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예술가들 - 스캔들로 보는 예술사
추명희.정은주 지음 / 42미디어콘텐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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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에도 그렇지만 예술가들은 매우 자주, 같은 시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기행을 저지르곤 합니다. 예술가로서의 업적은 업적대로 따로 평가해야 하지만, 이러한 기행들은 우리들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 좀 삼가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언행만 좀 반듯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지만 그러한 행동과 천재적인 예술적 기질은 애초에 그 본성상 둘로 분리되지 않는 것들이 많기에 우리는 더 흥미로운 시선으로 예술가들의 행적을 검토하며 분석하고 또 비판하곤 하죠.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우리가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서도 배운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헥토르는 운명에 저항하며 신의 아들과 (질 걸 뻔히 알면서도) 일합을 겨룬 영웅이었으나, 프랑스식으로 발음하여 h 사운드가 나지 않는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역시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마리 플례옐과 운명에 저항하지 않는 비극적 사랑에 빠집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오즈는 기어이 이 여성을 놓치고 마는데, 더 놀라운 건 피아노 제작사의 나이 많은 대표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파리와 로마라는 먼 거리를 사이에 두었다는 조건은 아마 치명적인 장벽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건 이 피아니스트가 끝내 사장님하고도 파국을 맞고 그 유명한 바람둥이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와 또 불륜 행각을 벌였다는 건데 아무리 자유분방한 기준이 통용되던 파리라고는 하지만 이 사건이 얼마나 당대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가뜩이나 이 분야에서 유명(?)했던 리스트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나 큰 비난이 플레옐을 향해 쏟아졌겠습니까. 책 저자께서는 "아마 플례옐도 처음에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라며 우호적인 추측을 시도합니다만(또 독자로서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여튼 결과가 그리 나왔으니 설령 노력을 했다 해도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한 가정을 파탄냈다면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비판 받아야 마땅합니다만 이런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유독 자신에게만 너그러운 도덕적 기준을 적용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샤를 구노는 그 대표작만 들어 보면 한없이 경건한 삶을 살았을 듯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스캔들은 충격을 넘어 경악 수준입니다. 귀족 사회에서 어떤 귀부인이 천재 음악가를 후원하는 건 수백 년도 넘은 전통이고, 또 간혹 가다가 이 둘이 불륜에 빠지는 것도 드물지만은 않게 보는 사건입니다만 여튼 영국의 귀족은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혈통을 따지고, 그 족보도 더 믿을 만합니다. 또 당시는 빅토리아 연간이기도 했는데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조지나 웰던 같은 이가 작곡가와 불륜에 빠진 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죠. "어떻게 프랑스 남자를 믿을 수 있었단 말인가?(p93)" 구노는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프랑스 남자 전체의 명성(가뜩이나 좋지도 않았던)에 먹칠을 한 장본인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감상하기엔 좋지만 연주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곡이 많습니다. 그 시계태엽처럼 정확한 곡 진행을 듣자면 마치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절도 있는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그는 고모의 딸과 사랑에 빠진, 어느 나라에서나 대단히 위험하고 흉하게까지 보는 사랑에 빠진 위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결혼을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를 지배하던 군주의 특별 허가(p140)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차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수장이기도 했기 때문인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황제 교황주의의 일환이기도 하죠. 여튼 이 커플은 어렵게 맺어진 만큼 오랜 동안 사랑을 이어갔는데 이후 러시아 제정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전복된 후엔 미국으로 망명해서까지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은 아마 경직된 공산주의 제체 하에서는 불온시되어 널리 인정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드뷔시는 그 특유의 신비로운 선율로 오늘날에도 폭 넓은 사랑을 받는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이 사람도 여러 여인과 맺어져 그 나름 화려하게 이어진 애정 행각으로 유명한데, 맺어진 여인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운명에 빠졌다는 것도 독특합니다. 하긴 남자가 이처럼 정신 없이 여성을 갈아치우는데 어떻게 그 여성들이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게도 동시대에 산 다빈치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애정사라는 이슈에 대해 무감각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괴퍅한 성미도 남달랐는데요. 책에 따르면 만년에 비토리아 콜론나라는 여성을 만난 후부터는 만많이 누그러진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천재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외골수로 몰두하는 경향이 있어서, 심지어 여성 일반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갖고 상례에 벗어난 태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클로드 모네는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와 함께 인상파의 대표로 꼽히는 천재 화가이며 스릴러 좋아하시는 분은 아마 <검은 수련> 같은 작품을 기억할 만하며 저도 5년 전에 문충에서 이벤트에 당첨되어 그 서평도 쓴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아주 드물게도 클로드 모네의 사랑은 비록 그 발전 과정이 험난하기는 했어도 불륜은커녕 모든 남자가 본받아야 할 아주 모범적인 패턴입니다. 인상파라는 건 세계 회화사에 남을 파격이었는데, 그 대표자 중 한 사람인 모네의 애정사는 그만큼 정격이 또 없었으니 역설적입니다.


