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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커 스타일 -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
사토 유야 지음, 주진언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카가미 가(家) 7남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사토 유야가 고교 졸업 후에 쓴 데뷔작으로 일본에서 메피스토 상을 수상했습니다. 우선은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쓴 파격적인 데뷔작이라는 점 때문에, 또 48편(1996~2013년)의 메피스토 상 수상작 중 불과 6편만이 한국에 출간된 걸 감안할 때 분명 기대할 만한 ‘뭔가’가 있으니 시리즈 전체가 출간됐을 거란 막연한 믿음 때문에 꽤 오래 전부터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너 또는 오타쿠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납치, 감금, 근친상간’ 등 폭력적, 선정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 출판사 소개글 탓에 그저 관심만 가졌을 뿐 실제로 읽을 마음까진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시리즈 전체를 중고로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덕분에 여전히 장르도, 스타일도 감이 안 잡힐 만큼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디어 시리즈 첫 편의 첫 페이지를 열게 됐습니다.
중반부까지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한 챕터씩 교차로 전개됩니다. 키미히코의 여동생이지만 그와 그 이상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카가미 사나가 짐승 같은 세 명의 중년남자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비디오를 본 키미히코는 그들의 딸 또는 손녀에게 복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곤 그들을 한 명씩 납치하여 폐허가 된 병원 건물에 감금합니다.
한편, 77명의 10대 소녀를 죽인 ‘나이프 잭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는 가운데 키미히코의 ‘친구’이자 신비한 초능력을 지닌 아스미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아스미의 초능력은 나이프 잭이 소녀를 죽일 때마다 그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인데 말하자면 소녀를 죽이는 순간을 나이프 잭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둘의 맞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시시각각 다가옵니다.
키미히코의 납치극과 ‘아스미 대 나이프 잭’의 대결이 교차로 전개되다가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기고 관련 인물들 모두가 한 공간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꼬였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만큼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 하나하나가 스포일러에 가까워서 이 이상 소개하기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서평 쓰기도 난감해졌는데, 그래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먼저 살펴봤더니 “작가가 생각나는 대로 펜을 놀린 거다!”부터 “최고다! 역대급 스토리다!”에 이르기까지 예상대로 거의 극과 극이라 할 만한 평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시 나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한 건가? 다시 읽어야 되나?”, 라는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은 더는 안 해도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고백하자면, 모든 인물들이 모인 상태에서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100여 페이지는 일일이 메모를 하면서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꼬여있습니다. 줄거리에 “꼬였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라고 썼지만, 실은, 풀리는 듯 하다가 다시 꼬이고, 또 꼬이고, 또 꼬이는, 그런 상태가 반복됩니다. 결국 뭐가 진실이고, 뭐가 사실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모호한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혼선을 노린 건지, 쓰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태로 책읽기를 마치는 건 결코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완주한 건 사토 유야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이 가진 정체불명의 흡입력 때문이었습니다. 뜬금없이 툭툭 끊어지거나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건 애교 수준이고, 피 튀기는 상황에서도 위화감 가득한 농담과 웃음을 끌어들이는 럭비공 같은 문장들은 처음엔 어이없다가도 점점 신선하거나 재치 있게 느껴진 끝에 오히려 익숙해지기까지 합니다. 또, 지극히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소재에 잘 어울리는 자극적인 문장들 역시 짜증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눈길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녔는데, 그래선지 당장 읽고 있는 페이지에선 화가 나는데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져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매번 생각으로만 그치고 만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최악의 서평과 평점 대신 별 세 개를 준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만 해도 “아무리 데뷔작이라지만 용서가 안 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서평을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후속작을 읽어볼까?”, 라는 이상한 욕심이 발동합니다. 아무래도 데뷔작보다는 좀 친절해지지 않았을까, 라는 근거 없는 낙관과 함께 말입니다. 또, ‘카가미 가(家) 7남매 시리즈’라는 타이틀답게 후속작인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은 키미히코의 누나인 료코가, ‘수몰 피아노’는 키미히코의 형 소지가 주인공이란 점도 약간의 기대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실컷 당하고도 또 궁금해지는, 또 당할 게 분명한데도 어찌 할 수 없는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다만, 연이어 읽기엔 정신적 부담이 큰 게 분명하니 충분한 공백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 공백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