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라치 황금펜 클럽 Goldpen Club Novel
이석용 지음 / 청어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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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라치(Paparazzi)

유명 인사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카메라로 몰래 찍은 뒤 이를 언론사에 고액으로 팔아넘기는 프리랜서 카메라맨을 의미하는 이 단어의 원뜻이 이탈리아어로 “파리처럼 웽웽거리며 달려드는 벌레”를 말한다니 원 뜻과 실제 의미가 딱 제격인 그런 단어일 것이다(네이버 백과 사전 발췌). 그런데 요새는 유명 인사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서 정부가 교통 위반이나 불량 식품 적발에 이런 파파라치 신고 포상 제도를 활용하면서 “세파라치”(신고 포상금을 전문으로 타 먹는 사람들)이라는 신조어도 나오고 이를 양성하는 사설 학원들도 우후죽순(雨後竹筍)격으로 생겨나고 있다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파파라치의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파파라치”가 때로는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슬픔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너무나도 짧은 찬란한 시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행복”의 의미로 사용될 수 도 있다는 책을 최근에 만났다. “제 1회 황금펜 영상문학상 금상 수상작”인 “이석용”의 <파파라치(청어람/2012년 2월)>이 바로 그 책이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로 말을 할 수 없는 19세 청년 “길도”는 큰 누나가 일본으로 2년 짜리 장기 출장을 가는 바람에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된다. 물론 큰 누나 집에서 열 살 난 조카 “다홍”이와 함께 살면서 아침마다 아버지께서 운영 하시는 우유 대리점 배달 업무는 그대로 하는 “반쪽” 자리 독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친하게 지내는 “한상욱” 신부님이 빌려 주신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뭔가 사업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바로 “파파라치” 일이다.

 

 

당신의 일상에서 흘려보내는 멋진 순간을

전문가의 뷰파인더에 담아드리겠습니다.

당신조차 낯설고, 치명적인 매력을 발견할 기회.

당신의 일상을 담아드리겠습니다.

 

 

