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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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 계절』. 이 책에는 자연이 그러하듯 사계절이 등장한다. 해당하는 계절마다 여러 편의 단편이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 계절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듯한 묘사력으로 계절마다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그동안 접했던 소설들과는 조금은 다름을 느껴본다.
 

 

  대개의 소설은 인물을 중심으로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어떤 일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매개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갈등이 점차 해소되거나 깊어지면서 완급이 조절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이 책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좀 더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자신에 대해서도 주변에 대해서도, 화자는 주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서술하는 관찰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봄 나무의 말》에서는 회화나무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자신이 지켜본 마을 일꾼 닷근이, 꽃서방, 새악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한다. 《여름은 지나간다》에서는 집안의 ‘하’가 나무의자를 끌어다 창가에 놓고 한낮의 밖을 바라본다. 밭에 가는 ‘파’, 무언가를 두드리러 숲으로 가는 소년, 새를 잡는 사내에 대해 우리는 잠시 ‘하’의 시선을 빌리게 된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 아닐 수 없다. 화자는 분명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어떤 중심에서 한 발자국 뚝 떨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어째서 이런 느낌을 받는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단편들을 읽으며 그 이유가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고방식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를 좋아하는가. 온갖 추측과 편견이 난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속의 화자들은 상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별다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되 모르는 것, 의심스러운 것은 섣불리 단정 짓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는 편이다. 심지어 이상한 일이 생겨도 그냥 그뿐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평소 자주 마주쳤던 누군가가 어느 날부터 사라져 안 보여도 잠깐 의문이 생기고 궁금증이 생기긴 하나 화자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킨다.

 


  《세한도》에서 ‘여자’는 한겨울에 슬리퍼 차림 그대로 나가 텅 빈 동네를 누빈다. 비즈 공예용 전기인두로 팔뚝에다가 글자를 새기는 선짓국집 남자, 노파, 그리고 동네에 점점 늘어나는 낙서들.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여자는 상관없다고 느낀다. 분명한 것은 추위뿐이다.
  이런 패턴은 다른 단편들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2월 12일-이상에게》에 등장하는 ‘이응’은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매번 같은 걸 찍어 필름을 장독에 넣어두는 남자다. 강씨, 일곱 번째 집의 아이, 길과 시장통의 모습 등등 스스로도 소용없는 것들을 찍는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왜 찍어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카메라의 둥근 구멍을 통해 바라보고 셔터를 누를 뿐이다.
  그 와중에 《바다, 夏日》에서 ‘미음’이 목격한 일이라든가 그로 인해 조성되는 긴장감, 마지막 장면, 《Fall to the sky》의 마지막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자신이든 타인에 대해서든 전후 사정을 몰라도 대해 그리 크게 고민하지 않는 화자들. 그들은 주변에 불명확 것들이 늘어나더라도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했다. 아니, 잠시나마 생각을 해보려 해도 계절의 존재가 압도적으로 모든 것을 제압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화자들이 느끼는 것은 오로지 계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캡슐 안은 생생해서 미칠 듯한 더위가 전부였다. 여자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는 것은 선명한 더위 말고는 일말의 것도 없었다. 정점에서 더위 아닌 모든 것들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관람차에 오르면서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 모두. 어디어디부터 어디어디까지의 것 모두.
  찌고 숨 막히는 듯하다가 더위는 고스란히 살을 에는 통증이 되었다. 어떤 느낌도 여자에게 이토록 명징했던 적이 없었다. 혹독했으며 처음이며 마지막일 것 같았다. 정점을 지나면 다시는 겪지 못할. (p.165, 《하이눈, August》)

 

이응은 어둠 속에 서서 작은 글씨를 오래오래 읽었다.
동네는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이유도 없이 언제까지나 오글거렸다.
바람이 불고 추웠다. 몹시 추웠다. 세상에 분명한 건 그것뿐이었다.(p.70,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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