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 어떻게 존엄하고 품위 있게 이별할 것인가
김형숙 지음 / 뜨인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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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당장 죽어도 무덤덤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1차세계대전 3대 전투 하나인 솜 전투에서 신병은 전투에 투입 72시간조차 넘기지를 못했던 적이 있다. 하나 살던 죽은들, 아메바가 이분열이 안되는 조건에 닥칠 때 스스로 사멸할 수도 있다. 삶에 조금 무덤덤해져도 편안할 수 있는 자기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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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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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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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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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든, 좋든 비선택적인 민족과 국가. 그러나 정부는 선택할 수 있는....오늘 지방선거 하는 와중에 읽었다. 뭐 내가 선택한 후보는 이 책정도는 읽었을까? ㅎㅎㅎㅎ 무식한데 무식한걸 자각하지 못한다는 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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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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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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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사 혹은 과거사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난 공간의 기록을 몇몇 사례로 정리하고 공간의 개념과 의미 부여를 이야기한다. 공간도 역시 시간과 더불어 기억이 녹아 있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특별화되는 과정의 설명이다. 그러나  페이퍼에서는 책에 대한 분석보다는 건축공간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건축공간에 대한 책에  해석이나 분석의 사족을 달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평소 생각하던 것들을 논해 보고자 페이퍼를 열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어느 공간인지 알고 있는가? 또는 그 공간을 찾아가 본 적이 있는가? 누구나 태어나서 생을 시작한 곳이 있듯이, 각자가 생을 시작하며 영위하는 공간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없다면? 아, 없을 수가 없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의 시작이란 결국 어느 곳이든 일정 부분 차지하는 공간 내에서 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이라고 하니, 따지고 보면 다 태어난 저마다의 공간은 반드시 있었다. 또한, 어린 시절에도 어느 공간이든 거쳐 왔었을 것이고 당장의 현재도 어느 곳이란 공간을 차지하고 어떤 공간 내에서 체적의 부피를 점유하고 있다. 소유와 비소유를 떠나서 어느 공간이든 간에 반드시 있게 된다. 무엇이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없다. 3평짜리 쪽방에서부터 2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까지  차지하고 있는 양태는 실로 다양하다. 어쨌든 인간은 의식주 중에서 주거에 해당하는 것도 거의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그 공간에 대한 추억이 제각각으로 만들어진다. 시간의 덧게처럼 역시 반드시 인간에게 공간의 흔적은 쌓이기 마련이다.  태어난 곳, 자란 곳, 학교 다녔던 모교, 군대에서 지냈던 병영의 막사, 회사 사무실의 공간들. 혹은 일하는 곳, 혹은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어 입원하는 병원, 죄를 지어 징역형을 받아 들어간 교도소의 몇번 수감방. 혹은 지난날 여자친구나 아내와 처음으로 만나 마셨던 찻집이나 레스토랑, 결혼했던 예식장, 엄마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할머님이 세상을 하직했던 병실이나 혹은 문상을 가서 마지막 추념을 하는 장례식장, 혹은 아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던 수술실. 수학여행 가서 처음 친구들과 한방에서 누웠던 그 때 그 여관방. 혹은 아파서 누워 지냈던 병실. 이렇게 삶에 있어서 공간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용도에 따른 이 공간에서 삶이 이루어져 왔던 거다. 공간의 추억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기억하게 한다. 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는 시공간에서 뭉치며 생기고 살다가 흩어지고야 만다.


가끔 오랫동안 비어 있는 채로 방치된 집을 보면 알 수 금방 알 수 있다. 급속도로 낡아가며 쇠락한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은 인이 빠진다는 의미와도 같다. 사람이 사는 공간에는 인이 베인다.(인 + 원소 기호로는 P, Phosphorus)) 인은 무기염류인데 사람의 뼈와 이빨 등 신체에 딱딱한 부분을 이루는데 필수적 원소이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의미였다. 어떤 거주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 생활을 하면 이런 인이 배여든다. 사람의 손때가 타고 반질반질해짐으로써 사람의 신체 일부가 베여 들어간다. 사람의 향이 축적됨에 따라 건축의 공간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어느 집이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 윤기가 빠져나가고 공간이 급격히 쇠락하는 이유이다.


