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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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려고 생각은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선순위에서 늘 뒤로 밀렸던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누군가와 다 같이 읽게 되니 뒤로 밀려있던 순위가 단번에 1등을 차지했다.


이어령에게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교수, 학자, 작가, 칼럼니스트, 예술가, 장관, 아트디렉터.....

워낙 많은 일들을 너무도 다 잘 해내었기에 어떤 수식어를 그 이름 앞에 붙여도 하나도 상경하지 않은 사람. 바로 이어령이다.


이 책을 계기로 김지수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잡지사의 에디터였다고 하며 이어령 교수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김지수 작가는 암 투병으로 힘든 몸을 이끌고서도 끝까지 공부하고 탐구했던 '까칠한' 인간 이어령을 16번이나 단독 인터뷰하는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총 16개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16개 수업은 나름의 제목을 갖고 있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각각의 수업에서 얻어 낸 키워드가 있다.


1장 바디/스피릿/마인드. 자기 머리로 생각하라. 꿀벌 독서법

2장 큰 질문을 경계하라

3장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과 은폐.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 것, 죽음

4장 운명과 자유의지

5장 존경vs사랑. 관습vs도발 혹은 삐딱

6장 디테일의 진실. 타자성의 철학

7장 진선미-순수, 실천, 판단의 기준

8장 스토리텔링이 있는 부유한 삶. 인생의 3단계 - 관심/관찰/관계

9장 꿈꾸는 삶

10장 상처와 고통

11장 눈물 한 방울

15장 도마뱀의 창조성. 한국인


김지수 작가가 이어령 교수를 거의 신급으로 존경하고 사랑한 관계로 책은 마지막 수업을 정리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어령의 말을 경전으로 만들려고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이 오히려 약간의 반감을 생기게 했다고나 할까?


과도한 경전화의 느낌을 알아서 편집하고 나면, 이어령의 말들은 생전에 그가 이룬 수많은 일들처럼, 그의 말조차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고 있다.

그의 말을 읽음으로써 필부(匹婦)인 나는 전혀 몰랐던 지식과 사상을 알게 되었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16개의 수업 중에 마지막 몇 개의 수업은 앞의 수업을 반복하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앞의 수업을 잘 들었으면 뒤에 있던 수업은 밑줄을 긋지 않아도 절로 반복 효과가 나는, 아주 바람직한 수업이었다.

모두가 가슴에 새길만하고 머리에 쌓아둘 만한 가치 있는 수업이었으나 그래도 내가 스스로를 돌이켜 보고 생각을 되새김한 가장 좋았던 수업은 두 번째 수업 '큰 질문을 경계하라'였다.


이어령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질문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어떤 양봉업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이어령 교수는 이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하며, 그의 개인적 경험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이런 유의 큰 질문 - 책 한 권으로도 답이 모자랄만한 총론 같은 질문이 아주 많다고 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거나, 질문하는 것을 고깝게 보고 돌출된 행동이라고 여기는 문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이 논문을 쓴다면 "8.15 해방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같은 것을 많이 쓴다면, 서양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세세하게 따지고 드는 논문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나도 이와 관련된 사례가 있다.

회사를 다닐 때 외국인과 한국인이 섞여 워크숍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한국인은 두어 명이었고 외국인은 열 명 정도인 워크숍이었다.

워크숍에서는 더 좋은 중간 관리자가 되기 위한 몇몇 활동을 하였는데 그중 하나는 팀끼리 토론을 통해 우리 회사에 맞는 중간 관리자는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하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좋은 중간 관리자라, 어찌 보면 뻔한 대답이 나올만한 주제이다. 아랫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스스로 솔선수범하고, 상사와 회사가 요구하는 것을 밑으로 잘 전달하는 것. 뭐 이런 뻔한 교과서적인 답을 준비하면서 나는 토론에 활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양에서 온 동료들은 이 뻔한 내용을 갖고 어찌나 시시콜콜 대화를 하고 대립을 하고 갑론을박을 하는지 나는 이 모습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아니, 뭐 이리 진지하고 세밀하게 사례를 들어가며 토론을 한단 말인가!