질병 때문에 일찍 죽어서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천재로는 이 책에 로트렉과 에곤 실레 등의 이야기가 더 실려 있습니다. 이들의 사랑 역시 비난은커녕 남들을 숙연하게 만들 정도의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앤디 워홀이나 피카소 같은 이의 애정 행각은 참으로 현란하죠. 이처럼 예술가들의 애정 전선은 그 추구한 예술세계의 노선과 그 결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동시대인들이 애정 문제에 있어 어디까지 그 일탈을 참아 주느냐의 문제도 반드시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닙니다. 아무튼 천재의 재능과 실제 삶이 비슷한 길을 걷기도 하지만, 반대로 극와 극의 발산을 보이는 것도 참으로 재미있는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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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 일본 제국의 기초를 닦다 살림지식총서 584
박진우 지음 / 살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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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이란 단어에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겠으나 책 제목이 원래 그리 된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혁신과 시대 계몽의 아이콘으로 이 사람을 꼽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주곤 합니다. 아마도 소위 명치 유신 당시 일본이 근대화의 롤모델로 꼽은 나라가 프랑스였고(이후 독일로 바뀜) 이 때문에 일본의 법제를 비롯하여 많은 것이 프랑스 제도가 그 원형입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인들도 자신을 따라하는 일본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호감을 느꼈고, 그 혁신의 기간 동안 군주로 재위한 이가 저 메이지 덴노이다 보니 그런 풍조가 생긴 듯합니다. 자크 아탈리의 책 <등대>가 2013년 10월 청림출판에서 번역되어 나왔는데, 한국어 번역본에는 없지만 원서에는 메이지 덴노가 저 인물들 중에 포함되었더랬습니다. ( http://blog.yes24.com/document/7466573 )


친일파 이광수가 쓴 평전 <도산 안창호>(2015. 6. 30에 책프 11기 26주차에 이 책을 글감 삼아 제가 남긴 서평이 있습니다) 를 보면, 안 도산이 서거할 당시 큰 소리로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라 외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목인이라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저 메이지 덴노의 이름입니다. 그 아들 다이쇼 덴노의 이름은 가인, 그 손자 쇼와 덴노의 이름은 유인인데 이걸 일본식으로 읽으면 히로히토가 되는 거죠. 자칭 만세일계라 하는 일본 군주들의 이름자(휘)는 이처럼 어질 인(仁)으로 돌림자 비슷하게 내려오는 전통이 있습니다. 저는 저 도산 평전을 중학생 때 읽었는데, 어떤 설명이나 각주가 없어서 저희 부친에게 질문을 해서 겨우 "목인"이 무슨 뜻인지 알아냈던 기억이 있네요. 


