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연애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8
마키 사쓰지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요즘 들어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바람에 444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 그리 두껍게 여겨지진 않지만, 한 남자의 40여년의 인생을 담은 내용만큼은 거의 대하급 무게감을 갖고 있습니다. ‘완전연애라는, 어딘가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집착의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과 함께 9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이라는 타이틀 역시 그 무게감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개의 시기로 나뉜 주인공 혼조 기와무의 삶이 그려지는데 매 시기마다 그가 직간접적으로 엮이는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2차 대전 패전 직후, 기와무와 그의 첫사랑 도모네가 얽히는 살인사건, 20여년이 흐른 뒤 기와무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목격하는 밀실 살인 사건, 다시 20여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당하는 살인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세 건의 살인사건은 모두 완전연애라는 미묘한 형태의 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과 평생 잊히지 않는 하룻밤 사랑에 대한 회한이 무려 40여 년 동안 여러 사람의 삶을 지배하면서 운명과도 같은 살인사건들을 일으킵니다.

 

도중에 모든 걸 파악한 독자에겐 완전연애의 실체가 다소 싱겁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대로 딴 데 한 눈 팔고 있던 독자에겐 꽤 충격적인 반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완전연애인지 새삼 되새겨보게 될 것입니다.

 

혼조 기와무와 그의 첫사랑 도모네 외에는 인물들을 소개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캐릭터 설명 자체가 소소하게나마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어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던데, 대형 스포일러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챕터 이상은 허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내용 소개는 없는 너무 밋밋하고 알맹이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내용이나 캐릭터가 궁금하신 분들은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40여년의 세월을 담기엔 다소 부족해 보인 분량인데, 이야기가 채 숙성되기도 전에 개연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약하거나 독자가 몰입하기도 전에 주요 인물들이 등퇴장을 반복한 건 분명 분량의 문제란 생각입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막판 반전이 앞서 펼쳐진 대하급 이야기를 무색하게 만든 느낌을 받게 되는데, 굳이 이만큼의 큰 구도가 필요했는지, 그 많은 인물들이 필요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박한 점수를 주고 싶진 않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지루하다고 평했던 초반부 유년기의 기와무의 이야기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물론 패전국 국민으로서 기와무가 겪어야 했던 비참함은 도무지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그 오랜 시간동안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 복잡다단한 감정들에 대한 묘사 역시 녹록치 않은 필력 속에 잘 녹아있다는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궁극적으로 그리려 했던 연애와 미스터리의 조합은 완벽하진 않아도 충실하고 꼼꼼했던 설계 덕분에 나름 공감을 얻었다고 할까요? 제대로 된 설계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많은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엉망으로 꼬인 연애와 미스터리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만 덧붙이면, 띠지의 자극적인(?) 홍보 문구 도발적인 살인예고, 완벽한 밀실 살인,

기이한 알리바이 증명, 그리고 마지막에 명탐정이 등장한다에 솔깃하거나 연연한다면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를 음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극적 요소에 대한 기대 때문에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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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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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이벤트를 통해 가제본 상태로 먼저 읽은 ‘64’입니다. 693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작심하고 하루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렸습니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읽는 내내 서사의 두께에 눌려 온몸이 긴장 상태를 풀지 못한 덕에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전신에서 삐걱거리는 비명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전력을 다한 폭주 수준으로 읽은 셈입니다.

이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어떻게 요약해야 하나, 무척 고민이 됩니다. 몇 가지의 굵직한 서사가 여러 겹으로 중첩된 채 진행되는데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방에 스포일러가 될 이야기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전에는 D현경 형사부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경무부 홍보담당관인 미카미는 벌떼처럼 달려드는 언론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앙숙지간인 형사부와 경무부의 총성 없는 전쟁에서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애매한 처지 탓에 양쪽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던 중 14년 전인 1989(쇼와 64)에 발생한 여아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사건의 해결을 독려하기 위해 경찰청장의 D현경 시찰이 결정되자 미카미는 홍보담당관으로서 그 준비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카미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힐 뿐 아니라 당시 수사와 관련된 비밀까지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년 전 ‘64’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진정한 경찰로 거듭나는 미카미의 활약 속에 이야기는 마지막 장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핵심적인 내용만 골랐는데도 여러 줄의 줄거리가 나올 정도로 ‘64’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4년 동안 미궁에 빠져있던 여아 유괴살해사건 수사 외에도, 결코 동료가 될 수 없는 경찰과 언론의 꼬일대로 꼬인 관계, (출신 성분에 따른) 경찰 내부의 심각한 갈등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무엇보다 형사부 대 경무부의 격한 갈등을 ‘64’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됐는데, 덕분에 진정한 경찰미카미의 진짜 적은 어쩌면 내부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미스터리 소재로는 비교적 단순해 보일 수도 있는 여아 유괴살해사건을 축으로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서사를 7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녹여 넣은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특히 사건 자체는 물론 거기에 연루된 다양한 개인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따라간 점도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가끔 동어반복적인 챕터들도 있고 과하다 싶을 만큼 감정을 깊게 묘사한 부분도 있어서 지루해지거나, 느슨해지거나, 맥이 빠질 때도 있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읽는 내내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는 건 ‘64’의 가장 큰 매력이자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2013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 ‘일본 서점대상’ 2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품으로 아마 올해 연말 각종 일본 미스터리 베스트 5안에 꼽힐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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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커 스타일 -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
사토 유야 지음, 주진언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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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미 가() 7남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사토 유야가 고교 졸업 후에 쓴 데뷔작으로 일본에서 메피스토 상을 수상했습니다. 우선은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쓴 파격적인 데뷔작이라는 점 때문에, 48(1996~2013)의 메피스토 상 수상작 중 불과 6편만이 한국에 출간된 걸 감안할 때 분명 기대할 만한 뭔가가 있으니 시리즈 전체가 출간됐을 거란 막연한 믿음 때문에 꽤 오래 전부터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너 또는 오타쿠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납치, 감금, 근친상간등 폭력적, 선정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 출판사 소개글 탓에 그저 관심만 가졌을 뿐 실제로 읽을 마음까진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시리즈 전체를 중고로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덕분에 여전히 장르도, 스타일도 감이 안 잡힐 만큼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디어 시리즈 첫 편의 첫 페이지를 열게 됐습니다.

