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 - 철학자의 생활에서 진정한 삶을 엿보다
서정욱 지음 / 팬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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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들을 테마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특히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서의 철학자의 삶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제시하여 왜 그가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를 돕고 있다.

서양철학자들은 거의 16~19세기에 배출되어졌다. 이는 유럽이 각종 혁명등 계급간 종교간 갈등 속에서 새롭게 변화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고민한 지식인들의 산물이었다. 특히, 유럽이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교육을 강화하고 대학을 설립하였다는 것은 이런 지식인들의 고민을 더욱 자극하였을 것이다.

이런 철학적인 산물이 있었기에 문명발달이 늦었던 서양이 동양을 앞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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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두 도시 이야기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46
찰스 디킨스 지음, 신윤진 외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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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거의 후반으로 접어들때까지 각 인물들에 대한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 흘러간다.
마네뜨 박사의 투옥 사연, 찰스 다네이의 진실된 정체, 요란스러운 미스 프로스와 이름만 언급되는 그녀의 동생, 주변인물처럼 등장하는 방탕한 칼튼 등등

더불어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처절한 묘사가 배경으로 많이 깔려 있다.
귀족계층의 과도한 특권과 남용, 극도로 굶주린 서민들의 비참한 삶.
특히 거리에 포도주가 쏟아진 장면은 앞으로 발생할 프랑스혁명이라는 피의 축제에 대한 전조로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미 전반적인 분위기로 자리 잡은 처절한 분위기와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각 인물의 의문점들이 하나씩 드러남감 동시에 긴장감을 더해간다. 특히 드파르지(혁명의 주도세력)가 찰스 다네이(마네뜨 박사의 딸 로시의 남편이자 마네뜨 박사를 감금한 프랑스 후작의 조카)를 고발하면서 완전히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은 지금까지 언급되어진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찰스다네이 대신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칼튼의 예언으로 끝이난다. 이 장면은 이야기의 여운을 더하고 이 여운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넘겨버린다.

죽음의 상징 파리와 부활의 상징 런던을 통해 프랑스혁명과 그 속에서의 사랑이야기가 '두 도시 이야기'이다.

잡념들...
이야기 속의 모든 사람들은 광기에 휩쌓여있다.
귀족이든, 빈민들이든 모두가 자기만의 광기에 휩쌓여있기는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자기애에 빠진 모든 인간은 자기애의 광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스스로 공정하다고, 스스로 배려한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의 최종목표는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자기만의 세계속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다.

서민들을 벌레처럼 여기는 귀족도, 그 귀족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한 서민들도 모두 자기들만의 세계속에서 판단한다. 그러한 편협한 판단은 결국 광기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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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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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아이히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떤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하여튼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 "그 일은 그냥 일어났던 일이다. ... 나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해야 한 적이 없었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재판받고 있던 아이히만의 주장이다.


아이히만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었거나 '평범'했다.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나, 열광적인 반유대주의나 세뇌교육도 없었다.


우리의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아이히만의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충격적인 일이다.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입장에서는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아이히만은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의 행위가 수많은 유대인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잉태했지만 그는 결코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한 것도, 누구를 죽일 어떠한 의도를 가졌던 것도 아니며, 결코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당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최종 해결책(유대인 말살)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며,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할을 떠맡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 재판은 복수의 권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승전국의 법정에서 이루어졌고 때문에 여러가지 논란을 낳았다.
특히 생각할 볼 것은 '너도 마찬가지'라는 관점이다.
2차대전에서 많은 민간인 유대인이 죽은 것도 사실이지만 연합군의 원폭으로 인해 또다른 수십만명의 민간인들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갈리듯 영웅과 악당도 갈렸다. 이뿐 아니라 베트남전이나 다른 세계각국의 전쟁에서 민간인에 대한 불필요한 잔인함이 자주 발생하였고 우리나라도 가해자로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는 아이히만 재판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조차도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문제로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아이히만의 범죄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것만은 변함이 없다.