​ 내가 태어난 집이 지금은 없다. 자신의 태어나고 자랐고 내 인이 박힌 곳이 없어졌다는 것은 고향이라는 태생의 정체성이 사라졌다는 말과도 같다. 고향을 찾는다는 것이 고향의 집이라는 본적을 찾는 것일진대, 고향에는 내가 살았던 집이 없다. 없으니 단순히 고향의 지역만 찾아갈 일도 좀처럼 생기지도 않는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고향 집을 떠나 도시에 나와 사는 삶이 허허로운 궁극적 이유가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정체성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의 추억이 기억 속에서만 간직 된 채로 뿌리의 정체성에 대한 부재는 도시에 살며 고향을 떠난 실향민의 고향에 대한 정의 그리움을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설날이고 추석이고 명절날이 되면 바리바리 싸 들고 몇 시간이나 막히는 고향집을 기어코 찾아가고자 하는 도시민의 허전함의 모습이 이를 증명해주는 현상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고향을 다시 찾아간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라고 했으나 고향은 너무나도 변해버렸다. 그래서 나온 후렴구가 가슴이 더 아파진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향과 그리움은 항상 병립된 사고 구조 속에서  맴돌고 있다. 고향을 떠난 도시민의 그리움이란 정체는 떠나 버린 고향과 변해버린 고향의 불일치에 따른 내 삶의 어린 시절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지금의 고향은 내 옛 고향이 진짜인데 새 동네의 고향은 이미 멀어져도 너무나도 멀리 와버린 지금의 내 나이를 떠 올린다는 것. 고향집은 그 속에서 살던 그리움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운 내가 살던 고향집. 없음의 부재로 인해 오늘의 도심에 높다란 아파트에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울적이는 어린아이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니었던가. 돌아갈 곳이 없는 아이의 고아 같은 측은함이 잃어버린 고향집에 머물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비록, 오래된 집이었으나 여름이 되면 대청마루에 뒷문을 열어 놓으면 소슬바람이 지나치며 시원했고 한판 소나기라도 뿌리는 날에는 마당에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흙탕물마저 정겹다. 겨울이면 뜨끈하게 지핀 아궁이에는 불씨가 새록새록 숨을 쉬며 구들장 고래로 타고 들며 따스한 바람을 불어 넣고 마당에 높다란 대추나무가 가을이 되면 붉게 익은 대추를 가을 빛살에 붉게 반짝였던, 그 고향 집이 없다는 부재의 우울함이다. 시간은 되돌이키지 못하듯, 사라진 집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의 공간이 기억 속에서 오늘의 나를 자꾸 긁고 우울의 부스럼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아파트에 사는 도시인은 자기 집터조차 없다. 집터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도 같이 두발도 서 있는 자기 터가 없다는 거다. 둘러쳐진 담장이 없이 사방이 막힌 공간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지어 버린다. 차단된 콘크리트의 막힌 곳이란 현관문은 세상의 거친 숨결을 직접 맨살에 맞부딪치게 하고 살벌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방문을 나서고 마당을 지나서 담장의 대문을 거쳐야 하는 과정이 없이 아파트 현관은 철저히 차단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담장 너머의 표정을 읽은 길도 없으니, 현관을 마주 보는 맞은편 현관 내의 이웃에 대해 무관심함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공간이 닫힐수록 소외는 늘어나도 고독은 깊어간다. 누군가 옆에서 죽든 살든 닫힌 현관 너머의 이야기는 전혀 들을 수가 없는 아파트는 공용 스피커의 공지 내용의 사무적인 이야기만 알릴뿐이다. 옆 집 현관이 동시에 열려 이웃을 마주 보고 눈인사 한 번이라도 했던가라고 생각해 보니 거의 없다. 차단된 공간은 마을의 공동체라는 연대가 사라진다. 옆집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구조가 아닌, 막힘의 구조는 그래서 숨이 막히든 사람끼리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제 집은 아니 부동산은 단순히 거주 공간을 넘어서 재테크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어느 집이든 집터를 잡고 수대를 물려가며 자신의 뿌리를 이어내려가는 집은? 이제는 상상하기 어렵다. 유럽만 가더라도 수백 년 내려오는 집이 여전히 건재한 곳도 많지만 우리는 시골의 어느 가문의 종택을 제외하면 뿌리 없는 공중 부양하는 듯이 허공에 매달려 사는 닭장 같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마음이 늘 정하지 못하고 어질어질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몽골 어느 촌락에 게르를 가지고 다니며 풀을 찾아 돌아다니는 유목민이었더라면 초원이 터로 삼았을 텐데, 흡사 공중에서 매달려 사는 게 고향 집을 잃어버리고 집터의 흔적조차 사라진 도시민의 고독과 닮아 있는 느낌이 든다. 30년, 40년만 되어도 콘크리트는 낡아서 떨어져 나가고 창문은 뒤틀리며 미세 바람 하나 막지 못하고 쉽게 썩어가는 도시의 주택들. 오늘날처럼 수십층의 높은 고층 아파트에서는 과연 몇십 년이 지나고 나면 이 세월의 쇠락하는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정녕 모를 일이다. 수년간 전세살이 후에 근근이 도시에서 내가 살 집이라고 아파트 하나 장만했으나 여전히 내 집다운 고향집 같은 느낌은 1도 없다. 아니 생기지를 않는다. 언젠가 여기도 떠날 수밖에 없고 허물어질 것만 같은. 그러니까 내 정서의 인이 전혀 베기지 못하는 아파트는 허허롭다. 생활이야 고향집에 비해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너무나도 편리하지만 한구석에 도사린 추억을 가진 한, 편안하지가 않는다. 그냥 집이라는 주거 공간에서의 정이 들지 않는 삭막함이랄까 싶었다.