 

중반부까지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한 챕터씩 교차로 전개됩니다. 키미히코의 여동생이지만 그와 그 이상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카가미 사나가 짐승 같은 세 명의 중년남자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비디오를 본 키미히코는 그들의 딸 또는 손녀에게 복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곤 그들을 한 명씩 납치하여 폐허가 된 병원 건물에 감금합니다.

한편, 77명의 10대 소녀를 죽인 나이프 잭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는 가운데 키미히코의 친구이자 신비한 초능력을 지닌 아스미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아스미의 초능력은 나이프 잭이 소녀를 죽일 때마다 그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인데 말하자면 소녀를 죽이는 순간을 나이프 잭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둘의 맞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시시각각 다가옵니다.

키미히코의 납치극과 아스미 대 나이프 잭의 대결이 교차로 전개되다가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기고 관련 인물들 모두가 한 공간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꼬였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만큼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 하나하나가 스포일러에 가까워서 이 이상 소개하기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서평 쓰기도 난감해졌는데, 그래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먼저 살펴봤더니 작가가 생각나는 대로 펜을 놀린 거다!”부터 최고다! 역대급 스토리다!”에 이르기까지 예상대로 거의 극과 극이라 할 만한 평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시 나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한 건가? 다시 읽어야 되나?”, 라는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은 더는 안 해도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고백하자면, 모든 인물들이 모인 상태에서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100여 페이지는 일일이 메모를 하면서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꼬여있습니다. 줄거리에 꼬였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라고 썼지만, 실은, 풀리는 듯 하다가 다시 꼬이고, 또 꼬이고, 또 꼬이는, 그런 상태가 반복됩니다. 결국 뭐가 진실이고, 뭐가 사실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모호한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혼선을 노린 건지, 쓰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태로 책읽기를 마치는 건 결코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완주한 건 사토 유야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이 가진 정체불명의 흡입력 때문이었습니다. 뜬금없이 툭툭 끊어지거나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건 애교 수준이고, 피 튀기는 상황에서도 위화감 가득한 농담과 웃음을 끌어들이는 럭비공 같은 문장들은 처음엔 어이없다가도 점점 신선하거나 재치 있게 느껴진 끝에 오히려 익숙해지기까지 합니다. , 지극히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소재에 잘 어울리는 자극적인 문장들 역시 짜증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눈길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녔는데, 그래선지 당장 읽고 있는 페이지에선 화가 나는데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져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매번 생각으로만 그치고 만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최악의 서평과 평점 대신 별 세 개를 준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만 해도 아무리 데뷔작이라지만 용서가 안 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서평을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후속작을 읽어볼까?”, 라는 이상한 욕심이 발동합니다. 아무래도 데뷔작보다는 좀 친절해지지 않았을까, 라는 근거 없는 낙관과 함께 말입니다. , ‘카가미 가() 7남매 시리즈라는 타이틀답게 후속작인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은 키미히코의 누나인 료코가, ‘수몰 피아노는 키미히코의 형 소지가 주인공이란 점도 약간의 기대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실컷 당하고도 또 궁금해지는, 또 당할 게 분명한데도 어찌 할 수 없는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다만, 연이어 읽기엔 정신적 부담이 큰 게 분명하니 충분한 공백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 공백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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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건 2012년 전후, 그러니까 서평을 쓰지 않던 3~4년 전의 일이지만 요즘 들어 밀린 서평을 몰아 쓰는 와중에도 이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고, 취향이 달라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서 한 번에 끝까지 달렸고, (난감한 고백이긴 하지만) 취향도 저와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호기심을 자아내는 서평을 썼다가 쉽게 잊히지 않을 불쾌감을 떠안게 될 불특정 독자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러다가, 문득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심과 함께,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다면 당연히 서평도 남겨야 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발동해서 책장 속에 꽁꽁 숨겨놓은 먼지 쌓인 책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읽는데도 첫 페이지부터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은 여전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범인이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어, 이 작품의 세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한 챕터씩 교차되면서 진행됩니다. 죽은 여자에게서만 사랑을 느끼게 된 미노루는 첫 경험이후 점점 더 대담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과 사체 훼손을 저지릅니다. 살인에 대한 쾌감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에게 있어 착한 여자는 오로지 죽은 여자뿐입니다. 한편, 정년퇴직한 형사 히구치는 언니를 살해한 범인을 잡으려는 여동생과 함께 희대의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거리로 나섭니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 기괴한 살인마에 대한 소식을 접한 마사코는 아들의 방에서 피 묻은 봉지를 발견하곤 무시무시한 의심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우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살인과 사체 훼손에 대한 잔혹하고 상세한 묘사입니다. 아마 이 때문에 ‘19판정을 받았겠지만 성인들조차 역겹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기에 조금이라도 잔혹함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면 호기심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화제의 이유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마지막 한 페이지가 준 충격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실제로는 1~2초 정도밖에 안됐겠지만) 느낌상으로는 꽤 오랫동안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경험을 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서술트릭에 맛을 들여 누가 이기나 해보자하던 때라, 눈에 불을 켜고 읽었지만 결국엔 마지막 페이지에서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역시 다 알고 읽는데도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어느 독자의 서평에서 혐오감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샌가 미노루의 마음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나 자신조차 무서워졌다.”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는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이 작품을 읽은 직후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들이 미노루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되는 모습을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될 거란 뜻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데, 성인조차 그런 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 책에 내려진 ‘19판정은 충분히 공감되고, 또 당연히 그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를 읽을 때도 이 작품의 잔혹성이 떠오르곤 했는데 실은 두 작품 모두 제겐 베스트 10에 꼽을 만한 매력적인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잔혹함에 대한 취향만 따지고 보면 스스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부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직후 아비코 다케마루의 미륵의 손바닥을 구해서 읽었는데, 기대만큼 잔혹하거나 독하지 않아서 실망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은근히 살육에 이르는 병 2’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속편이 나오더라도 이만한 만족감을 기대하는 건 분명 무리한 바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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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안 -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 외 지음, 한성례 옮김 / 프라하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미야베 미유키, 요코야마 히데오, 아야츠지 유키토, 시마다 소지 등 쟁쟁한 9명의 작가가 ‘50’이라는 키워드로 엮은 일종의 앤솔로지입니다. 작가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만한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 아마도 구매욕을 자극하기에 이만큼 완벽한 기획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속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9명의 작가 모두 적잖은 부담감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키워드 아래 쓰인 작품들이다 보니 독자들에게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은 물론 역시~”라는 감탄사까지 끌어내야 하니 말하자면 작가 입장에선 잘 해야 본전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별 다섯 개는 기본이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어지간한 완성도가 아니면 좀처럼 단편집에 만족하지 못하는 취향이라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열게 됐습니다.

