길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록 문화를 포함한 MTV 시대의 성장, 그리고 미디어 산업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은 확실히 감정이 있다. 그 누가 우스스탁 페스티벌 Woodstock festival의 안티 테제로 크리스쳔 록 페스티벌을 상상이나 했겠는가("이 반석 위에서"). 게다가 "액슬로즈의 마지막 컴백"에서 엿보이는 노골적인 락에 대한 경배와 - 나는 이것이 편협하다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 - "마이클"에서 나타나는 모타운 사운드를 넘어선 한 위대한 뮤지션의 최대 논쟁 지점 - 아동 성추행 혐의 - 는 지금도 명백히 유효한 미국 대중 문화의 한 모습이다. 우리가 오늘도 펍 Pub 에서 들려오는 각종 록 음악들, 이제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하는 우리의 아이돌 그룹들의 뿌리에는 마이클 잭슨의 업적이 자연스레 녹아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레게 음악의 시발점인 밥 말리 & 더 웨일러스 Bob Marley & the Wallers 의 바로 그 에윌러를 취재하는 모습까지! 이 모든 것들이 현재 빌보드로 대변되는 미국 대중 음악의 한 가운데에서 온 몸으로 그 문화적 세례를 받은 저자의 예리한 느낌이 살아서 숨쉬는 느낌이다. 

4. 아쉬운 부분...

이 책은 너무나도 미국적인 에세이 집이고 그들의 현재 시각과 공감대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그 정도로 미국 문화에 대해 선지식이나 당대의 이해도가 없는 독자들에겐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비춰질 여지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마치 지금 화면에 나오는 미국 현지의 스탠딩 코메디 쇼를 볼때, 청중들은 박장대소를 하는 부분에서 자막을 보아도 유머의 맥락을 몰라 어리둥절한 느낌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책은 주석이나 해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엄밀성을 요구하는 학술서나 전문 서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도 아니다. 따라서 주석이나 해설글이 장황해지면, 자칫 가벼운듯한 느낌의 저자의 글들과 어우러지지 않을거라는 지점이 존재한다. - 그리고 나의 우려를 반영한듯 최대한 주석을 자제한 편집이 보인다. - 그러므로 이 책을 보다 더 다양한 독자들과 조우하게 하려면, 기존의 방식보다는 "영상"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미디어에서 그 역활을 기대해볼 수 있겠다.

또한 내가 보기에 미국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라고 믿는다. 1,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패권 다툼의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되고, 6.25 전쟁과 베트남전으로 우리 역사와도 조우하는 지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으로 대변되는 미국 건국 초기의 역사나 그들 이전의 원주민들에 의한 역사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저 단편적으로 헐리우드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백인 중심"의 시각에서 다룬 일부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원 즈음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은 독자들이 따라가기에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구글 검색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의 소스가 존재하고, 접근성도 꽤 용이한 편이므로 보다 더 깊은 논의를 접해보고 싶은 독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읽어나가면 어떨까하고 추천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구현하고 있는 "뉴 저널리즘" 문체의 한계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앞서 밝혔듯이, 이 글들은 뉴스 기사와 소설사이의 어딘가 지점을 점유하고 있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낯선 글들이며 신선할수도 있지만, 거부감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미 부연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만큼 그들의 시장에서 자리잡은 이 쟝르가, 전혀 규모가 다르고 독자의 성향이 다르며, 언어가 다른 우리의 그것에서 얼마나 인상을 줄 수 있을지가 관건인듯 하다. -그리고 출판사도 이를 비판하는 문제 인식을 거론한다.- 그러나 나는 대중들에게 이 문제를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일뿐, 어떤 목적성이 들어갈 문제는 아니라 보기 때문이다. 다만 꾸준히 이러한 글들을 소개한다면, 꽤나 가독성이 보장되는 이 쟝르의 글들이 대중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결실을 맺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5. 나오며...

다시 돌아와 미국을 바라보도록 하자. "신대륙, 신국가"라는 의지의 표상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고, "구대륙"의 모순들을 피해 모여든 이민자들의 다양성이 혼재하는 사회, 그리고 이를 넘어서 현재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기회의 땅"의 모습, 물질 문명의 극치를 선보이며, 그 이미지적 헤게모니를 장학한 거대 국가... 이 정도로 그동안 정리된 이미지를 뒤로 하고, 오로지 이 책에서의 느낌으로 재정의 해보는 것이다.

문자를 남기지 않아 지금도 그 신비함의 비밀을 간직한 원시적 대륙, 가장 현대적인 도시 문명과 가장 전원적인 자연 환경이 공존하는 드넓은 나라, 이제 비로소 자신들의 문화적 근간들 - 흑인음악, 남부문학, 헐리우드 영화 - 을 구축해낸 역동성의 나라,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와 복지국가간 견제가 팽배한 국가.. 이 정도가 아닐까?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오늘도 외신을 장식하는 그들의 뉴스를 좀더 이해해보면 어떨까...

