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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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처럼 늑대를 키운 철학자의 이야기이다. 철학자는 늑대의 입양과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다.

사람들은 시간을 직선으로 생각한다. 직선으로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에서는 현재(순간)는 없다. 즉 우리는 과거의 흔적(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사는 것이고 순간은 개념은 있지만 실체는 없는 경계선상의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과거의 흔적에서 기인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과거에 근거해서 지속적으로 미래를 기대하면서 직선으로 계속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삶의 의미는 오직 미래에서만 찾을 수 있다. 현재를 통해 완성되어질 미래의 내 최고의 날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현대인들은 지금도 열심으로 달려가고 있다. 지금의 순간은 미래의 영광을 위한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다.

저자는 시간을 원으로 생각하는 또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순간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고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실체 없는 경계선이 아닌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더불어 순간은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삶의 의미를 삶 전체에 걸쳐 분포된 순간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떠오른다. 소유의 욕망으로 소유의 대상을 행해서만 달려가는 우리들이 정말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미래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줄수 있다. 반면에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즉 시간의 화살은 구원인 동시에 저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향해 달려만 가는 것으로 진정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다시한번 더 내 주위에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의 직장,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 나라 등등 스쳐지나가는 하찮지만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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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 개정판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 현문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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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 마리 한 마리가 바로 위대한 갈매기의 사상이고, 자유라는 무한 사상이다.

어릴 적 무엇인가 무서운 존재에게 쫓기는 끔찍한 꿈을 꾼 기억이 많이 있다. 특별히 이 꿈이 끔찍스러웠던 것은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하나조차도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현재 내 삶 가운데 지난 잘 그 끔직한 꿈이 나를 비웃 듯, 아직 그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겹쳐진다. 나는 항상 스스로가 만든 견고한 벽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이것이 스스로가 만든 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깰 수도 없고 나의 의지대로 할 수도 없다. 마치 윌리엄 폴의 ‘갈림길’에서처럼 내 자신의 속에 또 다른 내 자신이 스스로를 묶어 두는 견고한 성을 쌓고 있는 것 같다.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30대 초반부터 40대에 으르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을 고민에 휩쌓이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리며 때를 써보기도 하고 스스로 만든 규칙에 굳은 결단과 다짐을 해보기도 했으나 결코 그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러한 벽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은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성취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그냥 머문다면 결국 그냥 갈매기 조나단은 이러한 벽을 깨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이러한 벽조차도 깨닫지 못했지만 갈매기 조나단이 하늘세계 해변에서 순간이동을 사색을 통한 깨달음으로 성취한 것처럼, 무협지에서 주인공의 무공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그 벽을 깨고 한 단계 높은 무공의 단계로 오르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훈련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내 마음의 벽을 깨기 위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나의 머리는 알고 있으나 나의 냉철하고 계산적인 이성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속에서, 그리고 주위에서 조나단이 들었던 것처럼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는 한 마리의 갈매기일 뿐이야.”, “원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네가 나는 일에 관해 보통 이상의 것을 배우도록 정해져 있었다면, 눈을 감고도 정확히 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더욱 빨리 날도록 타고났다면, 매 같은 짧은 날개를 갖고 물고기 대신 쥐를 먹고 살았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나는 비상하고 싶다. 조나단처럼 더 높이 더 빠르게 세상가운데로 질타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이성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다. “능력에 한계가 있는 불쌍한 갈매기로서의” 조나단처럼 너무나도 명확한 한계가 나를 억누르고 있다. 최말단 하위직 종사자으로서, 가난한 남편, 가난한 아빠로서, 불효자로서 짙은 패배감에 눈앞이 흐려지고 몸이 무거워진다.