라는 홍보 문구를 걸고 홈페이지까지 개설한 길도에게 드디어 첫 의뢰가 들어온다. 회사원 “나애리”라는 젊은 여성의 일상을 담는 의뢰인데 첫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의뢰가 계속된다. 그런데 길도의 의뢰인들은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반년 전 남편과 아이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고 아직도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여인이 자신의 일상을 찍어달라고 의뢰를 해오는가 하면, 결혼해서 이민을 가기로 한 직장 여성이 자신의 행복했던 일상을 담아달라고 의뢰하는데 길도가 담은 사진들 속에는 그녀 주위를 맴도는 한 남자가 찍혀있다. 그리고 IT 기업 중견 간부인 한 남자는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일이 발생하자 음주 후 자신의 행동을 담아달라고 의뢰해오고, 청소년들의 카운슬러로 유명했던 한 여인은 얼굴에 병이 생겨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을 담아달라고 의뢰해오며, 또한 만화 작가는 밤마다 자신이 개로 변하여 길거리를 방황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이 변한 “개”를 촬영해달라고 의뢰를 해온다. 그저 사물이나 인물을 정지된 모습으로 포착하는 것에 불과한 길도의 사진에는 뭔가 다른 것이 담겨 있다. 바로 의뢰인들의 슬픔과 상실을 치유하는 힘이 있던 것이다. 사물과 사람의 이면(裏面)의 모습까지 포착해내는 길도의 사진 때문에 의뢰인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 바로 “참 착하다”라는 말이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사물을 카메라 앵글로 잡아내는 파파라치 “길도”는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세상에 대해 참 따뜻하고 선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 물론 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세상에 대해 심한 차별이나 피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약자(弱者)” 일 수 밖에 없는 장애인들이 험난하기만 한 이 사회를 살아가기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 너무나도 착한 청년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또 어떤가. 아들의 장애를 안 순간부터 아들의 미래를 위해 서점과 우유대리점을 경영하기 시작한 부모님들은 길도를 세상 풍파와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어른 뺨 칠 정도로 똑똑하고 속 깊은 조카 “다홍”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삼촌을 이끌어가는 야무진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 밖에도 두 살 연상의 애인 “화심”이나 동네 친구인 “민규”, 길도에게 카메라를 빌려주고 후견인 역할을 하는 한상욱 신부에 이르기까지 길도의 주위에는 길도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런 주위 사람들의 한없는 격려와 사랑이, 그리고 길도의 세상에 대한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이 카메라 앵글에 고스란히 담겨지고, 피사체가 된 의뢰인들의 가슴 속 깊은 상처까지 바깥으로 드러내 그런 상처와 슬픔을 어루만져 주기에 이른다. 즉 길도의 사랑과 행복이 그네들의 아픔을 치유하게 되는, 행복은 전염된다는 하버드 대학의 연구 결과에 딱 맞는 그런 이야기들인 셈이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서 가시지가 않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서 가슴 한 켠에는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착하기만" 한 사람들과 이야기이다 보니 그만큼 극적인 “재미”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동화(童話)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에도 선악이 대립하고 극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하는 데 이 책은 딱히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도 없고 이렇다 할 클라이맥스도 없고 그저 잔잔하게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너무나도 착하기만 하기에 길도의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허구의 인물로 느껴지는 것도 이 책의 성격상 어쩔 수 가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기승전결(起承轉結)” 이라는 서사 구조상 전(轉)과 결(結)이 빠진 듯한 맥 빠진 이야기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책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무슨 절대 법칙은 아닐 것이며,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무슨 불법이나 반칙 또한 아닐 것이다. “착하다”는 장점이 그런 밋밋함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음을 이 책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 “감동”도 분명 재미의 한 요소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이 책, 장르소설로서의 긴장감과 재미는 다소 부족하지만 읽고 나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위로를 느껴볼 수 있는 감동적인 책이었다. 