공간에서의 대가 끊기는 마당에 사람의 대를 이어서 무엇할까. 시골에 아직도 찾아갈 고향집이 있고 터가 있는 사람은 그나마 아직은 행복하다. 나중에 찾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회귀 본능을 가진 연어떼처럼 다시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죽어 가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곳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여우가 우리 마음에 한 마리씩 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살던 동네는 오늘의 동네와는 전혀 달라져 버린 지금, 가끔은 내가 가야 할 고향집의 부재는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한다. 다시는 갈 수 없는 곳. 그곳은 오늘 밤 꿈에서나 봐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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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0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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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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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05 1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대인에게 더이상 집은 추억을 담고 있는 나의 공간이 되지 못하는 듯 합니다. 막연히 노후에 살 집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몸을 붙인 이 공간을 재테크의 수단이 아닌 더불어 함께 하는 공간으로 생각해야하겠습니다...^^:)

yureka01 2018-06-05 10:28   좋아요 2 | URL
지난 날 생각해보면 집때문에 이사를 6번했죠.그러니 도시인은 주거 안정이 불안하거나(돈때문에)혹은 직장 때문에 옮기는 경우가 있거든요..
대를 이어 몇세대가 갈 수 있는 집이란 이젠 없을 겁니다.부평초같은 떠돌이 삶이죠..
일탈의 먼 여행을 하고 떠 돌아다닌 방탕아가 돌아가야 할 곳은.....어디일까..뭐 그런 생각...

커피소년 2018-06-06 11:11   좋아요 2 | URL
그러네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바뀌는 예술도.. 재산이 되고... 주거공간 또한.. 재산이 되고... 인터넷에 아파트 검색해보면.. 삶의 공간이 아닌 상품...재산목록에.. 집이 들어가고.. 뭐든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되듯.. 그렇게 바뀌어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yureka01 2018-06-06 23:55   좋아요 2 | URL
주거를 이용해서 재산 증식의 수단화가 심해질수록 주거가 불안해지는 현상.....
집이란 거저 편안해야 하는 공간인데 탐욕이 들어가니...참 아쉬운 시대입니다...
아직도 집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거든요,,

겨울호랑이 2018-06-07 06:33   좋아요 2 | URL
다른 제품들처럼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진 브랜드 아파트에서 애틋한 추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yureka01 2018-06-07 08:42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집의 추억이 자신의 시간을 이루는 요소중 하나인데 말이죠..

페크pek0501 2018-06-05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린시절을 보낸 동네를 가 본 적이 있었어요. 내가 알던 그 동네가 아니었던 게 충격이었어요. 모든 게 작았어요.
집도 작고 골목도 작고 계단도 작고. 그래서 거기에 사는 친구에게 자꾸 물었죠. 왜 이렇게 여기가 작아졌지? 라고.
그 친구는 늘 살고 있는 데라서 모르더군요. 오랜만에 그곳에 가 본 저만 느끼는 것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다가 이사한 것이었는데 중학생 때 가 보니 다 작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지금도 가 보고 싶은 곳인데 재개발로 확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아파트 지대가 되었을 거예요.

yureka01 2018-06-05 12:54   좋아요 2 | URL
사람의 공간 인지감에는 마인드 맵이라고 있거든요..

어릴 때 놀며 다니며 그려진 마인드 맵과 지금의 마인드 맵에 차이이죠...

네 이젠 대를 이어서 살 수가 없는 시대가 된 거랍니다......



2018-06-05 17: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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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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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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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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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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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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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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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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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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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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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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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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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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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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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8-06-07 11:16   좋아요 1 | URL
그럼 포스팅도 모바일로 하셨다니....아 눈 아파서 그간 어케하셨는지요..
전 도저히 모바일로는 뭘 하지를 못하겠더라구요..
글씨도 작고..자판도 어렵고요..

2018-06-08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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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09: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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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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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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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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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아프다고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아파도 고통이 아픈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상처는 더 커진다. 그게 어떤 병이라도 깊어지면 죽는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병이 더 무서운 법이다. 죽으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격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 그래서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죽기 전의 고통이 두려운 것. 아프면 아프다고 표현이 되어야 치료의 시작을 할 수 있다.


여기에 상처가 깊은 아이들의 사진이 있었다. 아프다고, 상처가 깊다고 표현하는 것을 사진으로 말한다. 사진이 그래서 이미지로 표현하는 언어가 된다. 아무리 말해도 둘어주지 않는데 사진으로 보여주니 들어 준다. 그리고 전시회를 하고 그 아픔이 순수한 예술화하는 작업에서 자신의 상처가 보여줌으로써 치료가 되는 놀라운 효과를 이룬다. 상처가 단지 상처로 끝나지 않고, 이 상처가 사유의 삶으로 유도하는 것. 이것이 사진의 순수한 힘이다. 사진은 그렇게 상처받은 아이들을 바꿔 놓는 힘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사진작가로써 소년원에서 4년간 아이들과 사진을 하면서 풀어낸 사진 책이다. 아이들의 사진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에 쌓인 앙금 같은 번민과 마음의 상처를 사진으로 표현해 낸 책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이뿜 받고 귀여움 한창 많이 받을 청소년 사춘기 나이. 청소년의 마음을 잘 들어 줘도 질풍에 흔들리는 나이이다. 그런데 무슨 상처가 깊어서 소년원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왜 너희들은 말을 안 듣니라고 상처를 줬다. 말만 잘 듣기를 원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듣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말만 잘 듣는 아이들만 있었다면 인류는 여전히 원시적 동물사회를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수동적 주입만을 강요한 숨 막힘을 요구하는 것을 청소년이 듣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말 잘듣는 범생교육을 최고로 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체된 모습이다. 차라리 그들의 말을 들어줄 때 사회는 진보한다. 보수의 가치보다 진보의 가치가 청소년에게 있음으로 사회는 발전되어 왔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게 막혀 있는 청소년들은 상처받고 숨 막혀 한다.


