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손바닥 정도의 작은 문고판인데다가 아주 얇다. 그런데 처음 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어려웠다.(번역가들이 번역하기에도 난해한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저 탄식할 뿐, 더할 나위 없는 걸작”이라고 격찬을 했으며 문학가 마사무네 하쿠초 또한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작품”이라 감탄하였고, 나카무라 미쓰오는 “일본 근대 소설 중 열 작품을 꼽으라 하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걸작”이라는 호평을 했다. 이러니 호기심이 당길 수밖에.
이야기는 오사카에 있는 묘지에서 시작된다. 화자는 절 안내인을 따라 슌킨의 묘 앞에 왔다. 슌킨의 본명은 모즈야 고토다. 경사면 중턱을 평평하게 만들어 조촐한 빈 땅에 지은 묘이다. 모즈야 집안은 이미 몰락해서 일족 중 한 사람이 참배하러 올 뿐이어서 집안의 고귀한 사람이라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 옆에 작은 묘는 슌킨의 문하생이자 실질적인 부부였다는 사스케의 묘지가 있다. 이들은 영묘한 인연으로 얽혀 저녁 안개 아래, 동양 제일의 공업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이다. 묘지가 여기에 위치하게 된 것은 사스케의 순정과 생전에 정해두었다는 설명도 들어있다. ‘나’는 슌킨의 무덤 앞에 예를 표하고 검교(檢校)의 묘석을 어루만지며 석양이 질 때까지 천천히 거닐었다.
그 무렵 ‘나’는 <모즈야 슌킨전>이라는 소책자를 접하고 슌킨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슌킨 3주기에 제자인 검교가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스승의 전기를 편찬하여 선물로 나누어 준 것이었다. 내용은 문장체로 엮어 있고 검교는 3인칭으로 써 있었지만 틀림없이 이 책의 저자는 검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려서 춤을 배웠는데 스승도 혀를 내두를 만큼 영특하고 현명하고, 단정한 용모에 고아한 분위기의 마치 신과 같이 여겨졌다는 내용이 써 있었다. 겉보기에 나이도 37세라고는 해도 27,8세로 보였다.
슌킨은 9살 때 불행하게도 눈병을 얻게 되고 양쪽 눈이 실명하게 된다. 부모는 비탄에 젖어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부모로서 얼마나 고통스런 상황인가. 그때부터 춤을 그만두고 거문고를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응성받이로 자라서 교만한 구석이 있었지만 애교가 있고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나 붙임성이 있어서 형제 중에서도 사랑받았지만 막내에게 딸려있는 유모는 그녀를 미워했다고 한다. 검교는 혹시 유모가 그녀를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나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맹인이 되고 나서 무용을 그만 두게 되고 거문고에 입문하게 된다. 스승은 그녀가 10세 때 그토록 어렵다는 [새벽 달](오사카 지방의 사미센 가곡(地唄). 미네자키(峰崎)고토(勾?)가 애 제자의 죽을 슬퍼하며 1주기를 추모하며 만든 곡으로 명곡으로 알려져 있음. 긴 간주곡이 특히 역작이라고 함.) 을 들려주었는데 혼자서 모두 외워 사미센으로 연주했을 정도로 음악에 선천적인 재능을 보여 놀라게 했다. 영혼을 불태우듯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오사카의 본가의 도움을 받는다.
특별히 장래에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단지 열심히 기술을 갈고 닦을 뿐이었다. 스승은 엄격하게 대했지만 혼내는 일은 없었고 칭찬해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친절하고 상냥하게 가르쳐주어서 선생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열 세 살 사스케가 아홉 살의 슌킨과 만났을 때 이미 그녀는 실명을 해서 아름다운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만날 때부터 그랬으니까 사스케는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원래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얼굴로 생각했기에 오히려 행복했다고 한다.
슌킨에게는 12살인 언니와 6살인 동생이 있었는데 그들보다 기량이 뛰어났다. 그리고 사스케가 슌킨을 사랑하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장애 때문에 연민과 동정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모습에서 신기한 기운 같은 걸 느껴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 그게 아니라는 오해를 하고 수군거리면 그런 말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며 반박을 했다. 하지만 사스케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처음의 불타는 듯한 숭배의 마음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면서 착실하게 섬겼기에 연애라는 자각이 없었고, 있다고 해도 상대는 천진난만한 딸이고, 누대에 걸친 주인의 따님이어서 그저 분부를 받들어 함께 길을 걷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스케만이 아니라 여자 하인이 시중을 들 때도 있었는데 슌킨이 사스케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사스케가 14세였던 때부터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매일 검교의 집에 가서 공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데리고 오는 일을 반복했다. 누군가 왜 사스케에게 시중을 들게 했느냐고 물으면 슌킨은 사스케다 온순해서 그랬다고 한다.
영민하고 조숙한 그녀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제 육감이 더욱 예민해져 사랑을 인식했음에도 사스케에게는 털어놓지 않아서 처음부터 사스케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그녀를 시중을 드는 일은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제멋대로인데다 맹인 특유의 고집이 있어서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신경 쓰지 못한 사이 그녀의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어서 얼굴 표정이나 동작을 놓치지 않아야 했기에 신중함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슌킨은 사스케를 은근히 짖궂은 장난으로 괴롭히기도 했는데 그는 오히려 어리광을 부리는 듯 일종의 은총으로 여기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슌킨의 시중을 들면서 그녀가 연습하는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히 음악의 취미가 길러졌다.