이 책이 문학상 취지 - 황금펜 영상 문학상 취지가 소설로서도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되 영상화되면 더 빛나는 가치를 드러낼 그런 작품을 장려하는 데 있다고 한다 - 대로 영상화가 될지는 미지수인데,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각 단편을 꿰뚫는 서사 라인을 좀 더 보강해서 긴장감과 재미를 한껏 살린 감동적인 영상으로 거듭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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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숲의 자그마한 밀실
코바야시 야스미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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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밀실·살인>에서 “밀실트릭”과 “서술트릭”이라는 복합 트릭을 선보였던 “코바야시 야스미(小林泰三)를 3개월 만에 단편 모음집인 <커다란 숲의 자그마한 밀실(북홀릭/2012년 2월)>로 다시 만났다. 각각의 단편마다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한번 씩은 들어 봤을 서로 다른 트릭을 선보이는 이번 작품, 다채로운 성찬(盛饌)이긴 하지만 맛이 어딘가는 부족한 밋밋한 그런 느낌이었다.

 

책에는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 편의 줄거리는 인터넷 서점 출판사 소개글이나 미리 읽으신 독자들의 서평에 충분히 소개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각 단편들마다 사용된 추리소설 기법(또는 트릭)을 소개하는 것으로 책 소개를 가름해야겠다. 먼저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커다란 숲의 자그마한 밀실”에는 “후더닛(whodunit, Who has done it?)”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범인이 누구냐에 초점을 맞춘 미스터리로 대부분 고전 미스터리가 이런 방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추리 소설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작품인 “얼음다리”는 “도치서술((倒置敍述)” 기법을 사용하는데,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방법을 도입부에 미리 밝혀놓고 탐정이 그 범죄를 어떻게 밝혀내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후더닛” 기법과는 반대의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형사 콜롬보”라는 미국 드라마를 봤다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작품인 “물의 메시지”에는 “안락의자탐정”이라고 부제(副題)를 붙여놨는데, 이는 추리소설 기법이라기보다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성격이나 수사방식을 분류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안락의자 탐정”이란 사건 현장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범인이나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을 말하는데, 안락의자란 명칭 자체가 사건 현장은 안보고 자기 집 안락의자에 앉아서 푼다고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탐정이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해낸 명탐정 “미스 마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반대로 범죄 현장을 직접 누비고 다니면서 증거를 수집하고 때로는 범죄자와 일대 격투를 벌이는 “거친” 탐정을 “하드 보일드” 탐정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추리소설 장르 분류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데, 150만 년 전의 지층에서 발굴된 썩지 않은 시신(屍身)이라는 황당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는 “플라이스토세의 살인”, 고대 그리스의 역설과 논증을 연상시키는 “정직한 사람의 역설” - 작가도 딱히 분류할 방법이 없는지 “?? 미스터리”라고 부제를 달았다 -, 죽은 사람의 뇌세포에서 죽기 직전의 기억을 재생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SF가 가미된 “시체 대변자”, 말 그대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는 “길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에 대한 연구”가 차례대로 소개된다.