혹자는 삶이 전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터 어디엔가에 또다른 유대인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법제도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잔인한 굴레를 씌고 있을지 모른다.
비밀이 아닌 비밀이 되어버린 상위 1%의 그들은 각종 사회제도와 법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대다수의 일반대중은 아이히만처럼 생각없이 그냥 주어진 법제도안에서 그들이 정해준 목표만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이런 비상식적인 제도에서 발생한 부작용의 굴레를 쓰고 허덕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샤르트르가 지식인은 태생상 지배층의 제도안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지배층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피지배층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갈등상황에 있다고 했다. 지식인이 지배층에 붙어 피지배층을 도외시 하는 것은 어찌보면 직무유기이다.


얼마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풍요의 시대, 넘쳐나는 곡물이 일부 지배층의 식탁에 오를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고발했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일부 지식인의 고발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법제도 속에서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들의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이 시대의 아이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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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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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산업혁명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우리 별에서 왜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지 고발한 책이다.

우리는 잘 포장되고 개작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 풍요로운 시대,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대, 최첨단기술로 미래를 지배하는 시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많은 미사어구들을 배우며 자랐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사람들이 프로그램된 가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들도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으로 잘 프로그램된 세계를 인식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대단한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 ‘초라한 나’를 느낄 때 ‘난 실패자인가?’ 하고 조바심을 가진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이상을 살고 있는 이 순간에는 그 조바심조차도 사치로 느껴진다. 바로 눈 앞에 닦친 삶에 대한 도전들('그들'에게는 우스운 것들이겠지만)을 해결하기에도 바쁜 나는..., 현재 이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라고 다독거린다. 위를 보지 말고 밑을 보며 살아라... 하면서.

멧 데이먼 주연의 영화 ‘엘리시움’. 가난, 전쟁, 질병으로 가득한 버려진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선택받은 1% 세상 엘리시움에 사는 사람들간의 갈등을 영화로 그린 것이다. 영화 속의 극심한 빈곤과 극심한 부의 대립은 우리 시대의 숨겨진 모습이다. 얼마전 '강남구'를 서울시에서 독립시켜달라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강남구는 우리시대 엘리시움인듯하다. 빈곤의 바다 한 가운데 부를 누리고 있는 우리와 구별된 1%의 도시이다.

어릴적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카우보이들과 인디언들의 전투씬이었다. 잔인한 인디언들이 연약한 개척민들을 괴롭힐 때 카우보이 영웅들이 나타나 무찌르는 스토리의 영화들. 그 당시 어린 나에게 인디언들은 야만인의 표본, 악의 표본이었다.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그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파헤치면서 이런 잘못된 인식을 깨트린다.

쇠고기를 먹는 문화는 기원전 유라시아 스텝평원에서 시작되었다. 스텝평원의 유목민들이 유럽과 인도에서 정착하면서 쇠고기를 먹는 문화도 함께 정착하게 되었고 차츰 유럽 귀족층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산업혁명 등 역사적 진보의 과정에서 폭발하는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소를 사육할 목초지와 곡물이 점점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프리카 등으로 목초지는 넓혀져 갔고 결국 버팔로와 인디언의 대륙인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에 미국에는 소가 없었다. 다만 버펄로와 인디언만 있었다. 지금 북미와 남미의 소들은 다 유럽에서 개척자들과 함께 건너간 것이다.

미국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평야에서 수천년동안 살고 있는 버펄로와 인디언을 몰아내야만 했다. 미국 군인들과 개척자들은 인디언들의 양식인 400만마리의 버팔로를 단 몇년만에 멸종시킴으로서 굶주린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 넣는다. 즉 영화 속의 난폭했던 그들은 자기들의 영토와 양식을 지키기 위한, 즉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실제 야만인은 인디언들이 아니라 미군과 개척자들이었다.

만약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축 사료가 아닌 인간이 직접 소비한다면 지구상의 10억의 사람들이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프리카는 원래 자급자족하던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화되면서 이들의 농지에는 사람이 먹을 곡식이 아닌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고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로 개발되었다. 정작 사람이 먹을 곡식은 유럽 등에서 고가에 수입하게 되는데 이 조차도 독재자들이 독식 한다. 결국 이러한 실태의 쓴 열매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이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수백만 인구가 최소한의 일일권장 칼로리를 섭취하지 못하는 가운데 극소수의 특권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쇠고기를 소비하는 현상이다.