그렇게도 자유 지향적이면서도 극도로 보수적인 그들의 내면, 패권주의를 보이지만 자신들의 대륙을 우선시하는 "고립주의"의 뿌리, 상대적으로 늦게 발달한 문화적 배경을 대중문화와 영상매체를 통해 완전히 자기들 것으로 재편한 그들의 모습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가? 이 모순적인 부분들을 보다 더 잘 드러낸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좋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낮은 단계의 시도일지라도 서서히 우리의 인식을 바꿔주는 좋은 계기를 꾸준히 제공하고자 하는 출판사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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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59 :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위저쥔 저, 2023


출판사 사전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당신은 "밀크티 동맹(Milk-tea Alliance)"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신의 외신 뉴스나 신문의 국제 정치 분야 기사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조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2020년대에 홍콩, 대만, 태국의 시위대에서 등장한 신종 슬로건으로서, "반反 독재, 반중시위의 국가간 연대를 외치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성공시키며,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거창한 자국(중국)의 긍지마져 과시하던 중국이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내몰렸냐는 의문마져 드는 용어이다. 물론 점점 팽창하는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려는 기존 서구권의 의도된 프레임으로 의심해볼 수도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높아지는 "반중정서"에는 "어글리 차이나(Ugly China)"의 실질적인 혐오감 또한 존재함은 명백한 그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단지 수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과 마주하는 일상에서 받은 대중들의 인식들, 그리고 중국의 해외 진출 지역에서 마치 "점령군"을 방불케하는 그들의 행태 또한 여러 기사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즉, 중국 인민들의 일상 태도나 인식이 타 국가나 공동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갔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이면을 주목해서 보고 싶다. 나와 공감하는 다수의 역사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중국의 근현대사"에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처절하게 질곡의 역사로 점철된 그들의 의식속에(또는 무의식속에) 상실로 인한 거대한 "정신적 결핍"을 유발하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리잡은 것은 "물질 만능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전후의 일본 재건 시대의 극심한 패배주의나 6.25 전쟁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보여준 극단적 생존 지상주의의 발현처럼 그들 또한 사회 전체가 거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그들의 현재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징후가 위에서 밝힌데로 곳곳에서 감지된다는 진단에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들보다 더욱 더 철저히 시장 경제적 기조와 행보를 보인다고도 탄복할 정도이며, 이러한 경제적 극단화는 필연적으로 커다른 사회적 갈증을 낳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시점에 이 갈증에 대한 반성과 경고의 화답으로 지금 살피고자 하는 이 책이 나온 배경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모두가 질주하듯이 달려오며 점점 가속화되어 멈출 수 없는 극단적인 현실속에서, 잠시 한 발짝 떨어져 시대를 관망하며, 인간의 삶에 대해 자조하는 이 철학자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 누군가는 포착한 것이라 짐작이 된다.

2. 저자의 의도...

본작의 저자, 위저쥔은 현現 푸단대 철학 교수로서 이 책의 기원이 된 팟캐스트 "철학 강의"로 유명세를 탄 인문학자이다. 당시 700만 조회수를 넘나들며 큰 호응을 이끌어냈고, 서구 사회의 "TED 강연"에 비견되는 대중강연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특이한 지점은 중국 태생의 철학자라면 으레 동양철학을 전공했으리라는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서구 관념론의 본고장인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력이다. 게다가 모교에서도 서양 철학을 강의하며 학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동양 철학의 본고장에서 서양 중심의 학풍을 가진 이방인에 가까운 행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선입견에도 상관없이, 푸단대에서도 대중적인 강의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일종의 "경계"에 선 학자라 볼 수 있겠다. 일련의 알려진 강의나 저서를 보면 서구 물질주의 문명의 비판론에 주관심사를 둔 것으로 보이고, 이 저서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서문에서 저자 본인은 자신의 견해는 최대한 배제했음을 밝히고 있지만, 팟캐스트의 목록과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이는 사실과 다르게 보인다. 47인의 철학자를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하면서 소개하되, 각 장의 대주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재 무질서에 가까운 중국 대중들을 "계몽"시킬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각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생각은 "현 세대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에게, 삶의 지향점과 의미를 철학으로 일깨워 주기 위함"이라고 명백히 읽혀진다.  

3. 인상적인 부분...


먼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려 했던 점은 선정한 주제들의 "경계"였다. 이미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국은 엄연히 "검열"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모두가 경제적인 측면만을 보고 판단하기 쉬우나, 중국은 정치적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를 지향한다. 따라서 아무리 학문의 자유를 명목상 보장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체제 이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과연 그와 같은 한계를 극복할만한 지점이 존재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읽는 내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선입견을 보란듯이 비웃듯, 그 경계에 선듯한 주제가 상당수 목격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로버트 노직, 권력의 통제와 감시 작동 원리를 맹렬히 비판한 미셸 푸코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원론적인 소개와 적절한 수준에서 이들을 해제하고 있지만, 더 자유롭게 이들의 논거들을 활용하면 현 중국 정치 체계를 비판할 수 있는 대목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사유의 위험성을 중국 당국이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며, 이는 분명 주목할만한 대목이다.(반대로 이 정도의 지적 사유의 확장으로 인한 체제 비판은 충분히 자신들의 사장적 기반으로 방어 가능하다는 자심감의 발로로 볼수도 있겠다.)

또한 저자의 나머지 주제들은 현 물질문명 내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주제들 내지는 비판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 이는 첫째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이후 폭주하는 중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측면이 다분히 존재한다. 이는 소주제로 제시하는 질문들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당신은 왜 일하는 시람이 되고자 하는가?"와 같은 문장들에서 그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로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의심케하는 시사점을 들고 싶다. 자본주의 내에서의 "비판"을 의도적으로 수용하고 드러냄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물론 이 의도의 한계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자신들의 과거 결정 또한 모순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결점 또한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각 인물에 대한 분석과 평이 매우 대중 친화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교조적인" 학자의 글도 아니고, 더욱이 맹렬한 문장들을 줄곧 선보이는 사회주의 특유의 문장과 표현들은 이 책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매우 친절한 구성과 문체, 심지어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독자들을 배려한 세심한 "대머리 지수"까지... 아주 잘 구성된 서구 사회의 대중 교양서적의 그것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잘 구사하고 있다.(저자의 이름을 가리면, 과연 이 책이 미국, 유럽에서 출간된 책이라고 보일 정도이다.) 이는 짐작컨데 현재 중국 인민들의 지적 수준을 고려한 측면이 있지 않은가 판단된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발표와 관계없이 아직도 중국 인민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역간 격차 또한 상당하다. 따라서 저자는 먼저 팟캐스트의 형식을 빌려 시작을 하였고, 이 책은 그 결과로 나온 책이므로 역시 그 의도의 자장 안에 존재한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라는 결과물이 질적으로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오히려 아주 잘 쓰여진 대중 교양서적으로 그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리라 보인다.

