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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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추억 중 하나는 바로 놀이공원에 관한 것이다. 하나같이 재미있어 보이는 놀이기구들과 알록달록한 장식들, 그리고 흥겨운 음악 소리. 그곳은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혼을 쏙 빼놓는 곳이자 마치 동화 속 세상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 거대함과 화려함이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먼 훗날 그곳을 다시 갔을 때는 어렸을 적의 감동과 감흥을 그대로 느낄 수 없었다. 여전히 신나고 즐거운 곳이기는 했으나 어린아이가 느꼈던 반짝임과 마법 같은 분위기는 사라졌다고나 할까. 이런 말에 어쩌면 누군가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 않냐고,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 펼치는 세계명작동화마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나오고, 마법사는 이런저런 마법을 부리며 뭐든 이루어지게 하는 만큼 자유롭게 어떤 상상이든 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이 정말 실존하는지의 여부는 잠시 내려놓고 그것 또한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 소녀가 “여왕이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가서 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남자로 변장을 해서 여왕을 속여야”(p.24)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일곱 살 생일까지는 남자애이고 이후에는 여자애가 된다는 말에 어쩐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남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얘기더라도 아이 자신에게는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우리가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아이들 측면에서는 그들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나름의 세상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 속 단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어린 시절 분위기와는 많이 다름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보통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이들만의 순수함, 해맑음, 환하고 밝은 느낌들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작품들은 어딘가 무겁고 거무스름하고 괴이하며 불분명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꿈과 현실을 오가는 생생한 경험들이 인상적이다. 배수아 작가의 글은 그 혼돈스러운 경계 속에서 삶과 죽음에 밀착하며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책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중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는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단편 「노인 울라(Noin Ula)에서」로 이어진다. 노인 울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기차역으로 그곳에 도착한 소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외모를 설명한다. 역장도 부관도 그것은 사령관의 외모라 말하자 소녀는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머무르게 되고, 그러던 중 긴 머리를 붉은 리본으로 묶고 있는 눈먼 소녀를 만나게 된다. 사실 이 눈먼 소녀는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도 잠깐 등장했었다. 소녀는 그녀를 경찰서 분실물-미아 센터에서 본 적이 있다.

 


  「노인 울라(Noin Ula)에서」는 소녀와 눈먼 소녀와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두 소녀는 여러 부분이 비슷하다. 둘 다 이름이 ‘눈 아이’라는 점, 눈먼 소녀도 소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찾고 있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는 서커스의 여자마술사로 특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마술인데, 눈먼 소녀의 어머니는 흉노 여왕을 위해 일하는 마법사로 그 자리에서 모습이 쓱 사라져 버릴 때가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소녀는 눈먼 소녀와 다른 존재임에도 둘은 때때로 겹쳐 보인다. 눈먼 소녀가 교수형을 당해 죽고 붉은 리본만이 남았을 때, 소녀는 그것을 주워 자신의 짧은 머리에 묶고 그대로 사라진다. 그날은 소녀의 일곱 살 생일이었다.

 


  이 책은 꽤 흥미롭다. 어떤 요소들은 다른 소설 속에서 조금씩 다른 구성으로 재등장하거나 반복되었는데 그럼으로써 각각의 소설은 다르면서도 닮아 있었고, 불안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뽐내면서도 저마다의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일곱 번째 생일이 다가오지 않은 나에게, 누나는 넌 여자애인데 언제까지 사내아이처럼 하고 다닐 거냐고 잔소리를 늘어놓는가 하면(「얼이에 대해서」), 교사는 반에서 키가 가장 작은 아이 리우진을 두고 사내아이가 아니었냐며, “일곱 살처럼 보이는 열두 살 여자아이가 정말로 앉아 있었던 걸까.”(「1979」, p.102)라며 문득 기묘한 의문에 휩싸인다.
  이웃에 사는 아이이자 내 짝인 얼이는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마술사가 되기 전에 반두의 왕이었다고 하고(「얼이에 대해서」), 언덕 꼭대기 작은 식당에서 열린 시낭독회에 방문한 화자는 사람들 앞에서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할머니가 반두의 여왕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한다.(「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소녀와 소녀가 짝을 이루는 조합 역시 이 책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소녀와 눈먼 소녀(「노인 울라(Noin Ula)에서」), 키 큰 소녀와 리우진(「1979」), 나와 “나는 네 언니야.”라고 말하는 소녀(「도둑 자매」)들은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결속력과 동질감을 형성한다. 같이 집에 간다거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장난을 치기도 한다. 때로는 비밀을 공유하며 아무에게 말하지 말아달라 약속을 주고받는다. 반면 소녀와 소녀는 아니지만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면 나와 얼이(「얼이에 대해서」)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어쨌든 이들에게 있어 나와 너라는 구분은 그리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의 우리라는 것은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이기 때문이다.