저희 부친은 더불어, 그 아들 다이쇼 덴노가 좀 모자란 인간이라는 평판이 파다해서, 모두가 허리 굽혀 절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 한 사람이 연단 위의 덴노가 뭘 하나 힐끔 쳐다보았더니 연설문을 돌돌 말아 망원경처럼 보고 있더라는 일화를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이게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이 어렵고, 다만 해당 인물에 대한 중평이 당시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죠.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대정 연간에는 일본 사회 전반에 자유주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덩달아 조선에도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게 시늉으로나마 행해졌죠. 아마도 일본의 보수 강경파가 이런 풍조를 못마땅히 여겨 의도적으로 그런 프로파간다를 퍼뜨렸을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그의 참모습이고 어디서부터가 조작된 이미지인지 면밀히 구분해 낼 방법은 없습니다. 어쩌면 아마 본인에게도 비극이었을 겁니다. 현인신이라 일컬어지며 근대화 과정을 거쳐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하려 들던 일본인들에게 이런 상징조작은 필수 과정이었겠습니다. 삼국 간섭 과정에서 "강도들이다. 정당히 전쟁을 하여 뺏은 영토를, 별개의 간섭을 통해 도로 내놓으라고 하다니!" 라며 개탄하던 제국주의자들의 태도를 보면 연민의 웃음이 나옵니다. 강도판에 무슨 룰이 있다는 말입니까? 메이지 덴노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과 그 추종자들이 한 일의 정확한 의미가 뭔지 몰랐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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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 1 - 풍운천하
구종서 지음 / 살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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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기록"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소설 형식입니다. 또,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정사에 근거를 두고 꼼꼼한 연구 끝에 쓰인 작품이므로 거의 역사책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 같은 이의 대하소설도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서부터가 소설인지 모호한데 이 책도 그런 기분으로 읽으면 좋을 듯하네요.


출간된지 14년이 지났는데 저는 11년 전쯤인 2010년쯤에 전권을 구매했었습니다. 그 당시 도정제 실시 전이라서 특히 교보 한 군데에서만 싸게 판매했기에 얼씨구나 하고 샀던 기억입니다. 작가는 중앙일보 국제부장을 역임한 구종서씨이며 필력이 좋아서인지 소설이 술술 재미있게 읽힙니다. 왜 아직까지 이 책을 제가 책프 글감으로 삼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책프에 오래 참여하다 보니 이게 혹시 전에 리뷰했던 책은 아닌지 일단 책좋사 카페에서 검색을 한 후에 읽고 독후감을 써도 쓰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구종서 작가님이 쓴 다른 책에 대한 서평은 여러 회원님들이 남긴 기록이 눈에 띕니다. 


이런 역사소설을 읽는 보람은,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이 머리에 잘 정리된다는 걸 그 첫번째로 꼽고 싶습니다. 역사를 국사 교과서나 참고서로 공부할 때처럼 지루하고 괴로운 순간은 없습니다. 아무리 설 모씨나 최 모씨처럼 일타 강사한테 배우더라도 이게 공부는 어디까지나 공부라서, 아무리 배워도 헷갈리는 부분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반면 소설로 접근하는 역사는 게임 못지 않게 꿀잼이라 결과물이 오래 기억된다는 게 비교할 수 없는 장점입니다. 


다음으로 이 작품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작가분이 정말로 열정을 기울여 연구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할 만큼, 문장 하나하나가 비분강개한 애국심을 뿜습니다. 그래서 독자로서 작품을 읽어 가며 새삼 자세를 고쳐 잡기도 했습니다. 작가분의 고향이 강화라고도 나오는데 아마 그래서 더 특별한 창작 동기와 열정이 부여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최충헌 집권기부터 시작합니다. 처음에 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옹립할 때 명종의 태자도 함께 폐위되었는데, 신종은 병으로 붕어하고 그 아들 희종이 즉위하여 최충헌을 상대로 일종의 친위쿠데타를 기도하다 실해합니다. 이걸 계기로 희종까지 다시 폐위하고는, 최충헌 자신이 14년 전에 태자 자리에서 쫓아낸 왕숙(王璹)을 즉위시킵니다. 이분이 고려 강종이죠. 즉위시에 이미 나이가 육십이었습니다. 휘(諱)인 숙(璹)은 옥그릇 숙 자인데 이 글자도 지금 제가 시도해 보니까 여튼 윈도에서 바로 지원이 되네요. 


강종은 병으로 승하하고 아들이 즉위하는데 이분이 고려 고종입니다. 즉위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북방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이는데 거란의 잔당이 고려 국경을 넘어온 사건입니다. 이를 진압하라고 금나라(여진)에서 보낸 포선만노가 연전연패한 후 처신이 힘들게 되어 엉뚱하게도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세우는데 이게 동하(東夏)입니다. 한국에서는 동진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여기에 당시 엄청난 기세로 동아시아 일대를 휩쓸던 몽골까지 합세하여 아주 복잡한 양상의 국제전이 일어납니다. 