사진은 막혀 있는 아이들 마음의 통로가 되었다. 그 상처에 대해 사진으로 아프다고 말할 수 있게 하고 어떤 말인지 사진 속에서 은유로 담는다. 그럼 은유가 바로 예술의 시작이 아닌가. 아픈 마음을 직설로써가 아니라 한 번 더 비틀어 은유할 때, 그들의 사진이 예술이 되는 딱 그 지점일 것이다. 유명한 작가를 하겠다고 사진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가진 처지의 하소연을 보여주는 것. 이게 핵심이다. 사진은 그래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과 열림을 사각의 창을 통해서 보여준다. 내 마음의 집에 창문이 하나 있어 창문을 통해서 내 안을 바라봐달라는 신호. 이게 사진이었다. 때로는 예술적으로 가끔은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는 이것은 사진 심리 치료와도 같다고 했다. 말할 수없이 답답할 때. 그때 사진은 그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대신한다. 훌륭한 표현의 도구가 그래서 사진이 되는 이유이다. 간단한 카메라 하나로도 충분하다. 순수에 대해 무슨 장비 타령이 왠말일까. 아니었다. 어떤 사진이든 자신을 표현할 주제를 주면 그 주제에 부합된 자신의 마음을 사진으로 찾는다. 그래. 사진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 보여주는 사진이 결국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로 이어지고 자신의 사유가 성찰로 리턴된다. 사진은 외부로도 보여주지만 자신에게도 발견하게 되는 이중성이 있다. 내가 나에게 표현하는 증상이 있어야 외부로도 발설된다. 내가 정리가 되지 않는데 밖으로 정리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진은 사유를 도우는 이미지의 언어이다.


사진의 수준을 찾으려거든 외국의 유명한 작가들 사진을 찾으면 될 일이고 거대한 담론을 만나려는 사진도 역시 사상적 사진을 찾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여기의 책에 나오는 사진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오롯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표현이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하고자 하는지 그 심리를 추적하게 해주는 사진이다. 대단한 사진은 바로 자신을 정확하게 은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책에 그런 사진이 담겨 있다.


사진 보다가 울컥했다. 아이들 사진들이 지금 내가 어릴 때의 그런 마음이 엿보였고 지금 어릴 때 받은 상처의 상흔이 사진을 통해서 부각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감정이 이입되고 빠져들고 마음이 울적해지는 느낌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진을 통해서 치유의 수단으로 만든 작가에게 진정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정말 사진을 통해서 너무 대단한 작업을 했음을 칭찬드리고 싶었다.


사진 이외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이는 꼭 낳기 전에 존재론에 대해 물었으면 좋겠다. 낳고 보니 어쩌니 저쩌네는 늦다. 태어난 이후에는 물릴 수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꼭 물어 봐야 한다. 자본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 때문에 심각하게 휘둘릴 정도의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는 준비해 놓고(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 좀)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무한 책임이다. 자식은 부모의 유한 책임일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는 자식에게 무한 책임이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못하면 상처는 대물림된다. 특히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아야 한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되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사실이다.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아이는 돈 없으면 잘 못 키운다. 돈 없어도 키우기야 하겠지만 "잘" 못 키운다. 아이도 일종의 투자다. 단기로 승부 보는 투기가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 물론 투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자비율에 따라 실패할 확률은 급격히 줄어든다. 인생의 삶이란 어차피 확률과 선택 아닌가. 그런데 투자할 자본도 없이 투자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주식 시장에 주식 대금도 없이 우량 주식을 사겠다는 것은 빚으로 내서 사든가, 아니면 저가 소량만 투자가 가능하다. 가치는 투기로써는 절대 이루어지 않는 것이 주식의 원칙 아닌가. 아이도 마찬가지다. 내 전답 하나 없이 농사짓겠다는 게 얼마나 조깥은 일이냐. 아이를 흔히 농사라고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자본과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투자인 셈이다. 그리고 하늘의 운발이 맞아야 제대로 아이가 자란다. 어느 것 하나라도 조건에서 빠지면 자라기야 하겠지만 잘 자라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런 조건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출이 많을 기대를 하는 농사꾼은 사기꾼이다. 농사가 어디 사기로 되나. 자식을 키우는 것이 사기 치는 걸로 될 수야 없다. 그렇지 못하면 아이는 상처받는다. 상처받고자 나온 게 아니다.


