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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지만 나는 거의 대부분을 작품으로 만나왔다. 열렬히 사랑해서 단 한번 만나기를 소망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를 아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촛불 집회가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천천히 흘러가는 물처럼 사람들이 흘러가는데 남편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돌아봤더니 거기에 김훈이 있었다.
때로는 tv로, 거의 대부분은 책으로 만났던 그를 그야말로 스쳐지나 가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갑자기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나에게는 좀더 깊게 다가왔다.
반대로 젊은 시인 김사이는 시로 만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만났다. 스승을 만나는 자리였는데, ‘사이’라는 필명이 좋았다. 헤어졌을 때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이 안날만큼 말 수가 적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사람을 알고 나니 그녀의 시들이 그녀의 목소리로 읽혔다. 시 곳곳에 녹아있는 그녀의 여러 감정들이 훨씬 도드라져 내게 다가왔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나는 어느 책이든 ‘작가의 말’을 굉장히 열심히 들여다본다. 중간 중간에도 다시 작가의 말을 읽는 경우가 많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작가와 작품이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보니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작품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꽤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작가의 말은 나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더듬이를 쫙 펴고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은 작품을 거둬내고 작가와 독자가 대면하는 시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는 독자로서 작가를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색과 경험을 공들여 적은 산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잡문’ 이어서 밀도 있는 만남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작품을 빼고 난 생활인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날 수는 있었다.
오로지 나의 게으름 탓이지만 우리나라에 알려진 그의 이름에 비해 나는 그의 작품을 성실하게 읽지 못했다. 일본 문학은 오히려 어린이 문학이나 만화가 더 자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아는 일본의 문학은 바쇼의 하이쿠가 전부라고 느낄 만큼 빈약하다. 그러니 내게 일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 선수다. 그런데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는, 한국의 독자는 그를 잘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은 알지 못하는 작가를 먼저 만나는 일로써 내게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하루키는
①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
② 그가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 있다는 것
③ 그가 나이답게 여유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④ 그가 한국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 등이다.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은 “자기란 무엇인가”에서 찾았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그는 소설, 혹은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가도 임무를 다하고, 독자도 그 가설, 이야기를 다 읽고 덮는 순간, 별로 달라진 것 없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소설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답이나 결말이 없어서 허탈한 독자도 있겠지만 소설가는 가설을 보여줄 뿐, 독자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또 다른 해답이나 결말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가설, 이야기를 찾아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 부분을 ‘계속성’이라고 말한다. 옴진리교의 폐쇄성을 보면 하나의 가설, 이야기가 하나의 진리 안에 닫혀있을 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있다.
그는 소설, 이야기가 전부라고 말하지 않고 삶의 계속성과 함께 가는 생활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 이어짐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작가와 소설, 독자는 그렇게 오래도록 생활 곳곳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옴진리교 문제를 취재하면서 하루키는 그 날,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목했다고 했다. 작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개별적 존재들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옴진리교가 개별적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교리, 하나의 생각에 개별적 존재들을 가두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인식에 깊이 공감한다. 소설가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실제로 번갈아 발을 넣어보게 할 뿐이다.” 독자와 작가는 그 “무언가”를 찾아, ‘계속’. 할 뿐이다.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쓴 글에서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같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소설을 전부라고 말하지 않아서 좋다.
‘굴튀김 이야기’로 자기 이야기를 써보라는 충고는 나로서는 박수로 환영한다. 내가 누구라고 구구절절 쓰느니 이처럼 맛있는 글로 쓰는 것이 훨씬 풍요로운 자기 표현이다. 글에는 그 사람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면접관이라면, 막 튀겨낸 굴튀김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 사람의 귀라면 그가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수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겠지. 그 소리를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로 듣는 사람이 회사의 직원이 된다면 그 직원은 자기 존재로 옆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점수를 팍팍 줄 것이다. 당신이라면 사람이 좀스럽다고 볼까? 그럴수도!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있다고 생각한 것은 ‘째즈’를 비롯한 그의 음악 이야기 때문이다. 소설에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참 난감하다. 그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마음을 싣기가 어려워서 괴롭다. 소리라는 공간성 때문에 그림이라면 어렵게라도 가능할 상상조차 힘들다. 그래서 하루키가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하고 쓴 그의 음악이야기는 이 막막한 시간이 언제 끝나려나 무릎을 꿇고 법문을 듣는 미욱한 중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하루키가 태평양 한 가운데 살면서 우리 쪽, 일본을 기준으로 서쪽이 아니라 동쪽 그러니까 미국을 향해 온 몸을 돌려 세우고 있구나 생각해 보았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문학도!