이 1권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북방 민족의 한다하는 장수들이 고려의 김취려 장군을 보고 형님으로 모시며 친분을 도모하는 장면입니다. 개인의 역량(외모 포함!)이 이처럼 압도적이면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 대목은 꼭 작가의 상상이나 허구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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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왕과 친인척 1 조선의 왕실 3
지두환 지음 / 역사문화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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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기 19주차, 또 21기 2주차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지두환 국민대 교수의 저작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대왕"이라는 호칭은 예컨대 "대행"처럼, 전임 왕에게 그 당대에 의례적으로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특히 다른 저작에서의 숙종처럼 지두환 교수 개인의 평가가 어느 정도 깃든 표현으로 보입니다. 


정몽주는 태조 이성계보다 세 살이 더 많은 나이였습니다. 포은이 끝내 새 왕조의 창업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이방원은 그를 숙청할 것을 결심하는데, 이성계는 끝까지 그에 대한 일종의 존중, 외경감을 갖고 있던 터라 이런 극단적인 처리 방식에 대해 내심 불편히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이방원은 생전에 과단성 있는 결단으로 여러 거물들, 혹은 정치적 비중이 큰 인물들을 제거했는데, 이를테면 이방번, 방석 형제와 정도전을 없앤 건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나서의 일입니다. 또 민무구, 무질 형제(자신의 처남)를 제거한 건 그 부친이자 자신의 장인이었던 거물급 신료 민제가 자연사한 후였습니다. 방원은 살아생전 자신의 친형인 방간을, 난까지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려 두고 대접도 섭섭지 않게 헸으나, 방원의 아들 세종은 방간의 아들 맹종(자신에게는 사촌이 되는)을 방간의 사후에 처형했습니다. 이처럼 이 부자의 정적 제거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권력은 본래 비정한 것이므로 이런 숙청은 안정된 국가 운영과 시스템 정착을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었고, 실제로도 효과가 좋았다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소 놀라운 건 정몽주를 사후 추증한 이가 태종이라는 건데 이는 아직 고려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관대한 조치였습니다. 더군다나 태종은 포은의 죽음에 직접 책임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또 이것 말고도 이방원은 자신이 처단한 정도전에 대해서도 저런 추증까지는 아니어도 미안한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방한 것으로 알려졌죠. 정도전이 공식적으로 복권된 건 고종 때에서나 가능했지만 말이죠. 


창업자 이성계의 가장 친한 벗이 무학대사였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교과서에서 조선 3대 국가정책 중 하나로 "숭유억불"이 꼽히는 게 다소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종, 또 그 아들 세종 모두 불교를 존중한 군주였으며 태종은 특히 아버지의 친우이자 스승처럼 무학을 대접했다고 전합니다. 이 책에서도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에야" 본격적인 억불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취지입니다. 또 재상이자 방원의 최측근이었던 하륜 역시 불교 측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였습니다. 


조사의는 드라마 <용의 눈물> 같은 걸 보면 이성계에게 찾아와 적극적으로 군사 정변을 같은 걸 꼬드긴 걸로 나오지만 역사가들은 오히려 이성계가 조사의를 적극 활용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시도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각종 사정, 예를 들면 명 성조 영락제가 방원에게 개인적 호감을 뚜렷이 표시했다거나 여진이 깊숙이 개입했다가 마지막에 발을 뺀 동향 등은 재미를 위한 과장이 있으니 가려 가며 볼 일입니다. 또 드라마를 보면 명에서 책봉이 내려오자 "제놈들이 뭔데 조선의 왕을 건방지게...!"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어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조사의는 드라마 등을 보면 막연하게 신덕왕후의 친족으로 가리켜지는데, 실제로는 조사의의 장인의 처제가 신덕왕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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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마크 C. 엘리엇 지음, 양휘웅 옮김 / 천지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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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는 강건성세의 마지막 구간을 통치한, 어찌보면 중화제국을 통치한 군주 중 명군으로 꼽히는 마지막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에 즉위한 청의 황제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거나 대단히 불운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건륭제 평전"이라고 합니다. 국내 저자에 의해 쓰이거나, 번역 소개된 건륭제 평전이 이 책 전에는 없었다는 뜻이겠습니다. 둥예쥔이라는 사람이 쓴 <평천하>라는 책이 있긴 했는데 분량도 많고 건륭제 한 사람에 초점을 두어 쓰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계서 성격이 강한 탓에 아마 평전 취급은 못 받는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건륭제 역시 개인적으로 자질이 빼어난 인물이었고, 그 부황 옹정제가 강희제에 의해 후계자로 골라진 것도 손자였던 이 건륭제의 자질이 어려서부터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여튼 그처럼 좋은 기반을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였고, 본인도 소양이 출중하고 통치를 성공적으로 행한 군주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붕어 후에 제국은 그저 내리막길을 탑니다. 조선도 비슷한 시기에 영정조의 부흥기가 있었고 공교롭게도 이 시기를 다스린 군주들 역시 조부와 손자 관계입니다. 정조가 죽은 후 이상하게도 왕권은 급히 쇠약해지고 급기야 세도가의 손에 맡겨지며, 청나라 역시 서태후라는 변칙적 권력가의 손에 넘어가 부패상을 겪게 됩니다. 


