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하면 된다와 되는 것부터 한다를 반복하기. - P58
해낼 수 있음을 아는 게 더욱 괴로울 때가 있다. 상상만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마법처럼 머리에 그려진다. 아름다운 숲처럼…………. 일을 거뜬하고 가뿐하게 완수했을 때 기쁘기보다는 허무하다. - P58
고통은 마주할 때 비로소 작아진다. 필라테스 하고 웨이트 하는 날에는 중력과 척추와 쇠의 무게만 생각하게 된다. - P58
먹고 씻고 자고 싸고 똑같은 일상이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는 게 종종 가혹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완전히 쉰다는 게 뭔지 몰랐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잘 자고 심심한 기분도 느낀다. 휴식에 대한 죄책감을 버리고 싶었고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된다. - P58
계획형 인간은 통제형 인간으로 고쳐 써야 적절해 보인다.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을 적재적소에 맞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범위와 동선에 한계를 두고, 기분을, 음식을, 인간관계를 통제한다. - P59
어떤 일을 시작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의 계획이 완성되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한다. 시뮬레이션은 실제와 비슷한 모형을 만들어 결정사항을 직접 반복적으로 대입해보는 미래 예측기법이다. - P59
돌이켜보건대,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과업에 대한 불안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불안이 있기에 긴장을 하고,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성장하고, 또 무언가를 성취하려 한다. - P59
오래 달리려면 걷기도 하고,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를 긍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너무 빠르게 거세게 달린 열차에는 연료가 남아나지 않는다. 잿더미가 되어버려 더 움직일 수조차 없다. 돌멩이가 천천히 자리를 옮기듯 움직여야 한다. 옷자란 가지를 조금씩 잘라내듯. 지금의 나를 잘 먹이고 씻기고 재워서 멀리 가야한다. - P60
‘갓생 살기 챌린지‘가 유행할 때, 이 시대가 앓고 있음에 대한 징후라고 생각했다. 서점의 에세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면 현시대의 병증이 무엇인지 잘 보이는데, 책 표지들은 번아웃이 온 사람들에게 "쉬어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 P60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그저 나로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냥 살자. - P61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지만, 가끔은 특별해도 되겠지. - P61
여기서 무엇보다 고민스러운 지점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든, 부정적으로 바라보든 갓생의 모든 방향성이 오로지 ‘나‘에게만 향한다는 것이다. 갓생에 담긴 동기나 의미, 실천 방법과 과정 등을 살펴보면 ‘너‘ 혹은 ‘우리‘를 함께 지향하는 가치를 발견하기 어렵다. 갓생의 성공도, 갓생의 실패도 전부 ‘나‘에게로, 말하자면 모든 성패가 한 개인의 능력과 실천, 의지로 수렴된다. 이는 집단과 소속을 우선시했던 시절에 비하면 개인의 가치와 의미가 성장했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타인과의 관계에서 취약해진 탓은 아닐까. - P65
또 반려동물이든, 금쪽이든, 배우자든 타자와의 관계에 능숙한 이들이 가장 존경받는 멘토가 되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타인은 지옥‘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갓생은 ‘타인‘이라는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떨어질수록, 그렇게 ‘너‘와는 거리를 두고 비대면을 유지하고 싶을수록 더욱 커지는 나만의 꿈은 아닐는지. 이우선의 사진 속에서 고립된 수많은 ‘나‘를 보면서 그런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 P65
"얼굴"은 균등한 무게를 지닌 채 있다. "동시에", "붙잡듯이", "다가오던", "손길", "손목", "팔", "너머에는", "이제", "영영", "과거로", "떠나", "버린"과 동일하다. 한 문장을 이루는 한 단어라는 의미에서. - P71
제작의 편이나 사용자의 편에서는 아무리 특정한 단어에 힘을 실으려 하여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글쓰기에는 제약이 존재한다. - P72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많은 ‘덜 중요한‘ 단어들도 결국에는 동일한 무게를 지닌 채로 문장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 P72
이 편(제작의 편)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 혹은 일으키고자 한 것은 결코 의도한 대로 지속될 수 없다. 명암은, 콘트라스트는 사라지고 흩어진다. 왜곡된다. - P72
이러한 무자비한 공평성이 글쓰기의 제약이자 매력이고 가능성이다. - P72
이상우는 수많은 단어들이 동일한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하고 자명한 글쓰기의 원칙을 끈질기게 의식하고 이용하는 작가다. - P72
ⓐ탁구채 없이 홀로 서서 상상으로 탁구를 치고 있는 누타왓을 말하기 위해서 ⓐ탁구채를 필요로 하는 글쓰기의 특성 때문이다.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없는 것을 호출한다. - P72
ⓑ양팔이 없는 누타왓을 말하기 위해 ⓑ양팔이라는 단어를 호출한다. 그렇게 해서 양팔이 없는 지금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팔이 있는 시간을 동시에 보게 한다. 거기에 없지만 거기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양팔은 거기에 있다. 단어로서. - P72
누타왓은, 적어도 글이라는 시공간에서라면 양팔을 잃었지만 양팔을 가지고 있다. 탁구채를 들지 않은 채로 탁구채를 휘두르고 있다. 너를 보고 있지 않지만 너를 보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이상우가 생각하는 글쓰기라고 느낀다. - P72
글쓰기, 라는 행위가 실체에 대응/대항하여 해낼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 - P72
단어가 진짜인지 아닌지 혹은 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상상으로만 탁구를 치는 일이 결국 탁구라는 단어를 이곳으로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 P73
사진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소환하지 않고도 현재라고 불리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 P73
그렇다면 없는 것, 사라진 것, 죽어버린 것을 언급하지 않는 글쓰기도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양팔이 사라졌다면, 양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탁구채가 없다면, 탁구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과거가 없거나 미래가 없다면 말하지 않는다. 정확한 기억이 없다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우는 끈질기게 단어를 건져낸다. 그러고는 여타의 단어와 동일한 선상에 무심하게 세워둔다. 없는 것은 없지만 없지 않고 있다. - P73