4. 아쉬운 부분...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철저히 대중을 상대로 기획된 팟캐스트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주제의 선정과 인물의 소개 및 구성도 이 목적하에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쉬움 또한 존재한다.

먼저 각 사상들의 치열한 전개와 확장성은 이 책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현재 중국의 정치 검열로 인한 상황으로 보일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소개한 정치 철학들 가운데 몇몇은 그 논의가 다다른 지점이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반드시 존재하고, 이는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 체제 또한 해당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 로크의 천부인권론을 들어보자. 이 이론의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할 수 없는 권리(자유)를 부여받았다"이다. 현재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각자의 기준대로 "헌법"상에 이 정신을 다양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거 "천안문 사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티벳에 대한 일방적인 흡수 정책과 신장,위구르 지역의 소수민족 탄압은 무엇이라 말해야될지 모르겠다. 심지어 로크는 그와 같은 상황하에서 인인은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지 않는가. 현재 중국 공산당이 가장 금기시하는 인민 봉기나 분리 독립은 이미 로크가 충분히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게다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또한 어떠한가. 권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시와 통제의 내면화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또한 현제 중국이 시행하고 있는 인터넷의 무제한 검열, 자유로운 사용의 제약 및 이를 위한 기술적으로 구현한 "파놉티콘"적 요소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상당히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중국 MZ세대들의 행태는 푸코의 지적이 유효함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저자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간에 "스스로를 검열"하고, 다소 말랑말랑한 수위로만 다룬다고 말할 여지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저자와 관계없이 이 책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편향성"을 들고 싶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중국의 현 정치 상황과 관련된 기사들(특히 홍콩 "우산시위")을 보면 생각과 달리 중국 인민들이 사상적으로 잘 단련되어 있음에 놀랄 때가 있다. 게다가 연이은 시진핑의 예외적인 장기 집권과 COVID 19 펜데믹에서 드러난 중국 공산당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꽤나 견고한 지지율을 과시하고 있다. 이를 전제로 짐작해보면,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서방 세계의 "데카당스"를 드러내고 자국 우월주의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로 오독될 여지가 존재하지 않을까.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나 구 공산권 체제들이 그래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계가 처음부터 명백히 주어진 책이고, 저자의 의도대로만 읽혀지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일종의 "안전장치"가 보인다는 점은 나만의 지나친 해석이 아니길 바란다. 물론 이와 같은 몇몇의 지점들을 제외하고 보면, 이 책은 그 궁극적인 목적에 매우 충실한 텍스트임은 적시하고 싶다.

5. 나오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현재의 문제를 들여다보자. 전세계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이미 "고속성장"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경제 체제는 그 한계에 봉착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소위 거시 경제론에서 흔히 거른되는 "중진국의 함정" - 전체적 경제 성장률 저하 및 토입요소 대비 고용률 감소 - 을 비롯하여 급격한 노령화와 인구 감소 추이와 같은 구조적 한계 또한 관측되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가속화되고, 중산층의 위기로 읽혀지는 각종 징후들이 경제 기사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실 속에 놓인 대중들의 정서적 결핍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증상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폭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날로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 시점의 중국 인민들에게 "중용"의 미덕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의도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쇠락기에 에피쿠로스가 들고 나온 "쾌락론"과 같다고 할까. 삶에 있어 "행복"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고, "쾌락"의 그 지향점과 과도한 위험성을 세밀하게 분류하며, 인위적으로 주어진 쾌락의 정서가 독이 된다는 그 당시의 주장 말이다. 비단 이와 같은 지적은 그들뿐 아니라, 표류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대중들에게도 시사하는 지점이 크다고도 보인다. 더욱이 기존 텍스트에 거부감마져 보이는 현 세대의 대중들에게 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서는 입문서로서 이 책은 더욱 적절하다. 시대의 갈증이 지배하는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철학책이 나와 위로를 해준다면 고마운 시도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중용의 미덕을 충분히 이 책을 내놓은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작은 감사를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하루10분철학이필요한시간 #위저쥔 #알레 #철학책 #철학책추천 #철학 

#인문학책추천 #인문학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안광복추천 #서울대권장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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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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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58 : 생각의 요새, 고명섭 저, 2023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Ride for ruin...and the world's ending!...(중략)...Forth! Eoringas!"

(폐허뿐인...세상의 종말을 향해 달려라!...(중략)...진격하라! 에오를의 후예들이여!"

이 대사는 영화사상 최대의 전투씬으로 회자되는 "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에서 수세에 몰린 인간들의 요새(미나스티라스)를 위해 달려온 "로한"의 왕, 세오덴이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수없이 펼쳐진 모르도르군을 향해 일격의 돌진을 하며 내뱉은 말이다. 물욕과 야만으로 더럽혀진 인간들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각지에서 모든 영웅들과 요정들(엘프, 드워트 등)이 합심하여 거대한 전투를 벌이는 명장면이다. 백척간두의 미나스타리스를 외면하지 않고 달려온 세오덴은 이 전투에서 끝내 장렬히 전사하지만, 악의 세력을 굴복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위대한 여정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며 전설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된다.