책에서는 만주족 성공의 딜레마를 분석하는데, 3백 년 전의 몽골은 한족의 영토 전부를 최초로 정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를 채 백 년도 영유하지 못하고 도로 북방으로 쫓겨갔습니다. 그에 비해 청조는 성질 사나운 내몽골 정통파 제 부족을 모조리 복속시키고, 수십 년에 걸쳐 중국 전토도 손에 넣은 후 대단히 효과적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부 최고위직에서 만주족은 언제나 다수를 유지했으니, 정복 왕조 중 가장 온전한 의미로 중국을 "정복"하고 "통치"한 왕조는 바로 청조라 하겠으며,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전근대 체제 중에서는 청나라 때가 가장 윤택했습니다. 독자인 저 개인적으로는 심지어 마오 통치 하에서도 청조의 수준을 과연 넘었을까 싶습니다. 특히 이 강건성세 기준이라면 말입니다. 


청나라는 그 다스린 영토 역시 역대 중화제국 중 최대였습니다(원나라는 기타 한국들은 제외해야 하니). 이렇게 된 건 이른바 신장 지역을, 이 건륭제 대에 와서야 완전히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이 확보한 강역이라고 해서 이름이 신강이며, 지금도 이 지역의 이름이 신장인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최근 아프간 정부가 망하고 탈레반이 최종 승자로 부상하면서 신장이 주목 받는 건 그 분리주의 운동이 과연 아프간 정세에 의해 영향을 받겠는지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도 있습니다. 왕이 외교부장이 탈레반 지도자를 불러 아프간 영토 안에서 반(反) 중국 동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일대일로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죠. 


아무튼 신강, 신장이 중국에 편입된 건 건륭제가 티벳 일부와 결탁한 중가르 제국의 무서운 발흥을 제압한 공이 무척 큽니다. 이미 북방 유목 민족은 2대 황제 홍타이지가 다 포섭하거나 평정했겠으나, 이들은 내몽골 족이고 서부의 오이라트, 외몽골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게 150년이 지나서 드디어 세를 모아 커다란 제국을 형성하기 직전까지 갔던 것입니다. 중가르 혹은 준가르라는 말의 뜻은, 미야와키 준코, 혹은 카미무라 아키라의 연구를, 한국어 위키피디아가 인용, 정리한 바에 의하면, "두르베트 정권에 있어 좌익(=동쪽)을 담당하던 진영의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오이라트는 전통적으로 서부에 웅거해 왔는데 왜 준가르가 "동쪽"인지 의아하다면 이 부분을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책에는 "준가르" 어원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독자인 제가 외부 전거를 따로 살펴 보았습니다. 


중화 제국은 건륭제 대에 와서 비로소 북방 유목 민족에 대한 근심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으나(이로부터 수십 년 후 다시 야콥 벡의 도전이 있긴 했지만요) 불과 다음 세기에는 양이(洋夷)의 침노 때문에 제국이 완전히 끝장나기에 이른 건 아이러니입니다. 과연 習皇帝의 통치 연간에 설욕이 가능할지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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