발표 시에 보니 서양의 동료들은 아주 디테일한 본인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좋은 중간관리자에 대하여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였다. 내가 준비한 것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야말로 뻔한 말이어서, 발표에서 나는 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공교육에서 질문과 발표의 교육을 받지 못한 주입식 교육법 탓을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질문 있습니까?'라고 할 때 내 질문은 주로 두루뭉술한 거대 담론적인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질문을 했는데, 질문이 멍청해 보여서 타인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당해 내야 할 수도 있고, 시간도 없는데 뭐 그런 것까지 묻는다고 그런 건 따로 조용히 가서 질문하라는 불평을 들을 수도 있다. 이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안전한 질문, 그리고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도 화려한 미사여구로 있어 보이는 질문을 하다 보니 내 질문은 주로 '큰 질문'이 되었다.


이어령 교수의 두 번째 수업을 들으면서 내 질문의 허점을 깨닫게 되었고 문제점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을 받고 공부를 하고 배운 것이 있다면 그 수업은 아주 좋은 수업이다.

게다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기에 돈이 들지 않았다.) 배웠다면 더더욱 금상첨화일 터이다. 모든 수업이 다 좋은 수업이었지만, 이어령 교수에게서 들은 마지막 수업 중 두 번째 강의가 내게 딱 그런 수업이었다.


밑줄을 여러 군데 그었다. 수업 내용은 반복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배운 것을 두고두고 보고 익히기 위하여, 밑줄 그은 문구들을 나의 '좋은 말 모음집' 노트에 고이고이 필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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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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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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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P12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 P28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 P49

우리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P60

테레자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 P85

필연과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인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 P88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 P11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ㄲ 작곡하고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P152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싦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잇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음닐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187

프란츠는 모든 거짓의 원천이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과 공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은 별개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그는 아무것도 비밀이 아니며 모든 시선에 열린 ‘유리 집‘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던 앙드레 브르통의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 P187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P201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 P202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 P205

그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 P353

목청 높여 자신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이 나았을까? 혹은 침묵해서그 대가로 좀 더 느린 종말을 사야 했을까?
이런 질문들에 한 가지 해답만이 존재할까?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 P357

진정한 목표는 정치범의 석방이 아니라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 P436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중략)
두 번째 범주에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중략)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중략)
끝으로 아주 드문 네 번째 점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 P440

현실이란 꿈을 뛰어넘는 것, 꿈을 휠씬 뛰어넘는 것이란 확신을 갖기 위해 그는 여행을 했던 것이다! - P448

테레자는 태평하게 무릎을 베고 누운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대충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테레자는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릭 심지어 토마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랑받는 여인으로 처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토마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어디까지 우리 감정, 우리 사랑이나 비-사랑, 우리 호의 혹은 증오의 결과인지 또는 어디까지가 개인 간 역학 관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 P470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밖에 나온 거야. 카레닌은 산책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단지 우리를 즐겁게 해 주려고 온 거야."
그녀가 한 말은 슬펐지만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슬픔을 무릅써서가 아니라 슬픔 덕분이었던 것이다. - P476

공포는 하나의 충격, 완벽한 맹목의 순간이다. 공포에는 모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결핍되어 있다. 오로지 우리가 기대하는 미지의 사건이 내뿜는 광폭한 빛만 보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슬픔이란 우리가 무엇니가를 안다는 것을 상정한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귿르을 기다리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공포의 광채는 휘장에 가리고, 우리는 전보다 세상을 휠씬 아름답게 만드는 푸르스름하고 부드러운 빛 속에서 세상을 발견한다. - P493

"솔직히 말해서 아들과의 만남이 두려워. 바로 그래서 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가 왜 이리 고집불통인지 나도 모르겠어. 어느 날 어떤 결심을 하면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 결심에는 자기 고유의 관성이 생기는 거야. 세월이 흐를수록 그것을 바꾸는 게 더 힘들어." - P500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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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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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가 우물 안에 던져졌고, 그 우물은 나의 젊은 영혼이었다. - P46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내가 내디딘 걸음들뿐이다. - P65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 없어. 아무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 P88