 

작품 속에는 저마다의 개성들을 자랑하는 독특한 탐정들이 등장하는데, 전작인 <밀실·살인>의 주요 등장인물들이었던 “도쿠 영감(후더닛)”과 “사이조 겐지(도치서술 미스터리)”, “신도 레츠(안락의자탐정)”가 등장하여 저마다 번뜩이는 추리 솜씨를 뽐낸다. 이외에도 탐정은 아니지만 역시 전작에 등장했던 “타니마루” 경부와 수사관들도 등장하니 전작을 읽어본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마치 이 책이 전작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나 또는 “외전(外傳)”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아쉽다면 <밀실·살인>의 명탐정 요리카와 탐정과 조수 요츠야가 등장했었으면 훨씬 반가웠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작가가 두 콤비는 이런 단편에 등장시키기에는 이름값(?)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초한(超限) - 한계를 초월했다는 의미로 설정으로만 보면 추리소설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최고의 천재 탐정이라 할 수 있겠다 - 탐정 “∑(시그마)”(황당 미스터리), 괴짜 과학자 “마루노코 톤키치” 박사(SF 미스터리)와 그의 조수 “나(?? 미스터리)”, 그리고 단기 기억 장애자 “타무라 니키치”(일상 미스터리) 등 독특하고 이색적인 탐정들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한다. 각 탐정들은 자신들이 해결하는 단편 한 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편에서는 조연(助演)으로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도쿠 영감은 첫 편에서 밀실 살인을 해결하고는 마지막 편에서는 단기 기억 장애를 앓고 있는 타무라와 추리 대결을 벌이고, 신도 레츠는 안락의자탐정에서 사건을 해결하고 황당 미스터리에서는 사건이 벌어진 고고학 발굴 현장의 아르바이트 역할로 등장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추리기법과 소재, 그리고 매 편마다 독특한 탐정들의 활약이 펼쳐져 한편 한편 서로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지만 너무 짧은 분량이어서 그런지 이책에서 소개하는 일곱가지 추리소설 장르의 재미들을 올곧이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특히 단편이더라도 농밀한 짜임새와 기막힌 반전이 허를 찌르는 묵직한 정통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단편들이 너무 가볍고 밋밋하다는 느낌 - 심지어 “?? 미스터리” 편에서는 미스터리보다는 “말장난”에 가깝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에 실망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정통 미스터리 뿐만 아니라 코지 미스터리( (Cozy Mystery; 일상 미스터리)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도 즐겨 읽으니 이 책 정도의 가벼움이야 많이 접해봤다고 할 수 있어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었고, 다양한 장르의 추리소설 기법들과 독특한 탐정들을 한 책에서 만나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긴 했지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래도 부담 없이 읽어볼 만한 가볍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찾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그나저나 이 작가, 추리소설은 전작과 이 작품, 두 작품 밖에 없다고 하니 단 두 권 만으로 그의 전(全) 미스터리 작품을 읽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에 나오는 탐정들 이상으로 독특한 탐정인 “요리카와 탐정” 콤비를 다른 작품에서 만나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소개글을 보니 이 작가, 미스터리보다는 SF 소설이 주 장르인 것 같은데 그를 SF 소설로도 조만간 만나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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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
펠릭스 J. 팔마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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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F소설과 영화의 단골 소재인 “타임머신(Time Machine)"의 개념은 “쥘 베른”과 함께 ‘과학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영국의 과학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H.G.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 ~ 1946)의 소설 <타임머신(1895)>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타임머신>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작품에서 시간 여행자는 공간의 세 평면인 길이·너비·두께와 네 번째 차원인 시간, 즉 “4차원(四次元)”의 개념으로 시간 여행을 설명하고 있다는 데, 시간 차원을 제4차원으로 간주한 것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1905)”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보다 10년 전에 비록 소설 속 허구이긴 하지만 4차원 개념을 정립한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런데 이런 “시간여행(Time Travel)"은 과연 웰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순수한 창작이었을까? 혹시 웰스는 실제로 타임머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이름 모를 과학자가 타임머신을 발명했다거나 또는 미래의 시간 여행자가 웰스를 방문해서 그런 정보를 주진 않았을까? 그래서 실재(實在)하는 타임머신을 웰스가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4차원에 대한 개념이나 시간여행을 그렇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그려내지 않았을까? “조나단 스위프트”가 시간여행자였고 타임머신을 통해 미래를 다녀와서 그걸 토대로 <걸리버 여행기>를 썼다는 설(說)이 있는 것처럼 허무맹랑하지만 한번쯤은 의심(?)해볼 만한 그런 상상일 것이다. 스페인 작가 “펠릭스 J. 팔마”의 <시간의 지도(원제 El Mapa del Tiempo /살림출판사/2012년 2월)>는 이처럼 H.G.웰스와 시간여행에 얽힌 재미있는 상상을 그려낸 소설이다.