선각자 갈매기 치앙은 “순간이동의 비결은 우선 조나단 자신이 자기를 한정된 능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육체 속에 갇힌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고작 1미터 남짓한 날개 길이와 겨우 비행 지도에나 써 넣을 정도의 비상력밖에 없는 갈매기의 육체에 마음을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한정된, 제한된 벽을 깨트려야 한다. 반야심경의 지고한 정신적 경지처럼 거대한 어둠의 무기들로 나의 눈을 어지럽히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거나 아니면 내 속에 있는 탐욕의 눈을 일깨워 판단을 흐리게 하는 생멸심을 버리고 진정한 나의 모습인 진여심을 깨달아야 한다. 조나단이 플레처에게 말한 것처럼 “너의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어서는 안 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허위야. 너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야.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찾아야 해. 그러면 어떻게 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의 눈으로 진정한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


내가 가진 비전들과 미래의 꿈들이 진정 아름답고 풍요롭게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거기에 걸 맞는 거름을 주어야 한다. 나의 갇혀진 현실의 벽을 깨고 싶다. 인간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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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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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지만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책이다.
책은 서두에 도덕성 등을 배제하고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만을 말한다고 언급하며 시작한다. 비정한 이기주의로서의 유전자의 보편적 법칙만 언급한 것이다.

30~40억년전 해양을 구성하는 원시 수프에서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자기 복제자가 생성되었다.
자기 복제자는 계속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담을 그릇, 즉 생존 기계를 스스로 만들었다.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생존 기계) 속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 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로 바깥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자기 복제자)은 우리 안에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유전자들의 단기적인 연합이 만들어낸 생존 기계는 임무를 다하면 폐기되지만 유전자는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을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행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생존기계를 잘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유전자 풀 내 동료 유전자들 집단과 협력하고 또는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자기 복제자의 생존기계인 우리들의 결정에 이타주의는 없다. 그 이면을 깊게 보면 결국 유전자의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이기적인 결정일 뿐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조차도 결국 동류의 유전자를 생존케 하기 위한 생존 기계의 결정인 것이다.

현대에는 인간의 문화라는 새로운 수프가 등장했고 밈이라는 새로운 자기 복제자가 발생한다.
밈은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으로 설명할 수 있고 유전자와 유사한 자기 복제자로서 우리의 뇌에 기생하고 있다. 즉 우리의 뇌가 밈의 번식을 위한 운반자인 것이다.
밈의 예로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등이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마치 우리가 컴퓨터처럼 프로그램된 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말그대로 기계처럼 묘사하고 있다.
다만, 생명체 중 인간만이 이기적 유전자와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음 언급하여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영할 수 있다.'

책을 덮으며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유전자는 살려고 하는가?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렇게 의문을 가지는 나에게 왜 살려고 하고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도 답이 없다.
다만 그냥 삶을 사는 것이고 그 삶 가운데 계속 스스로에게 왜 사는지 물음표를 던질 뿐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 스스로 절대적이고 우월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책은 '우주의 어떤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 뿐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결국 우주의 절대자는 자기 복제자라는 말인가? 그리고 그 자기 복제자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뿐이라면 인간이 스스로 또다른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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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 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코너 우드먼 지음, 홍선영 옮김 / 갤리온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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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업무게시판에서 공정거래에 대한 홍보 글을 보았다. 회사의 공정거래 정책에 대해 찬성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반발의 씨앗이 꿈틀거리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언젠가 이 씨앗이 자라면 어떠한 형태의 모습을 가질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보고 이면에 있는 보고 싶지 않는 부분은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지우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은 라오스의 자연 속에서 여전히 전통을 유지하며 옛날식으로 살아가는 부족을 보면서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고무제품을 누구보다도 많이 사용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노동집약적 농업으로 생산되는 고무의 생산을 위해서는 라오스부족의 삶의 터전을 훼손해야만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 내용 중에는 임신한 여자가 땅속을 기어서 석탄을 캐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석탄 없이 살 수 없는 시대적 현실 속에서 이를 묵인하는 시대적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 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공정거래’를 외치고 공정거래 마크가 있는 상품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상품이 과연 공정거래의 의미에 부합한 상품인지, 단지 상징적인 마크만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
즉, 이것이 진정한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인지 아니면 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얕은 수인지는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단지, 판매자는 ‘공정거래’ 마크가 있는 상품을 판매한다는데, 소비자는 그것을 소비한다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한 유명 레스토랑의 경우 식당에서 제공되는 랍스타의 유통경로를 확인한 결과 그 랍스터가 식탁위에 오르기 위해 남미 어느 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잠수병으로 반신불구가 되어 가고 있음에도 이 식당은 랍스터가 공정거래 상품이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공정거래 마크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기업들은 그에 상당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잠수병으로 반신불구가 되는 젊은이들의 희생의 댓가는 결국 기업의 추가이윤으로 돌아가게 된다. 기업은 이 이윤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공정거래인 것이다. 공정거래를 인증해 주는 기관에 일정한 수수료를 내고 공정거래 마크를 제품에 새기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아가 공정거래 마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상품에 대한 최초 원산지에 대한 확인도 겸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랍스터 판매 식당은 남미의 젊은이들까지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공정거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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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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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 떠나자