그를 세계 시민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아주 약간 기분이 상해서 그를 미국 시민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가 그건 쫌 심하지 싶어서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의 글에서 일본적인 냄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그를 편안하게 생각한 것은 이미 우리 사이에도 미국이라는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스며 있기 때문일테니 말이다.
읽기에 조금은 편안한 이런 글의 매력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란 말과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약간은 풀어져도 되는 이런 글에서 평소 하던 대로 쓰는 말을 글로 읽는 느낌은 색다르다. 각 장마다 그 글을 싣는 이유라던가, 글의 출처, 혹은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들은 하루키의 육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각 각의 글들에 대해 무척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 있어서 본문보다 그 말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나이를 보니 호들갑 떨 것도 없고, 조바심 낼 나이도 아니고 살아온 생의 길이가 깊이로 더해져서 오로지 그 나이가 되어서야 나올 여유가 느껴졌다. 남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당연하게도!
한 권의 책을 한 자리에 앉아서 다 읽어내는 일이 어렵다 보니 맥이 뚝뚝 끊기는 독서를 할 수 밖에 없다. 방학이니 때 맞춰 아이 밥도 차려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먼지도 털어야 하고, 돌아서면 저녁해야 하고. 식구들이 돌아오고,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이 상황의 끝에 따라 또 다양하게 읽힌다. 더욱이 이 책처럼 이러저러한 글들을 모았다고 하는 책은 집중하기가 더 곤란하다.
어느 맥락에서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느 순간 나는 하루키가 꽤 차가운 이성(異性)으로 느껴졌다. 도무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냉정할 만큼 나(한국의 독자, 혹은 한국의 문학)에 대해 말이 없었다. 이 두꺼운 잡문집에는 <도넛을 베어 먹으며>가 유일하다. 그 글을 쓴 계기도 그가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일본인으로 2위에 뽑혔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을 몰라주는 매정한 남자라고 느낀 것은 한국 독자들이 그를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가 흡족한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몇 권의 책에도 한국어 서문이라거나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없다.
급기야 <잭 런던과 틀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그가 한국 문학을 어떻게 볼까 하는데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에서 잭 런던이 러일 전쟁 중에 한반도 북부의 벽촌에 묵었던 적이 있었단다. 마을 사람들이 잭 런던을 보자고 해서 조선의 외딴 시골마을에까지 자기가 알려졌다고 생각, 감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잭 런던이 아니라 잭 런던의 틀니를 보여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이쿠! 아버지!
하루키는 어빙 스톤이 쓴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잭 런던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로구나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틀니를 보여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제 틀니를 삼십분씩이나 뺐다 끼웠다 하면서 잭 런던은 “인간이 제아무리 사력을 다해 뭔가를 추구해도 그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좀처럼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루키는 그가 교훈을 터득하는 방식에서 감탄을 한다. 누구나 잭 런던처럼 무식한(이건 내 생각이다) 이방의 사람들 앞에서 틀니를 뺐다 끼웠다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하루키가 잭 런던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도넛> 말고 한국과 관련한 글은 잭 런던과 틀니와 관련한 이글이 전부다. 특별히 이 대목을 언급하며 문제 삼은 그의 생각 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느 만큼일까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우리가 접한 외국문학은 초기에는 일본 번역물을 다시 번역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화 자체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데, 혹시 이런 흐름과 그의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이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편협하고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그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만 한국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토록 그의 문학에 열렬히 환호를 하고 독자를 자처하는데도 한국에 한번 와보지도 않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다. 계획이 있거나 올 수도 있지만 지금 막 그의 <잡문집>을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강렬하다.
물론 그가 와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좋아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어야 하고, 한국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또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는 세계시민으로 인정받는 소설가이니까!
이 책을 통해 그를 다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해도 그의 육성과 맨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그의 말대로 독자는 책을 덮는 순간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의 느낌 혹은 나의 변화가 중요하다. 철저하게 논픽션의 세계였지만 그 또한 특별한 한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물론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고 나 또한 특별한 개인이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그 앞에서는 의미 없는 자기 방어일 뿐이다. 그가 소설가로서 폐쇄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소설이 앞으로 계속되는 한 그의 독자도 계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그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가다.
다만 나는 한걸음 다가가기 보다는 반걸음 물러났다. 애초에 준 마음이 없으니 이럴 것 까지 없잖아 할 수도 있건만 그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등만 바라본 것 같아 아주 약간 상처받았다. 거절당한 친구 대신 내가 뭐라 하는 꼴이다. 괜히 나서지 말라는 소리가 마구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