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제작년이나 작년쯤이었던것 같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전 하더라도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경제에 이바지한 전쟁이라 생각했었다. 그 관점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때 틀린말은 아니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외화벌이는 분명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비록 우리는 돈을 벌었지만, 그 나라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했고,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늘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올려볼까 한다.

 

1.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는 군복을 벗은 뒤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 초기에는 한국의 경제력이 매우 열악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리마 운동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북조선보다 훨씬 못살았고, 이승만과 친일파 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는 한국 경제를 더더욱 망쳐놓았다. 따라서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정권 기간동안 경제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던 시기 박정희는 미국에게 요청을 받았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다. 외화를 벌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박정희는 전세계가 비판하는 그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많은 군대를 파병했고, 전쟁 기간동안 연 5만 이상의 군대를 베트남에서 유지시켰다.

(베트남으로 파병 되는 한국군 병사들.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베트남 전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다.)

 

박정희가 파병한 그 전쟁은 결국 미국이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군 또한 1973년 3월에 완벽히 철수했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유신독재를 감행하며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미화했고, 대한뉴스같은 선전매체들은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 거기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핑계삼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다시한번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얘기하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이 옥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베트남 전이 진실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에서 청룡부대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다. 퐁니 퐁넛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군이 벌인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여자나 아이였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ㅡ 미안해요 베트남 p.157

(퐁니 퐁넛 학살을 담은 사진)

 

10일 뒤인 2월 22일 청룡부대는 꽝남 성에 있는 또다른 마을인 하미 마을에서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135명을 학살한 한국군은 그 시체를 암매장해버렸다. 학살당한 민간인들 중에는 1살이나 2살 짜리도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 경에 호이안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

 

ㅡ 팜티호아,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의 증언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퐁니 퐁넛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66년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떠이션 현에 있는 고자이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이고, 다른 하나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빈호아라는 곳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맹호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총 380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고, 청룡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빈호아 학살로 총 43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빈호아 학살 한국군 증오비)

(고자이 학살 위령비)

 

"한국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땅굴에 숨었지. 그들이 땅굴 속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었어.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고 ‘컥’하니 숨이 막혀왔어.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땅굴 밖으로 기어오르면 한명씩 총을 쏘아 죽였지."

 

ㅡ 고자이 학살 생존자 판티부이 할머니의 증언

 

“1966년 12월3일(음력 10.22) 빈호아 사, 롱빈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3일에서 6일까지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을 당했지요. 응옥흥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인 후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기도 했지요.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습니다.”

 

ㅡ 1999년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과 인터뷰를 한 마을 부주석의 증언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즉 이 글에 언급된 것 외에도 학살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2. 학살 부정측에 대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월남전 참전 용사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1990년대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수정 박사가 공론화를 하면서 부터였다. 그래서 그 이후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을 찬양하는 극우계열 인물들과 세력들은 학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위에 언급한 고자이 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그 마을 벽화에 그려진 고양이과 동물은 호랑이가 아닌 흑표범이다. 즉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의 흑표범 마크지 맹호부대의 호랑이 마크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마치 정말 그러한듯 하다. 실제로 찾아보면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피해자들은 분명히 한국군의 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정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보도연맹 학살. 1950년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잠재적인 빨갱이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을 3개월 동안 대량 학살했다.)

 

학살 부정측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거짓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것과 달리 한국군은 그리 이성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뿌리는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했던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잠재적인 빨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심증만 가지고, 최소 30만이나 되는 자국 민간인을 단기간에 학살했던 전력이 있다. 많게 보면 100만까지도 잡는다. 즉 한국군은 자국민 수십만을 학살했던 전력이 있기에, 절대 깨끗한 집단이 아니다. 자국민을 수십만 학살했던 집단이 과연 타국에서 도덕성이 지켜진다는 믿음은 그저 학살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상상이다.

(미라이 학살.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의 부대는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총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하루 만에 학살했다. 이 사건은 군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를 통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이 부정하기 위해 드는 것들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하가지만 더 들겠다. 학살 부정측은 미국의 미라이 학살을 들며 한동안 여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군 학살을 부정한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의 그리 학살했으면 미군처럼 이미지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했을 것"이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미라이 학살 사건 또한 파뭍힐 사건이었다. 파뭍힐 뻔하던 사건이 양심적인 기자에 의해서 공론화 된 케이스다. 즉 그 사건도 얼마든지 한국군의 학살처럼 장지간 동안 묻힐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 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동원했던 알제리측 부대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서방세계는 명성이라곤 별로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고, 동맹인 미국 또한 한국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즉 그들은 이점을 놓치고 있다.

 

3. 결론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붙히자면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극우반동세력의 모략을 잠재우는 방법은 공동 진상조사다. 현재 승전국 위치에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도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라 진상조사는 좀 힘들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당장의 해결이 힘들지라도 최소한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라크 전쟁. 2003년 미국이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당시 한국의 한나라당은 베트남 전쟁을 운운하며 이라크 파병을 적극 주장하였다.)

 

극우세력들이 학살에 대해 부정하려고 하지만, 필자는 분명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을거라 믿는다. 왜나하면 필자는 내 나라의 군대가 아주 쓰레기 같은 똥별 똥군기 집합체들로 인하여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했던 사실을 역사를 공부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한국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우세력이 뭐라하든 구수정 선생을 비롯한 진보 계열 학자들이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필자는 학살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보지만, 베트남 전 참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본다. 베트남 전쟁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정 공세 이후 대규모의 반전운동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랬던 전쟁이기에 미국사람들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미국이 만든 수많은 베트남 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미안해요 베트남'운동 )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었다다. 즉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세력들은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다"라며 전투부대 파병을 주장했었다. 한나라당 세력들의 무책임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을 아주 잘 보여준 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부터가 잘못됐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반성의식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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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기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필하시길^^

NamGiKim 2019-02-01 22:23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벨루치님도 즐거운 명절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