자본의 시대에 살면서 주식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적어도 돌아가는 체계 정도는 알고 살자는 말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나아가 아이의 미래의 삶까지 고민을 꼭 해야만이 우리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일종의 조건사항이 아닐까 싶었다. 청소년기에 한창 놀고 공부하며 자신의 미래에 꿈을 꾸어야 할 아이들이 무슨 사고를 치고 불만을 가지고 반항하며 터무니없는 절도와 폭력에 노출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먼저 아이는 부모의 무한 책임이라고 했다. 부모의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고 아이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아이의 삶을 선택적인 결정이 중대한 파급한다는 것이다. 단돈 100만 원으로 투자를 하려 해도 얼마나 알아보고 뒤져 보고 찾아 보고 따져 봐야 할 종목을 선정할 것인지 아이는 주식 시장의 종목 선택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심지어 한 생명을 낳고 키우고 자라는 것에 너무 고민없는 짓들이란 심각한 범죄같아서이다. 낳아 놓고 내가 못키우겠으니까 남들이 키워 줄 거라는 터무니 없는 작자들의 생각도 증오의 대상이다. 자신이 만들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혹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징글에서 사는 부족도 그런 조건적 생각은 없이 아이 낳고 아마존 밀림에서 아직 석기로 사냥하는 부족도 아이 잘 낳고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의 욕망의 크기는 그들과 비할 바는 못된다. 같은 동일한 조건 하가 아니란 거다. 우리 사회는 자본 사회의 가운데서 살고 있고 자본적 기대치와 욕망은 너무나도 크다. 그런 욕망을 앞에 엄연히 두고서 하루 밥 세끼 잘 먹는 것의 소박한 욕망으로 견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당장 시골 어디로 가서 내가 채워 놓은 욕망의 그릇을 완전히 비울 수 있는 용자라면 그런거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의 환경은 저기에서 찾을 일은 더더욱 아니기도 하다.


PS 사진 이야기 하다가 결론이 엉뚱?스러운 삼천포 같아도 개인적으로 방황과 고통당하는 아이들보면 낳은 부모들에게 어떤 분노가 치밀어서이다.그나마 아이들이 좋은 작가 선생님을 만나서 사진으로 자신의 고통을 풀어내고 응어리진 마음을 다독이는 것에서 사진을 찍어 온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던 까닭이다. 나도 얼른 좋은 사진 생활 해야 할텐데.....그래서 열심히 준비해서 기회가 오면 꼭 잡아야 할텐데.....그런 마음으로 앞으로도 열심히 사진 찍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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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8-06-04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행로를 따라 쓴 글이 진솔하게 다가오네요
격식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손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글에 진심이 담겨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요.

지인 중에 재혼 커플이 있습니다
1) 대학재학중 멋모르고 여자를 임신시켜 결혼, 아이 낳고 여자가 히스테리 발작으로 집 나감
아이를 키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재혼했는데, 10년쯤 살던 두번째 여자는 바람 나서 나감(딸 하나 두고 나감)
무려 14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50대 중반에 세번째 결혼, 여자가 데리고온 자식 하나, 남자 자식 둘, 둘이 결혼해서 또 하나 낳게됩니다. 그러나 세번째 여자와도 4년만에 이혼. 입양했던 전처 소생을 파양 ㅠ.ㅠ

2) 철모르던 시절 남자에게 성폭행당해 결혼하고 자식을 둘 낳았습니다. 남자는 3종셋트(술, 도박, 바람)를 갖춘 백수건달이라 여자는 애 둘 데리고 집을 나옵니다. 위자료 안받는 조건으로, 생활비 요구 안하는 조건으로. 애 둘 데리고 살아보려고 별별 곳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는데........... 너무 외롭더래요. 그래서 홀홀단신 남자(노총각)과 재혼해서 아이를 낳았답니다. 문제는, 아비가 남의 새끼를 냉대하고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냉대받은 그 아이는 지금 우울증으로 고전중.

부모라고 다 부모인가? 라는 의문에 대한 댓글치고는 너무나 적나라하죠?
1)은 고소득 전문직 2)는 보통 서민
배우고 덜 배운 걸 떠나서, 인간은 동물일 뿐이더이다. 유치하고 이기적인.

yureka01 2018-06-04 09:44   좋아요 0 | URL
아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정상적으로 살려고 해도 어려운 판국에, 무슨 악연들이 깊어 없던 인연 만들고 아파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네 배우고 덜배우고만의 문제가 아니네요.....

기막힌 이야기 입니다.아고야.....
 
[eBook] 문명과 식량 - 인류는 자연환경의 위기에 맞서 어떻게 번성하는가
루스 디프리스 지음, 정서진 옮김 / 눌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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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요즘 한창 남북회담과 북미 회담이 성사로 북한의 개방을 염원하고 그리고 북한이 베트남만큼이라도 따라와 주면 얼마나 한반도의 기운이 상승할 수 있는 모멘텀이 만들어질까 생각해봤다. 당장에 주식 시장에서 건설, 항만, 철도 등 SOC 산업과 에너지 산업이 상종가를 치고 있는 것만 봐도 그 북한의 개방이 미치는 경제적인 파급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할 거라는 기대감이 무르익는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덧붙여서 가볍게 예상되는 생각을 했다. 철도나 항만시설, 에너지 등 SOC 사업은 북한이 당장 해방하더라도 일정 부분 물리적인 절대적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당장 개방된다고 해서 건설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들어설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전 조사가 필요하고 행정적, 기술적인 조율을 필요하고 관련 기관과의 수많은 협의로 결정되고 나면 그제서야 설계를 하고 시공하는데도 몇 년이 걸리는 사업일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먹는 문제는 당장의 절실함과 덧붙여져 있다. 먹는 것과 맛나는 것은 이념을 초월한다.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서는 금기시되는 먹거리도 당장에 융화되듯이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종교적 금기시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아니라면 파급되는 건 삽시간이다. 그래서 주식 투자 종목에서 라면이라든가 빵이라든가 각종 식음료의 판매 매출을 생각하게 되었다. (뭐 더 나아가서 햄버거나 패스트푸드 같은 식품들도 포함이다. 햇반이나 김밥 이런 것도 히트 될지도 모른다.)