 

작가는 과거를 다시 돌이킬 수 있고 우리들이 걸어온 발자국 위를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감격과 놀라움이 가득한 모험에 초대한다는 팸플릿의 글과 함께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로 1부를 시작한다. 웰스가 <타임머신>를 발표한 지 1년 후인 1896년, 8년 전에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에게 연인 “마리”를 살해당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리가 살해당했던 곳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앤드류 해링턴”을 뒤이어 달려온 사촌인 “찰스”가 가까스로 막아낸다. 찰스는 앤드류에게 최근 런던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머레이 시간여행사”에게 부탁하여 8년 전으로 돌아가 연인을 구해내자고 제안한다. 반신반의하면서 찰스를 따라 나선 앤드류는 머레이 사장에게서 자신들의 시간여행은 로봇과 인류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2000년”으로 밖에 할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지만, <타임머신>을 집필한 H.G.웰스라면 혹시 타임머신을 실제로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며 그렇다면 과거로의 여행도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둘은 웰스를 찾아가게 된다. 웰스는 자신을 찾아온 두 청년에게 자신의 집 2층에 있는 타임머신을 제공하고, 앤드류는 8년 전 과거로 돌아가 마리를 살해하기 직전 잭 더 리퍼를 살해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그러나 현실은 전혀 바뀌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크게 실망한다. 웰스는 그런 앤드류에게 또 다른 우주, 즉 평행우주(平行宇宙)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 곳에서는 마리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2부에서는 머레이사의 2000년으로의 시간여행을 소개한다. 로봇과 인간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는 2000년 5월 20일로의 2차 시간여행 원정대에 참여하게 된 귀족 출신의 소녀 “클라라”는 로봇의 대장인 “솔로몬”과 처절한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둔 인간 대표 “섀클리턴” 대장에게 한 눈에 반하고야 만다. 현재로 돌아온 어느날, 미래에서 새클리턴 대장이 클라라를 찾아온다. 미래에 놓고 간 클레어의 양산을 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둘은 하룻밤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섀클리턴 대장이 미래로 돌아가면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만다. 그런데 미래의 로봇을 만들어낸 상인을 죽이기 위해서 비슷한 시간대로 수차례 시간여행을 해온 섀클리턴에게서 편지들이 도착하고 클라라는 그가 말했던 시간여행 입구에 답장들을 가져다 놓는다. 3부에서는 웰스와 동시대의 작가이자 훗날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작가인 “브람 스토커(<드라큘라>의 저자)”와 “헨리 제임스(<나사의 회전>의 저자)”의 아직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빼앗아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하려는 시간 여행자가 그들을 위협하고, 현재의 웰스는 그 사건으로 미래로 튕겨져 나간 또 다른 우주의 웰스가 보내온 편지를 받고서 그 위협에 대처한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책들보다 큰 판형에 작은 글씨체,  줄 간격도 빽빽하고 560 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인지라 처음에는 언제 다 읽지 하는 생각에 꽤나 겁을 먹고 시작하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상황 묘사가 꽤나 사실적이고 이야기 구성 또한 흥미롭고 재미있어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어느새 처음의 우려는 금세 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부를 다 읽고 나니 맥이 탁 풀린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 소설인 줄 알았더니 1부에서 시간여행은 연인을 잃고 상심해서 자살하려는 청년을 달래기 위한 일대 연극(演劇)이었던 것이다. 다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연쇄 살인범 “잭 더 리퍼”가 등장하고 비록 연극이지만 연인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청년의 로맨스가 일견 아슬아슬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어 이야기로는 재미있어서 2부로 넘어갔다. 이런 2부도 사기극(詐欺劇)이었다! 로봇과 인류가 전쟁을 벌이는 2000년으로 시간 여행하는 “머레이 시간여행사”는 거대한 세트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가상 체험이었고, 현재(1896년)의 소녀와 미래의 구원자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은 실제 - 물론 당연히 실제가 아니어야겠지만 - 가 아니라 웰스가 섀클리턴 대장 역을 맡은 보잘 것 없는 하층민 청년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줬다는 것이다. 과연 이 책의 성격이 뭘까, 계속 읽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타임머신>의 저자 H.G. 웰스와 시간 여행과의 비밀스러운 함수 관계를 그려낸 소설로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그런 기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속았다는 생각에 그냥 이대로 책장을 덮어 버릴까 싶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분량이 아까웠고, 마지막에는 어떤 사기극으로 마무리하는지 두고 보자 하는 생각에, 또한 출판사 책 소개 글에 실려 있는 각종 매체들의 찬사(讚辭)가 결코 광고만은 아니겠지 하는 심정에 3부를 내처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3부에서 비로소 내가 처음 기대했던, 아니 기대 이상의 이야기가 “드디어” 펼쳐진다. 즉 마지막 3부야말로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白眉)였던 것이다. 즉 1, 2부는 “가짜” 시간 여행 - 물론 19세기말 영국 빅토리아 시대 모습을 치밀하게 재현해 낸 점은 훌륭하지만 -이었다면, 3부는 작품의 본령인 “SF 소설”로써의 재미를 극대화한 “진짜”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작가는 3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뜸을 그렇게 오래 들인 셈인데, 1,2부에서 느꼈던 실망이 3부에서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으니 작가의 의도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부까지 다 읽고 나서야 1,2부 이야기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작가가 각 부를 넘어갈 때 숨겨 놓은 장치들, 즉 1부에서 앤드류가 시간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마주친 의문의 남자의 정체가 2부에서 비로소 드러나고, 2부에서의 거창한 사기극을 벌였던 머레이 시간여행사는 3부에서는 웰스를 위기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되며, 1부에서의 “잭 더 리퍼” 결말이 어떻게 시간의 흐름에 분기점 -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간의 지도”가 시간 여행으로 인해 바뀌어 버린 역사의 흐름을 기록해 놓은 지도이다 - 을 가져왔는지 2부의 가짜 섀클리턴 대장이 웰스를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전체 이야기를 사전에 촘촘하고 치밀하게 구성해놓고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19세기 당시의 사회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고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발하고 독특한 설정과 이야기 전개, 연극의 변사(變辭)처럼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불친절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쥐었다 폈다 하는 작가의 글솜씨야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지만, 인내력 테스트가 아닌 이상 너무 오래 끌어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의도가 성공했다고 해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 그런 괘씸함(?)에 별점 하나를 깎았다^^

 