"두 사람의 팔이 닿을 듯 말 듯"은 이제 어디에 두어도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어느새 맥락이나 상황이 흐려지고, 독자인 나는 이상우가 만든 이것들(이것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시간을 문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을 통과하여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강렬했던 "두 사람의 팔이 닿을 듯 말듯"의 순간으로 이동한다. 됐어, 글 읽기는 잠시 내려놓아도 좋아. - P73
단어들은 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글을 벗어난다. 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도로 이쪽(독자의 편)과 가까워진다. 이것이 단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 이다. - P73
단어는 공유 가능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리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갈 수 있다. 내 것이 되었다가도 떠나갈 수 있다. 철회할 수 있고, 철회한다. 공유되어야 하니까. 그것이 법칙이다. - P73
우리는 단어의 전부를 가진 적이 없다. 늘 나누어 가지고 있다. 공유하고 있다. "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P74
나는 이상우가 《핌·오렌지빛이랄지》에서 "버스에 타 있는 모두가 버스를 잊은 버스 안에서" "버스에 타 있는 모두가 버스를 잊은 버스 안에서"라고 써내려감으로써 "모두가 버스를 잊은" 그 상태를 거스르거나 뒤바꾸지 않으면서도 "버스"를 기억하고 "버스"를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느낀다. - P74
어떻게 샨츠와 하라와 비키와 응우옌의 잠을 깨우지 않으면서도 ‘꿈‘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꿈‘이라는 단어를 공유할 수 있을까. - P74
이상우는 각자에게 속하는 것이지만 결코 각자의 것만은 아닌 것으로서의 글쓰기를 한다. 그러한 글은 각자의 것이 아닌 것만큼이나 현재의 것이 아니고, 미래의 것도 아니며, 과거의 것도 아니다. 모든 곳에 동시에 속하며, 동시에 지워진다. "버스에 타 있는 모두가 버스를 잊은 버스 안에서"라고 쓰는 순간, 버스는 하나로는 잊히고, 둘로는 생생해진다. - P74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사람이야, 라고 굳게 믿어왔던게 무너지는 느낌 - P78
박솔뫼 소설의 화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람의 일부와 저런 사람의 일부가 전부 나의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 P78
가족이나 애인, 혹은 절친한 친구는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보증해주는 사람들이어서 불안감이나 혼란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런데 박솔뫼의 화자는 자꾸만 그다지 가깝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고,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랑 정말로 진하게 얽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사람들이랑 연결되려고 한다. ‘미역‘ 같은 걸로. - P78
단어는, 말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게 아니고, 그래서 누군가가 그것을 특별히 여긴다고 해서 모습을 바꾸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 말이 나의 말이 되어버"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일까. - P78
사장의 고리처럼 걸린 것이라는 말은 이후로도 여러 번 나를 찾아와서 이제는 이 말이 나의 말이 되어버려서 새로운 물건이나 조금 동떨어진 뭔가를 시도할 때 나는 이게 그냥 고리에 걸려서 하게 되는 거라니까 말하게 되었다. - P78
이미 존재하는 것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되는 가능성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모습을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우리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 가능성을 박솔뫼는 오래전부터 "말"에서 찾아온 것 같다. - P78
말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모습을 바꾸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달라지게 만드니까 자꾸 고리로 사용하고 싶어진다. (특정한 말을 자꾸 하다 보면 "고리에 걸린" 기분이 든다. 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기분이 그런 것뿐이지만 뭔가가 변한다.......) - P79
먹을 수 있는 미역은 먹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어서 좋지만 어느새 그것은 내 것이 되어버린다. 공유할 수 없다. 그러나단어인 미역은 여기에도 갈 수 있고 저기에도 갈 수 있으며 ‘나‘에게 와서도 붙을 수 있고 아미에게 가서도 붙을 수 있다. 그렇게 해도 그대로다. 그대로이면서도 ‘나‘와 아미를 한데 묶는다. 아미와 아미의 남자친구를, 혹은 ‘나‘의 친구를, ‘나‘의 친구의 친구를. 이상하게 한데 묶어놓는다. 단어란 그런 힘이 있다. - P79
아미는 형체가 없는 걸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인물이고, 박솔뫼는 그게 글쓰기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 P79
이 단어를 가져다가 쓰세요. 박솔뫼는 말한다. 이 단어가 형체가 없어 보이고, 또, 만질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를 멍이 들 정도로 깨물고 만지고 싶다는 마음이 형체가 없는 것 같지만 그걸 글로 쓰게 되면 절반 정도의 형체를 지니게 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단어를 가져와서, 혹은 원래 있던 것을 가져와서 쓰면 된다. ...(중략)... 그러면 무언가가 변하지만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채로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잘 모르는 사람들과 나를 연결하는 방법이다.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도 변할 수 있다. - P79
에세(ESSE)는 라틴어로 ‘존재‘라는 뜻입니다. - P84
당신을 보았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나에게 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 마주침은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 P89
사실 시를 쓰는 일 자체가 여길 좀 보라는 말을 전하는 일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고, 그런 마음으로 눈앞에 없는 사람에게 가까스로 전하는 서툰 말하기가 바로 시 쓰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P89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목소리에 마음을 맞추고, 보이지 않는 시인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면 결국 그 한 편의 시가 내 마음속에 깊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깊은 의미에서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 P90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설령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그건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여보세요, 여길 좀 보시라구요.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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