요즘 나는 최근의 우리 사회와 세계의 흐름속에 위 장면이 자꾸 겹쳐져 보인다. 이미 어느덧 우리의 현실 속에 "전쟁"은 다가와 있고, 각 국의 정치 상황은 점차 극단으로 치닫기만 하며, 이를 반증하듯이 지구 기후마쳐 파멸의 전주곡을 우리에게 들려주는것 마냥 연일 뉴스 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이쯤에서 다음의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류 보편의 화합과 공생을 온데간데 없고 급기야 "지속가능성"이란 처절한 단어까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꺼내야만 했으며, 여기에 더해 가혹하게도 "COVID 19 펜데믹"마져 우리 모두의 삶을 움켜쥐고 송두리째 뒤흔들었지 않은가...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빛의 서광이 내려오듯이 우리는 결국 이 펜데믹을 극복하고, 그동안 우리를 둘러싼 어떤 것들에 대해 조금씩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 예외없이 드러워진 "양극화", 이에 편승한 "혐오의 정치"등 구 체제의 모순들이 드러나고,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의 연구와 테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이들의 개별적인 외향과 근원은 다르지만 나는 이들 모두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위의 질문이다. 아직은 누구도 어떤 것이 우리의 미래에 답을 줄거라고 성급히 예단할 수 없으며 여전히 논의가 진행중이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의 가슴 속에 위 질문이 공통적으로 자리잡았다는 데에 있다. 더이상 현 체제로는 이 산적한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없다는 데에 적어도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반증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이 "전간기"ㅇ[ 해당하는 시기에 과연 어떠한 담론이 자리를 잡는가이다. 그동안의 역사 흐름을 보면 이 전간기의 논의가 이후 수십년간의 역사 향방을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더욱 치열하게 우리는 생각해야만 하고, 끊임없이 토론하며 사유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점가나 온라인 컨텐츠 시장에서 폭발적으로 여러 담론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 양과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해서 일반 시민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들을 정리하고 비교적 적절하게 전달하는 "지식유통"의 역활이 최근들어 급격하게 주목받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생각의 요새"도 이러한 맥락안에서 읽혀져야 하는 텍스트인 것이다.

2. 저자의 의도...

본 책의 저자는 기존 철학자, 학자들의 사상이나 이 시대의 담론에 기여할만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사유와 실천을 꾸준히 조명하는 기자 출신의 작가이다. 또한 그동안 담론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서구 사상에 대비하여 동양 사상내지는 한국의 사상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독자들에게 그 소개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저서는 앞서 밝힌 전간기의 시대에 놓인 우리들에게, 보다 더 다양하게 지적 사유를 자극하는 인물들의 대표작들을 선별하여 제시해주는 일종의 선집의 성격을 띄고 있다. 크게 보아 6개의 대단원으로 구성되어, 각 장에는 저자가 생각하는 주제로 구성된 것이 엿보인다. 각 장에서 선별된 인물들과 대표작들은 짧은 호흡으로 명료하게 끝나는 글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장대한 구성을 따라가며 책의 막바지에 이르면, 어느덧 철학, 사회, 종교, 예술/과학을 넘어 역사적 통찰에 이르도록 하는 거대한 "통섭"의 흐름을 저자는 의도한듯이 보인다.

3. 인상적인 부분...

일단 이 책을 처음 본 독자들은 그 압도적 분량에 적잖이 당활할 수도 있겠다. 더욱이 저자의 의도대로 지적 사유의 미로속에서 방황하며 돌파구를 찾고자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이 책의 진가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발휘된다. 기자 출신답게 독자들의 호흡을 충분히 감안하고 쓴 문장들과 그 명료한 표현에 어느덧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 그 특유의 레토릭과 복잡한 서술 구조를 최대한 자제하고, 빠른 속도에 익숙한 현 세대들에게 충분히 배려한 서술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선정한 인물들의 위대함을 크게 잘 포착하여 전달하고 있으며, 향후 더 발전된 독서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도 효율적으로 인물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다. 이는 다년간의 필력을 짐작케하는 저자의 진면목이며, 기존 인문학 책들이 흔하게 저지르는 "구구절절한 설명"에 지친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준다.

또한 통섭을 방불케하는 주제간 연결 고리를 전개함에 있어, 매끄러운 진행과 유연한 사고의 매력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전문 분야의 학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지나친 "자기과시적 현학"이나 특유의 "아집"에 진절머리가 난 독자들도 다수일거라 사료되는 바인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꽤 적절치 못하게 느끼는 대목이다. 자신의 분야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 독선적인 "자만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100년간 우리는 이전 시대의 모든 인류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지식의 소비"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활자 매체를 넘어서 디지털 혁명으로 유래된 정보의 우위가 무너진 시대아닌가.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훨씬 거대한 지적 네트워크에 접속 가능하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수많은 정보를 취득하는데 익숙한 현 세대에게 학자의 오만함만큼 시대착오적인 것도 없을테니 말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이 휩쓸고 지나던 그 시대 지식인들이 오히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헤겔"의 지적을 다시한번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최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담기위한 전략으로 유연합을 택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싶다.(이는 기자 출신의 이력이 작용한 측면에서도 이해가능한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의도 중 가장 돋보이는 점은 특정 인물들을 선정하는 "기준"이라고 보인다. 저자가 직접 서문에서 밝히듯이 심연을 뒤흔드는 "경계의 사고"에 독자들을 과감히 끌여들일려는 노력의 흔적들을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이트"의 리처드 다이어드나 "공-산의 사유"로 파란을 일으킨 도나 해러웨이 같이 도발적인 지식인들도 기꺼이 지면을 할애하여 과감하게 소개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일반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백낙청 선생의 그 독특한 사상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룸으로써 결코 대한민국이 지적 담론의 장에서 더이상 변방으로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지적 사대주의에 열등감을 느끼기 쉬운 우리들에게, 충분히 우리의 것들도 "세계적"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듯이 말이다. 이번 펜데믹에서도 나타났듯이, 대한민국은 더이상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것처럼 작은 나라에 머물고 있지 않다. 동북아라는 위치와 크기라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서서히 서구 중심의 인식 체계에서 균형감을 찾아야 진짜 우리의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음을 저자 또한 동의할 것이다. 