나중에 사스케도 맹인이 되어 슌킨의 명예를 얻어 검교의 자리를 얻고 음악을 했지만 슌킨이 높은 하늘만큼의 천재적인 재능이 타고 났다면 사스케는 엄청난 노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스케는 14세에 변변치 않은 사미센 하나를 사서 동료들이 모두 잠든 심야에 연습을 했다. 5,6명의 종업원이나 견습생이 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로 천장이 낮고 좁은 방에서 그들이 잠자는 것을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조건으로 비밀스럽게 부탁한 것이다. 불평을 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들이 숙면을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벽장 속에 들어가 연습을 했다.
이렇게 몰래 연습하곤 했던 일이 같은 방 동료 외에는 몰랐는데 어느날 새벽 슌킨의 어머니의 하녀가 화장실에 있을 때 [雪]이라는 곡이 들려서 알게 되고 너도 나도 들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슌킨의 어머니까지 알게 된다. 하지만 사스케는 아직 모르는 줄 알고 대담해져서 일하다가 쉬는 짬이 생기면 연습하다가 나중에는 잠이 부족해지고 따뜻한 곳에만 있으면 졸음이 쏟아지게 된다. 그리고 새벽 세시에 빨래 말리는 곳에서 혼자 연습을 하다가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면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리하여 점포 지배인에게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고 사미센을 몰수당했지만 안에서는 어느 정도 칠 수 있는지 듣고 싶다는 의견이 나왔고, 생각지 않은 곳에 구원의 손길이 펼쳐졌는데 그 사람은 슌킨이었다. 이리하여 11세의 슌킨과 15세의 사스케는 사제의 연을 맺고 견습생 일을 하는 한편 일정 시간을 정해서 사미센 배우는 것을 허락받게 되었다. 하늘을 오를 듯이 기뻤음은 물론이다. 평소 신경질적이었던 슌킨이 어떻게 그런 혜택을 사스케에게 허락했을까, 궁금해 했는데 아마도 주위 사람의 의견이 전달되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알고 보니 고용인들이 신경질적인 슌킨을 시중드는 것이 힘들고 슌킨과 사스케가 같은 취미를 갖고 있으니 그쪽으로 유도해서 그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아마도 사스케가 신의 가호가 분에 넘친다고 기뻐할 것이라며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사스케가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어쨌든 영악한 하인들 덕분에 이렇게 둘의 운명은 시작되었다.
이 둘은 주종(主從)관계도 아니고 동문(同門)도 연인 사이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2,3년 계속되다가 나중에 순쇼 검교가 죽고 나서 슌킨은 스승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어린 스승 슌킨은 네 살이나 많은 제자 사스케에게 어떻게 가르쳤을까. 야무지게도 슌킨은 바보, 이것도 외우지 못했느냐고 소리지르며 북채로 사스케의 머리를 때리는지 훌쩍훌쩍 우는 소리를 들은 고용인들을 놀라게 했다. 슌킨은 가학적인 면이 있었다. 그런데도 사스케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슌킨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과 연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슌킨이 애지중지했다는 휘파람새와 종다리 이야기도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새는 휘파람새였는데 ‘텐코’(우렛 소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지저귀는 소리를 즐겼다. 슌킨의 재능을 샤미센, 칠현금만이 아니라 작곡도 할 줄 알았고 다양한 재능이 있었다. 거문고를 연주하면 휘파람새가 기뻐하며 지저귀고 함께 연주를 겨루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부자집에 태어나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하고 살았던 슌킨에게 맹인이 된 것 말고도 시련이 있었으니 몰래 잠입한 흉한(兇漢)에게 끓는 물 세레를 받은 것이었다. 그 이후 슌킨은 얼굴과 머리를 거의 꽁꽁 싸매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스케는 이런 슌킨의 모습을 보기가 그렇게 괴로웠을까. 41세에 맹인이 된다. 세상에! 맹인이 되려고 작정하고.. 그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섬뜩하다. 하녀의 방에서 몰래 경대와 재봉바늘을 가지고 나와서 자기의 눈을 찔러서... 그리고는 슌킨에게 자기도 이제 맹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얘기는 하지 않는다. 단지 스승님을 지키지 못해서 그 빚을 갚기 위해 맹인이 되기로 했던 것 같다.
글쎄 그 부분에서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고 빚 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고 해도 멀쩡한 눈을 멀게 해서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스케는 그렇게 되고 나서 더욱 더 행복을 느꼈다고 묘사하고 있다. 눈이 보였을 때 못 보던 것을 맹인이 되고 나서 더욱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는 아이러니. 어쩌면 사스케가 맹인이 되고 나서 슌킨은 전보다 마음을 내주었던 것 같다.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을까. 사스케는 슌킨을 관념적인 슌킨을 만들어내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죽었어도 사스케의 마음 속에는 죽은 사람이 아니었다. 촉각의 세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교감에 뭉클하고 안타까운 감동으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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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쉬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