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아프다고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아파도 고통이 아픈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상처는 더 커진다. 그게 어떤 병이라도 깊어지면 죽는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병이 더 무서운 법이다. 죽으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격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 그래서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죽기 전의 고통이 두려운 것. 아프면 아프다고 표현이 되어야 치료의 시작을 할 수 있다.
여기에 상처가 깊은 아이들의 사진이 있었다. 아프다고, 상처가 깊다고 표현하는 것을 사진으로 말한다. 사진이 그래서 이미지로 표현하는 언어가 된다. 아무리 말해도 둘어주지 않는데 사진으로 보여주니 들어 준다. 그리고 전시회를 하고 그 아픔이 순수한 예술화하는 작업에서 자신의 상처가 보여줌으로써 치료가 되는 놀라운 효과를 이룬다. 상처가 단지 상처로 끝나지 않고, 이 상처가 사유의 삶으로 유도하는 것. 이것이 사진의 순수한 힘이다. 사진은 그렇게 상처받은 아이들을 바꿔 놓는 힘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사진작가로써 소년원에서 4년간 아이들과 사진을 하면서 풀어낸 사진 책이다. 아이들의 사진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에 쌓인 앙금 같은 번민과 마음의 상처를 사진으로 표현해 낸 책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이뿜 받고 귀여움 한창 많이 받을 청소년 사춘기 나이. 청소년의 마음을 잘 들어 줘도 질풍에 흔들리는 나이이다. 그런데 무슨 상처가 깊어서 소년원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왜 너희들은 말을 안 듣니라고 상처를 줬다. 말만 잘 듣기를 원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듣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말만 잘 듣는 아이들만 있었다면 인류는 여전히 원시적 동물사회를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수동적 주입만을 강요한 숨 막힘을 요구하는 것을 청소년이 듣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말 잘듣는 범생교육을 최고로 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체된 모습이다. 차라리 그들의 말을 들어줄 때 사회는 진보한다. 보수의 가치보다 진보의 가치가 청소년에게 있음으로 사회는 발전되어 왔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게 막혀 있는 청소년들은 상처받고 숨 막혀 한다.
사진은 막혀 있는 아이들 마음의 통로가 되었다. 그 상처에 대해 사진으로 아프다고 말할 수 있게 하고 어떤 말인지 사진 속에서 은유로 담는다. 그럼 은유가 바로 예술의 시작이 아닌가. 아픈 마음을 직설로써가 아니라 한 번 더 비틀어 은유할 때, 그들의 사진이 예술이 되는 딱 그 지점일 것이다. 유명한 작가를 하겠다고 사진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가진 처지의 하소연을 보여주는 것. 이게 핵심이다. 사진은 그래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과 열림을 사각의 창을 통해서 보여준다. 내 마음의 집에 창문이 하나 있어 창문을 통해서 내 안을 바라봐달라는 신호. 이게 사진이었다. 때로는 예술적으로 가끔은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는 이것은 사진 심리 치료와도 같다고 했다. 말할 수없이 답답할 때. 그때 사진은 그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대신한다. 훌륭한 표현의 도구가 그래서 사진이 되는 이유이다. 간단한 카메라 하나로도 충분하다. 순수에 대해 무슨 장비 타령이 왠말일까. 아니었다. 어떤 사진이든 자신을 표현할 주제를 주면 그 주제에 부합된 자신의 마음을 사진으로 찾는다. 그래. 사진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 보여주는 사진이 결국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로 이어지고 자신의 사유가 성찰로 리턴된다. 사진은 외부로도 보여주지만 자신에게도 발견하게 되는 이중성이 있다. 내가 나에게 표현하는 증상이 있어야 외부로도 발설된다. 내가 정리가 되지 않는데 밖으로 정리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진은 사유를 도우는 이미지의 언어이다.
사진의 수준을 찾으려거든 외국의 유명한 작가들 사진을 찾으면 될 일이고 거대한 담론을 만나려는 사진도 역시 사상적 사진을 찾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여기의 책에 나오는 사진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오롯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표현이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하고자 하는지 그 심리를 추적하게 해주는 사진이다. 대단한 사진은 바로 자신을 정확하게 은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책에 그런 사진이 담겨 있다.
사진 보다가 울컥했다. 아이들 사진들이 지금 내가 어릴 때의 그런 마음이 엿보였고 지금 어릴 때 받은 상처의 상흔이 사진을 통해서 부각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감정이 이입되고 빠져들고 마음이 울적해지는 느낌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진을 통해서 치유의 수단으로 만든 작가에게 진정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정말 사진을 통해서 너무 대단한 작업을 했음을 칭찬드리고 싶었다.