4. 아쉬운 부분...


앞서 지적했듯이 이 책은 정말 다양한 인물들과 저작들을 담고 있다. 이는 저자의 통섭적인 사유의 지향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일부 독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대목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꾸준히 독서를 해오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인물들이 등장이 난무하고 다양한 분야의 담론에 흽쓸려 자칫 거대한 대양의 한복판에 갖힌 느낌마져 들 수도 있겠다는 우려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독자들을 위하여 일종의 "나침반"을 제시했으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이 든다.(물론 이러한 시도가 독자들에게 저자의 선입견을 강요하듯이 느껴질수도 있겠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든다.)

또한 어섯 개의 각 장으로 구성된 부분이 다소 모호하게 다가온다는 점이 눈에 띈다. 평소 다독을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저자의 숨은 의도를 읽고 그 흐름에 맞춰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서의 깊이가 깊지 않고 분야가 넓지 않다면 각 장의 의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선정한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소개와 글은 매우 짧은 흐름으로 되어 있어, 각 장의 의도를 모른다면 "파편화"된 지식들을 피상적으로만 느낄 소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각 장의 의도와 인물들의 선정 기준을 보다 더 명확히 드러냈으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 들어 각 장다마 따로 짧은 서문을 할애하여 앞서 지적한 저자의 의도를 제시하였어도 충분히 그 기능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럼으로써 저자의 의견을 강요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독자들이 저자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는 측면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이 책의 제목인 "요새"라는 단어에서 나는 자칫 "사고의 고착화"가 유래할수도 있다는 우려가 든다. 일찍이 프로이센의 계몽 군주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략의 일화를 예로 들어보자. 당시 사방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프로이센의 지리적 한계로 인해 기존 전략인 요새 위주의 "거점방어"를 기반으로 한 공격 전술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간파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과감한 결단은 내린다. 그것은 요새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기동전술"의 활용을 골자로 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에 기존의 장성들과 참모들은 큰 우려를 표명하며 반대하였지만 젊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직접 선두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꿋꿋히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요새에 의존하는 기존 전략은 우리 군을 스스로를 수동적으로만 행동하게끔 제약한다. 우리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유연함이 필요하고 그 핵심은 기동 전술이어야 한다."

이 주장은 이 책의 저자에게도 해주고 싶은 조언이다. 얼핏보면 요새라는 든든한 벽으로 자신의 사유의 힘을 강화시키는 좋은 수단이지만, 반대로 그 요새라는 벽 안에 스스로의 사유를 가두는 한계 또한 존재한다. 더욱이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듯이 사유의 유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요새라는 벽을 허물고 과감히 돌진하는 선두의 "지향점"을 독자에게 제시했으면 어떨까하는 제안을 해본다. 흔히들 말하는 "공감의 시대"에 맞춰 독자들을 위해 잘 차려진 식탁위로 인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으나, 모로도르군을 향해 돌진하는 세오덴의 모습을 원하는 독자들도 상당히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과도한 상대주의적 관점으로만 대한다면 정작 이 혼돈의 시대에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한 줄기 빛을 보여주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저자는 좀더 과감히 현실세계로 나아가 실천적으로 어떤 것들을 제시하여도 충분히 좋았을 것이다.

5. 나오며...

다시 반지의 제왕으로 돌아오자. 앞서 말했듯이 로한의 왕 세오덴은 자신이 이끄는 기병대와 연합군에 피가 끓어오르는 명연설 후 맹렬하게 돌격한다. 거침없는 돌격으로 힘입은 연합군은 치열한 전추 끝에 승리하지만, 세오덴은 장렬히 전사하며 다음의 말을 남긴다.

"이제 위대한 선조들의 전당에 들어가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다..."

이때, 세오덴의 얼굴에는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평온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장엄한 전투의 승리자로 기록되며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 장면이 책을 읽는 내 기억속에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토록 거대하고 장대한 사유의 군단을 통솔하고 배틀라인으로 일렬로 서게하며, 독자들에게 마치 거대한 구원군처럼 보이게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닐까... 물론 이렇게까지 느낄 수 있도록 치열하게 읽고, 토론하였으며 누구보다도 더 격렬히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접하며 준비했을 저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백척 간두의 미나스타리스 요새에 갖힌 우리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달려와 준 저자에게 심심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싶다. 분명 나와 같은 독자들은 저자가 위대한 사상의 선조들이 모셔진 전당으로 들어갈 자격이 충분히 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생각의요새 #고명섭 #교양인 #철학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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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가는 길 - 선진국 한국의 다음은 약속의 땅인가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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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57 : 이탈리아로 가는 길, 조귀동 저, 2023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위 문구는 아랍의 속담이자, 1974년에 개봉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대표작 제목이다. 파스빈더의 일생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짐작하듯이 이 영화는 개봉 당시부터 엄청난 논쟁과 찬사를 동시에 불러온 문제작이었다.(지금까지도 아예 이 제목이 관용구로서 자리잡을 정도이다.) 영화는 독일의 소외된 계층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흔히들 말하는 "만나서는 안되는 만남"을 시작하고, 주변의 끊임없는 편견과 무시로 인해 끝내는 파국에 이르는 치정극의 형식을 띄고 있다. 평범한 작품이라면 이 정도에서 고전으로 남지 않았으리라. 이 영화의 진면목은 여기서부터 발휘된다. 감독은 흔히들 짐작할 수 있듯이 외부로부터 오는 편견의 폭력성을 주목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지는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로써 "전후 독일 사회"에서 조차 도저히 근절하지 못했던, "일상의 나치즘"에 대한 문제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체주의에 반성을 통렬히 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새시작을 했다고 자부하던 독일 주류 사회조차도, 언제든 일상적으로 "타자화"의 폭력을 아무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시선에 많은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일종의 기시감(Deja-vu)을 느끼게 하는 이유라고 돌이켜 생각해 본다. 

