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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칼과 황홀>을 며칠에 걸쳐 띄엄 띄엄 읽었다. ‘띄엄 띄엄’ 읽었다는 것은 아마 다른 일을 좀 미루고서라도 이 책에 매달리게 할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설거지 하면서 그냥 흘려보낸 물이 몇 바가지는 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확한 연유를 모르겠다. 이 글을 마무리할 때 쯤이면 생각이 떠오를라나.
‘성석제의 음식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나는 깊게 읽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속도마저 느린 독자다. 1부와 2부를 넘어가서는 심지어 다른 책을 끼워 읽는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3부에서는 주로 술 이야기를 해서 그나마 흐리멍텅 해지던 눈이 조금 밝아지고 더러 입맛이 다셔지기도 했다. 그리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마치 막걸리 원주라도 마신 것처럼 얼얼해졌다. 이십여 년 년 전 대낮에 어느 허름한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 대신 빼갈을 먹었을 때처럼. 감동 때문이 아니라 3부를 거의 채운 술 이야기 때문에.
이 책은 꽤 두툼하다. 책갈피마다 여행과 여행지에서 먹었던 잊지 못할 음식과 술에 관한 얘기가 잔뜩 들어있어 어느 순간에는 황홀하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 미국, 칠레를 오고가며 머물렀던 곳과 그곳에서 먹었던 그 곳의 일상의 음식들은 가보지 못한 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아, 그 맥주 한 모금 마셔봤으면 하게 만든다.
물론 내 나라의 음식과 사람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석제가 누구던가. 빼어난 글 솜씨는 최고 숙수가 휘두르는 칼의 솜씨라고 멋을 부려 표현할 수 있다. 유머와 재치가 적당히 버무려져 한 맛 더했지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 되지 않았던 나의 여행을 되돌아 보았다. 나의 여행은 몇 년에 한번 이루어질까 말까다. 그것도 겁 많은 자라서 현지 곳곳을 탐색하는 일은 애초에 텄고 숙소에 들어가면 다음날 까지 출입을 안 할 ‘지경에 이르렀기에, 나의 여행은 여행이라 말하기에 다소 부끄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돌아오면 본전 생각에 한동안 입맛만 다셔야한다. 그러니 내 생각으로는 여행하는 자라면 돈보다 두둑한 배짱을 앞서 준비해야할 목록이지 싶다.
어찌되었든 그나마 기억에 남아 더러 추억에 잠기게 하는 여행에는 본 것 보다 먹은 것이 더 오래 남아 있었다. 여수에서 먹었던 돌산갓김치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맺히고 코끝이 그야말로 쨍하게 매워온다. 일본 어느 거리에서 먹었던 길거리표 라멘은 아들과 내가 두고 두고 떠올릴 맛이 되었다. 다시 가고 싶은 나라에 일본이 끼는 것은 바로 그 라멘 때문이다. 하긴 가 본 나라가 다섯 손가락이 다 채워지지 못하니 선택에 여지가 없긴 하다만.
본 것 보다 먹은 것이 더 오래 각인되는 건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지칠대로 지친 몸이 다음날 다시 여행을 하도록 생명의 기를 넣어주는 음식이니 여행의 마침표는 음식을 먹음으로서 찍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낯선 곳으로의 초대에 응하고 싶기 때문이다. 독자는 저자의 여행기에 몸을 싣는 것으로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런 여행의 장점은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어도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칼과 황홀>을 읽는 동안 아주 잠깐 잠깐 그만 내려가고 싶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띄엄 띄엄’ 읽은 이유를 거칠게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음식 이야기라고 해서 나는 칼의 주인 ‘숙수’의 모습을 기대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음식을 만드는 장인(匠人)으로서의 숙수, 그의 땀과 비경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을라나 싶었는데 숙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열렬히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칼의 주인 숙수는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여행이 아니었다.
또 하나, 저자의 여행이 그야말로 사적인 것이라서 차마 그 여행에 동참하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그가 먹은 그 음식의 맛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다.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 내가 먹은 음식의 맛이 아닐까. 그건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여행이다. 저자는 1박2일처럼 놀러 오시라고 청하지 않는다. 이름난 곳이 아니라서 언제 저기 한 번 가봐야겠다는 욕망이 아예 차단된다. 그날, 그 때 그 시간, 그가 아니면 그 공간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곳이 된다. 그러니 그의 음식 이야기, 술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람 이야기에 나를 보태기가 어색하였다.
책을 읽는 행위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라고 했으나 <칼과 황홀>을 읽는 동안 나는 어째 듣기만 한 것 같아 좀 피곤하다. 끼어들어 생각이라도 보태야 대화가 될텐데 그럴 여지가 없다. 스승의 면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승의 세계는 대체 어디까지 뻗쳐있는가 궁금해 하던 어느 날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대개의 문제는 일상의 독자인 내게 있다. 도대체 이 촌티를 나는 언제쯤 벗어버릴 것인가.
저자의 말과 행위와 그의 일상(그가 만나는 사람, 그가 하는 여행, 그가 마시는 술)은 스무살, 처음 대처로 나와 부르조아와 쁘띠 부르조아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허무함을 닮았다.
쓸 수 있는 자와 읽기만 해야 하는 자의 단절을 나는 <칼과 황홀>을 읽으며 아주 잠깐 느껴야 했다. 마치 스윽, 칼날에 손이 베듯이 그런 느낌으로.
당대의 ‘술꾼’을 다룬 책에 성석제의 이름이 오른 광고를 본 것 같다. <칼과 황홀>에서 나는 충분히 그가 자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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