 

 

 

종교적 금기시되는 음식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먹는 것은 즉각적이고 큰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반면에 효과는 크다. 북한이야 종교국가는 아니니 터부시 되는 식음료의 해당사항도 적다. 그래서 찾아 본 주식 종목이 삼양식품, CJ제일제당, 오뚜기, 농심, 한국야쿠르트와 같은 식음료 회사의 주식가격이 오르지 않을까라는 뭐 얄팍한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싸고 간편하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북한 사람들도 라면은 있으나 대중적인 라면이 퍼지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면 가짓수를 봐도 엄청나게 많다. (그렇다고 이거 보고 실제 투자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가의 상승 논리가 그럴싸하지 않나라는 의견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은 먹는 문제가 제일이다. 배고프면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삶의 육신에 대한 굴레가 첫 번째가 먹거리에 달려 있다. 이는 누구나 예외가 없다. 단 예외면 그야 신일 테니까. 먹지 않고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이겠다. 현대 지구촌에서 일부 분배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로 기아에 빠진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음식이 풍요롭고 남아돈다. 우리나라도 일년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양을 굳이 찾아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남아서 버려지는 걸 익히 알고 있다. 이는 오늘날 인류가 현대전까지 식량 부족에 맞서 끝없이 농업을 개량하고 증산하여 왔고 이에 문명은 그 식량에 걸맞게 진화되었다는 주장이 이 책에서는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먹는 문제가 문명의 조건이자 발생 원인이었으며 먹는 것에서부터 생존의 삶이 존재의 삶으로 옮겨가는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사실 먹는 문제는 인간의 욕구에서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식욕의 본능인데 이 식욕을 맞추지 못할 때, 인류의 진화는 더디거나 아예 쇠락하였을 것이고 잉여 식량이 발생 됨에 따라 정치와 경제, 군사와 지식들이 식량 잉여물이 먹여 살린 것이다. 모두가 식량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지점부터 인류의 문명은 수립되어 간다는 의견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구의 환경과 조건에 대한 순화 메커니즘으로 분석하고 왜 지구가 다른 행성과 다르게 생물의 다양성에 적합한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 지구의 맨틀이 순환되지 못하고 금속 맨틀이 움직이지 못하면 태양풍을 막아내는 자기장이 없고 대기가 우주로 빼앗기게 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지구의 자전 원리와 자전 각도에 따른 영향 등을 분석하였다. 이렇게 지구의 자연적 메커니즘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확률임을 알게 되면 진정 감동적이 아닐 수가 없다. 금성이나 화성에서 왜 생물체가 살 수 없는 이유와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이 우주의 모든 별에서 고등 생물이 진화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별이 몇개나 될까를 연구하는 천문학자에서부터 식물학자들 문명 학자 진화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저자는 지구라는 거대한 자기 스스로의 메커니즘, 즉 톱니바퀴를 메타포로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은 지구가 다른 행성과 차별화된 우주의 특별한 부동산이라고 은유한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조절할 수없는 전체적인 체제라고 아울러 주장하고 있다. 이런 체제에서 인간의 누적 학습은 다른 생물종과 달리 답습과 답보를 벗어나서 위기에 대응하는 유전자를 자기화된 데이터를 축적시켜 생존에 대해 덜 위험하고 안전함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지구의 순환 구조에서 인간이란 특별한 종족의 학습력은 인간을 진화시켰다. 하나를 배우면 이를 토대로 위기에 대처하는 학습이 쌓이고 이것이 내재되는 효과는 다른 종과를 구별되는 부분 때문이었다. 물의 순환, 에너지의 순환, 대기의 순환에 따른 돌고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인류는 적응과 향상이라는 두 개의 고리로 기어를 맞물렸다. 식량의 생산에서부터 생산한 잉여물을 저장하고 유통함으로써 식량 생산자에서 도시인으로 변모하여 왔던 것이다. 결국 지구의 행성이라는 특별한 부동산에 매물과 매도가 돌고 돌았다는 저자의 해석은 우리의 문명에 대한 시야를 지구의 전체 시스템으로 확대시키면 그 논리가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에서는 식량의 혁명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불의 발견에 대한 혁명, 비료의 발견에 대한 농업 혁명,  노동력을 대신할 농업기계의 혁명이었다. 