2. 저자의 의도...

                 

본 책은 <한겨레 21>에 연재된 저자의 칼럼인 "조귀동의 경제유표"와 그 외의 다수의 논고들을 모아 완성한 작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 정치현실을 진단하고, 유사 국가들 (특히 여기서는 "이탈리아"를 거론한다.)과 비교 분석하며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특히나 그 시작점을 "노무현"으로 보고, 그 이후 비극적인 보수정권의 재등장, 이를 뒤집는 극적인 촛불 시민혁명으로 인한 정상화, 끝내 다시 반동된 극우정치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 정치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며 분석한다. 그리고 현재의 문제점을 최근 이탈리아의 그것과 대비하며 우리에게 문제의식을 던지고, 그 대안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자 한다.
3. 인상적인 부분...

 

먼저 이 책을 보면 전반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진단"이다. 책의 첫 문장부터 "한국은 어떠한 개혁도 바랄 수 없는 사회가 됐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노무현" 정신의 태동과 그 이후 몰락의 과정을 비교적 명료하게 관찰한다. 마치 미국 민주당 정권이 클린턴 대통령 이후 "중도"의 가치를 들고, 그 정치적 근간을 기존 노동계층아 아닌 과포장된 중산층으로 옮겨오면서 그 이후 정치적 아젠다를 상실해 버린 그 위기를 지적하듯이 말이다.(여기서 말하는 중산층이란 실제 "쁘띠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럼으로써 끝내 "트럼프"라는 정치적 괴물에게 미국의 모든 가치를 넘겨준 오류를 범하는 그 퇴행말이다. 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같은 서사구조로 다가왔으며, 그 결과 우리는 혼란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맹렬히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의 한 켠에는 정치적 이념(이데올로기보다는 현안 극복을 위한)이 사라져버린 현실에서 오직 남는 것은 "기술"뿐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적"을 상정하고, 그로써 정치적 우군을 규합하여 담론을 주도하여 대중 매체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을 기획하고, 그럼으로써 표결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그 퇴행적 기술말이다.(일찍이 이런 전략은 칼 슈미트의 논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덕분에 토론은 상실되고, 언론조차도 이해관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어 대중들은 신뢰하자 않으며 그 어떤 정치적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을 비교적 정확하고 간결하게 진단하는 대목은 가장 이 책의 묘미이다.

둘째로, 월트 로스토우의 "국가발전론"을 비롯, 새뮤얼 헌팅턴의 "정치발전론"에 입각하여 표면적 정치현실의 위기가 "경제문제"라는 하부구조에 기대어 있다는 논지를 적극 차용하여 전개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러한 시도는 현재 "먹고사니즘"으로 이해되는 단순한 표어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난 90년대에 촉발된 양극체제의 붕괴(사회주의 몰락)로 한 쪽의 일방적 승리가 선언이 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단극체제의 폭정을 제어할 구실이 부재했었음에 기인한다는 많은 학자들의 진단에 합류하는 합리성을 띄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근본에는 이른바 "오일쇼크"로 대비되는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시도였고, 결국 우리가 목격했듯이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기점으로 그 종말을 맞이한다. 그 이후 현개까지 그 어떤 경제 담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이리저리 표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어쩌면 지그문크 바우만이 지적한 "유동하는 사회"의 근간에는 이러한 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현 정치체제의 위기의 근본에는 바로 이와 같은 "경제체제의 모순"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앞서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이유로 야기된 "불안감"이 결국 민주정이란 "영혼"을 잠식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에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게다가 경제구조의 하위 요소인 "인구구조" 또한 언급하여 보다 더 설득력있게 이 위기를 진단하는데 보태어, 결국 노무현 정권의 최대 오점인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인한 불평등의 극대화 및 고착화라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된 논거인 "이탈리아"와 비교 대목은 꽤나 신선했다. 흔히들 한국의 미래를 일본에 빗대어 언급하고, 실제로도 현재의 대한민국 발전사에 일본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롤모델로 자리잡아온 현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의 인식을 뒤집고 다소 생뚱맞게 저 멀리 유럽의 이탈리아를 거로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두 나라의 사회구조적 유사성을 들어서 선택하지 않았나 짐작이 간다. 하부 구조인 경제구조에서 상당히 유사성이 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정치적 현실의 전개 양상이 표면적 이유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그 특유의 국민성에 대한 교집합, 고유의 독자 문화에 대한 열광 및 자부심, 모두가 느끼는 대중들의 기질적 유사성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탈리아를 선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추측이 든다.