각성이 나의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을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었다. 맥없고 매력 없이. 책들은 종이었고, 음악은 서걱임이었다.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 P91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 P122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하나가 된 남자와 여자,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다. 나는 운명을 동경하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그곳에 있었다. 늘 내 위에 있었다. - P127

나는 단 한 가지만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둡게 숨겨진 목표를 끌어내 내 앞 어딘가에 그려 내는 일,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될 것이며, 그러자면 얼마나 걸리고, 그것이 어떤 장점들을 가질지 정확하게 아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려 내는 일, 그것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 해를, 그러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도 하나의 목표에 이르겠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P128

당시에 나는 흔히들 말하는 대로 ‘우연‘에 의해 특이한 도피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런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그것으로 인도한 것이다. - P130

이제 비로소 피스토리우스가 이해되었다. 그의 모든 꿈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이런 꿈이었다. 사제가 되어 새로운 종교를 알리는 꿈, 찬양과 사랑, 예배의 새로운 형식을 주고 새로운 상징들을 세우려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도 편안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 머물렀다. 그는 예전의 것을 너무도 정확하게 알았다. 그는 이집트에 대해, 인도에 대해, 미트라에 대해, 아브락사스에 대해 너무도 많이 알았다. 그의 사랑은 이미 지구가 본 형상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가 잘 알았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하며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어 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 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 이르도록 돕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대미문의 것,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 P168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사람들은 결국 시인 혹은 광인이, 예언가 혹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이었다. - P169

"연대란... 멋진 일이지. 그러나 지금 도처에 만발해 있는 것은 결코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테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 모두가 그들의 삶의 법칙들이 이제는 맞지 않음을, 자기들은 낡은 목록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끼는 거야. 종교도 도덕도 그 모두가 이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맞지 않아. - P180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그 길이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하면 안 돼요."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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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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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꽃은 무장투쟁이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만주벌판에서 산을 넘고 들을 지나는 무장 독립군을 생각하며 배고픔과 추위와 그리움을 견딘 그들을 존경했고 숭배했고 동경했다.

이런 이유로 문학이나 교육, 집필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은 독립운동의 2류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목숨을 내놓지 않은 얄팍한 지식인들이 앞세운 그들의 변명과도 같은 독립운동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윤동주의 시를 좋아했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좀 더 나이가 들었다. 몇 년 전 영화 '동주'를 보았다.

영화 '동주'를 통해서 나는 윤동주의 진심이 느껴졌고 그의 부끄러움에 호응했다. 가슴속에 가진 당시 시국에 대한 분노(영화는 2016년 2월에 개봉했다. 박근혜 정부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동주에 반사되었다. 조금은 윤동주가 이해되었고 소위 '얄팍한 지식인들'이 납득되었다.


친구와 서울 종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 갔다. 그는 윤동주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였다. 전시된 그의 시와 영상을 무심히 보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동주의 전시된 시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일일이 사진을 찍고 공짜로 주는 엽서를 마치 고흐의 진품 그림을 대하는 것처럼 귀히 여겼다.

그가 말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을 보았어. 여기 오니 소설이 생각나네. 윤동주를 가슴으로 읽고 이해하게 되였다고나 할까?"

평소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친구를 믿고 책을 빌렸다.


책은 2권짜리, 작가는 '뿌리 깊은 나무'의 이정명, 추리소설, 역사소설, 등장인물 교도관 스기야마, 윤동주 히라누마 도주, 교도관 와타나베 유아치, 조선인 죄수 최치수, 조선인 죄수이자 끄나풀 김만교, 누가 스가야마를 죽였는가? 윤동주는 어떻게 죽었는가? 문장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사람에게 시란 무엇일까? 칼이 무서운가, 글이 무서운가? 기록과 기억의 중요성.