○ 꿈을 찾아 떠나는 양치기 산티아고
산티아고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스페인 어느 시골의 버려진 낡은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반복되는 같은 꿈을 꾼다. 그 꿈은 스페인 건너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의 보물에 관한 꿈이다. 꿈을 찾아 가기를 권유하는 멜기세덱 왕과의 만남으로 산티아고는 전 재산인 양 60마리를 팔아 아랍으로 꿈을 찾아가는 긴 여행을 시작한다. 초심자의 행운일까, 시작은 순탄한 듯했다. 하지만 도중에 양을 판 돈을 모두 도둑맞고, 사하라 사막을 건너고, 부족전쟁에 휘말려 죽을 고비도 경험한다.

우리가 무엇인가 결심하고 시작할 때 마음속은 희망으로 울렁거리고 모든 것이 다 저절로 순탄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가시밭길이고 잘 뚫린 고속도로도 또 폼 잡고 멋지게 질주할 오픈카도 없다. 작심삼일이라고 했던가? 현실을 직시하는데 삼일이면 충분한가 보다. 결국 포기하기가 십상이다.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영화에도 클라이막스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클라이막스는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희망메시지(?)이지만 실제로 해가 뜨는지 확인한 사람은 드물다. 나는 뜨는 해를 볼 수 있을까?

○ 꿈이 허황되다고 생각한 군인대장 vs 꿈을 따라온 산티아고
많은 고난 속에서도 결국 꿈속에서 보았던 피라미드에 도착한 산티아고는 한 부족의 군인 대장으로부터 우연히 그의 꿈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군인대장의 꿈은 ‘스페인 어느 시골의 버려진 낡은 교회의 무화과나무 밑에 보물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그 대장은 그 꿈을 허황되게 생각했고 꿈을 찾아 피라미드까지 온 산티아고를 ‘바보’라고 했다. 세상은 군인대장에게 ‘현명’하다고 하고, 반면 산티아고에게 ‘바보’라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답이다. 그렇기에 꿈을 찾은 소수의 사람이 있고 그 꿈을 쟁취하는 사람이 가치 있는 것이다. 다르게 보면 산티아고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그 군대대장이 자신의 꿈을 포기 했기 때문이다. 대장이 꿈을 찾자 떠나서 스페인 교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물을 먼저 찾았다면 결코 산티아고의 꿈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 만남의 중요성
산티아고는 여행 중 여러 사람을 만났고 이러한 만남은 꿈이 실현되는 성패를 결정했다. 물론 만남 이후의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①꿈을 찾아 떠나도록 도운 멜기세덱 왕, 현실에 안주하는 산티아고에게 다시 떠날 수 있도록 그 가는 길을 인도한 연금술사. 그리고 ②성지순례를 꿈꾸면서도 현재 자신의 부와 안락함에서 떠나지 못하는 크리스탈 가계 상점주인 등 / 우리 인생에 많은 만남이 있다. 그 하나하나는 내 삶에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을 듣는 것도 그 이후에 삶을 결정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 눈앞의 지위와 부 vs 불확실한 꿈
산티아고도 이집트 사막에서의 작은 성공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할 위기가 있었다. 바로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과 사막 오아시스에서의 지위와 부는 산티아고의 불확실한 꿈을 향한 전진을 포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찌보면 우리가 꿈을 찾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결국 ‘현실’ 때문이다. 내가 부양해야할 가족,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사회적인 성과들 이러한 것들은 결코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사람에게는 ‘그릇’이 있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도 있지만 아직 보잘 것 없는 작은 그릇도 있다. 산티아고가 사막 오아시스라는 제한된 작은 공간에서의 성공에 만족했다면 큰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순례자가 산 2개를 넘고 3번째 산꼭대기 나무까지 오면 큰 복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순례자가 3번째산 중턱에서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결국 복을 주지 못하셨다. 우리가 현실이라는 작은 성공 속에 안주로 할 때 그 이후에 큰 미래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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