4. 아쉬운 부분...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드는 첫번째 아쉬움은 저자의 "진단"에는 충분히 동의하나, "처방"은 부재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특히 유럽) 다수 저서와 뉴스들,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진보"쪽으로 분류하는 미디어에서 누누히 지적해온 것들의 동어반복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본 주장이 차별화되려면 그 진단과 별개로 구체적인 "처방"이 나와야만 유효할 것인데, 본작에서는 그 임팩트가 약해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독자들을 공감케 하는 제데로 된 처방이 나와야 앞서 전대한 훌륭한 진단이 더욱 빛을 발하며 대중들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오게 되거늘, 현재의 모습은 다소 힘이 빠지는 모양새이니 더욱 그렇다.(물론 일개 지식인으로써의 위치로 인한 한계와 또다른 논란의 부담을 피하고자 함이 의도되어 있을수도 있으나, 그 마지막 개선책의 선명성이 더욱 아쉬움을 가져온다.)

또한 대한민국 정치 위기의 현실과 이탈리아의 그것과의 비교분석은 흥미로운 대목이긴 하나, 한계점 또한 명백히 보인다. 먼저 필자가 주장한 하부구조인 경제구조의 유사성도 얼핏보면 유효한 것처엄 보이지만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이탈리아의 경제 구조는 외견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유로화"라는 단일체제에 묶여있어 우리와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한국의 대외적 요인은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시장의 흐름속에 있고 글로벌 수출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인데 반해 이탈리아는 유럽이라는 단일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보장되고, 더군다나 유로화는 기축통화이므로 그 세부적인 디테일에서 기조의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현재 저자가 지적하는 유사성은 좁은 영역에서의 수치상의 유사함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또한 남북이 갈등하는 구조인 이탈리아와 아예 영호남간의 대치하는 한반도의 현실이 겹쳐보일 수도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시민들의 의식구조가 많이 다른 관계로 대한민국이 이탈리아의 길을 고대로 따라갈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주장은 간극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신선하다고 할 수 있으나, 글로써의 한계를 태생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존 유럽정치의 흐름과 이탈리아의 정치 경제적 역사를 어느정도 파악한 나와 같은 독자라면 저자의 이탈리아와의 비교하는 대목의 진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아쉽게도 일반 대중 독자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가 취할 수 있는 책의 구조는 어딘가에서 챕터를 따로 할애하여 이를 설명하는 대목들을 처리하고, 이후에 한국의 현실로 넘어와서 분석하는 구조였다면, 아마도 지금 책의 분량으로는 힘들고, 두꺼운 학술적인 면모가 강조된 책으로 오인받아 대중성을  떨어뜨리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 비교할 근거를 제시할 대목을 생략하고 간다면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구조는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글의 전체적인 구조를 유기적으로 탄탄하게 구성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보이며, 저자 또한 고민했을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과감한 시도를 했고, 여기에는 충분히 공감대가 개인적으로 형성되었다. 

5. 나오며...

우리는 분명 "불안"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 징후는 전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퍼져 내가 일일히 이 글에서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남는 의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 불안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나는 섣불리 어떤 것을 제시하기 힘들다. 현대의 복잡성은 좋은 의도로도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합의 과정 또한 험난한 가운데 모두가 "선"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온전히 제도로서 정착되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써 "존엄"에 대한 마지막 신뢰가 그것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괴로운 현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타신의 존엄성을 짓밟는 결정을 내린다면(최소한 동조한다면) 어찌 인간으로써 그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겠는가. 한나 아렌트도 지적했듯이 "생각없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악마의 죄를 저지를 수 있다"라는 지난 세기의 처참한 교훈을 벌써 잊어버리면 안된다. 나는 다시한번 인간의 역사에서 양보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늘 말한다. 그것만이 우리와 "동물"을 구분짓는 유일한 점이므로... 그러한 교훈의 시작은 우리 주변의 문제인식에서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나와 같은 의도와 문제의식으로 이 글을 암울한 현실속에 내놓았다고 믿으며 저자의 노고에 공감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이탈리아로가는길 #조귀동 #생각의힘 #한국정치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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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유기, 근대 한국인의 첫 중국 여행기
이병헌 지음, 김태희 외 옮김 / 빈빈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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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56 : 중화유기 근대 한국인의 첫 중국 여행기, 이병현 저, 2023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강호의 도의(度義)가 땅에 떨어졌다..."

이 대사는 그 유명한 영화 "영웅본색"의 한 대사이다. 이 단호한 선언과도 같은 문구는 다음의 극중 흐름에서 나온다. 등장인물이 몸담던 범죄조직에서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상황이 조성되고, 기존의 권력구조가 또다른 권력에 의해 해체되는 가운데 극중 인물들은 다음의 세 가지 유형을 보인다. 

        


첫째로, "변절하는" 유형이다. 영화내에서는 담성(이자웅 분)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일찍 감지하고 재빨이 그 안에서 개인의 영달을 꾀하며, 기존 세력의 제거를 도모한다. 둘째로, "저항하는" 유형이다. 이 영화의 진주인공에 해당하는 소마(주윤발 분)는 강건하지만 낭만적 인물로 이 불의에 분노하며, 그 유명한 "풍림각의 복수"장면을 보이며 배신자들을 응징한다. (이 과정에서 본인도 평생 불구로 살아야만 하는 큰 부상을 입게된다.) 마지막으로 "순응하거나 도피하는" 유형이다. 외견상 영화의 주인공인 송자호(적룡 분)가 이 유형에 해당하며 극중에서는 음모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회피는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며, 이 불의에도 조직생활 자체에 대한 회의와 함께 출소하면서 과거 청산을 위해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온다.