 

소녀가 웃으면서, 춤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친 최초의 낯선 것이었다. 그 마주침으로 인해 소녀는 나이자 곧 세계가 되었다. (「도둑 자매」, p.154) 

 


  이 책의 표제작인 「뱀과 물」은 읽으면서 어렵게 느낀 작품이고,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이 떠오른 작품이다. 여기서는 한 인물이 내면의 여러 인물로 분열되는데 여교사 김길라는 상황에 따라 전학생 김길라가 되기도 하고 늙은 김길라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뱀과 물이 나오는 꿈을 꾸고는 한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무척 기괴하다. 오물과 배설물과 피, 찢기는 장기와 잘리는 머리, 끔찍한 태아의 모습이 가학적이고 자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여교사는 이 모든 광경을 거울을 통해 본다. 자신의 모습에 충격에 빠진 그녀는 거울을 깨뜨린다. 하지만 그런다고 깨진 거울이 참혹한 그녀의 모습을 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교사는 자신을 죽여달라 애원하지만 뱀과 물은 그러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꿈이다.

 


  그런데 자주 꾸는 그 꿈이 여교사에게는 어린 시절보다 오히려 더 선명한 시간이고 직관적 인식에 가깝게 한다. 오래전의 일은 “피부 아래의 아득한 감각”으로 남아 있을 뿐, 여교사는 어린 시절을 두고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p.223) 생각한다. 한편 「1979」에서 교사의 동생은 어린 시절에 대해 그런 건 없다며 그 자체를 망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p.94)


 

  이들의 의견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늘어놓거나 혹은 어린 시절은 그런 게 아니라며 부정할 마음은 없다. 어린 시절은 사람마다 다 다를 테니까. 간혹 선하고 아름다운 관점으로 무조건 좋은 점만 바라보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도 왠지 조금 불편하다. 당사자가 경험하고 느낀 것은 무시됨과 동시에 어느 일방적인 면만 주장되는데 그 역시도 어찌 보면 일종의 편협적인 사고가 아닐는지. 그리고 그러한 태도 자체가 사람을 압박하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 약간 거북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소녀였고, 교사였다가 여교사 김길라였다가 할머니의 푸른 양철 가방을 들고 여행하는 화자였다. 등장인물들을 따라 여러 어린 시절을 겼었으며, 그들의 꿈을 따라 서커스 공연을 보러 갔다가, 과수원집을 갔다가, 해변을 가기도 했다. 「도둑 자매」에서 소녀가 눈을 감았다 뜨니 “그사이에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p.169)라고 하는데 나 역시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이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어린 시절) 대신, 지금에 집중하며 앞으로 현재와 미래를 잘 이어나가자 다짐해본다. 그런데 어떻게?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언제 어디서든 몇 번이고 되뇔 수 있는 문장부터 정해볼까 한다. 소설에서는 화자들을 맴돌며 반복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니 이 부분을 자신에 맞게 활용해 “한번 소리 내어진 말들은 그렇게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도둑 자매」, p.152)” 여기고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키워나가면 어떨까 싶다. 자기만의 주문을 만들어 틈틈이 말해볼 것. 어느 순간에는 분명 그 자체로 환기가 되고 큰 힘을 발휘해주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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