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런 나이에서 저는 이제 한참이나 멀어진 듯합니다. 하기야 그 무렵에도 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를 만한 용기도 없었고, 섣부른 판단으로 누군가로부터의 꾸지람을 자초할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순간 저는 거쳐야 할 단계를 뛰어 넘어 아이에서 갑자기 애어른으로 돌변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일찍 철이 든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에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월반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에 합당한 고통이 따르를 뿐 아니라 훗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지난 주말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가늘게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여느 아침보다 조금 더 어두웠고,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날아갈 듯 부풀었습니다. 빗속에서도 도토리를 모으느라 분주한 청설모 가족과 왠지 쇳소리가 섞인 듯한 까치의 울음 소리가 조용한 숲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단비였던지요! 말못하는 짐승들도 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저리도 분주한데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난 난민들은 다가올 겨울을 어찌 날런지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제 시리아 난민 돕기 성금 모금에 작은 정성을 보탰습니다. 터키 해안에서 익사한 채 발견돼 전 세계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던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어린이의 시신을 뉴스에서 본 후 그 모습이 내내 제 머릿속을 맴돌았고,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된 자로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지요.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결혼식장 공습으로 인해 예멘의 무고한 시민들이 백 명 넘게 죽기도 했으니까요.

 

오늘 아침부터 저는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소설이지요. 이 소설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작가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합리적인 어떤 이유도 없이, 단지 잦은 런던 공격에 대한 보복성의 상징적 의미만 있었던 '드레스덴 폭격'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1944년의 잔인한 사건이었죠. 3,900여 톤에 해당하는 폭탄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13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민간인이었다고 합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한 희생자 수가 7만을 조금 상회하였을 뿐이니 '드레스덴 폭격'의 참혹함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체험을 메타픽션의 기법으로 소설화한 <제5도살장>에서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의 참전 내용은 보네거트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검안사 빌리 필그램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는 스무살에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커트 보네커트와 마찬가지로,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후송됩니다. 이야기는 빌리 필그램이 트라팔마도어 우주인에게 배운 순간이동기술법에 의해 자유자재로 시간 이동을 하면서 진행되는 까닭에 시간적 혹은 공간적으로 순차적 진행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몹시 혼란스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순간이동기술법이라는 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빌리 필그램의 착각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심하게 병들고 심히 무력한, 거대한 힘의 노리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대단한 인물이 될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p.191)

 

이와 같은 해체적 배열이 갖는 특징은 정신 분열증입니다. 작가는 빌리의 의식 속에 끼여드는 무의식적 상흔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방식을 의도적으로 도입한 듯 보입니다.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 때문에 작가도 어쩌면 빌리처럼 정신 분열증을 겪었었는지도 모르지만 분열증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는 참상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이미 병들어버린 현실에 대한 잔혹한 냉소, 선량한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 그를 통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작가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테구요.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p.77)

 

이 책에 등장하는 위의 시는 많이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커트 보네거트가 누구인지, <제5도살장>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일체 알지 못했던 독자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작금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런지요.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을 기원하기보다는 저는 '내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염원하고 싶습니다.

 

"뒷날,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빌리에게 이와 같은 선택적 집중이 가능했더라면,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햇볕을 듬뿍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택했을 것이다." (p.228)

 

오늘은 가을 햇살이 유난히 좋군요. 내일은 고3 수험생들의 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구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혹 인생의 그 모든 과정이 허무하다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소설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모든 이들에게 후렴구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 이 말을 들으면 이 세상을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전쟁에 대한 회의감도 함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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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11-11 13:18   좋아요 0 | URL
우앗 며칠전에 구하려 했는데 없어 중고 알아보고 있었어요.
무척 반갑네요 :)

꼼쥐 2015-11-12 15:34   좋아요 1 | URL
아,그러셨군요. 지금 이 책은 대부분 출판사에서 품절인 것 같더라구요.

다락방 2015-11-11 16:13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몇 년째 책장에 꽂혀있는데 이제 읽어봐야겠네요.

꼼쥐 2015-11-12 15:38   좋아요 0 | URL
언젠가 도서관에서 다락방 님이 쓴 책 한 권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어요. 저는 책을 출판한 사람이면 무조건 존경하고 보는 습관이 있어서 `우와, 대단한 분이시구나!` 생각하면서 다락방 님의 블로그에 방문하면서도 댓글은 달지 못하고 늘 눈팅만 했었죠. 이렇게 제 블로그에 다락방 님이 직접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정말 놀랐어요. 더없이 반갑구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