사진 이외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이는 꼭 낳기 전에 존재론에 대해 물었으면 좋겠다. 낳고 보니 어쩌니 저쩌네는 늦다. 태어난 이후에는 물릴 수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꼭 물어 봐야 한다. 자본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 때문에 심각하게 휘둘릴 정도의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는 준비해 놓고(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 좀)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무한 책임이다. 자식은 부모의 유한 책임일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는 자식에게 무한 책임이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못하면 상처는 대물림된다. 특히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아야 한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되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사실이다.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아이는 돈 없으면 잘 못 키운다. 돈 없어도 키우기야 하겠지만 "잘" 못 키운다. 아이도 일종의 투자다. 단기로 승부 보는 투기가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 물론 투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자비율에 따라 실패할 확률은 급격히 줄어든다. 인생의 삶이란 어차피 확률과 선택 아닌가. 그런데 투자할 자본도 없이 투자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주식 시장에 주식 대금도 없이 우량 주식을 사겠다는 것은 빚으로 내서 사든가, 아니면 저가 소량만 투자가 가능하다. 가치는 투기로써는 절대 이루어지 않는 것이 주식의 원칙 아닌가. 아이도 마찬가지다. 내 전답 하나 없이 농사짓겠다는 게 얼마나 조깥은 일이냐. 아이를 흔히 농사라고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자본과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투자인 셈이다. 그리고 하늘의 운발이 맞아야 제대로 아이가 자란다. 어느 것 하나라도 조건에서 빠지면 자라기야 하겠지만 잘 자라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런 조건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출이 많을 기대를 하는 농사꾼은 사기꾼이다. 농사가 어디 사기로 되나. 자식을 키우는 것이 사기 치는 걸로 될 수야 없다. 그렇지 못하면 아이는 상처받는다. 상처받고자 나온 게 아니다.
자본의 시대에 살면서 주식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적어도 돌아가는 체계 정도는 알고 살자는 말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나아가 아이의 미래의 삶까지 고민을 꼭 해야만이 우리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일종의 조건사항이 아닐까 싶었다. 청소년기에 한창 놀고 공부하며 자신의 미래에 꿈을 꾸어야 할 아이들이 무슨 사고를 치고 불만을 가지고 반항하며 터무니없는 절도와 폭력에 노출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먼저 아이는 부모의 무한 책임이라고 했다. 부모의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고 아이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아이의 삶을 선택적인 결정이 중대한 파급한다는 것이다. 단돈 100만 원으로 투자를 하려 해도 얼마나 알아보고 뒤져 보고 찾아 보고 따져 봐야 할 종목을 선정할 것인지 아이는 주식 시장의 종목 선택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심지어 한 생명을 낳고 키우고 자라는 것에 너무 고민없는 짓들이란 심각한 범죄같아서이다. 낳아 놓고 내가 못키우겠으니까 남들이 키워 줄 거라는 터무니 없는 작자들의 생각도 증오의 대상이다. 자신이 만들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혹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징글에서 사는 부족도 그런 조건적 생각은 없이 아이 낳고 아마존 밀림에서 아직 석기로 사냥하는 부족도 아이 잘 낳고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의 욕망의 크기는 그들과 비할 바는 못된다. 같은 동일한 조건 하가 아니란 거다. 우리 사회는 자본 사회의 가운데서 살고 있고 자본적 기대치와 욕망은 너무나도 크다. 그런 욕망을 앞에 엄연히 두고서 하루 밥 세끼 잘 먹는 것의 소박한 욕망으로 견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당장 시골 어디로 가서 내가 채워 놓은 욕망의 그릇을 완전히 비울 수 있는 용자라면 그런거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의 환경은 저기에서 찾을 일은 더더욱 아니기도 하다.
PS 사진 이야기 하다가 결론이 엉뚱?스러운 삼천포 같아도 개인적으로 방황과 고통당하는 아이들보면 낳은 부모들에게 어떤 분노가 치밀어서이다.그나마 아이들이 좋은 작가 선생님을 만나서 사진으로 자신의 고통을 풀어내고 응어리진 마음을 다독이는 것에서 사진을 찍어 온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던 까닭이다. 나도 얼른 좋은 사진 생활 해야 할텐데.....그래서 열심히 준비해서 기회가 오면 꼭 잡아야 할텐데.....그런 마음으로 앞으로도 열심히 사진 찍어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