이와 같은 서사 구조는 역사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침탈로 인해 결국 한일합방에 이르렀을 때,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유형 중 하나를 선택한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의 저자린 진암 이병현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의 저자인 이병형 선생은 호는 진암이고, 경남 함양 출신의 유생이다. 당시 영남유림의 곽종석에게 사사받는 재야 유림으로써, 그 입지를 굳힐 뻔하나 당대 청나라의 강유위(캉 유웨이)의 개화사상을 접하고 개화사상가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외견적 목적인 중국 방문 또한 그 강유위의 사상을 보다 더 근거리에서 접하고, 궁극적으로 "공교"(유교의 종교 개혁 운동에 해당) 사상을 조선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야망을 실현시키고자 함이었다. 비록 후에 그 뜻이 보수 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쳐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으나, 망해버린 한 나라의 지식인으로써 유학을 근본 사상으로 하여 난세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활동은 평생동안 일관되게 주장해옴이 다수의 저서를 통해 남겨져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사상적 근본에 해당하는 "공교"와 그 이론적 종주국인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함으로 보인다.

3. 인상적인 부분...

앞서 밝혔듯이 필자는 "유교의 종교화" 즉 "공교"를 꿈꾸는 원대한 이상향을 근간으로, 중국 본토, 공가의 고장에서 공자나 기타 유교의 성인들에 대한 제례와 의식들에 대해 매우 세밀한 서사를 하고 있다. 어쩌면 종교적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 세부적인 절차와 의미 부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 유관 학문 분야에서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또한, 조선이 일본에 의해 합병이 되어버리고, 중국마져 서양 각국의 침탈에 신음하던 그 때에, 혼란함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조선에서 만연하고 있던 배청사상의 비판과 당대의 만연한 구악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조선 풍수설"로 인한 묘지 남용으로 말미암은 토지 사용의 왜곡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다던지,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북방에 대한 힙일설에 공감하는 대목이 그런 예이다.

마지막으로 이미 합병된 조선이 슬픈 현실에 대해 나름의 한계를 인지하고, 근대 서구 문물과 문화에 대한 관심 (단, 적극적인 도입은 아닌것으로 보인다.)에 대한 지적도 의미가 있다. 만주지방의 경제적 침탈과 붕괴는 "금본위제"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는 근대적 화폐론을 거론하는 대목도 엿보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는다던지, 또는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을 짐작케하는 내용을 거론하는 장면은 이례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아마도 청나라로부터 전래된 서구 과학 문물에 대한 정보를 접해봤다는 확실한 증거로 보인다.

4. 아쉬운 부분...

서문의 소개글에서는 언급되지만 본 저서에는 많이 서술되지 않는 사실은, 이병현 선생이 서구의 "근대국가론"과 칸트, 루소 등 "계몽철학"도 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책에서 명백히 서술되는 "유교우위론"과 "공교"에 대한 언급에서 불가피한 구시대적 유학자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근대 서구 철학의 근본 명제와 이제껏 자신이 받아들이던 유학의 그것들이 상충하는 부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사료되며, 결국 본인의 선택은 후자의 우위론을 설파하는데 주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서구에서 종교과 철학이 분리되고, 정치에 있어 국가의 기본이념이 "종교"가 아닌 "시민의식"에 입각한 "법"에 근거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이는 곧 루소나 칸트의 계몽철학의 근간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그동안 믿어왔던 철학이자 이념으로서의 유교 사상에 입각한 지식 체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종교와 철학이 합일될 것이라는 학문적 예측 오류도 범한다.)

또한 지주가 둥글다는 것까지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지동설과 공전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도 자기 고백적으로 나온다. 이는 서구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합리적 명제들이 어떻게 철학과 분리되었고, 객관화(또는 실체화)되어 감에 따라 하나의 학문 체계로 자리잡았는가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즉, 서구 근대 문물의 우월성과 특이함에 관심은 보이되, 그 근간을 보지 못했다는 면에서 유학을 맹신하는 구시대적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내며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필생의 꿈인 "공교"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머지, 대부분의 근대적 국가에서 당연시되던 "재정분리"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한 점도 눈에 띈다. 세속의 종교가 한 국가의 사회적 배경이 되는 것과 그 종교가 특정 국가의 시스템에 완전히 구조화되는 것은 다른 문제로 봐야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서구권에서는 근대 국가 이전의 국가론에서나 볼 법한 주장에 지나지 않고, 이미 때는 계몽사회를 넘어 "발전국가"의 모토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점임에도, 본인이 인지하는 그 시대적 감각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 당대 이 정도 유림의 지식인들의 표본이라고 이 저자를 설정한다면 그 시대적 수준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대비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로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의 그것돠는 크게 보아 백년, 작게 보아도 최소 수십년 이상의 차이를 보이니, 그 시대의 흐름을 조선이 따라잡지 못한 것은 현재 우리들에게 뼈아픈 대목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5. 나오며...

이 여행기를 다 읽고 나서 나에게는 이 책의 제목은 "공교로의 애가" (내지는 회귀)라는 제목이 적절하지 않은가라는 인상을 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세 부류의 유형 중, 이병현 선생은 자신의 세계로 침착해 들어가 끝내 퇴보하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퇴보는 자신이 원한 바도 아니었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유교 근본주의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아닐까. 또한 본인은 여행 중 넉넉치 못함을 가끔 호소하나, 그 당시 생계와 관련없이 이역만리를 몇 차례에 걸쳐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 대중에 비해 삶의 여유가 최소한 보장된 부분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만일 이 짐작을 긍정한다면, "저항하지 않고" 이와 같은 애가에 가까운 기록만 남겼다는 소극적 회피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유학의 마지막 현세에 대해 세밀한 기록의 기여 부분은 인정할만하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1차 사료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인다. 오늘날 시대는 완전히 근본적으로 변하였고, 세상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넘나드는 이 시기에 과거의 우리 모습을 소규모로나마 남겼다는 의의로 이 작품을 이해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중화유기 #이병현 #빈빈책방 #근대 #중국여행기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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