  괘씸하다고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560 여 페이지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 임에도 금세 읽히게 만들 정도로 재미있으며,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H.G. 웰스의 <타임머신>, 출간되고 120 여 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들로 다양하게 다뤄졌음에도 아직도 이 책처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고 시간 여행자라는 “존 티토”의 예언이나 시간여행자의 증거 사진들이라는 사진들이 인터넷에 심심찮게 화제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시간여행이 현실이 되는 미래의 그 "어떤" 시점까지는 두고 두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그야말로 최고의 흥행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시간여행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될 작가가 왠지 부럽기까지 하다.  기회가 된다면 원작인 <타임머신>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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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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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도 전혀 낡은 느낌을 주지 않고 갈수록 새로움이 느껴지며,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같은 감동과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을 “명작(名作)”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은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문(門, 1910)>은 100 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도 시대와 공간에 대한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바로 현재 우리 주변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니 "명작”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린 나이에 읽었던 책에서 느낀 재미와 감동을 수십 년이 흘러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 다시 읽어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면 그 책 또한 분명 “명작”일 것이다. 이번에 읽은 <오 헨리 단편선(원제 The Selected Works Of O. HENRY / 비채 / 2012년 2월)>이 바로 그런 책이다. 중학교 시절 문고판으로 그의 단편집을 읽었었고, 다른 단편 모음집이나 잡지, 방송,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자주 접해봤던 “익숙한”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30여년 만에 다시 읽은 이 책, 마치 처음 읽는 것 같은 재미와 감동을 느껴볼 수 있었다. 아니 인생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조금은 알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에 읽으니 한결 그 재미와 감동이 더 크게 다가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에는 300여 편에 달하는 작가의 단편 들 중에 작품성이 높고 이야기 구성이 치밀한 대표작 30편을 수록했다고 한다. 역시나 맨 첫 작품으로 교과서에도 실렸던 <마지막 잎새>부터 시작하고 역시나 유명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이어진다. 굳이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아도 “아~그 작품”이라고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만한 그런 작품들일 것이다. 이후로도 오 헨리의 유머와 촌철살인의 반전이 담뿍 담긴 단편들이 계속 이어지고, 마지막 작품으로 내가 오 헨리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어 하는 작품이자 오 헨리식 익살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붉은 추장의 몸값>이 실려 있다. 제목만 들으면 모를 수 도 있는데 어리버리한 납치범들이 소년을 납치했다가 소년의 등쌀에 오히려 돈을 소년의 부모에게 물어내고 풀어줬다는 간단한 소개만 들으면 금세 알아챌 만한 그런 이야기이다. 또한 책으로 읽지 않았어도 “디즈니 가족 영화”와 꽁트 드라마로도 여러번 제작되어 TV에서 한번쯤은 봤었을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긴 이 책에 실려 있는 30 편 모두 유명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번쯤은 들어보지 않은 이야기가 과연 있을까? 그런데 분명 읽었었고 아는 이야기들인데 다시 활자로 읽으니 식상하지 않고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새로움이 느껴진다니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명작의 정의 뿐만 아니라 “보석(寶石)”은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과 가치가 퇴색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과 가치가 더 뚜렷하고 영롱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을 보면 오 헨리의 단편들은 단언컨대 “명작”일 수 밖에 없고 그리고 “보석”일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 이 책을 읽는 내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보통 소설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해설”은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인데 이 책에 실려 있는 “작품해설 오 헨리와 단편소설 전통” 만큼은 작가 오 헨리의 삶과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공부해볼 수 있는 유익한 글이어서 꼼꼼히 읽어보았다. 특히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오 헨리가 은행원이었고, 공금 횡령으로 인한 옥살이가 그를 글을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경험들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다양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다는 대목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어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새로운 정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오 헨리 단편들의 특징, 그리고 비슷비슷한 구조와 이야기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니 이 글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워낙 잘 알려진 책이고 어줍잖은 내 서평보다 백배는 훌륭한 해설도 실려 있다 보니 이 감상은 다른 글들 보다 짧게 마무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아뭏튼 명작이 왜 명작인지, 또한 명작은 한번 읽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다시 읽었을 때, 특히 나이가 들어 인생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을 때라면 더 큰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읽기였다. 그래서 이미 읽은 지 수 십 년이 지나 누렇게 바랜 채 책장 가장 깊숙한 곳에 꽂혀 있는, <데미안>, <폭풍의 언덕>, <죄와 벌>, <전쟁과 평화>, <테스> 등의 옛날 문고판 고전 명작들에 다시금 눈길이 가는 지도 모르겠다. 이 책들은 나에게 어떤 감동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줄지 벌써부터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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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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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즈음 새로 짓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운동시설, 보육시설, 문화센터, 학원, 학교, 도서관, 대형 마트 등 온갖 편의시설들과 상가(商街)들이 빼곡히 마련되어 있어 단지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휴일에는 단지 밖을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고들 하는데, 며칠이야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불편하거나 지루하지 않겠지만 평생을 단지 내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요새는 “은둔형 외톨이”라고 해서 집 안에 틀어박혀 일체의 사회 활동이나 대인 관계를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 - 일본에는 현재 이런 사람들이 130만 명이 넘는다고 하며 우리나라도 30만 명에 달한다고 하며 그 숫자가 매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 도 있다고 하니 불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일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답답해서 단지를 두르고 있는 담벼락이 마치 감옥의 창살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구보데라 다케히코”의 <모두, 안녕히(원제 みなさん、さようなら/비채/2012년 2월)>는 이처럼 평생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십대 청춘이다.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다.