 

우선, 9명의 작가가 ‘50’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간단히 정리해보면...

- 미야베 미유키 : 요괴 혈안에 매달린 50개의 눈.

- 아야츠지 유키토 : 50번의 칼질로 50토막이 난 피살체.

- 시마다 소지 : IQ 50의 역도선수가 감당해야 하는 50파운드의 무게.

- 미치오 슈스케 : 필름 감도를 나타내는 ISO 50.

- 모리무라 세이치 : 50엔짜리 우표.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결혼 50주년에 일어난 살인사건.

- 오사와 아리마사 : 호텔 50층에 머무는 전설의 인물.

- 다나카 요시키 : 가문의 50대 손에게 내려진 저주.

- 요코야마 히데오 : 나이 50.

 

나름대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 작품들 속에 ‘50’이라는 키워드를 녹여냈습니다. 그중 미야베 미유키는 미야베 월드 2막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에도시대 귀신이야기를 통해, , 요코야마 히데오는 종신검시관의 주인공 구라이시를 암 환자로 설정한 에피소드를 통해 일종의 스핀오프 단편을 내놓았습니다. 오사와 아리마사 역시 신주쿠 상어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자아냈고,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동명의 주인공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명탐정으로 등장시킵니다.

 

9명의 국대급작가들의 단편들을 한 작품집에서 만난 건 분명 반갑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작품집 자체의 만족도만 놓고 보면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려웠습니다. 뭐랄까... 작가들이 느꼈으리라 예상했던 적잖은 부담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이런 기획에 겨우 이런 수준의 작품을 냈다니?”라는 것이 솔직한 제 느낌입니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다수 작품에서 기대 이상의 실망을 느낀 게 사실이고, 어쩌면 유명세만큼 성실할 것이란 건 진짜 환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속담이 생각난 건 아마 저만의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기획은 훌륭했지만 왠지 낚였다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적어도 자신만의 영역과 스타일을 확보한 대작가들이라면 오히려 단편 하나하나에 대해 훨씬 더 큰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닌지, , 기획자나 출판사 역시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닌지 묻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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