아시다시피, 인간은 불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종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누적 학습효과가 계속 축적됨으로써 불의 발견과 불의 이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을 이용해서 날 것을 익혀 먹음으로써 소화 흡수가 빨라지고 질지고 거친 것이 부드럽게 됨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너지는 결국 노동력의 증대를 가져왔고 이 노동력이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즉 식량의 밑바탕 위에서 문명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비로소 인간은 채취인에서 농업인으로 바뀌는데 불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농업인으로 바뀜에 따라 도시가 생겨나고 도시에게 끝없이 식량을 공급하게 됨으로써 도시의 체계가 만들어지고 인간의 역할이 분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비료는 땅의 지력, 즉 영양분을 인위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생산력을 올렸다. 자연 발생적으로 채집에서 농업으로 바뀌게 되고 토지의 양분은 계속 빼앗기는 과정을 겪어보면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비료를 통해서 토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 비료인데, 각종 배설물이나 나뭇잎 등의 부엽토를 사용했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문제는 결국 식량 부족으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인간은 이를 비료로 생산량의 증대를 위기의 타개책으로 개발해왔던 것이다. 인간의 부산물을 비료로 쓴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근대에 들어 공장에서 만들어진 값싼 질소와 인을 투입함으로써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생산량이 늘은 만큼 부작용도 나타났다. 질소와 인의 과도한 누출로 야기된 환경 오염은 인간의 환경에 위협이 되고 다시 인간은 환경의 규제에 대해 골머리를 싸매게 된 것이다. 내연 기관이 발명됨으로써 농업에는 다시 획기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가축이나 인력에 의한 노동력의 한계를 내연기관, 즉 기계가 대신 함으로 인해 엄청난 식량 생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가끔 인터넷 유튜브에 농기계 작업하는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수백만 에이커의 광활한 농지에 농기계들이 줄지어 가면서 엄청난 작업을 하는 것을 불 수 있다. 그렇게 넓은 면적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것을 대부분의 농업용 기계가 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기계화는 가파르게 이루어질 것이고 생산량은 증대되었다. 이는 잉여 농산물이 사회 경제적인 먹거리의 풍요와 더불어서 인간의 역사상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농기계의 작업이 무인화가 추진되고 있다. GPS 시스템을 이용해서 자율 주행되는 자동차는 농기계로 응용되고 이제 농업이 공장화되고 디지털화되는 조절력을 가지게 되었다. 즉 경제적으로도 소규모 농업은 대규모의 집적화된 농업에 경쟁이 되지 못함으로써 소규모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도시민의 빈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중국의 농민공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추가하자면, 농약의 사용이 작물의 해충과 병균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농약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는 심각했다. 한 예로 DDT에 대한 긴 과정의 설명을 이 책에서는 하나의 예로써 들고 이 신물질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는 반드시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양면성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이 긍정적인 영향과 농약 사용의 역효과에 대한 양단의 문제는 어느 것이 정답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 너무 어렵기도 하다. 20세기의 획기적인 위생과 식량을 향상시키는데 농약 사용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더라도 생태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인간이 돌이킬 수 없는 자연의 파괴로 이어짐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했다. 이에 더하여 농업 생산성 향상에 작물의 품질개량을 위한 품중을 개발하는 것에서도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컸다. 나아가 이제는 GMO 작물, 즉 유전자 조작한 작물까지 나오고 있고 이런 유전자 조작된 작물이 생태계에 퍼질 때의 그 영향은 어떻게 발생되는 것인지 두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각종 필름류 플라스틱류, 수지류 같은 포장지 용기 등 상당히 많고 다양한 물질들이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 환경 호르몬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유전자가 교란되는 문제는 인류가 앞으로 겪게 될 소위 도끼로 내리찍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일례로 슈퍼마켓에서 진열된 식품 대부분의 포장 용기는 비닐이거나 합성수지들이다.