나는 평생, 내가 태어난 아파트 단지를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준비가 됐다.

청춘의 상처들이여, 모두 안녕히…

 

“사토루”는 도영 후로쿠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쭉 살아온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소년이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무결석, 무지각으로 졸업한 그가 중학교에는 단 하루도 등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괴한에 의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충격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 되면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병을 알기에 어머니 “히나”씨는 사토루에게 학교갈 생각이 없으면 가지 말라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학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사토루는 입주민 생활복지관에 있는 시청각실과 도서실을 매일같이 드나들고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오야마 마스다쓰(최배달)”의 책을 교본 삼아 체력단련에 힘쓴다. 사토루가 운동과 함께 하루도 빼먹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순찰”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107명 모두 한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터라 친구 사귈 걱정이 없었지만 하나 둘씩 이사를 가자 아는 사람이 점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단지에 남은 동창생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보는 데 이를 “순찰”이라 부르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단지를 돌아다닌다. 한번도 출석한 적이 없었지만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사토루는 단지내 상가에 있는 케이크 숍 “타이지론느”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사토루는 단지 내 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는 초등학교 여자 동창인 “사키”와 연인 관계가 되어 약혼까지 하게 되지만 단지를 벗어날 수 없는 그의 처지 때문에 결국 그녀와 헤어지고야 만다. 세월은 계속 흘러 친구들은 학업에 취업에 결혼에 계속 단지를 떠나고 아파트 단지 또한 시간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낡게 되면서 빈집들이 늘어나고, 결국 단지의 동창생들은 모두 떠나고 사토루 혼자만 남게 된다. 그는 과연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의 눈 앞에서 친구가 죽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소년이 자신 스스로 아파트 단지에 자신을 가둬놓고 그 안에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엉뚱하게도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트루먼”은 자신이 태어나고 30년을 줄곧 살아온 세계가 TV 세트장이었음을 알게 되자 현실 세계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며 끝을 맺는다. 현실 세계의 온갖 위험에 면역력이 전혀 없는 트루먼은 어쩌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쓸쓸이 죽어갔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 세계로 나가는 문을 열고 나가는 트루먼에게 현실 세계는 거짓된 세계와 작별하는 “해방”이자 “희망”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미지의 위험에 대한 공포보다는 진실을 마주한다는 기쁨과 희망이 더 컸기에 트루먼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환하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토루에게 아파트 담장 너머 바깥세상은 “공포”의 공간이다. 그것도 막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를 죽인 괴한이 그가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즉시 덮치고 말 거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험이 존재하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 공포가 친구들과 작별하고, 깨져버린 사랑에 대한 슬픔보다 더 컸기에 그는 아파트 담장 안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사실 이 책의 결말은 사토루가 결국 어떤 “계기”로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을 쉽게 예측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뻔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결코 그 결말이 식상하지 않고 감동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의 꼼꼼하고 치밀한 이야기 전개와 심리 묘사 때문에 주인공인 사토루에게 절로 감정 이입하여 그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기를 응원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계기”가 “슬픔”이어서 가슴 아프지만 그 슬픔으로 인해 바깥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사토루의 발걸음에 희망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가는 열쇠가 그 계기는 서로 달랐지만 결국 “희망”이었다면 억지스러운 결론일까? 영화와 이 소설, 설정과 이야기 둘 다 전혀 닮은 데가 없지만 두 주인공 모두 바깥세상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다고 느꼈기에 영화를 연상시킨 것 같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두 안녕히”라는 말에서 트루먼의 마지막 인사 “여러분, 다시 못 볼지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성장 소설 특유의 재미와 감동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었던 멋진 책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에 고통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다면 천형과도 같은 공포와 고통을 결국은 이겨내고 희망을 향해 걸어 나가는 사토루의 삶이 위로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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