 

10억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과욕으로 비만과 풍요성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또다른 10억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멜더스 같은 제1세계의 지적 엘리트들이 제2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에서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것은 아주 모순된 모습이다. 사실상 그들은 부유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고기를 꾸준히 소비할 수 있도록 빈곤층의 생계를 박탈하고 있는 과도한 소의 개체수와 먹이사슬의 현실을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TV에서,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아이들에 대한 구제기구의 활동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너무나도 무심하다. 거리의 상처받은 짐승들의 구제에는 열광하면서 그들에게는 왜 무감각한 것일까? 그들이 태어난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배고픔의 벌을 받고 있다.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다이어트를 고민한다. 내 몸속에 쌓이는 지방덩어리를 떼어내려고 고민하고 있다. 이 지방덩어리 일부가 배고픈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면 그들 중 몇몇은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오늘도 그들의 죽음을 먹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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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진보와 빈곤 - 땅은 누구의 것인가 e시대의 절대사상 24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외 옮김 / 살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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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면적 기준 지니계수 0.89, 가액 기준 지니계수 0.79, 바로 우리나라의 토지 소유의 편중 실정이다.(지니계수가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9월말경에 정성호국회의원이 최근 10년간 전국 땅값이 68.5%가 올랐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지가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지니계수를 감안할 때 이 상승분이 모두 토지 소유자들의 불로소득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시 보게 한다.

헨지 조지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생산력이 증가하는 '진보'에도 불구하고 생존최저임금이라는 '빈곤'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였다.

헨리 조지의 활동시기인 당시 1820년대에서 1860년대까지 미국은 산업혁명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진보는 부작용을 낳았다. 빈곤과 실업이 대도시 지역에서 나타났고, 토지가치는 투기의 영향으로 상승했다.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집필하기 시작한 1877년에는 마침내 산업 불황이 찾아왔다. 극도의 사치와 비참한 빈민가가 공존하는 뉴욕의 대로에서 헨리 조지는 물질은 엄청나게 진보하는데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캐묻기 시작했다.

결론은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지대를 차지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토지사유제 때문이다. 즉 생산력의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함으로써 임금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크게 이루어져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부-지대=임금+이자)

빈곤을 타파하려면, 1.개인이 지대를 소유하는 것을 법으로 보장하는 토지사유제를 없애야 한다. 2.그러나 이미 토지사유제가 관습화된 나라에서는 토지를 공유화 할 필요까지는 없고, 단지 해마다 지대를 정부가 환수해 사회가 공유하고 그 대신 다른 조세를 면제하는 지대조세제를 실시하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제는 사유된 것을 상당 부분을 조세로 징수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유재산제에 어긋난다. 즉 현재 부과되는 조세는 인간의 노력, 근면, 기술,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철도를 개설하면 철도가 공해라도 되는 듯이 세금을 받으러 온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는 사람을 조세로써 처벌하며, 기계를 들여오고 늪을 농지로 바꾸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린다.

그러나 지대조세제는 불로소득인 지대를 조세로 징수하고, 그 대신 노력과 기여의 대가인 임금 및 이자의 완전한 사유를 보장한다.

또한 지대조세제를 통해 토지 세액이 실제 지대에 근접하는 경우에는 누구든 사용하지도 않을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토지는 실제로 사용할 사람에게 개방해서 더 많은 생산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노동소득은 그 스스로 창출한 부이며, 사회의 부의 총량을 증가시킨 부이다. 그러나 지대소득은 단지 이미 생산된 물자 중에서 취하는 것일 뿐이며, 그 대가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진정 정의로운 과세란, 노동 소득이 아닌, 사회가 창출하는 가치인 토지가치를 징수해 사회의 공공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사회가 지대를 징수해 공공의 용도로 사용하면 지대 상승분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산업혁명으로 경제구조가 재정립되는 시기에 바로 적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게 한다.  현대는 그 때보다 더욱 경제구조가 복잡해졌고 기존 기득권의 위치도 굳건해(?)졌다. 많은 책이나 언론이나 영화까지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그뿐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우리 모두가 의식을 가지고 동참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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