 

10억의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반대로 10억의 인구는 비만으로 인한 병을 만든다. 어느 쪽은 결핍에 의해 고통당하고 다른 한쪽은 영양 과잉으로 비만에 따른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설탕과 과당 같은 탄수화물, 저가격의 값싼 지방의 고기 등으로 인한 비만 인구의 확대는 인간이 문명과 식량이라는 이 주제에 새로운 시험대에 올라서 있다. 역사적으로도 오늘날까지 인간은 부단하게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 왔던 것을 감안하면, 식량의 절대적인 부족은 해결했으나 식량의 상대적 불균형과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경제화된 농업에 대규모 기업화됨에 따라 식량이 없어서 못 먹는 문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먹는 문제가 기아 문제로 이어진다. 자급할 수 있는 농업에서 비자급형 공장형 농업화 됨에 따라 자영농민은 농업의 채산성을 맞추지 못해 사라지고 도시로 나가 빈민화되어 돈으로 값싼 지방 덩어리의 정크푸드에 매달리고 병 걸리고 치료도 못 받고 죽어는 자본적 혼돈에 빠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비만은 또 마찬가지다. 저소득층일수록 비만에 더 노출되고 건강관리가 안 됨으로 싼 가격의 식량으로 노출됨에 따라 자영할 수 없는 비극을 만들게 되었다. 도시에서 살면서 한 번도 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 먹는 슈퍼마켓의 식품 진열대는 화려한 것은 어쩌면 오늘날 인간이 제 먹을 것을 제 손으로 만들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먹을거리의 생산을 박탈당해 버렸다. 자신의 농토에서 자신이 재배한 작물을 맛볼 수 없는 도시민은 비자급의 비극은 비만으로 도출되었다. 움직임은 적어지고 오래 앉아 있고 고열량의 음식을 계속 섭취함에 따른 부작용은 온갖 성인병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생활의 도시 형태에서 인간은 앞으로 더 비만스러워질 것이고 병에 더 많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대의 전쟁도 땅따먹기처럼 넓은 땅을 차지해야 농사를 더 많이 지을 수 있는 것에서부터 오늘날은 농업의 기술과 하이테크 산업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산업화되고 자본화된 농업이 상업화되어 감으로 더 이상 전쟁으로 땅따먹기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인간은 모든 활동이 먹거리의 생존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만약 광합성도 했더라면 그래서 먹지 않고도 나무들처럼 살 수 있었더라면 과연 오늘날의 문명이 이렇게 시작되고 바뀌고 문명의 생태계가 변모를 거듭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먹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다. 또한 먹는 즐거움과 먹는 것의 쾌락을 끊기도 어렵고 이것을 포기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에서 과잉의 영양 때문에 앓아야 하는 병들로 인해서 소식하기를 주장하고 적게 먹음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그래서 굉장히 어렵고 지난한 노력이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다. 길을 가다가 둘러보면 온통 식당들이 널려 있다. 먹는 것이 모든 활동의 시작이듯 그 과정 또한 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약속을 잡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일단은 먹는 것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그래서 나온 이야기. 언제 밥 한 번 먹어요.라는 인사말이 된 오늘날을 살고 있다. 식량이 음식이 되고 나아가 예술화된 요리의 세계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진화에 끝까지 다다른 느낌도 그래서 드는 이유이다. 먹는 것만 해결되었지만 이 먹는 것의 해결을 위해서 치러야 할 반대 급부는 인간에게 또 다른 도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농약의 생태계 교란, 환경호르몬의 영향, 유전자조작된 작물의 변이적 영향, 이런 문제는 앞으로 인간이 여전히 먹거리에 대한 문제가 되었고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나나는 전 세계적으로 유전자가 단일 품종이라고 하던데 이 품종 하나가 무슨 영향으로 이상이 발생하면 식물 한 종이 멸종당하는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식량화시키는 품종은 생태계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극히 일부분의 종이 전 지구를 뒤덮어 버리고 생물의 다양성이 점점 줄어들 때는 과연 인간은 어떻게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은 현재로서는 없다. 호박별 화석에 갇혀 있는 공룡의 피 한 방울로 유전자를 복구해서 다시 공룡을 탄생 시키는 쥐라기 공원의 능력은 아직은 단지 영화 속의 이야기 일 뿐이지만 북유럽 어느 나라 지하 깊은 속에 지구상의 모든 품종의 식물 종자가 그래서 저장되어 혹시 멸종할지도 모르는 현상에 대비하고자 하는 멸종에 대한 응전도 있게 된 배경이었다. 이처럼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파생되는 영향은 인간에게는 또 다른 기근에 버금가는 위험요소로 등장했다. 과연 지난 과거를 반추 삼아 앞으로 인간의 위험은 어떻게 감소시켜 나갈 것인지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큰 화두를 던지고 있다.

 

참고 : 이 책과 더불어 총균쇠라는 책도 곁들이시면 좋습니다.

           또한 아래의 표지 책도 함께하면 좀 더 종합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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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01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 몰라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미래의 식량을 준비하는 자세가 미흡한 것 같아요. 사람들도 식량 부족의 심각성과 미래 식량의 중요성을 못 느끼고요. 우리나라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일단 북한 문제가 그렇고, 인공지능, 미래 식량 문제까지도... 이 모든 문제 전부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것들이네요.. ^^;;

yureka01 2018-06-01 12:17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을 지적합니다..대량생산의 산업화된 농업 자본은 중소 국가의 농업의 자영농을 고사시키게 되거든요..규모부터 연구와 실험.그리고 대규모 자본의 농업자재.농약과 화학비료의 가격때문에
농사 작물의 가격 경쟁력을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자급농을 못하게 되니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으로 되는 환경에 놓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농업의 경쟁력은 국가의 일부 보조금이나 지원이 없이는 농사 지을 수록 손해가 나는 이유거든요.
가급적 제일 좋은 방법은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이 가까운 지역민에게 소비되는 순환 과정이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유통과 수송이 멀면 멀수록 발생되는 비용도 무시할 수없는 거라서요..

그래서 대부분 재래 시장에서 가까운 주민들이 직접 농사지은 것을 사먹는 노력이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가까운 지역의 농산물을 그 지역민이 소비가 될 때, 농사짖는 주민도 살고 도시민의 건강도 확보할 수 있죠..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를 한번 보시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찾아 보셔도 좋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6-01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GMO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은 북한에서는 유기농 농업을 비롯한 친환경농업이 자리 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지형적으로 북쪽이 남쪽보다는 농사에 적합하지는 않겠지만, 처음이니 특성화 작물로 차별화를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yureka01 2018-06-01 13:39   좋아요 1 | URL
북한의 농업의 생산력은 형편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게 제일 문제가 되거든요...
친환경이 살려면 생태계가 복원되어야 하는데...북한에 있는 산들이 나무들이 없어요..
산림 조림도 시급한 과제죠..조림을 할려면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등등등..
북한 자력으로는 못하는 일들이 많아서..지원해야 할 일이 참 많을 거예요..
그중에서 식량은 제일 우선 순위니까요.일단 먹는게 해결되어야..그 다음이 있으니 말입니다.

2018-06-01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1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1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