시점이 여러 개의 나뉘어 왔다 갔다 산만했다. 소설 초반에 교도관 유이치의 기록과 시선으로 썼다고 되어 있었는데, 어느샌가 어느 부분은 스기야마의 시선이 되었다가 또 어떤 부분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었다가 했다. 독서의 흐름에 심대한 방해를 일으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추리소설임에도 심장 쫄깃해지는 몰입은 어려웠다.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벽걸이 시계의 시계 추처럼 자주 왔다 갔다 해서 과거와 현재의 분간이 흐릿했다. 책을 읽다 자주, 특히 초반에, 앞을 다시 들춰보는 수고를 해야 했는데 이 점도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작가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는 이미 여러 작품으로 정평이 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드라마로만 보다가 활자로는 처음 읽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을 통해서 이정명 작가가 직유와 은유와 비유에 탁월한 솜씨를 지닌 작가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소설이 긴박하다기 보다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였다. 작가의 탁월한 능력은 그래서 궁금증을 일으켜야 할 추리소설에는 오히려 독서에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작가의 탁월한 묘사와 표현력을 질투한 내 뾰족한 심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의 매 챕터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야 하는 문장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행복이 유리에 맺힌 물방울처럼 불안하다'든가, '그의 영혼의 올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걸 보았다'든가, '눈앞의 백지는 형무소의 뜰처럼 황량했다'든가, 하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비유를 만드는 작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물과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저런 능력이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라면 수많은 글쓰기 강좌와 수업은 다 사기임이 틀림없다. 만약 수없는 노력과 연습이 절묘한 비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하는지, 그저 나는 가망이 없는 것 같아 기쁘게 책을 읽으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우울해짐을 느끼는 역설을 머리에 이고 책을 읽었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고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것은 드라마로 영화로 다큐로 여러 번 다루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떤 식으로 풀어 내는가에 따라 재미는 증폭되기도 하고 반감되기도 한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사실이 증폭되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알고 있는데, 그 주사를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을. 책으로 들어가서 유이치에게 '그 주사를 동주에게 맞히면 안 돼! 그는 죽을 거야!'라고 미래를 말해주고 싶은 욕망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에서 들끓었다.

"속속들이 모르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위험하오."

1권 163쪽

동주가 유이치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윤동주에 대하여 속속들이 모르면서 어떤 선입견을 갖고 있진 않았나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부끄러워만 한 얄팍한 지식인이라고. 사람마다 저마다의 타고난 성정과 기질과 역량이 다 있을진대 사람을 똑같이 재단하여 무장투쟁이 일등이요, 나머지는 이등, 삼등으로 분류한 결국 아무것도 몰랐던.


영화 '동주'에서도 강하늘의 목소리로 듣는 윤동주의 시는 처절하고 의연했었다.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에 나오는 윤동주의 시도 의연하고 처연하고 슬픔이 배어 있었다. 색다른 맛이었다. 시는 볼 때마다 다르다. 읽기에 어렵고 시간과 품이 많이 들어간다. 읽는 데 드는 품에 비해 얻는 것이 힘드니 내가 시에 쉬이 눈이 가지 않는가 보다.

소설에는 윤동주의 시와 함께 윤동주가 사랑한 프랑스 시인 프랑스시 잠의 시가 두 편이나 실려 있다. 프랑시스 잠이라는 시인을, 그의 시를 알게 되어 기쁘다. 하나의 책으로 다른 책의 꼬리를 물게 되는 것, 독서의 묘미이다.


책의 뒤에 실려있는 윤동주의 연표를 정리해 봄으로써 '별을 스치는 바람'의 감상을 끝맺음하려 한다. 아직 속속들이 알지는 못해도 어렴풋이나마 그전보다 더 윤동주를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더 이해하게 될 테니까.


-1917년(1살) 간도에서 태어남

-1925년(9살) 명동 소학교에 입학

-1931년(15살) 명동 소학교를 졸업

-1932년(16세)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19살) 평양 숭실중학교 편입

-1936년(20살)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의 광명 학원에 편입

-1937년(21살) 윤동주라는 이름으로 작품 발표

-1938년(22살)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 입학

-1939년(23살)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발표

-1940년(24살) 릴케, 발레리, 지드의 작품을 탐독

-1941년(25살)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42년(26살) 일본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1943년(27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

-1944년(28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945년(29살)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에 사망

-1947년 <쉽게 쓰여진 시>가 경향신문에 최초로 발표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

-1968년 윤동주 시비 건립

-1977년 윤동주 심문 기록 입수

-1979년 윤동주의 독립운동 사실 확인

-1982년 윤동주 판결문 사본 입수

-1985년 중국 용정의 윤동주 묘와 묘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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